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배를 탔습니다 (2) >
「미스터 미스터리 대본리딩(주연)」
일시 : 2001.04.09(월) 14:00 ? 20:00
장소 : 별관 2층 대본연습실
담당 : AD반유선 (02-XXX-XXXX)
문 옆에 붙여놓은 안내 공고문 앞에서 반유선이 싱글벙글이다.
“그렇게 좋냐?”
강 피디는 찌푸린 눈을 여전히 펴질 못하고 물었다.
“그럼요. 일할 맛이 난다니까요.”
“그 정도야?”
“후후. 뭐 저만 그런가요.”
그래. 다들 지금 난리지.
남수혁이 한다고 할 때는 걔가? 그래요? 그렇구나··· 정도였는데. 이시현이 한다니까, 이건 뭐 거짓말 조금 보태 KIS 건물이 들썩일 정도로 환호성이 터졌다.
“촬영 감독님도 좋으시다던데요?”
“그렇다더라.”
촬영, 조명, 미술 감독들도 이시현 합류에 환영하는 쪽이다. 두 팔 벌려 반긴다나 뭐라나.
“시현 씨하고 촬영하면 뭔가 일어날 것 같다니까요. 기대감 같은 거?”
반유선은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 일할 맛이 나고. 기대감이 난다고?”
반면 강 피디는 이시현의 합류 결정 이후, 막바지 스케줄 조율을 하느라 제대로 눈을 붙이질 못해 기운이 없었다.
‘역시 문제는 촉박한 촬영 일정.’
또다시 촬영 일정을 고민하는데, 경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둘이서만 재밌는 얘기 하고 있기에요?”
보라색 카디건을 걸친 유 작가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하러 이렇게 빨리 왔어요?”
“2시까지 못 기다리겠더라고. 집에 있을 수가 있어야지.”
하얀 건치를 보이며 유 작가는 대본연습실 문을 열어젖혔다.
**
“아하. 그런 거구나.”
서아린에게서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한송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한 이유를 알았으니까.
“그럼 남수혁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거야 회사가 알아서 하겠지.”
서아린은 크게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송이 역시도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근데 언니. 스타일리스트를 충원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글쎄.”
서아린의 모호한 대답에, 한송이는 눈꼬리를 슬쩍 올리며 다시 물었다.
“아니에요?”
“해외 촬영 때문에 충원한다고는 했는데, 지금 스케줄이 꼬였잖아. 뭐 그래도 언젠가는 충원하겠지만.”
최재환은 반추 촬영에 앞서 이시현의 주변을 재정비할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확정된 건 없기에, 서아린은 얘기를 이쯤에서 끝냈다.
그런데 한송이를 보니 가늘어진 눈꼬리에 입술만 연거푸 핥고 있는 게 뭔가를 망설이고 있는 듯한 눈치다.
“해외 촬영 많이 힘들어. 너 그래도 하고 싶어?”
“뭐, 누가 하고 싶다나. 나 쫓아낼 때는 언제고.”
속마음이 들키는 바람에 한송이는 괜히 기침 한번 하고 말했다. 성지훈한테 택배 보내듯 슝 보내버렸던 때가 언제더라.
“그래. 지금 와서 다시 오기도 그렇지.”
“그거야 뭐. 오가는데 문제가 있나.”
우물쭈물 속삭여 말하는 그 모습에 서아린이 피식 웃고 물었다.
“오겠다는 거니 말겠다는 거니?”
“봐서요.”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려고 했던 그때랑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작년 12월에 성지훈에게 왔으니까, 벌써 넉 달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와 오란다고 헤헤거리며 간다?
한송이는 괜스레 입을 구기고 이시현 밴의 내부를 살폈다. 카니발을 타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건만.
‘원년멤버를 이렇게 푸대접이나 하고.’
코평수만 들썩이던 한송이가 흘끗 밖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시현과 최재환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차로 다가온다.
“어, 언니 저 갈게요!”
차에서 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려고 했는데, 능구렁이처럼 굽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한송이 스타일리스트 아닙니까?”
“아··· 오랜만에 뵙네요.”
입술을 꽉 다물고. 한송이는 억지 미소 띤 얼굴로 이시현을 마주 봤다. 키는 여전히 크고, 잘생긴 건 여전한데. 저 특유의 얄미운 눈웃음.
“뭘 그렇게 놀래?”
“안 놀랬거든요?”
심심하면 이마에 딱밤을 때리지 않나, 꾹꾹 누르질 않나.
