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59화 (159/227)

< 한 배를 탔습니다 (4) >

준비를 마치고 돌아온 세트장은 매체와 기자들의 소란스러움은 사라지고 촬영 전의 분위기가 맴돌았다.

왠지 긴장되고, 왠지 들뜨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게 만드는···

“왜요?”

언제 왔는지 오소리가 내 옆에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다.

잿빛 목폴라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로 지적인 변호사가 된 그녀.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를 보고 있으니 이런 변호사가 있으면 손님이 줄을 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유선 씨는 안 추운가 봐.”

뭐야. 나를 빤히 볼 때는 언제고, 이번에는 뜬금없이 무전기 하나 쥐고 뛰어다니는 조연출을 보며 피식 웃고 있는 오소리.

“그러게요. 아직 4월인데.”

스태프들 옷이라도 선물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데, 오소리가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이제 진짜 촬영이네요.”

“그러게요.”

언젠가는 함께 촬영할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 날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시현 씨. 우리 잘해봐요.”

“그래요, 선배님.”

“선배 소리는 그 정도만 해요.”

콧잔등을 찡긋하더니, 오소리가 희고 작은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웃음이 봄 날씨처럼 따뜻한데, 다가온 강 피디가 그녀에게 엄지를 척 내밀며 너스레다.

“와, 이 변호사님!”

스태프들 웃음소리가 세트장을 채우고.

“둘 다 준비됐지?”

“예.”

일단 대답은 했는데···

나도 그렇지만 오소리도 준비 시간이 너무 짧았다.

지난 두 차례의 대본리딩에서 강 피디는 만족한 듯 보였지만, 나도 그렇고 오소리도 크게 만족스럽진 못했다.

그래서 내내 대본을 붙잡았고, 최재환이 살인자의 심리분석과 같은 자료를 구해서 보여줬지만 그래도 너무 짧은 시간이다.

이러다 수박 겉핥기가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요 며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뭐 815특집드라마 때도 해냈는데 이거 못할까 싶지만, 기대치라는 게 있는 거니까. 사람들은 늘 기대하고, 나는 그걸 충족시켜줄 의무가 있으니까.

“좋아. 접견실 가고, 그다음 복도 찍자고.”

촬영 순서를 탁탁 집으며 강 피디가 디렉션을 이어갔다.

“성수는 오랜 짐을 덜어버린 거니까, 죽인 자들에 대한 미안함도 죄책감도 없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오늘 촬영은 구치소 접견실에서 변호사 이혜리와 성수가 처음 마주하는 장면이다.

“접견실에 가까워졌을 때 창 너머로 변호사 등 보이고, 그다음 들어가서 변호사가 고개 돌리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고요한 눈빛.”

우리는 동선을 따라서 가볍게 느낌부터 잡아봤다.

“그리고 마지막 씬 말이야, 어려우면 다음에 찍어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마.”

강 피디가 오늘 촬영할 마지막 씬에 대해서 얘기하며 오소리를 바라봤다. 그녀가 다부진 미소를 끄덕이자, 박수를 짝!

“자, 그럼 진짜 들어가 볼까?”

**

휴대폰을 내미는 손. 투명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비치고.

“여깄습니다.”

교도관에게서 출입증을 받은 이혜리는 보안 검색대를 지나 접견실로 향했다. 유리로 가득한 접견실로 들어가기 전 그녀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자. 깡패. 정치인.’

과거 그들은 동네 양아치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유린했다. 작고 여린 몸을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심지어 강에다 버리기까지 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히 떠오른다.

명치끝이 뜨거워지고, 등줄기엔 소름이 돋으며, 추위가 밀려온다.

마치 온몸이 제 것이 아닌 마냥 흔들리고 경직된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고통이었는데··· 그 3명이 갑자기 죽었다.

‘왜.’

이 남자는 그 셋을 죽인 걸까.

“안녕하세요 한성수 씨. 변호사 이혜립니다.”

하지만 마주친 시선이 너무 고요한 바람에, 이혜리는 입가에 새긴 미소를 주춤하고 서류가방을 뒤적여 사건 기록을 꺼냈다. 두툼한 종이뭉치를 책상에 놓은 그녀는 하··· 숨을 내쉬고 말했다.

“날씨가 참 좋아요. 이제 곧 여름 오겠어요.”

“그런가요.”

목소리를 못 듣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성수는 쉽게 대꾸했다.

“뭐. 제가 왔다고 한성수 씨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죠.”

맥락을 짚었더니, 쉽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세상에는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사건 기록을 넘기는데, 성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팬카페라고요.”

“예?”

잠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든 이혜리.

그러나 곧 다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예 맞아요. 이 사건의 진실을 찾고 싶은 많은 사람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서 저를 수임했습니다. 와. 근데 신문에서 본 것보다 실제 보니 훨씬 미남이신데요?”

가볍게 농담을 던졌는데, 성수는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래서 잠시 멈췄다가, 그녀는 계속했다.

