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53화 (153/227)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4) >

“그럼 뭐야. 이거 협박이야?”

지금 순간 조 부장의 어이없는 얼굴처럼, 최재환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다. 성 팀장이라고 다를까.

“작가님 작가님 하니까, 진짜 상전인지 아나. 이거 강지환 피디가 연출이지?”

콧잔등을 찌푸려 웃던 조 부장이 도톰한 입술을 깨물고 있는 성 팀장을 돌아보고 물었다.

“예.”

일단 대답을 들은 그는 날벼락에 놀란 남수혁을 눈에 담고 최재환에게 다시 물었다.

“가경 작가하고, 유 작가 무슨 사이인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둘이 친분이 있는 건 확실해요.”

“촬영 일정을 미룰 정도로?”

“그건 그냥 하는 얘기겠죠.”

최재환은 다른 사람과 달리 그 얘기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촬영이라는 게 한두 사람 움직이는 일도 아니고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페이 프로덕션이 구멍가게도 아닌데 친분만으로 회사 일정을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게 말이 되나.

“제가 통화해볼게요.”

최재환은 엉거주춤 서 있는 남수혁을 지나쳐 부장실을 빠져나왔다.

터벅터벅 걸어서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전화번호를 찾아 수첩을 뒤적이면서, 문득 예전 일을 떠올린다.

‘바닷사람들 이야기’에 이시현 꽂아넣으려고 피디한테 얼마나 허리를 굽혔던가.

술대접하고, 삼 선물하고.

장뇌삼 싸게 구하겠다고 산에서 직접 캐는 체험 현장 가서 비탈길 굴러가며 호미질했던 기억.

‘훗.’

상황은 조금 애매하게 심각한데, 입가에는 웃음이 나온다.

신호가 가고.

“작가님.”

바로 유 작가의 목소리가 왕왕 들려온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요구하시면 어떻게 해요. 시현이 일정은 둘째치고, 이거 이미 남수혁 캐스팅됐다면서요.”

-그건 내 허락 없이 피디가 마음대로 결정한 거고, 확정이 아니라 얘기만 오간 거고.

깨진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무슨 소리세요. 이미 얘기 다 끝나고, 남수혁은 대본까지 달달 외웠건만.”

의자를 빼서 앉으며, 최재환은 잠시 뗐던 휴대폰을 다시 귀에 붙였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입맛 한번 다시고 얘길 이어갔다.

“그리고 올해 굵직한 스케줄은 이미 다 잡아놨는데, 반추 일정이 요동치면 우리 손해 커요.”

농담하듯 얘길 꺼냈지만, 이게 차 대표의 귀에 들어가면 방송국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걸 이 여자는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내가 이렇게라도 하니까 전화 주는 거 아니야? 지에스에, 이시현 연락처 좀 달라니까 주질 않더라. 전에 번호는 바뀌었고.

“저한테 연락하지 그러셨어요? 제가 작가님한테 명함을 몇 번이나 드렸는데.”

하긴 그때는 지갑에 꽂을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거는······.

“아무튼 이건 물릴 수가 없어요. 우리도 곤란해요.”

-시현 씨가 하겠다고 하면?

“걔 지금 반추 하나 신경 쓰기도 벅차요. 우리가 괜히 휴식기 들어가나.”

물론 회사로서는 이시현이 계속 움직이길 원한다.

최근 차 대표는 해외 투자자를 끌어오고 있고, 인터넷 업체와 행사 대행업체를 인수하고, 잡지사와 협업을 추진하고 있다.

심지어 올해는 코스닥 진출까지 노리고 있는 상황이고.

-나 지금, 시현 씨 의견 물어보는 거야.

유 작가의 목소리가 까칠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재환은 입술만 핥다가 다시 얘길 꺼냈다.

“그럼, 한번 물어보고 전화 드릴게요.”

**

“안 해.”

나는 대본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러자 최재환이 두툼한 눈두덩을 찌푸린 채로 손에든 대본을 훑으며 속삭인다.

“대본은 나쁘지 않네.”

뭐 나도 그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래. 알았다.”

최재환이 벌떡 일어났다. 어라. 그냥 가는 건가.

이유도 안 물어보고, 날 기콘부에 덩그러니 내버려두고 사무실을 성큼 나가버린다. 그래서 펄럭이는 유리문에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분홍색 컵이 불쑥 내 앞에 다가왔다.

“드세요. 코코아예요.”

백유진이 배시시 웃는다. 하얀 이와 통통한 볼, 긴 치마와 두툼한 스웨터까지 입고 있으니 순박한 시골 처녀가 따로 없다.

컨셉을 바꿨나.

얘는 말괄량이 삐삐가 제일 잘 어울리는데.

“고마워요.”

“팀장님이 답을 정하고 오셨네요.”

“그렇죠?”

녀석은 내가 안 할 거라고 확신하고 온 듯했다.

한번 찔러나 볼 걸 그랬나.

