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51화 (151/227)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2) >

“후······.”

한숨 크게 내쉬더니, 터벅터벅 다가온 원장이 기운 빠진 어깨를 으쓱 올렸다.

“못 온대. 촬영팀 회식 잡혔다고.”

이시현 측이 N 샵의 예약을 취소한 모양이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원장은 풀이 죽은 얼굴로 연거푸 한숨을 속삭였다.

“자기 이시현 괜히 기다렸네. 내가 쓸데없는 얘기 해서.”

“아니야. 전화해서 따로 만나지 뭐.”

단막극 ‘바닷사람들 이야기’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유 작가는 서둘러 샵을 빠져나왔다.

차에 오르는 동안 머릿속은 이시현을 데려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로 채워진다. 배우의 스케줄도 확인해야 하고, 설득도 해야 한다.

아마 쉽지 않겠지.

이시현 입장에서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돈도 안 되고 시간만 든다. 하물며 이시현은 이제 단편 드라마에 출연할 급도 아니고.

‘일단은 이시현과 한자리에 앉는 것부터.’

그런데 왠지 대본을 보여주기만 하면 이시현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좋은 대본이니까, 이시현이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거라는 확신.

“훗. 나도 참.”

유 작가는 그 생각을 피식 웃음에 실어 밤바람에 흘려보내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

“스텝의 대박을 위하여!”

인근 대폿집에서 간단하게 회식이 이어졌다.

야외촬영은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고생이다. 물론 그만큼 서로에게 정이 들지만. 더구나 이번에는 딱히 트러블도 없어서 다들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 촬영을 이어올 수 있었다.

“감독님 한잔 받으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병을 기울였다. 투명한 유리잔에 맑은 술이 찬다. 꽉 채우진 않고 살짝 남겨둬서 그 위를 웃음으로 채웠다.

촬영감독은 기름진 얼굴에 붉은 끼가 둥둥 떠 있고, 찬바람에 입술이 튼 최 감독은 입가에 고기 양념이 번들거리고, 호리호리한 조명 감독은 술이 얼마나 센지 흐트러짐 하나 없고, 무술 감독은 턱수염에 술 방울을 묻히고 나를 보며 웃는다.

“오늘은 좀 마시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최재환 눈치를 살폈다. 팔짱을 켠 채로 기분 좋게 웃고 있던 녀석이, 내가 예상했던 말을 꺼낸다.

“적당히 마셔라.”

“예예. 알겠거든요.”

역시나 싶어서 인중을 길게 늘어트리고 대꾸했더니 최 감독이 수저를 흔들며 우리 둘을 가리키고 말했다.

“하여간 티격태격, 둘이 심심하지는 않겠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많은 배우, 많은 매니저 봤지만 이 둘처럼 잘 노는 팀을 본 적이 없어.”

짠하고, 부딪친 뒤에 한잔 마시고.

“그게 다 배우 하기 나름이야. 배우가 말 안 들어봐? 매니저는 일하기 짜증 나지, 그러다 보면 서로 갈등 생기고 불편해지지. 시현이 봐. 애가 얼마나 털털해? 까칠하지도 않고, 열심히 하고, 피곤해도 티 하나 안 내고.”

오늘 왜들 이러실까. 이 양반들이 나를 너무 띄워준다. 내가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이렇게 대놓고 칭찬을 퍼주면··· 기분이 좋잖아.

“안 되겠다. 오늘 법인카드 감독님한테 맡겨두고 가야겠다.”

“하하하! 최 팀장 그래라. 우리 2차도 가고 3차도 가게.”

“아이고.”

최재환이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다.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는 모습에 최 감독이 웃으면서 술병을 손에 쥔다.

“이시현을 위하여!”

이 양반들아, 낯간지러운 거 이제는 그만 좀 하자고!

그런데 입안을 채우는 술이 참 달지.

고기 냄새도, 사람들 냄새도, 시끄러운 소리도, 웃는 소리도, 참 달다.

