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배를 탔습니다 (3) >
“수고하셨습니다!”
어두워진 창밖, 형광등 불빛이 채워진 복도로 나온 사람들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기지개부터 켰다.
“쟤 정말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된 거 맞아? 전에 작가님 작품 할뻔했다며? 그때도 이랬어요?”
강 피디는 듬직한 매니저와 함께 바삐 떠나는 이시현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여전히 앉아 대본을 보고 있던 유 작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미소를 가로젓는다.
“그럴 리가··· 작년만 해도 대사 칠 타이밍도 못 맞춰서 넋 놓고 있던 신인이었어. 근데 어떻게 일 년도 안 돼서 이렇게 달라질까.”
긴 회의 동안 이시현은 지친 기색 한번 없었다.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때는 조심스러웠고, 타인의 얘기에는 귀 기울였으며, 의견이 충돌할 때는 웃음으로 대본연습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꿨다.
“성장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감탄하는 유 작가의 모습에 강 피디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청률 50프로가 이유 없이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나저나 남수혁하고 나이 차가 있어서 좀 걱정이었는데, 괜한 걱정을 했네.”
“그러게. 설정을 좀 건드려야 하나 싶었는데, 소리하고 그림도 잘 어울리고.”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오소리로 이어졌다.
순전히 유 작가의 인연으로 출연을 결심해준 것도 고마운데, 짧은 시간에 꽤 준비한 모습이었다.
“근데, 오소리는 조금 아쉽더라.”
“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 작가가 두 손을 모으고 물었다.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닌데··· 그냥 익숙해. TV에서 보던 그대로야. 잘하긴 하는데··· 왠지 뻔하다는 느낌? 아역 이미지가 아직도 있더라고요.”
“강 피디.”
“예.”
“그게 좋은 거야. 퀄리티가 안정적이잖아.”
“그거야 작가 입장에서 입맛대로 포지션 짤 때나 좋은 거지. 시청자들은 질린다니까? 그리고 배우가 괜히 배우입니까. 변신할 때는 변신해야죠.”
“왜? 이번에 명이 얼마나 잘되고 있어?”
“옷을 잘 입은 거지. 사극이야 뭐, 톤부터가 다르잖아. 눈속임이예요 그거.”
“거 자꾸 우리 소리한테.”
“하. 알았어요.”
유 작가가 오소리를 아끼는 걸 알기에, 강 피디도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시현의 연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강 피디.”
별관 건물을 빠져나오는데, 유 작가가 잠시 멈춰 섰다.
“왜요?”
“한번 기가 막히게 찍어봐. 내가 봤을 때는, 이시현 당분간 한국에서 찍는 드라마는 이게 끝이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한국에서?”
영문을 모르는 강 피디의 모습에, 유 작가는 봄 내음 흠씬 담긴 바람을 들이마시고 속삭였다.
“강 피디만 알고 있어. 이시현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 뭔지 알아?”
“들새들 가경 작가 차기작이라는 거? 그게 왜?”
“그거 페이 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거야.”
“페이 프로덕션이면······.”
말꼬리를 늘어트리던 그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페이 프로덕션?”
“그래.”
전 세계 영화인들의 로망. 할리우드.
“··· 그럼 지금 이시현이 그거 준비해야 할 시간에 우리 드라마 하는 거라고?”
“그렇다니까.”
“에이.”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 앞에서, 유 작가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아무튼 우리 예술 한번 해보자고.”
**
“부장님, 촬영 끝날 때까지 스케줄 좀 조정해주세요.”
“어.”
조 부장은 별다른 얘기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대본리딩 분위기를 지켜보면서 대충 예상 한 일이니까.
“집으로 갈까?”
“아니요.”
오소리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시선은 손에 든 대본에 집중해 있었다. 예쁜 미소도, 밝은 기운도 사라진 그 모습이 너무 심각해 보여 차 안에 냉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소리야. 배 안 고파?”
삼성동에 도착하자 스타일리스트 오명숙이 힐끗힐끗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난 괜찮아. 언니하고 부장님 드시고 오세요.”
홀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그녀 모습에 오명숙이 눈을 가늘게 뜬다.
“왜 이렇게 시현 씨를 신경 쓰는지 모르겠네.”
“그게 바로 따라잡히는 기분이지.”
조 부장은 한 덩치하는 오명숙의 배를 채워주려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저를 놓고, 물 한 모금 마신 오명숙이 다시금 눈을 가늘게 떴다.
“따라잡히는 기분이 뭐예요?”
“소리가 확 뜨진 않았어도, 인지도는 어느 정도 꾸준했잖아?”
“그죠.”
“근데 이시현은 봐. 작년에 걔 누가 알았어? 그리고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아무리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도 바로 옆에서 그렇게 추월당하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거야.”
더구나 같은 회사.
“국밥 나왔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국밥 앞에서 오명숙이 음식 앞에서만 보인다는 홍조 띤 얼굴을 보인다.
“여긴 언제 먹어도 맛있어요.”