“시현 씨는 남수혁 씨가 신경 쓰이나 봐요?”

“글쎄요.”

나는 미소를 기울였다. 그러자 백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 앞 소파에 살짝 엉덩이를 걸친다. 손이라도 내밀면 두 손 공손히 올릴 기세로 나를 쳐다보고 속눈썹을 깜빡인다.

“그러면요?”

남수혁이 드라마를 하든 말든, 또 거기서 빠지든, 그건 관심도 없다.

그 일에 한 톨의 신경도 쓰고 싶지 않으니까.

아니면 일부러 물 먹이려고 내가 그 역을 하겠다는 생각?

물론 없지. 시간 아깝게 왜 그런 짓을.

나는 그저 유 작가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다.

내가 필요하면 협박이 아닌 부탁을 해야지.

그도 아니면 제안을 하던가.

아직도 최재환이 작가와 피디 앞에 허리 숙이며 안마나 해주던 때를 기억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아무리 유 작가라도 말이야.

“그래도, 시현 씨가 그 역 하면 진짜 대박일 것 같은데.”

사실 머릿속에는 이미 장면 장면이 스쳐 가고 있다.

내가 꽃미남 살인자 역을 한다면 어디서부터 그 인물에 접근할까.

허황된 캐릭터가 아닌 현실로 끌어올 수 있을까.

리얼리티를 어떻게 표현할까.

살인자의 살해 동기는 무엇이며, 시청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이유를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가.

후··· 이렇게 보면 또 인정할 수밖에 없네.

유 작가는 이런 식으로 나와도 되는 작가라는 거.

“저는 영화 준비해야죠.”

“하긴. 반추 오래 기다렸으니까.”

그래 오랫동안 기다렸다. 반추의 김은재가 되기를.

성심그룹 회장 김은재는 냉정한 남자다.

J라는 단체, 잃어버린 연인 유민서.

김은재의 삶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그 존재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가 너무도 궁금하고, 또 그를 원하고 있다.

“와.”

갑자기 들린 탄성에 고개를 들었더니, 백유진이 마른침을 삼키고 눈을 빛냈다. 그 눈동자가 얼마나 맑은지 내 얼굴이 선명히 비친다.

“지금, 꽃미남 살인자였죠?”

뭐라는지 몰라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더니, 그녀가 코를 벌렁거리며 속삭인다.

“배우는 정말 순식간에 역에 몰입하는구나. 멋있어요.”

“아··· 뭐.”

대체, 얘 왜 이러는 걸까.

**

“하.”

무거운 한숨이 먼지와 함께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쌓이고 쌓이는데, 마주 앉아 지켜보던 김은수 작가가 피식 웃고 말했다.

“왜 이러실까 정말. 작가님 이렇게 조급한 사람 아니잖아요?”

“하.”

“이미 결정 난 걸 어떻게 해요.”

“김 작가 지금 나 염장 지르려고 왔니?”

유 작가는 찌푸린 눈을 하고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안경까지 크고 두툼한 것을 쓰고 있어서 콧잔등도 짓눌려 있고.

“그러게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되죠.”

“뭐가.”

“협박이잖아요 그거. 시현 씨가 아직도 바닷사람들 이야기 박태식인지 알아요?”

그때와 지금은 하늘과 땅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당시엔 누구도 이시현을 몰랐지만, 지금은 이시현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가 방송에 나가면 죽었던 시청률도 살아나고, 거리에 나가면 그 일대가 마비된다. 그뿐인가. 여타의 스타들과 달리 팬들과의 관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하고.

그런 이시현에게 ‘너 이거 안 하면 아웃이야’라고 협박을 했으니 원.

“눈이 뒤집혀서 그랬다 왜? 강 피디 그놈이 내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잖아! 황 국장은 살살 약 올리듯 말하고.”

유 작가가 한숨을 푸푸 내쉬자··· 김 작가가 다시 미소를 띠고 소곤거렸다.

“차근차근 접근해야죠. 배우에게 대본을 보여주고, 캐릭터 가이드해주고, 그래서 배우가 욕심을 내게끔. 이거 작가님이 나한테 가르쳐준 거잖아요.”

“후.”

“일단은, 기회 봐서 마주 앉아 얘기하세요.”

김 작가는 한숨만 계속 쉬는 유 작가를 살살 구슬렸다.

그런데 커피 한 모금에 잔을 내려놓은 유 작가가 은은한 시선으로 마주 보는 게 아닌가.

“왜··· 그러세요?”

“근데 김 작가. 이시현이랑 연락하지?”

“예?”

**

곤란한 부탁.

하지만 김 작가의 청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게 ‘우리 오빠’라는 큰 선물을 준 작가니까.

그래서 이곳에 유 작가가 있을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올 수밖에 없었다는 거.

“시. 현. 씨. 왔어?”

유 작가가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부담감 백 프로 느끼고 있는데···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고 올려다본다.

