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52화 (152/227)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3) >

“블랙보이 리더 남수혁이요.”

유 작가는 검붉은 입술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잘못 들었다는 착각에 혀끝을 꿈틀대다가 다시 물었다.

“아이돌 얘기하는 거예요?”

“예.”

“국장님!”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강 피디 모습에, 유 작가는 뭐라고 말 좀 해보라며 황 국장을 바라봤다. 지금 이시현을 캐스팅하려는 상황에, 검증된 배우도 아닌, 아이돌이라니.

“남수혁이라. 걔 건강문제로 활동 중단한다고 하지 않았어?”

유 작가의 기대와 달리 황 국장은 묘한 표정을 짓고 턱 끝을 긁적이며 물었다.

“이제는 괜찮아져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다네요. 열심히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만나는 본 거야?”

“예. 연기 한번 봤는데 괜찮더라고요. 톤도 좋고, 표정도 나쁘지 않고.”

“남수혁이면 뭐.”

황 국장은 귓불을 긁적이며 유 작가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속삭였다. 누가 봐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캐스팅이니까.

블랙보이 팬덤이야 이미 검증된 거고, 더구나 활동 중단 후에 휴식기에 들어갔던 남수혁의 복귀가 음악이 아닌 드라마라면, 분명 이슈는 떼놓은 당상이다.

“국장님!”

“아휴. 나쁘지 않잖아.”

황 국장이 온화한 미소를 던졌지만 유 작가의 찢어진 눈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안 했다.

“절대 안 돼요. 아이돌은 안 돼.”

단호하게 선을 긋는 유 작가의 모습이 답답해서, 이번에는 강 피디가 테이블을 두드린다.

“작가님 걱정 아는데, 남수혁 연기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꽃미남 살인자 캐릭터랑 잘 어울리잖아? 남수혁 얼굴이야 이미 검증된 거고.”

“난 싫어요.”

아예 등을 보이는 유 작가.

황 국장이 한숨을 쉬면서 다시 얘길 꺼냈다.

“지에스랑은 다 얘기 된 거라고?”

“예. 남수혁이 자기는 출연료도 필요 없대요. 그냥 출연하게만 해달래. 애가 간절하더라니까.”

강 피디는 얼마 없는 앞머리를 넘기며 남수혁과 만났던 얘기를 했다.

싹싹하고, 인사성 밝고, 무엇보다 연기 열정이 보통이 아니라는 얘기를 늘어놓자 황 국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 걔가 인사성이 밝았어?”

황 국장이 남수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의뭉스럽게 속삭이자, 유 작가가 떼쓰는 아이처럼 쏘아붙인다.

“국장님 나 이거 못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대안이 없잖아. 당장 이달 19일 종방인데, 25일에 내보낼 게 없어요! 그래서 이걸로 땜빵치는 건데 언제 캐스팅에 세월아 네월아 해?”

목소리에 힘을 실어 봤는데··· 유 작가는 되려 눈에 힘을 주고 항변이다.

“캐스팅 이번 주 안에 끝내면 되고요, 촬영은 보름이면 충분하잖아요.”

“그럼 배우는 대본 언제 봐?”

그 말을 꺼내고 황 국장은 아차 싶었다. 이마를 찌푸리기 무섭게 유 작가의 반격이 들어왔다.

“이시현, 815특집드라마 들어갈 때도 촬영 이틀 전에 대본 받고 들어갔다면서요? 그리고 이 작품, 이시현 등장 씬 4부작 통틀어 40프로도 안 되고 그나마도 변호사하고 걸치는 거고. 아마 이시현은 815특집드라마에 비하면 이건 새 발의 피일걸?”

유 작가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시현이 ‘꽃미남 살인자’로 확정인 듯했다.

“그럼 이렇게 해.”

결국 황 국장은 해결책을 꺼내 들었다.

“일단 유 작가는 이시현부터 물어와. 그러고 나서 얘기해. 이번 주 금요일까지야.”

그제야 유 작가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부릅뜬 눈을 끄덕인다.

**

“뭐라고?”

잠시 편의점에 들른 최재환은 바나나우유를 챙기며 휴대폰을 귀에 딱 붙였다.

“남수혁이를 삼성동에서?”

배우만 담당하는 2팀은 삼성동 C&C로 모두 옮겼다.

2팀 소속 매니저들이야 당연히 넘어왔고.

그런데 지금 1팀장이 블랙보이 남수혁을 C&C에서 맡으라고 하고 있다.

-예. 이번에 4부작 드라마 하기로 했거든요.

“난 들은 얘기가 없는데?”