“그러게. 최 팀장도 시현이하고 자주 온다던데··· 이거 양반은 못 되는구만.”
마침 가게 유리문이 열리고 최재환과 이시현이 들어왔다.
식당 여주인이 한걸음에 달려가 그들을 반긴다.
“왔어?”
“이모, 우리 배고파 죽겠어요.”
“죽으면 안 되지. 좀만 기다려어!”
여주인이 주방으로 뛰어가고, 빈자리에 앉으려던 최재환이 조 부장을 발견했다.
“부장님?”
“뭐해. 일로 와.”
졸지에 넷이 합석했다. 그런데 이시현이 오기 전만 해도 밥숟가락을 힘껏 붙들던 오명숙이 젓가락만 깨작거린다.
“명숙 씨, 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드세요.”
“아, 저 원래 이렇게 먹어요.”
“명숙아.”
조 부장이 입을 열자 오명숙이 눈에 힘을 팍 준다.
“그래. 명숙이 원래 입이 짧아.”
그렇게 말해줬더니 오명숙이 배시시 웃고 화장실에 가겠다며 일어났다. 분명 화장을 고치고 올 것 같은데.
“시현아.”
셋이 남자, 조 부장은 국밥 건더기를 헤집으며 입을 열었다.
“너 말이다.”
짧은 한숨 뒤에 다시 얘기를 꺼냈다.
“스캔들 한번 내 볼 생각 없냐?”
“예?”
정작 이시현은 가만있고 최재환이 놀라서 눈을 끔벅인다.
마침 국밥이 추가로 나왔지만 세 사람이 수저도 들지 못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가운데, 조 부장은 다시 입술을 훔치고 말했다.
“내 말은 사귄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핑크빛 기류? 그 정도 선에서 괜찮을 것 같은데.”
지금 ‘명이’로 인해서 오소리 인지도가 수직 상승했다.
하지만 여배우의 인기란 게 가을철 단풍 같은 거라서, 잠깐의 아름다움 뒤에 남는 건 허무함이다.
마치 바람 불면 떨어지는 낙엽처럼.
물론 그 인기가 바탕이 돼 다음 작품의 선택권도 높아지고 급이라는 게 자리매김하지만, 지금 오소리는 한 번쯤은 크게 반등을 칠 무언가가 필요하다.
A급 그 이상의 급으로 오르기 위한, 사람들의 뇌리에 크게 박힐만한 무엇이, 설사 그것이 독이 될지라도.
“저 부장님.”
“최 팀장. 내가 미리 얘기 못 해서 미안한데, 나도 대본리딩 지켜보다가 생각해본 거야. 시현이야 큰 스캔들도 없었고, 더구나 이달 촬영 끝나면 해외 촬영 들어가니까 헤프닝으로 마무리하기도 좋잖아.”
“글쎄요.”
최재환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스캔들 한번 잘못 터지면, 남자 쪽보다 여자 쪽이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얼마 전에는 아이돌 가수들이 대기실에서 잠깐 인사했다는 사실만으로 팬들이 여자 쪽에 죽은 쥐와 면도칼까지 보내서 난리가 났던 적이 있으니까.
“부장님 생각은 알겠는데요, 너무 위험해요.”
그 눈을 잠시 마주 보다가, 조 부장은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래. 나도 얘기나 꺼내본 거야. 먹자.”
**
「KIS 드라마 세트장. 2001년 4월 11일 수요일」
50명이 넘는 스태프들이 고사상을 앞에 둔 현장은 4부작 특집드라마 고사 현장에서 보기 드문 취재 열기가 이어졌다.
KIS 연예가소식팀, 기자들, 케이블 연예정보 프로그램.
“두 분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세요?”
리포터 김성민이 검은색 니트에 회색 청바지로 코디한 이시현을 붙잡았다. 그 곁에는 밝은 톤의 원피스를 입은 오소리가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
“우선 두 분,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부탁드려요.”
카메라를 향해 밝게 인사 하는 두 사람.
“시현 씨가 맡은 역할, 꽃미남 살인자에 벌써부터 팬들의 기대가 크잖아요?”
“예.”
“3명이나 죽인다면서요?”
“하하. 그러게요. 제가 그런 못된 사람이네요.”
“왜 그렇게 많이 죽이는 거예요?”
“그거야··· 음··· 말 좀 하세요.”
이시현이 짓궂게 대답을 옆으로 떠넘기자, 오소리가 빈주먹으로 그의 팔뚝을 툭 치고 속삭였다.
“왜냐하면요. 작가님이 그렇게 쓰셨거든요.”
리포터가 깔깔 웃는다.
“작가님! 소리 선배가 작가님 흉봤어요.”
“와 고자질하는 것 봐. 나한테는 작가님이 못살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드라마 한다고 했으면서.”
“지금 저 모함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여배우 오소리가 이런 분이랍니다.”
“하. 나 속 터져.”
가슴을 두드리면서 웃는 오소리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우리 되야지님 올라옵니다!”
돼지머리를 본 스태프의 외침에 박수가 쏟아졌다.