“회식비 나가는 거 걱정하지 마시고요. 오늘 많이 드세요.”

이 양반들과 막잔 부딪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동안 수고 많았던 스태프들과 서로 잔을 나누고, 촬영 중 에피소드도 얘기하고, 웃고 떠들면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간혹 식당 직원을 붙잡기도 했다.

“이모님 고기 좀 챙겨주시고요, 저기 저 테이블 오래 기다렸는데 아직 음식이 안 갔거든요? 우선 좀 챙겨주세요.”

“아, 좀 전에 온 사람? 알았어요.”

맑은 웃음을 보인 식당 직원이 발걸음을 경쾌하게 움직인다. 춤을 추듯 스텝을 내미는 그 모습을 잠시 감상하고, 대폿집을 빠져나왔다.

“후······.”

바람을 쐬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돌았다.

송이경이었다. 밤에 봐도, 아니 언제봐도 예쁜 미소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와 달을 본다. 홍조 띤 하얀 얼굴, 매끄러운 턱을 내밀고.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아. 이 정신없는 와중에 다른 배우들까지 챙기고.”

그녀가 코끝을 찡긋하고 웃는다.

“에이 그 정도로 내가 남을 챙기진 않는데.”

그저 늦게 온 단역배우가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얘기 좀 한 것뿐이다.

“그럼 이제 반추 준비하는 거예요?”

“응. 당분간 쉬면서 준비하려고.”

반추는 3월에 제작 발표회, 5월에 크랭크인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제작 발표회가 연기됐는데···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라서 자세한 사정은 아는 게 없고.

“오빠. 우리 제법 친해진 거죠?”

송이경이 새침하게 눈을 기울이고 물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하긴. 나를 보는 팬들도 그럴 거다. 그냥 미소가 나오겠지.

“그럼 우리 이제 자주 연락하는 거예요?”

그렇게 눈을 뜨면 연락 안 할 남자가 어디 있을까.

3개월 가까운 시간, 우리는 함께 많은 장면을 찍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송이경은 뭐하나 먹어도 꼭 자기 스태프들 것까지 챙겼다. 덕분에 나도 목에 좋다는 꿀 절인 도라지도 제법 많이 얻어먹었고. 그럼, 그녀에게 나 이시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고우희도 그렇고 송이경도 그렇고.

지금 문득 생각이 들었는데, 작품을 마친다는 건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록 서로가 바빠서 자주 못 보겠지만 그래도 이 삭막한 곳에서 지나다가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인연이 생겼다는 건 좋은 일 아닐까.

“하. 오빠 빠지면 쓸쓸하겠다.”

왠지 달콤하게 느껴지는 속삭임을 들으며 나도 달을 올려다봤다.

둥근 달이 환하다. 그래서인지 쌀쌀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왠지 아쉽네. 3개월 동안 함께한 장태원을 지우고 다음을 준비해야 하니까. 그래서일까··· 이 밤이 조금 길었으면 싶다.

“전 이만 갈게요.”

송이경이 쭉 뻗은 검지를 내밀어 주차장을 가리킨다.

어둑어둑, 푸르스름한 밤기운을 뚫고 강 실장이 차를 몰고 온다. 아마 뒤에는 긴장한 신입들이 닭장 속의 병든 닭마냥 앉아 있겠지. 훗. 진짜 끝났구나. 내 세 번째 드라마 촬영.

**

「2001년 4월 2일 월요일」

“하.”

최재환이 통화를 끝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원장님이 뭐래?”

이번에 샵을 삼성동 N 샵으로 바꿨는데, 솜솜 원장이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설마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긴 뭐래. 저주를 퍼붓고 있는데.”

“훗.”

피식 한번 웃고 매장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샹들리에 빛이 내려와 전시된 옷들을 고급 그 이상으로 만들고 있다.

“뭐해?”

감색 재킷 하나를 꺼내 최재환의 목 언저리에 살짝 가져갔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린다.

“가만있어봐. 괜찮네.”