“먼저 하나 물을게요. 죽은 그 셋. 아무 잘못도 없는데 미치광이 살인자 때문에 죽은 건가요?”

성수의 얼굴이 꿈틀한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고, 또 누군가의 남편이잖아요? 그런 행복한 사람들을 죽인 건 그냥 당신이 미치광이 살인자라서?”

“······.”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끝내도 됩니다. 나는 팬카페에 그렇게 올릴게요. 죽은 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물론 의뢰인과 나눈 대화는 비밀로 간직하겠지만.”

잠시 무슨 답이 이어지나 싶어 기다렸는데.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숨을 고르고, 성수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고 다시 말했다.

“나는 살인잡니다. 하지만, 내가 죽인 그들도 살인자였습니다.”

이혜리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럼 들어볼까요? 그 이야기······.”

“오케이 컷!”

외침과 함께 스태프들이 카메라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스타일리스트들이 배우에게 달라붙고, 강 피디가 빠르게 얘기한다.

“좋아, 일단 좋은데 말이야······.”

강 피디가 대본을 넘기는 손길이 빠르다. 촬영 내내 연출은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으며, 베스트 샷을 만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혜리가 좀 부자연스러워. 도입부잖아. 시청자들은 혜리를 그냥 변호사로만 본단 말이야. 근데 지금은 혜리가 뭔가 사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톤을 낮출까요?”

“그래, 이번엔 그래 보자고.”

오소리의 표정이 진지하다. 갈색 눈썹이 기울고, 눈꺼풀에 주름이 새겨진다. 그렇게 대본을 보면서 몇 번이나 입바람을 뿜는 바람에 스타일리스트는 하염없이 빗질만 하고 있다.

**

“첫 촬영에 왜 이렇게 깐깐해. 벌써 이러면 이따 감정 씬은 어떻게 가려고.”

카메라 밖에서 지켜보던 조 부장이 괜스레 입맛을 다신다.

“그러게요.”

최재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시현은 잘하고 있으니, 뭐 크게 걱정 없이 주변 반응이나 살핀다.

현장 분위기 좋고··· 촬영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고··· 두 배우도 대본 살피며 의견을 나누고 있고···

조 부장의 찌푸린 얼굴을 빼면 이게 바로 순풍에 돛단 상황.

“나 담배 한 대 피고 올게.”

뭐가 그렇게 답답한 건지, 조 부장이 한숨을 쉬며 촬영장을 벗어난다.

‘왜 저러지?’

최재환이 그 뒷모습을 신경 쓰는데, 현장을 찾은 드라마국 씨피가 다가와 속삭였다.

“최 팀장, 지에스에서 힘 좀 써. 우리 이 좋은 분위기 시청률로 좀 이어지게.”

“저희가 뭐 힘이 있나요. KIS에서 힘을 써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홍보부에서 움직이고 있다.

지에스 소속 배우가 남녀 주인공으로 합류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거기다 이시현인데.

“이제 지에스가 연기 쪽으로 제대로 나가려나 보네. 여배우는 오소리, 남자배우는 이시현. 아주 탄탄하네.”

탄탄할 수밖에. 괜히 C&C를 설립했을까.

두 사람뿐 아니라 송이경도 나름 성과를 올리고 있고, 한승연도 있다.

“최 팀장. 우리 앞으로 오래오래 함께하자고.”

“무슨 또 그런 말씀을.”

“왜? 이 손이 시현이 키운 마이다스의 손 아니야.”

씨피가 최재환의 손을 덥석 잡고 하얀 이를 보인다.

“제가 뭘 키워요.”

너무 들어서 귀에 딱지가 붙은 얘기에 대충 대답을 하는데, 윤찬 씨피가 흘깃 곁눈질하고 혼잣말을 속삭였다.

“내가 최 팀장이면 벌써 회사 하나 차렸지.”

**

“자! 15분 뒤에 마지막 슛 들어갑니다.”

조연출이 목청을 높인다. 그러자 스태프들이 모두 세트장에서 철수했다. 조명이 꺼지고. 어둑어둑한 그림자 아래서 오소리가 책상에 홀로 앉아 감정을 추스르고 있다.

흠.

나 역시도 그녀를 배려해서 잠시 스태프들과 세트장을 벗어났다. 물론 촬영이 끝났으니 이대로 떠나도 되지만.

“근데 첫날부터 오열하는 건 좀 심하다.”

서아린 옆에 서 있던 오명숙이 불만을 속삭였다.

왠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언제 다가왔는지 유 작가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내 곁에 섰다.

“이번 씬이 우리 드라마 행방을 좌우하는 거야.”

유 작가의 말에 가시가 박혀 있다. 왠지 찔리는 느낌이랄까. 초록색 카디건을 어깨에 걸친,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에서 비장미가 느껴지는 건··· 순전히 내 느낌일까.

“소리야 너무 무리하지 마!”

유 작가의 외침에 오소리가 빙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감정을 잡으려 집중한다.

‘하······.’

