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5) >
“거 말도 안 되는··· 변호사 역을 무슨 남수혁을 줘. 살인자도 잘생기고, 변호사도 잘생기면, 드라마에 잘도 집중되겠네.”
강 피디는 핀잔을 툴툴 던지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건 그냥 김 작가가 한 말이고.
“그래서, 이시현이 하겠대요?”
어차피 안될 일이기에 큰 생각 없이 물었더니, 예상대로 풀죽은 목소리가 들린다.
-할 거야. 할 수밖에 없어.
이놈의 작가들 고집.
“작가님. 우리 그냥 남수혁 해요. 이번에는 작가님이 한번 나한테 져줘요. 뭐 방법 없잖아.”
-나는 강 피디를 이해 못 하겠네. 왜 이렇게 절실하지가 않아? 이시현이랑 하고 싶지 않아?
그 말에 강 피디는 잠깐 멈춰,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고 싶다는 배우가 있는데, 오지도 않는 배우한테 매달릴 거 없잖아요. 그리고 나 배우 인성 따지는 거 알잖아?”
남수혁도 충분히 괜찮은데 굳이 이시현한테 안달할 게 뭐 있나.
-이시현 인성이 어때서?
“여기저기서 들으니까, 그렇게 좋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디서 이상한걸 들어서. 아무튼 나한테 생각이 있어.
“생각이요?”
-나한테 카드가 있다고. 좋은 카드가.
밑도 끝도 없는 확신 뒤에 유 작가가 전화를 끊었다.
“뭐야.”
끊어진 전화에 강 피디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주머니 속 동전을 꺼내다가 멈칫했다.
‘응?’
봄이 오니 어디서들 저렇게 기어 나오는지.
복도 커피 자판기 앞에서 피디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들 해?”
강 피디는 커피를 뽑아 들며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여름에 비가 좀 왔어요? 촬영 첫날부터 벼락치고 비 쏟아지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815특집드라마 촬영 얘기를 꺼내는 목소리에 그날의 기억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때의 암담함, 한기, 머리가 쭈뼛 서던 감정들이 전해진다.
“그러니 이시현이 비를 얼마나 맞았겠어요. 그런데도 흐트러짐이 하나 없고, 뭐 연기야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지.”
후루룩.
강 피디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곱슬머리의 수다를 계속 들었다.
“또 비 맞은 군복이 얼마나 무거워요? 그걸 갈아입을 생각도 안 하고, 스태프들 짐 나르는 걸 도와주더라니까요.”
“그거야 처음이니까 그러지.”
퉁명하게 뱉고 커피를 홀짝이는 강 피디 모습에 곱슬머리가 펄쩍 뛴다.
“무슨 소리를.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니까요. 촬영 내내 그러는 거예요. 인성이 정말 바르고, 사람이 됨됨이가 있다니까요? 우리가 괜히 시청률 50프로 찍은 게 아녜요.”
또다시 시작된 시청률 자랑에 피디들이 고개를 내젓는다.
“피디님은 이시현 본적 없으세요?”
“인연이 있어야 보지. 근데 뭐, 배우들 하루 이틀 겪냐.”
강 피디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속삭였다.
“아니라니까요. 이시현은 달라요.”
“다르긴.”
자판기에서 등을 돌리고 드라마국에 돌아온 강 피디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화사하게 봄이 핀 얼굴이 그를 부른다.
“피디님.”
조연출 반유선이었다.
“왜?”
예전에는 분위기가 칙칙해서 누가 데려갈까 싶더니, 이제는 드라마국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력적으로 변한 그녀.
라인이 제대로 드러난 청바지와 흰 티, 청재킷을 걸친 그녀에게서 어느 누가 색바랜 티셔츠나 입던 반유선을 떠올릴까.
아니 대체 누가 얘를 이렇게 변하게 한 거야.
“오디션 보겠다고 누가 왔는데요.”
“아. 맞다.”
강 피디는 바로 일어나 다시 드라마국을 빠져나왔다. 그 뒤를 반유선이 봄바람에 몸을 싣듯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쫓아온다.
“넌 왜 따라와?”