제법 잘 어울리는데, 최재환이 손을 휘저어 재킷을 밀어내고 말했다.

“제작 발표회는 크랭크인 들어가기 한 주 전에 일본에서 할거래.”

“그럼 한 달 남짓 남은 거야?”

“글쎄다. 또 어떻게 될지.”

반추에 처음 캐스팅됐을 때, 우린 무척 기뻤었다.

하지만 지금의 최재환은 탐탁지 않은 얼굴이다.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형 이거 한번 입어봐라.”

“됐다고.”

입어보라면 입어보는 거지 말이 많다. 근데 치수가 좀 작아 보여서 매장 직원을 돌아봤다. 곱게 묶어 올린 머리에 진주 귀걸이가 눈에 띄는 여직원이다.

“이거 한 치수 큰 거 없나요?”

“아, 저희가 시현 씨한테만 지원하는 거라서. 다른 분 것은 좀······.”

여직원이 곤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눈을 보니 이미 많이 당한 모양인데.

“이건 제가 계산할 거예요. 제 매니저 선물하려고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괜찮아요. 그럴 수 있어요.”

나는 살짝 찌푸려 있던 미소를 가로저었다. 여직원이 치수를 알아보겠다며 물러나자 최재환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임마 아무 데서나 끼 좀 부리지 마.”

뭐야. 언제는 끼 좀 실컷 부리라더니만.

“아린아. 나 억울해.”

“전 중립이에요.”

“아니거든. 너 내 편이거든.”

서아린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흔드는 나를 최재환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본다. 그러더니 콧바람 한번 내쉬고 혼잣말을 중얼중얼.

“참내. 니가 할리우드라니.”

스텝이 끝났다. 그리고 내 다음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다.

[반추(反芻)]

그 작품을 위해 긴 시간을 준비해왔다. 우리 오빠를 촬영하면서도, 스텝을 촬영하면서도 시나리오를 놓지 않았다. 그래, 지금 나는 언제든 반추의 김은재가 될 준비가 돼 있다.

“이제부터는 휴식기 들어간다.”

최재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충분히 논의했던 얘기니까. 차 대표는 탐탁지 않은 얘기지만 그래도 그동안 회사가 원하는 대로 활동을 충실히 해왔다. 사실 쉬지도 않고 연달아 드라마 촬영을 했으면 진짜 열심히 한 거지. 그것도 별의별 스케줄을 다 소화하면서.

“대본도, 시나리오도 선별 안 할 거고.”

회사에는 여기저기서 보내온 대본, 시나리오, 콘티가 한가득하다.

매주 기콘부에서는 그중에서 좋은 작품을 배우들에게 선별해서 보여주는데, 나 역시도 그동안 꾸준히 받아봤다. 좋은 작품에 대한 열망은 모든 배우가 가지고 있으니까.

“아니.”

“응?”

여직원이 한 치수 큰 옷을 가져왔는데, 최재환이 받아들다 말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좋은 대본 있으면 봐야지. 하지 못하더라도··· 아니, 할 수 있으면 해야지.”

일정이, 스케줄이 빡빡하다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인기란 언젠가 마르지만 좋은 작품은 영원히 남는 법이다. 그러니 좋은 작품이 있다면 스케줄은 그때 봐서.

“형. 구두도 한번 신어봐라. 잘 어울리겠다.”

**

「KIS 드라마국」

“그래서, 스텝 어떻게 할 거야?”

-아직 촬영도 안 끝났습니다.

차 대표의 목소리는 여유가 붙어있다. 그래서 늘 듣기 찜찜한 목소리고, 이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괜히 안달이 나는 황 국장이다.

“거의 끝났잖아. 이시현은 이미 촬영 마쳤다며?”

-급할 거 뭐 있습니까. 천천히 가죠.

“우리 줘라.”

황 국장은 터놓고 얘기했다. 빙글빙글 돌려 찌르다가 놓치는 건 딱 질색이니까.

“SBC에서 편성료 15프로 잡았다며? 우리도 딱 그 정도 선에서 손잡자.”

