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배를 탔습니다 (1) >
“여, 여긴 어떻게?”
“나 여기 계속 있었는데.”
텅 빈 어둠 속처럼 오감을 끌어내기 좋은 장소가 없거든.
그런데 하필이면 많고 많은 연습실 중에 이곳을 들어온 걸 보면 저놈도 참 지지리도 운 없는 놈이다.
“뭐··· 들었어요?”
“다.”
오감을 끌어내고 있었다니까.
나는 한발 다가가며 남수혁의 시선을 쫓았다. 쥐구멍을 찾는 것인지,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건지 정신없이 움직이네.
“아직도 김태호 팀장님하고 연락하는 줄은 몰랐는데.”
가만 보자.
둘이 합심해 최재환을 물 먹인 때가 언제였더라.
연제협까지 끌어들여서 폭력 매니저 운운하며 최재환을 저 멀리 낚시터에 몰아놓았을 때가 불과 4개월 전.
그 결과 김태호는 쫓기듯 퇴사했고, 남수혁은 근신.
뭐 하긴 이놈이 근신 몇 달에 180도 달라질 인성이 아니긴 하지.
“그냥 연락한 거예요. 별 얘기 없었고.”
남수혁이 창백해진 얼굴을 감추려고 콧바람을 들썩인다.
“통화 내용은 그게 아니던데. 회사 옮기려는 거 아니야?”
“아니요. 뭘 잘못 들으셨나 보네요.”
낯짝도 두껍지.
그런데 이놈 모습에 화가 나야 하는데, 화가 안 난다.
“너 올해 스물한 살인가?”
“그건 왜요?”
이 녀석은 스물한 살에 세상을 알아버렸다.
여기 붙고, 저기 붙고, 어느 쪽이 좀 더 괜찮을지 저울질하는 삶.
병든 어른들 틈에서 이렇게 배워 온 거다.
그래서일까. 남수혁을 보면 이제 막 핀 꽃봉오리가 아닌 늘어지고 처진 꽃줄기를 보는 기분이다.
‘아니지. 지금 이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지.’
호되게 혼을 내줘야 하는데.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니까.
차 대표는 김태호를 이 바닥에서 매장하려고 할 테고, 남수혁이야 당연히 드라마에서 빠질 테고, 관리 못 한 매니저들도 책임져야 할 테고, ‘미스터 미스터리’도 문제가 생길 거다.
하.
왜 하필 나한테 걸려서 이런 고민거리를 안기는 건지.
“그래, 알았어.”
잠시 생각 뒤에 나는 남수혁을 지나쳐 연습실 문을 잡았다. 그 순간, 녀석이 내 팔을 덥석 붙들었다.
“잠깐만!”
뭔가 싶어 쳐다보니, 남수혁이 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벙끗하고 상상도 못 했던 단어를 꺼냈다.
“형.”
“형?”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내가 형제로 보이는 기적이라도 일어난 모양이다.
“저요, 이거 정말 하고 싶어요.”
“해. 누가 뭐래?”
“문제 일으키지 말자는 거예요.”
“문제는 니가 만들었잖아. 정말 연기가 하고 싶었으면 기콘부에 얘기해서 좋은 대본 얻을 수 있었는데··· 굳이 이거 아니더라도 말이야.”
남수혁이 김태호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는 건 누가 봐도 불순 의도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뭐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차 대표도 아마 같은 생각이지 아닐까 싶고.
“차라리 절 때려요.”
녀석이 무작정 볼을 내밀었다.
“속 풀릴 만큼 때리시라고요. 그리고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어이가 없어서 콧바람만 나오네.
“나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럼 무릎 꿇을까요?”
연습실을 채운 조명에 녀석의 이마가 번들거린다.
무릎 꿇는 그 이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인데, 내가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또 눈을 흘긴다.
“내가 회사 나간다는 거 증명할 수 있어요?”
“증명?”
“저요. 김태호 팀장님한테 전화 받긴 했지만, 한 귀로 흘릴 생각이었어요. 거길 내가 왜 가.”
남수혁이 크게 숨을 들썩이고 다시 말을 꺼낸다.
“아니면, 내가 겁나요?”
정말 가지가지 하고 있다.
“내가 연기하는 게 겁나냐고요.”
“···겁난다?”
일단 연습실 문에서 손을 뗐다. 눈에 힘을 주고 있는 녀석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녀석이 내 앞에서 갑자기 쿵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원하는 뭐든 할게요.”
비장미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데···
나는 대꾸하기도 싫어 연습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부리나케 쫓아온 녀석이 이번에는 내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환장하겠네 정말.