“피디님. 시현 씨 이번에도 저희 드라마 하는 거예요?”
“누가 그래? 남수혁이 한다니까.”
“아. 누가 들었다고 그래서요.”
실망이 이만저만 아닌 눈이다.
“너도 이시현이랑 하고 싶어?”
“당연하죠.”
“어이구.”
더는 쫓아오지 않는 그녀를 두고 강 피디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배우 앞에 섰다.
“서범진 씨?”
“안녕하십니까!”
그리 크지 않은 키. 각진 얼굴. 작은 눈. 스포츠머리까지.
누가 봐도 연기력은 일단 보장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매니저는 어디 있어요?”
“아직 제가 매니저가 있을 단계는 아니라서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를 데리고 강 피디는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다음 물었다.
“드림 프로덕션이라고요?”
“예.”
“나는 회사 따지고 그러지 않아요. 연기력만 받쳐주고, 인성만 좋으면 돼요. 뒤돌아서면 변하는 배우들한테 질렸으니까, 그런 모습 보일 거면 그냥 가시고. 자, 연기 한번 봅시다.”
강 피디는 회의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를 꼬았다.
서범진이 긴장된 숨을 고르며 준비한 연기를 보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모습을 힐끗 보고, 손에 쥔 자기소개서를 훑어보다가 슬쩍 물었다.
“얼마 전까지 드라마 촬영했네요? 스텝?”
“예. 지에스에서 이번에 제작한 드라맙니다.”
“그거야 나도 알지.”
자기소개서를 내려놓자 바로 서범진의 연기가 이어졌다.
많이 준비했는지 대사에 힘이 실렸다.
호흡도 좋고, 표정도 풍부하고, 목소리도 안정감이 있고.
“좋네.”
5분 남짓한 연기가 끝나고 일단 칭찬부터 꺼내고 질문을 던졌다.
“근데, 작은 역이라도 상관없어요?”
“시켜만 주시면 저는 뭐든 상관없습니다.”
강 피디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모든 신인배우가 저렇게 말하니까. 하지만 뜨고 나면 싹 변하지.
“고민해보고 전화 줄게요.”
“감사합니다!”
나쁘지 않은 연기력과 자세가 만족스러워서 강 피디는 자기소개서를 다시 들고 훑어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스텝 촬영이었으면, 이시현도 자주 봤겠네.”
“예!”
“어때요? 그 배우?”
그냥 대수롭지 않게 물었을 뿐인데.
서범진은 짧은 한숨 뒤에 이곳에 와서 가장 편한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시현 씨, 정말 좋은 배우입니다. 그리고 또 좋은 사람이고요.”
“그래요?”
의문의 시선을 가진 강 피디에게 서범진이 다시 말했다.
“얼마 전의 일인데, 회식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숨 한번 고르고.
“저희 같은 단역은 회식 가는 것도 눈치거든요. 가서 제대로 먹기도 힘들고. 시키기도 그렇고.”
흔한 얘기였기에 강 피디는 귀밑을 긁적이며 얘기를 들었다.
“그날도 눈치만 보면서 음식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여기서 먼저 가져가고, 저기서 먼저 가져가고. 아무리 기다려도 저희 테이블은 오지를 않더라고요. 근데 갑자기 시현 씨가 식당 이모님을 붙잡고 저희 테이블에 음식이 안 갔다고 빨리 챙겨주라는 거예요.”
“아.”
“시현 씨는 제 쪽을 계속 보고 있었던 거죠. 그게 얼마나 고맙던지.”
“그랬구나.”
잠시 뒤 서범진이 나가고.
강 피디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속삭였다.
“이시현이 이거 대체 어떤 놈이야?”
**
“잘 들어. 현장 다니면서 항상 3가지만 기억해.”
차에서 내리기 전, 최재환은 신입들을 돌아보고 얘기를 꺼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는 우선순위가 아니야. 내 배우, 내 가수, 이들이 최우선이야.”
이게 첫 번째.
“누가 나 무시하면 그냥 참아. 우리 일 자존심 꼬박꼬박 챙길 만큼 우아한 일 아니야. 하지만 내 배우 누가 무시하면 그건 참지 마. 부모님 욕 다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기분 더러운 거니까.”