-하하, 국장님도 참. 우리가 그거 깎자고 이럽니까. 아직 촬영도 남았겠다, 괜히 성급하게 일정 잡다가 다 된 밥 뜸하나 제대로 못 들여서 설익어 내보낼까 봐 그러지.

“말은. 그 정도면 완성도 충분하구만.”

-하하.

웃기만 하지.

“그럼, 이시현 이제 뭐 해?”

-슬슬 차기작 준비해야죠.

“가경 작가 차기작이라는 거?”

-폭넓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쉬게 하면서 구상해야죠.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예능은 아예 생각 없는 거야?”

-예.

단호한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마침 유가희 작가가 노크와 함께 국장실에 들어왔다.

“유 작가 왔어?”

국장실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에 황 국장은 미소를 들고 일어났다. 반가움이 가득 새겨진 눈주름을 가지고,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유 작가와 소파에 마주 앉아 물었다.

“그래. 대본은 완고 됐고?”

“예.”

“수고했어. 손목도 안 좋다면서. 내가 이 은혜 톡톡히 갚을게.”

“말만 하지 마시고요, 이거 끝나면 저 다음 편성은 언제 잡아주실 거예요?”

“우리야 유 작가 준비되면 바로 잡는 거지.”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씀하세요. 다른 작가들한테도 그렇게 얘기하시면서··· 그리고 지금 우리 땜빵 들어가는 거요, 실은 스텝 집어넣으려고 간 보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 말에 황 국장은 눈을 부릅뜨고 펄쩍 뛰었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우리 아직 스텝 잡지도 못했어.”

“잡으면 그렇게 하시게요?”

정곡을 찌르는 시선에 황 국장은 괜스레 시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강 피디 이 새끼 왜 안 와.”

“국장님.”

유 작가가 아이 달래듯 속삭여 부르고 눈을 기울인다. 그 찜찜한 시선에 황 국장은 입술 한번 빨아들이고 물었다.

“왜?”

“주연 배우 말인데.”

“뭐 생각해둔 애 있어?”

땜방 드라마 특성상 캐스팅이 쉽지가 않다.

급 있는 배우들이야 굳이 할 이유도 없고.

“이유 없이 사람들을 죽인 꽃미남 살인자. 그 살인자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변호사의 노력.”

황 국장이 담배를 물며 중얼거리는데, 유 작가의 목소리가 불쑥 들어왔다.

“이시현한테 한번 제안해보려고요.”

“뭐?”

황 국장이 놀라서 눈을 찌푸린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할걸.”

담뱃불을 붙이고.

“걔가 지금 뭐가 아쉬워서 그걸 해?”

“한번 대본은 보여보려고요.”

“에이.”

물론 하면 좋겠지만, 이시현이 할 이유가 없다.

“괜히 진 빼지 말고, 우리 적당히 하자. 정 그러면 성지훈 어때?”

“성지훈이요?”

“걔도 이번에 스텝 촬영했잖아. 분량이 적어서 애저녁에 촬영 끝났다는데, 음반 활동도 접었으니까 시간 될 거야.”

“아니요. 전 이시현이 했으면 좋겠어요.”

“아이고 또 고집은.”

유 작가가 한번 깐깐하게 굴면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난감해서 담배 연기만 빨아들이는데, 뒤이어 강 피디가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황 국장은 유 작가의 생각을 얘기했다. 그런데.

“그거 이미 캐스팅 끝났는데? 유 작가님이 그랬잖아요, 아무나 괜찮은 애 있으면 빨리 잡자고.”

유 작가가 눈만 깜빡인다.

“이미 지에스랑도 얘기 끝났어요. ”

“지에스?”

황 국장이 담배를 비벼끄다 말고 눈을 치켜떴다. 지에스라면.

“너 설마 이시현 잡았어?”

“아니요. 이시현 말고.”

“그럼 누구?”

“그게······.”

동그랗게 뜬 눈동자들.

강 피디는 그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머뭇거렸다.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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