지금 내가 한숨을 쉬는 이유. 오소리를 지켜보는 이유. 왠지 손이 저리는 느낌이 드는 이유.

그건 바로 이번에 오소리가 촬영할 씬이 엊그제 주연배우 대본리딩에서 내가 한 제안 때문에 추가된 씬이기 때문이다. 씬만 추가된 게 아니라 대본이 수정됐다.

수정 전의 대본에선, 성수가 3명을 살인하는 이유는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엊그제 대본리딩에서 나는 다른 방식을 제안했다.

성수가 실은 여자아이가 살아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유 작가가 기분이 상할 수도 있기에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얘기했었다.

‘저는 성수가 성장해서 우연히 여자아이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고 지켜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눈치채게 되는 거죠. 그녀가 3명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하지만 성수는 그녀가 살인자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누굴 죽여야 한다면, 자신이 하면 되는 거였다.

어차피 자신은 죽을 운명이니까.

‘그래서, 그녀를 대신해 살인자가 되기로 한 거죠. 그리고 성수는 눈앞의 변호사가 그녀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모른척합니다.’

나는 사건의 진실을 성수와 시청자들만 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얘기가 끝났을 때, 유 작가는 잠시 대본 연습실을 빠져나갔었다.

그때 살짝 쫄았었는데···

아무튼, 원안대로라면 이혜리로 시작해 이혜리로 끝난다.

하지만 내 제안대로라면 한 남자의 조용한 사랑으로 끝이 나고.

“내가 왜 대본 수정하기로 했는지 알아?”

여전히 감정을 잡으려 애쓰는 오소리의 등을 지켜보며, 유 작가가 내게 물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날 유 작가가 한참 뒤에 돌아와서 한 말은, 싫다는 거였다. 그리고 말했었다.

‘마지막에 이혜리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는 거로 하자. 성수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그녀의 계획을 눈치채서 그가 먼저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그녀도 알게 되는 거로.’

이혜리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성수가 떠난 그 자리를 보며 오열한다. 지금 그 씬을 앞두고 있는데, 한마디로 첫날부터 엔딩을 촬영하는 거다.

“나 처음이야. 배우 의견에 대본 바꾸는 거. 왠지 알아?”

그녀가 콧바람을 킁하며 나를 흘겨본다. 그 눈에 짓궂음이 담겼다.

“좋았거든. 그 방향이 더 낫더라고. 그럼 된 거지 뭐.”

말은 쿨한데, 왠지 된 것 같은 표정이 아니다.

이거 또 나중에 나를 괴롭히려는 거 아닌가 싶은데.

“아예 시현 씨가 대본 한번 써보는 건 어때? 감이 있을 것 같은데.”

쓰라면 못쓸까. 막장 일일 드라마부터, 여성들의 판타지를 채울 로맨스 드라마까지. 내 머리에 있는 게 어디 한두 작품인가. 배우 안 하고 그거 해도 될걸? 얼굴 없는 작가도 나쁘지 않고.

후후.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때우고 다시 오소리의 작은 등을 바라봤다. 같은 배우로서, 그녀가 지금 고군분투하며 이혜리의 감정을 쫓고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또 그게 얼마나 외로운지도.

“오늘 될까?”

강 피디도 곁에 와서 지켜본다. 그가 굳이 오늘 이 씬을 잡은 건, 한 번에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안되면 나중에.

째각째각.

15분이 지났을 즘, 오소리가 고개를 돌렸다.

“감독님, 10분만 더 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강 피디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오소리는 스태프들에게 미안한지 입술을 깨물다가 다시금 두 손을 모으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마 누군가는 어서 끝내고 쉬기를 바라고, 누군가는 별생각이 없을 테고. 조 부장은 팔짱을 켠 채로 똥 마려운 개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고.

“아무래도 힘들겠다.”

강 피디가 속삭인다.

그사이 곁에 온 서아린이 내게 시디플레이어를 내밀었다.

“오빠. 가져왔어요.”

“어, 고마워.”

“뭔데?”

유 작가가 쳐다보길래 싱긋 웃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드르륵.

책상에 오소리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

왜 이렇게 감정이 안 나올까. 첫날이라서 그런가.

답답해서 진짜 울고 싶은데, 기다리는 눈물은커녕 초조함에 한숨만 흘러나온다.

“하······.”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오소리는 마른 숨을 쏟았다.

‘한심하네.’

앞에 이시현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의 냄새가 공기 중에 흐르니까. 아마 도와주러 온 거겠지. 감정선을 잡을 수 있게. 그런데 지금은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눈을 감고 있는데.

“잠시만 그대로 있어요.”

무슨 소리일까.

나른한 속삭임이 들린 데 이어 오소리는 순간 흠칫했다.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고, 귀에 이어폰이 끼워졌다. 그래서 슬며시 눈을 뜨려는데··· 음악이 흘러나온다.

귓가에 들리는 슬픈 노랫말.

눈앞에서 쓸쓸히 미소 짓고 있는 이시현.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 한 배를 탔습니다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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