꿀꺽.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마른침이 절로 삼켜지네.

“앉아앉아.”

유 작가가 제 곁의 빈자리를 팡팡 두드린다.

글만 쓰느라 고운 손인데, 소리는 매섭게 내 귀를 때린다.

왠지··· 저 자리에 앉으면 발이 묶일 것 같은 찜찜함 속에 엉덩이를 붙였다.

“자, 작가님?”

고운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힘이 장사다.

“하나만 물을게.”

안경 너머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그래서 정말 하나만 묻기를 간절히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 봤지?”

“예.”

“어땠어?”

그거야 뭐.

“욕심나더라고요.”

내 말을 들은 그녀가 테이블을 탕! 두드린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시현 씨라면, 대본 보면 꼭 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운을 떼자마자 유 작가의 미소가 경직된다. 허망한 눈을 하고 눈썹을 축 내리며 나를 보는 그녀.

“남수혁이 하기로 했잖아요.”

“아, 또!”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을 그녀가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외쳤다.

“그거 내 허락 없이 이뤄진 거라니까!”

카페 사람들 다 보겠네.

그러지 않아도 나라는 거 눈치챈 분위긴데.

“남수혁 대본 달달 외웠대요. 작가님도 아실 거 아니에요? 캐스팅됐다가 물 먹는 배우 기분.”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곁눈질하고 빠르게 얘길 했다.

순간 유 작가가 실컷 울분을 토하던 입술을 머뭇거린다. ‘바닷사람들 이야기’에서 내가 빠졌던 그때의 일을 벌써 잊진 않았을 테니까.

“남수혁은, 내가 다음에 쓸 거야. 약속할게.”

뭐 그거야 그때 가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죄송해요.”

“하··· 좋아. 그러니까 시현 씨 얘기는, 하고는 싶은데 남수혁 때문에 못하겠다?”

“그게 아니라.”

답답하네.

나는 걔 일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니까.

“그럼, 남수혁이가 안 한다고 하면 되겠네?”

집념인가. 아니면 그렇게까지 남수혁이 싫은 건가.

유 작가의 억센 고집에 간신히 미소만 들고 있는데, 김 작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남수혁을 변호사로, 시현 씨를··· 꽃미남 살인자로 하면.”

“예?”

**

“하하하!”

강 실장이 껄껄 웃는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배까지 움켜쥐고 있다.

“야. 완전 상황 역전이네. 전에는 니가 그렇게 쫓아다녔는데 말이야.”

“유 작가가 고집이 보통 아니다.”

최재환은 불붙지 않은 담배를 손등에 툭툭 두드리며 옥상 난간에 기댔다.

“그래서 하기로 한 거야?”

“글쎄.”

“그냥 하지그래? 어차피 일정이야 이미 조절한 상황이고, 배역 나쁘지 않다며?”

“대본이야 좋긴 한데.”

여전히 결정을 망설이며 담배를 입에 문 최재환.

그러자 난간에 등을 기댄 강 실장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물었다.

“시현이는 뭐래?”

“나보고 알아서 하래.”

“마음은 있다는 거네.”

“니가 점쟁이냐? 걔 마음을 어떻게 알아.”

최재환이 피식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강 실장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너. 엄마 요리가 왜 좋은지 알아?”

“뭔 소리야.”

“항상 맛있는 건 아니지만 기대되거든.”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싶어서, 최재환은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물었다.

“그래서?”

“난 시현이를 보면 그러거든. 기대돼.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이시현이 하는 꽃미남 살인자는, 대체 어떨까?”

“약 먹었냐? 헛소리는.”

핀잔을 주자 강 실장은 피식 웃으며 난간에서 등을 뗐다.

한발 물러나면서 하늘을 보고 기지개를 켠다.

“아후! 그럼 나는 신입들이나 갈구러······.”

고장 난 테이프마냥 늘어진 강 실장의 목소리에 담배 연기를 뿜던 최재환이 고개를 돌렸다. 한데 그 앞에 남수혁이 서 있다.

“저기··· 드릴 말씀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그 모습에, 강 실장이 눈치를 살피며 먼저 내려갔다. 그렇게 둘만이 남은 순간.

“너 뭐하냐?”

남수혁이 무릎을 꿇었다.

눈가에 주렁주렁 눈물을 달고, 간절하고 또 간절함을 섞어 흐느낀다.

“팀장님. 저 꼭 그거 하고 싶습니다. 저한테는 정말 마지막 기회잖아요······.”

신경 쓰지 말라고. 이시현은 안 할거라고.

그렇게 위로 섞인 말을 잔뜩 하고, 최재환이 먼저 옥상을 내려갔다.

“훗.”

홀로 남은 남수혁은 눈가에 맺힌 인공눈물을 쓱 닦아냈다. 꺼내 든 담배를 물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연기를 흘리며 석양을 바라본다.

“순진들 하기는.”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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