이게 두 번째.
“스포트라이트는 늘 배우의 몫이야. 우리는 그림자라는 사실 잊지 마.”
이게 마지막.
“알아들었어?”
“예!”
최재환은 두 신입들의 우렁찬 대답을 듣고 차에서 내렸다. 식곤증에 하품만 연달아 하는 강 실장이 맨 마지막으로 내리자, 혀를 차며 신입들에게 말했다.
“니들은 저런 식으로 일하면 안 된다.”
“내가 뭐? 얘들아 나처럼 일해도 돼. 단, 박한영, 송이경, 이시현 정도는 키우고 나서.”
최재환이 기가 차서 고개를 내젓는데, 강 실장은 두 신입들의 목을 양팔에 끌어안고 스튜디오로 향하며 물었다.
“자, 지금부터 너희들이 볼 배우가 누구일까?”
“한승연이요!”
“니 이상형 말고 임마. 그리고, 한승연?”
목을 꽉! 끌어 앉자 뿔테 안경이 발버둥을 치며 외쳤다.
“한승연 씨요! 한승연 씨!”
살짝 풀어주고, 강 실장은 지금부터 만날 배우의 이름을 속삭였다.
“들어는 봤나. 배우 오소리라고.”
“오소리요? 아, 오소리 씨!”
그녀가 누구인가.
지금 드라마 ‘명이’로 전국에 사극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여배우가 아닌가.
포도청 종사관과 관노비의 로맨스.
서로의 신분 차로 인해 이뤄질 수 없는 가슴 절절한 로맨스에 울고 웃는 시청자들.
사전제작 드라마임에도 MNC 방송국에 연장 방송을 해달라는 전화가 빗발친다는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 오소리.
“자식들 입이 아주 귀에 걸렸네.”
“아, 하하하.”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 신입들의 모습에 강 실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인다.
“근데 조심해야 한다. 오소리 어리다고 쉽게 보면 안 돼. 대표님도 한 수 접는 우리 회사 터줏대감이니까.”
“애들 데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차가 막혀 늦은 탓에 스튜디오에서는 오소리의 인터뷰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를 담당하고 있는 조 부장이 팔짱을 켠 채로 카메라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힐끗 돌린다.
“왔어?”
“예.”
최재환은 그 곁에 서서 오소리를 바라봤다.
까무잡잡한 피부도 겨울 한번 거치니 한층 옅어졌는데, 그래도 여전히 건강미는 넘쳐 보인다. 그리고 명이 촬영 동안 가발을 쓰느라 고생을 해서인지 최근에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는 듯했다.
“유 작가한테 얘기했냐?”
조 부장이 넌지시 한 질문에 최재환은 마른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내일 만나 뵙고 얘기하려고요.”
“잘 구슬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이시현이 지금 그거 할 때야.”
“계속 고집부리시진 않을 거예요. 잘 얘기하면 유 작가님도 이해하겠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속삭임은 관두고, 두 사람은 다시 오소리를 바라봤다. 리포터의 미소에 조명이 달라붙었다.
“소리 씨, 지금 명이 열풍이 장난 아니잖아요?”
“많이 사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명이라는 인물이, 소리 씨한테는 어떤 의미예요?”
“당연히 저한테는 큰 선물이죠. 그동안 사실 저한테 아역 이미지가 많이 남아있었는데, 삶에 굴곡이 있는 명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그런 이미지를 제 스스로 떨쳐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연기 외적으로도, 명이라는 인물을 겪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고요.”
오소리의 표정에 힘이 실렸다. 작년과는 달리 표정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역시 사람은 잘 되고 봐야 한다.
“하승진 씨와의 로맨스에 지금 많은 분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둘이 잘되는 건가요?”
“그건··· 보시면 아시겠죠?”
살짝 미소를 곁들여 재치있게 대답하는 오소리.
“소리 씨는 그동안 많은 역을 했는데, 욕심 많은 배우라고 소문이 났을 정도잖아요?”
“후후.”