“그냥 좀 넘어가자고요!”
“그거 알아? 니가 정말 절실하고 절망적이라면, 지금쯤 눈물이라도 글썽였을 거야.”
지금 그 뻔뻔한 얼굴 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내가 뭘!”
내 허리에서 손을 뗀 남수혁이 눈을 부릅뜨고 발버둥이다.
“집에 가서 생각해봐. 뭘 잘못했는지.”
“이 씨X 그냥 좀 넘어가자니까!”
엘리베이터에 오르려고 했는데, 나는 멈칫하고 뒤돌았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게.”
“확 그냥!”
화들짝 놀란 녀석이 껑충 뒤로 물러난다.
**
야밤에 각부서 팀장급과 주요 직원들이 청담동 지에스에 모였다.
대표실 문 너머에서 차 대표의 목소리가 넘어온다.
화를 참지 못해 격양된 목소리로 협박성 단어들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더니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아마 전화기를 집어 던졌지 않나 싶다.
‘후.’
최재환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남수혁을 곁눈질했다.
그래도 지난번 연제협 사건 때는 모든 사실이 들키고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더니만, 지금은 달관했는지 특유의 하얀 낯짝만 들고 있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흰머리가 힐끗 나왔다. 정 이사다.
“유 팀장하고 남수혁만 들어가 봐.”
남수혁은 대꾸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유 팀장은 초주검이 된 얼굴을 숙이고 들어갔다.
최재환을 비롯한 남은 이들은 정 이사를 따라 6층 홍보부서로 우르르 내려왔다.
탁.
불을 켜고.
모두 퇴근한 휑한 공간에 팀장들의 한숨이 채워지자, 정 이사가 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최 팀장.”
“예. 이사님.”
정수기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최재환이 고개를 돌렸다.
“남수혁 뺄 거야.”
“그럼 드라마는······.”
“우리는 안 하지. 그 피디가 김태호 대학 동기라는데, 우리가 할 이유가 없잖아. 셋이 공모한 건지도 모르고.”
“근데, 그거 시현이가 하고 싶답니다.”
“뭐?”
눈주름을 찌푸린 정 이사를 보며 최재환은 다시 말했다.
“자기가 남수혁 고름을 터트렸으니까, 책임지고 싶답니다.”
“무슨 책임을 져?”
“휴식기 없이, 드라마 대타로 들어가겠답니다.”
그 말에 정 이사는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며 쓴 표정을 지었다.
“안 돼. 피디가 김태호랑 짜고 친 건지 아닌지도 아직 모르는데.”
“저도 그런 얘기는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 안 하고 유 작가만 생각하겠다고 합니다.”
“흠.”
“지난번에는 유 작가한테 싫은 소리 했는데, 사실 시현이가 신세 진 게 좀 있잖습니까. 반추도 그렇고.”
잠시 고민 끝에, 정 이사는 최재환이 아닌 성 팀장을 눈에 담고 물었다.
“4부작이라고 했지? 괜찮겠어?”
“휴식기니까 일단 촬영은 문제없는데요. 다만, 휴식기 동안 하려고 했던 게릴라 이벤트하고 팬 미팅은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CF도.”
정 이사의 깊은 한숨.
아무래도 또 긴 회의가 이어질 듯 보였다. 이 밤에.
**
-너 청탁받았냐?
“아니요. 무슨 청탁을 받아요?”
황 국장의 의심에 강 피디는 펄쩍 뛰었다.
-그럼 남수혁 어떻게 캐스팅한 거야?
“그거야 제가 오디션 봐서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김태호한테 소개받은 거 아니야.
“국장님 저 몰라요? 저요, 눈으로 봐야 믿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걔가 남수혁 소개했어도, 제가 보지도 않고 캐스팅했겠습니까?”
-보면 뭐하냐고 임마! 그 동태눈깔로 뽑은 게 그 싸가지 남수혁이잖아!
할 말을 잃어 입술만 핥는 동안에도 국장의 분노한 목소리는 계속 들렸다.
-너 내가 인성 운운할 때부터 알아봤어. 어떻게 할 거야? 지에스는 너하고 김태호, 남수혁이 짜고 친 고스톱이라고 생각하는데!
“하 미치겠네.”
-나도 미치겠다 임마. 너 내일 출근하자마자 나한테 튀어와. 혹여나, 청탁받은 거 있으면 밤새 잘 생각해보고 고해성사하고!