‘그럴 때가 언제이면서 능청스럽기는.’
불만을 구시렁거리면서 휙 뒤돌아 갈 길 가려는데, 곁에 있던 최재환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송이 너, 일 잘하고 있어?”
“예!”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지하주차장에 통통 튀었다.
“지훈이랑 호흡도 잘 맞고?”
“예!”
“일은 재밌고?”
“예!”
“그럼 뭐, 계속 잘해라.”
“예?”
고개만 끄덕이던 한송이가 눈을 크게 뜨자, 최재환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잘하고 있는 너한테 다시 오라고 할 순 없지.”
“아 그건······.”
한송이가 서둘러 입을 벙긋 여는데, 순간 그녀의 어깨에 팔 하나가 성큼 올라왔다.
“시현이 스타일리스트 충원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거 어쩌지? 우리는 호흡이 너무 잘 맞아서. 하하.”
성지훈의 느끼한 웃음소리에 가볍게 손을 흔들고 차에 오르는 이시현과 최재환.
“두 사람 보기 좋다. 그럼 우린 가볼게.”
드르륵, 탁.
차가 붕 사라지고.
“곤란했지? 해외 촬영 되게 힘들어. 돈도 안 되고.”
성지훈은 윙크와 함께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한송이가 얼마나 곤란했을까를 생각하니, 좀 전의 행동에 괜히 뿌듯해지는데. 한송이가 뭔가를 중얼거린다. 자세히 들어보려 그녀의 키에 맞춰 귀를 살짝 내렸는데.
“뭐라고?”
“이씨!”
**
“적당히 좀 놀려요.”
회사를 벗어나자마자 실컷 웃는 남자들.
“놀리긴 누가 놀려. 오라고 했는데 자기가 싫다고 튕기는걸.”
“4개월이나 버려뒀는데 다시 오라고 하면 예, 하고 오겠어요?”
“왜. 전에는 꼭 오겠다고 눈에 불을 켰는데.”
최재환도 거들자 서아린이 체념한 듯 말했다.
“하여간 짓궂어요 남자들··· 그런데, 송이 지훈 씨한테 정말 왜 보낸 거였어요?”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던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여태 한 번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은 없었다.
“두 가지 이유.”
이시현이 의자에 등을 묻으며 말했다.
“두 가지요?”
“첫째. 지훈이가 VVW였잖아. 한송이도 거기 있었고. 그래서 빨리 적응하라고 배려한 거고.”
“두 번째는요?”
“경험해 보라고. 나 말고도 다른 사람 스타일링을 해보면 또 다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시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순간 마주친 눈동자에 서아린이 흠칫 놀라 얼굴을 뒤로 빼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유가 하나 더 있네.”
“뭔··· 데요?”
“너.”
“예?”
“나한테 서아린이라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있었으니까.”
서아린은 말문이 막혀 입술을 빨아들였다.
가끔 이렇게 훅치고 들어오면 입이 열리지 않으니까.
“아린아. 우리 계속 같은 배 타고 가자?”
서아린은 잠시 그 눈을 마주 보다가 앞으로 다가갔다.
이시현의 옷깃에 손을 얹는다. 차가 달리는 중에도 그 손길은 흔들리지 않았다. 툭툭 먼지를 털어주고, 손을 떼면서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이시현이 올 때가 됐는데.”
유 작가는 시계를 살피며 속삭였다. 언제나 오려나. 아직 시간이 늦은 건 아니지만 괜히 조바심이 난다. 이러다가 안 오는 거 아니야?
“진득이 좀 기다려요.”
“자기, 이시현한테 불만 있는 거 아니지?”
“불만이요?”
강 피디가 무슨 소리냐는 듯 대본에서 눈을 뗐다.
“뭐 그냥. 남수혁도 지에스고, 이시현도 지에스고. 어떻게 보면 지에스에서 병 주고 약 주고 한 거잖아.”
유 작가는 나중에야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남수혁이 지에스에서 짤린 김 팀장이라는 사람과 합심했고, 그 김 팀장이라는 사람은 강 피디의 친구이고. 여튼 복잡하긴 한데···
그 때문에 이시현에게 불만이 있을까 봐 싶어 염려돼 묻는 거였다. 감독과 주연배우가 불화가 있으면 큰 문제니까.
“그럴 리가요. 난 이시현 좋아.””
“뭐야? 전에는 삐딱하게 보더니.”