“그럼 이제 또 어떤 역을 하고 싶으세요? 소리 씨가 욕심을 가질만한 배역이 뭐가 있을까요?”
“글쎄요. 그 어떤 역할이라도 깊이가 있다면 모든 배우가 욕심을 내죠. 하지만 저는 사실 배역보다는, 배우 욕심이 커요.”
“배우 욕심이요?”
“예. 상대 배우만 믿고 작품을 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다음 작품도 그런 좋은 배우가 제 상대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물론, 상대 배우에게도 제가 좋은 배우로 여겨졌으면 좋겠죠?”
인터뷰가 끝나고 오소리가 카메라에서 벗어나 최재환에게 다가왔다.
“오셨어요?”
맑은 미소를 보이더니, 신입들에게 눈인사를 살짝.
“이것들 완전히 얼었네.”
고목처럼 뻣뻣해진 신입들의 모습에 다들 짓궂게 웃는데, 오소리가 최재환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시현 씨는 어디 있어요?”
**
이상하네.
시나리오가 해질 정도로 달달 외웠는데 김은재가 바로 튀어나오질 않는다. 일본에서는 김은재의 감정이 손에 잡혔는데···
“하.”
괜히 기분이 꿀꿀해서, 나는 연습실 거울을 보며 잽을 날렸다.
때로 집중력을 잃으면 섀도복싱을 한다.
스텝에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이라고나 할까.
허공에 빈 주먹을 뻗으면서 나는 김은재를 다시 생각했다.
연인 유민서가 죽고, 그의 앞에 정하연이 나타난다. 그녀는 유민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기억까지도 가지고 있다.
스스로가 유민서라고 믿고 있다.
김은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차마 정하연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래서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그녀를 보지만, 실은 자신도 모르게 냉철함에 금이 가고 있었음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J라는 단체, 킬러, 기억조작, 성심그룹, 정보기관, 전쟁에 관한 서사까지.
반추는 복잡한 영화다. 하지만 그 중심엔 사람이 있다.
김은재가 있고, 유민서가 있고, 정하연이 있다.
그 세 사람의 이야기가 반추다.
“후······.”
이런. 김은재한테 거의 접근했는데.
하지만 나는 찌푸린 얼굴 대신 입가에 미소를 새기고 연습실 입구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오소리였으니까.
“잘 지내셨어요, 선배님?”
“이제 선배 소리 그만 해요.”
오소리가 눈웃음을 들고 들어왔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연습실에 울린다. 안부 인사나 하려고 들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시현 씨는 대본에 욕심 없어요?”
“예?”
다짜고짜 무슨.
“미스터 미스터리. 욕심나지 않아요?”
아. 이제 알았다. 유 작가구나.
오소리한테 날 꼬시라고 시킨 모양이다.
“그거 남수혁이 하기로 했어요.”
내 말에 그녀가 찌푸린 코를 가로젓고 말햇다.
“전 지금 시현 씨가 꽃미남 살인자라는 역할에 욕심이 나는지를 묻는 거예요.”
“저 그게.”
나는 살짝 접은 이마를 긁적였다. 그녀의 행동이 나를 곤란하게 있으니까. 부탁받아서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는 건 알지만.
“알아요 시현 씨 곤란한 거. 유 작가님이 시현 씨한테 실례되는 행동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난 그냥, 순수하게 배역에 관해서 묻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
“욕심이야 나죠. 근데 모든 변수를 떠안을 정도는 아니에요.”
내가 선을 분명하게 긋자 그녀가 싱긋 웃고 다시 말했다.
“그럼 그 변수를 떠안을 정도로 욕심나게 하면 되는 거예요?”
글쎄, 이미 대본은 훑어봤다.
여기서 욕심이 더 들만 한 요소가 있을까.
“변호사 역에, 제가 하면 어때요?”
순간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생각했다.
“제가 변호사를 한다면, 시현 씨는 꽃미남 살인자, 욕심나요?”
당황한 나를 향한 오소리의 미소가 당당하다.
“저, 시현 씨하고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사랑을 구애하는 세레나데처럼 들린다면··· 내가 이상한 건가.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