조연출의 축문을 시작으로, 경건한 분위 속에서 드라마 촬영의 무사완주를 비는 고사가 시작됐다.
연출, 주연배우, 출연진, 촬영팀, 제작진 일동.
시청률이 잘 나오기를, 사고가 없기를, 무탈하게 촬영이 끝나기를, 방송국 귀신님들한테 NG 없게 해달라는 우스개 소원과 소감이 이어질 때마다 웃음이 들썩였다.
“후.”
떨어져서 현장을 지켜보던 최재환이 콧바람을 들썩이자, 곁에 있던 조 부장이 넌지시 물었다.
“뭘 그렇게 실실 웃고 그래?”
“그냥요. 돼지머리 보니까, 문득 예전 생각이 나네.”
“무슨 생각?”
“언제였더라······.”
최재환은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냈다.
신입 시절, 고사 현장을 따라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 하필 고사상에 올라갈 돼지머리의 미소가 사라진 거다.
웃고 있어야 할 돼지가 죽을상이니 그 때문에 감독은 짜증을 부리지, 조연출은 공황 상태지··· 어찌어찌 해서 그가 서둘러 차 끌고 시내에 나와 돼지머리를 공수해갔던 기억.
“그때 돼지머리 들고 땀 뻘뻘 흘리며 뛰어왔더니만, 소리가 눈을 부릅뜨고 그러는 거예요.”
“뭐라고?”
“왜 현장 스태프도 아니면서 미련하게 사서 고생하냐고······.”
“그랬어?”
조 부장은 입가에 미소를 새기고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저 멀리 있는 오소리와 이시현에게 닿는다. 그때가 언제였든 간에, 지금은 저 둘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니까.
“그래서 넌 뭐라고 그랬는데?”
왠지 궁금해서 다시 물었더니, 최재환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우리는, 한 배를 탔으니까요.”
**
고사 현장이 정리되고 바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는 한 배를 탔다, 그 말 멋있네.”
“어쩜 그렇게 말도 잘할 수가 있죠?”
강 피디가 이시현이 했던 소감을 언급하자, 반유선이 생글생글 눈웃음을 보인다.
“넌 어째 이시현 얘기만 나오면 눈이 달라지더라.”
“모르셨어요? 유선이 얘 방송국에 이시현 왔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요. 입에 침 닦고, 머리 훅 묶고, 화장 고치는데 오분도 안 걸릴걸요?”
스태프가 웃으며 놀려도 반유선은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근데 어쩌냐. 이시현은 오소리 같은 애 사귈 텐데.”
“그래 유선아. 오르지 못할 나무 보지 말고, 오를만한 나무 있잖아. 그거나 봐.”
옆에서 듣고 있던 유 작가가 눈썹을 쫑긋 올린다.
“오를만한 나무? 그건 누구야?”
“황동태라고 있어요. 거 왜······.”
“감독님!”
반유선의 흘긴 눈에 깜짝 놀란 촬영감독이 침을 꼴깍.
“알았어, 알았어. 두 번 농담했다가는 길가다 비명횡사하겠네.”
떠들썩한 웃음을 끝으로, 감독들은 반유선이 짠 촬영 스케줄 표를 보면서 오늘 이어갈 촬영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촬영 첫날이라 가볍게 스케줄을 잡았는데, 첫 씬은 극 중 꽃미남 살인자인 성수와 변호사 이혜리의 만남이다.
전개상 성수가 3번의 살인을 저지른 상황이라, 이시현이 앞뒤 흐름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소화할 수 있는 씬이기에 다들 어느 정도의 NG는 예상하고 있었다.
“유선아. 가서 배우들한테 촬영 들어간다고 얘기해라.”
“예!”
반유선은 크게 외치고 대기실로 달려갔다.
먼저 이시현의 대기실부터 들렸는데, 밝은 미소의 이시현을 기대하고 노크를 똑똑. 문이 살짝 열리고. 최재환의 쌍꺼풀 없는 눈이 나타났다.
“왜요 유선 씨.”
“10분 뒤에 슛 들어갑니다.”
“아. 우리 이제 준비 끝났어요.”
그 말과 함께 최재환이 문을 활짝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준비를 마친 이시현이 반유선을 바라본다. 그런데 고사 내내 환한 미소를 보이던 그 이시현이 아니다.
3명을 죽이고, 모든 걸 체념한,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편안해 보이는 얼굴의··· 꽃미남 살인자가 거기 서 있었다.
**
“슛 들어갑니다.”
조연출이 밝은 얼굴을 들고 사라진다.
“쟤는 내내 즐겁네.”
조 부장은 문을 닫고 준비를 마친 오소리를 바라봤다.
‘내가 미쳤지.’
그날 국밥을 먹으면서 한 얘기. 분명 실언이다.
말은 안 했어도 최재환이 얼마나 한심하게 봤을까.
‘그래. 이슈는 연기로 보이면 돼. 오소리가··· 이번에 이시현 잡는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
“준비됐어?”
조 부장의 무거운 시선에, 변호사 이혜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 한 배를 탔습니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