소속 아티스트의 동향을 체크하는 건 팀장들의 기본 업무다. 하물며 연기 활동과 관련한 건 2팀장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런데 귀띔하나 없다가 뜬금없이 남수혁이 드라마라니.

더구나 녀석은 지금 근신 중이건만.

-대표님이 바로 컨펌하신 거라서.

“대표님이?”

최재환의 얼굴이 구겨진다.

-남수혁이가 대표님한테 무릎 꿇고, 빌고 또 빌었어요.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잘못했다고. 기회를 달라고.

“후······.”

한숨 한번 쉬고.

“지금 회사 들어가니까, 가서 얘기해. 부장님 계시지?”

전화를 끊고 계산대에 섰다.

작은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바나나우유만 가득하다.

그런데 아르바이트생이 봉지에 재빨리 담으면서 눈치를 힐끗 보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저기, 매니저세요?”

그 질문에 최재환은 잠시 떠오른 잡생각을 지우고 호기심 어린 아르바이트생의 눈을 마주했다. 속눈썹을 깜박이더니, 그녀가 수줍은 얼굴로 속삭였다.

“통화하는 게 들려서··· 블랙보이 수혁 오빠 얘기 맞죠?”

최재환은 대답 대신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수혁 오빠 언제 복귀해요?”

타이밍도 좋지. 여기서 남수혁 얘기라니.

“빨리 복귀했으면 좋겠는데.”

“그러게요.”

계산을 끝내고 편의점을 나왔다. 도롯가에 세워진 밴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이시현이 동글동글한 눈을 하고 쳐다보고 있겠지.

‘뭐 어차피 일.’

머리 아프게 생각할 것 없다.

“자.”

“감사합니다!”

차 문을 열자, 이시현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바나나우유를 받아들었다.

빨대 하나를 톡 찔러넣어 서아린에게 건네고, 운전석에 앉은 최재환에게도 건네더니, 제 것에도 톡 찔러넣어 입에 문다.

“아린아 그거 알아? 바나나는 원래 하얀 거.”

“그래요?”

“이거 노란색 식용색소야.”

“그렇구나.”

“바나나는 하나도 안 들어있대.”

“아 그래요?”

신나서 떠드는 이시현과, 그러냐고만 묻는 서아린의 모습.

차를 출발하면서 최재환이 말했다.

“아린아, 저 바보한테 호응 좀 해줘라.”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최재환은 피식 한번 웃고, 나긋나긋한 말투로 얘길 꺼냈다.

“아린아. 봄 오면 우리 스타일리스트 더 뽑을 건데 넌 괜찮지?”

반추는 한중일 3개국 올로케이션 촬영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현지에서 대응할 수 있는 팀을 구축해야 한다.

또 사실 스타일리스트가 더 붙어야 서아린이 좀 더 일하기도 수월해진다. 협찬을 받는다든지, 이시현의 스타일을 좀 더 고민할 시간도 벌 수 있을 테고.

“예. 괜찮아요.”

대답을 들은 최재환은 차창을 열었다.

겨우내 추워서 늘 닫고 다녔는데, 오랜만에 여니까 봄바람이 수줍게 들어온다.

‘매니저도 새로 붙여야 하는데······.’

언제까지고 그가 이시현 곁에 붙어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저놈을 어떻게 혼자 보내나.’

그런 걱정.

‘반추가 잘 돼야 할 텐데.’

또 그런 걱정.

**

“지난 일은 다 잊고······.”

“다 잊어요?”

답답하게 한숨만 쉬는 최재환을 대신해 나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걸 토해냈다.

“전 못 잊겠는데요.”

조 부장이 이마를 구긴다. 내가 이렇게 나오니 당황한 모습인데, 사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최재환 데리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다.

“시현아.”

“남수혁 때문에 저는 고아라는 사실 터졌고, 재환이 형은 폭력 매니저라고 낙인 찍혔던 사실 잊으셨어요? 지금 1팀장님 자리,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잊으셨어요?”

남수혁과 공모해 최재환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김 팀장을 언급했더니 조 부장이 볼을 찌푸린다.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을 테니까.

내가 은퇴라는 초강수를 뒀던 연제협 사건.

“됐어. 시현이 넌 나가 있어라.”

“형.”

“나가 있어.”

최재환이 나를 달래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그래서 일단 한숨 한번 내쉬고 회의실을 나왔는데, 밖으로 나오니 성 팀장이 나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오더니 분홍 입술 한번 빨아들이고 반달 눈썹을 기울인다.

“나도 시현 씨 마음 이해해.”

“무슨 드라마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 뭔지 들어나 보자.