못 믿겠다는 듯 흘겨보는 유 작가의 찌푸린 미간을 보며, 강 피디는 손에 쥔 펜을 놓고 그 밤을 떠올렸다.
“그게 말이죠······.”
그 밤 이시현이 전화를 해왔고 직접 그의 집까지 찾아왔다.
그러더니 상황을 소상히 얘기하고 하는 말이, 책임을 지겠다는 거였다.
그뿐인가.
일단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극에 관한 얘기를 했는데, 이시현은 이미 대본의 상당 부분을 준비한 상태였다.
“묻는 족족, 내 맘에 쏙 들더라니까. 신기하게도.”
인물이 가진 갈등, 씬에서 필요한 감정이나 앞뒤 상황 등에 있어서 의견을 나눴는데, 결국 얘기를 나누면 서로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느 때는 강 피디가 예기치 못한 부분을 꼬집기도 하고.
“아무튼 기대가 커요.”
마침 대본연습실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이 시간에 맞춰 들어왔다.
오늘은 남녀 주연배우, 그러니까 오소리와 이시현이 스태프들과 함께 대본분석을 하면서 촬영 전반적인걸 체크할 거다. 그런 뒤 내일은 모든 배우가 모인 전체대본리딩, 그 다음 날은 비로소 촬영 시작.
“오소리 씨 왔습니다!”
반유선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가벼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오소리가 풍성한 머리카락을 흔들며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누가 왔는지는, 굳이 얘기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밖에서부터 난리가 났으니까.
방송국 직원들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들어오는 이시현의 모습.
“시현 씨!”
유 작가가 환한 얼굴로 이시현을 반기는 동안 강 피디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날 집에 이시현이 찾아왔을 때도 깜짝 놀랐었다.
남수혁을 봤을 때도 너무 잘생겨서 놀랐었는데, 이건 뭐.
“안녕하세요!”
이시현이 스태프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다. 악수하고, 대화하고, 웃는데··· 아무렇게나 입고 온 것 같아도 영락없는 연예인의 모습에 다들 헤헤거리고 있다.
“시작합니다.”
어수선함이 가라앉기도 전에 스태프들은 한 자리씩 차지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상당수 인원이 ‘우리 오빠’ 스태프들이었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주연배우 대본분석이 이어졌다.
“시현 씨, 두 번째 살인은 진짜 중요해. 알지?”
유 작가가 대본을 집으며 눈을 빛낸다.
안경 속 그 시선을 보며 이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이 부분 많이 고민했는데요.”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하더니.
“살고 싶어요?”
이시현이 갑자기 빈 공간을 보고 속삭인다.
그러자 다들 서둘러 대본을 눈에 담았다.
18# 창고 / 낮
재갈을 문 채로 의자에 묶여 발버둥 치는 기자.
성수는 그를 눈에 담으며 손에 쥔 칼을 소매에 닦는다.
성수 : 살고 싶어요?
기자 :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성수 : 그렇지. 죽고 싶진 않겠지.
기자 :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데)
성수 : 아마 그 아이도, 살고 싶었을 거야.
기자 : (눈을 부릅뜨고)
성수 : 그래도 바로 끝내지는 않을게. 그 아이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고통도 더 오래 받아야지. 안 그래요?
기자 : (신음하며 발버둥 친다)
성수는 이미 한번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는 살인자이지 킬러가 아니다.
칼끝이 살을 찢고, 그 사이에서 선혈이 흘러나와 뜨거운 것이 손에 닿을 때의 느낌은 쾌감보다는 더럽게 찝찝하고 두려울 거다. 그걸 이미 한번은 거친 성수.
“그렇지. 죽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
두 번째 살인은 첫 번째보다는 좀 더 쉽고 좀 더 수월하다. 망설임도 덜 하고.
하지만 실행하기까지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아마 그 아이도, 살고 싶었을 거야.”
성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 이는 살인을 준비할 시간이자, 과거 여자아이를 외면했던 자신에게 하는 질타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순간 죄책감이 그를 휘감고, 죄책감은 곧 실행에 옮길 원동력을 심어준다.
“그래도, 바로 끝내지는 않을게.”
눈앞의 속삭임에 다들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키고 대본과 이시현을 번갈아 봤다.
“그 아이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고통도 더 오래 받아야지.”
떨리는 눈동자, 그리고 대본 위에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그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주먹을 꽉 쥐었고 또 확신했다.
이거 또··· 뭔가 일내겠구나.
< 한 배를 탔습니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