으름장을 놓고 끊어진 전화에 강 피디는 숨 한번 들썩이고 전화번호를 찾았다. 신호가 한참을 가는데··· 상대는 받지 않고 소리샘으로 이어졌다.
“야이 개새X야!”
강 피디는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을 들썩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유 작가와 기분 좋게 헤어지고 집에 들어와 양말을 훌러덩 벗은 순간, 황 국장한테 전화가 와서 욕이란 욕은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니 말 듣고 남수혁 캐스팅했어! 그런데 지금 대체 뭐야? 니가 남수혁과 짰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야! 국장님까지 날 의심하고 있어! 나도 너 하고 짝짜꿍한 거 아니냐고 말이야!”
김태호한테 남수혁을 소개받았다.
블랙보이 남수혁의 첫 연기라는 말에 귀가 혹한 것도 있지만, 오디션을 봤을 때 인성도 바르고 연기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기분 좋게 캐스팅했더니만, 그게 짜인 판이었다 이 말이다.
“너 메시지 들으면 당장 나한테 전화해! 알았어?”
휴대폰을 소파에 집어 던지고,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해서 숨을 들썩였다.
“이거 뭐야. 그럼 자식이 날 갖고 논거야?”
오디션을 봤을 때 예의 바르던 남수혁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간다. 벌벌 떨면서 눈치를 보던 그 모습이, 다 쇼였다고?
“허. 연기 한번 끝내주네.”
헛웃음도 잠시.
강 피디는 이마를 북북 긁으며 생각에 또 생각을 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연출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아 진짜.”
다시금 휴대폰을 들어 유 작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녀 말대로 이시현으로 하자고.
근데 이시현이 할까. 아니 지에스가 하겠다고는 할까.
달력을 보고 나서는 더욱 절망적.
25일에 방영하려면 지금 캐스팅이 끝났어야 하는데, 당장 주연이 펑크 났으니.
“김태호!”
이를 아드득 갈면서, 강 피디는 TV 선반 옆에 있는 고급 양주를 찌푸린 얼굴로 바라봤다. 저것도 청탁이라면 청탁인가··· 잠시 고민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이시현이··· 날 깠어.”
오소리는 빈 와인잔에 퀭한 눈을 비추고 있는 유 작가를 바라봤다. 꽁지머리를 흔들며 혼잣말을 중얼중얼하고 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유 작가가 집에 놀러 오라고 했을 때 적당히 핑계 대고 빠졌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사실 애초부터 무리였어요.”
오소리가 간질간질한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곧장 날아든 유 작가의 토라진 시선.
“무리? 무리가 어디 있어?”
“시현 씨, 반추도 준비해야 하고 2차 팬 미팅도 할 것 같고, 게릴라 이벤트도 계속하는 것 같고요.”
“반추가 누구 때문에 하는 건데! 내가 말이야, 가경한테 이시현이 하라고,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거든?”
혀 꼬인 소리에 오소리는 피식 웃었다.
“그래요?”
“그래! 그렇다고!”
“시현 씨가 잘못했네.”
편을 들어줬더니 그제야 유 작가가 픽 웃는다.
상체를 흔들흔들하는 그 모습에 오소리는 슬슬 일어설 준비를 했다. 그런데 유 작가가 휴대폰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휴대폰을 들여다보느라 미간을 가득 모은 유 작가.
그 옆으로 슥 다가간 오소리가 문자를 대신 읽었다.
[유 작가님, 이시현 공식 홈페이지 확인해보세요.]
발신자 ‘꽉 막힌 놈’
“작가님, 시현 씨 공식 홈페이지 확인해 보라는데요?”
“누가?”
“꽉 막힌 놈이요.”
“강 피디?”
오소리는 취한 유 작가 대신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유 작가의 작업용 노트북에 손을 얹고, 검색창을 거쳐 이시현 홈페이지로 들어간 순간.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작가님!”
“왜에?”
“이거 봐요.”
“뭔데?”
유 작가는 비틀비틀 다가와 허리를 숙여 화면을 들여다봤다. 찌푸린 눈에 비친 모니터에는 강 피디가 이시현과 함께 어깨동무한 사진이 걸려 있다.
“이 꽉 막힌 놈이 왜 이시현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거야?”
“이시현, 강지환 피디 특집드라마 합류. 꽃미남 살인자가 되기 직전?”
오소리가 사진 아래에 적힌 글을 읽었다.
그러자 유 작가도 다시 한 번 따라 읊더니 갑자기 제 두 볼을 짝! 두드렸다. 눈이 번쩍 떠진 그녀.
“뭐!?”
< 한 배를 탔습니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