블랙보이 남수혁이 연기를 하겠다는 것도 놀랍지만, 노래만 부르던 놈이 대체 무슨 드라마를 하겠다는 건지.

“유가희 작가님 4부작 드라마인데, KIS에서 이달 중순에 종영하는 수목극 끝나고 잠깐 비는 2주 동안 방영하려나 봐.”

“대본 있어요?”

“어, 있는데······.”

“좀 보여주세요.”

망설이던 그녀가 문제의 대본과 시놉시스를 챙겨왔다.

나는 대본을 받아서 기콘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미스터 미스터리]

기억에 없는 드라마인데···

유가희 작가가 이런 드라마도 썼었나?

아니면 내가 미처 모르는 건가 싶지만, 뭐 일단은 한 장을 넘겼다.

‘꽃미남 살인자?’

다리를 꼬고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시놉시스를 읽고 나서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것뿐이다.

‘와.’

유가희 작가. 미쳤다.

간단히 시놉시스만 훑어봤을 뿐인데 뒷머리가 오싹 치솟는다.

어느 날 3명의 선량한 시민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마가 붙잡힌다.

옷과 구두에 흠뻑 묻은 피, 선홍빛을 머금은 날카로운 칼을 쥔 채로 현장에서 체포된 살인마.

한데 그 살인마가 엄청난 꽃미남이다.

언론은 흥분하고, 인터넷에는 그를 위한 팬카페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대단한 외모를 가졌다.

매일 신문에는 사건에 관한 내용이 오르고, 심지어 구치소 일상까지도 기사가 돼 올라온다. 그러던 차에 팬카페에 글이 하나 올라온다.

죽은 3명은 선량한 시민이 아닙니다.

꽃미남 살인자는 죄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를 살려야 합니다.

팬카페 회원들은 변호사 고용을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익명의 기부자까지 나선다. 그렇게 고용된 변호사는 꽃미남 살인자의 진실을 파헤치게 되는데.

‘이게 4부작이라고?’

군더더기는 다 걷어내고 제대로 된 알맹이만 모아놓은 느낌이다.

“꽃미남 살인자.”

나도 모르게 되뇌었다.

어느새 불쾌한 화는 사라지고 가슴은 식었다.

악역.

적잖은 배우가 악역을 로망으로 여긴다.

또 연기 변신을 위해 일부러 악역을 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때 나 역시도 악역으로 스크린에 오를 날을 꿈꾸기도 했고.

그래서일까···

이거 묘하게 당기네.

**

“너 열심히 해야 한다.”

답답함이 고인 한숨 뒤로 조 부장은 남수혁을 쳐다봤다.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얼굴이야 잘생겼다. 그리고 사실 그동안의 행실만 두고 보면 꽃미남 살인자 역할에 제격이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척해진 얼굴을 들고 남수혁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최재환이 탐탁지 않게 지켜본다.

“임마 나한테 고개 숙이지 말고, 최 팀장한테 고맙다고 해.”

남수혁이 엉거주춤 허리를 틀자 최재환은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저었다.

“인사는 됐으니까. 너 대본은 다 외웠어?”

“예!”

남수혁이 크게 외치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미안한 건 있는지 눈을 제대로 들질 못하고 있었다.

“후······.”

마지막이라는 듯 긴 한숨을 내쉬고, 최재환은 남수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한테 마지막 기회니까 열심히 해라.”

“감사합니다!”

남수혁이 눈물을 글썽이더니 최재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도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눈에 보이니 최재환도 기분이 착잡해서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노크와 함께 성 팀장이 어깨를 덮은 머리를 흔들며 들어왔다.

“조 부장님.”

“왜?”

“유가희 작가님한테 연락 왔는데요.”

“유 작가?”

그 이름에 최재환이 눈썹을 쫑긋 올리자, 조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수혁이 보려고 전화했나 보네.”

“그게 아니라. 시현 씨가, 미스터 미스터리 했으면 좋겠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다들 영문을 몰라서 얼굴만 찌푸리자, 성 팀장이 다시 말했다.

“반추 스케줄 때문에 못하면, 가경 작가님한테 연락해서 반추를 아예 뒤로 밀어주겠대요.”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황당해하는 조 부장의 모습에, 최재환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이마를 구겼다.

“가경 작가하고, 유 작가님··· 둘이 인연이 있어요.”

“뭐?”

생각지 못한 얘기에 조 부장은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그렇게 잠시 눈썹만 잔뜩 찌푸리고 있더니 최재환에게 묻는다.

“그럼 뭐야. 이거 협박이야?”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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