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50화 (150/227)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1) >

「경기도 일산. 2001년 3월 30일 금요일」

초록이 삐죽삐죽 솟아난 비탈길, 그 길을 신나게 달리는 자동차 한 대.

“후! 이제 여름이다, 여름.”

비포장길을 달리느라 차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흔들리는 차를 운전하면서 강 실장은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룸미러를 힐끗 쳐다봤다.

“니들 겨우 이거 가지고 죽을상이야?”

뒷좌석에선 신입 매니저 두 놈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천장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아닙니다! 욱!”

대답은 우렁찬데 속이 울렁이는지 바로 헛구역질이다.

씨익 웃은 강 실장이 액셀을 힘껏 밟자, 차가 튕겨 나가며 신입들이 엉덩이를 크게 들썩거렸다.

“신입1 오늘 이시현 스케줄 뭐야.”

“오늘 시현 씨 ‘스텝’ 마지막 촬영 있습니다!”

은테 안경이 기세 좋게 외쳤지만, 돌아온 건 강 실장의 찌푸린 미간.

“그거야 나도 알지! 우리 지금 산에 왜 올라가는데?”

“죄송합니다!”

“신입2 오늘 촬영 씬 뭐야?”

이번에는 뿔테 안경이 침을 크게 삼키고 대답했다.

“오늘 촬영 씬은 장태원이 챔피언이 되고 1년 뒤의 에필로그입니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장태원과 권여름.

두 사람은 오해와 원망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를 평범한 일상에서 치유한다. 1년 뒤, 장태원은 윤시진의 무덤을 찾아 그 앞에서 담담하게 고백한다. 권여름이 좋다고. 이제 니 눈치 안 본다고. 고백하러 갈 거라고.

“··· 그렇게 뒤돌아선 장태원이 깜짝 놀라고, 권여름의 미소를 마주하면서 끝납니다!”

“옳지! 아주 맘에 들어.”

강 실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운전대를 두드린다. 그러자 차가 또 휘청. 연거푸 헛구역질을 들썩이는 신입들을 보면서 강 실장이 낄낄거리며 속력을 높였다.

“다 왔어 이놈들아!”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곳곳에 늘어선 차들이 보인다. 장비 차량과 스태프들 차량이 흩어진 주사위처럼 여기저기 주차돼 있는데, 강 실장은 하얀색 밴 옆에 차를 주차했다.

“내리자!”

엉거주춤 내린 신입들을 강 실장이 눈초리를 흔들며 훑어봤다.

“야 니들은 다른 옷 없어? 청바지가 유니폼이냐? 넌 또 왜 구두야?”

행동도 굼뜨고, 자세도 흐느적거리고, 눈들은 또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는지.

“어휴. 최재환처럼 단단한 놈 하나 안 들어오네.”

강 실장이 한숨 한번 푹 내쉬고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스태프들에게 인사도 하고, 손도 흔들고, 여유롭게 움직이면서 신입들을 돌아본다.

“니들 어제 욱이 따라다녔지?”

“예.”

은테 안경이 냉큼 대답했다.

“그럼 슬기 봤을 텐데, 소감이 어땠어?”

“너무 예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알았습니다.”

두 놈 다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뭐 배웠어? 아무거나 얘기해봐.”

“소속 아티스트에게 존칭 쓰라고 하셨습니다. 눈앞에 없어도 이, 야, 너, 절대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

강 실장이 피식 한번 웃다가 걸음을 멈췄다.

올라오는 길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던 것과 달리 강 실장이 멈춰선 곳은 정적이었다. 그 말인즉, 촬영 직전이라는 얘기.

“우와.”

신입들이 최 감독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시현을 보고 넋 나간 얼굴이다.

“우와!”

그러더니 또 그 옆을 보고는 눈이 배로 커졌다.

스타일리스트가 송이경의 머리를 만질 때마다 웨이브 섞인 머리카락이 흔들흔들. 눈은 또 어찌나 큰지. 그녀의 환한 미소 따라 신입들도 입꼬리가 상승한다.

“어떠냐. 우리 지에스 C&C 간판들이.”

두 놈 다 말해 무엇하냐는 표정들인데, 송이경을 향해 손을 살짝 치켜들던 강 실장이 멈칫하고 말했다.

“아, 존칭 문제는 서로 친해지면 회사 밖에서는 편하게 해도 돼. 또 그렇다고 회사 밖에서 대표님이랑 같이 있는 데서 반말하는 그런 무개념은 보이지 말고.”

“예!”

시원한 대답 한 번 듣고, 강 실장은 송이경에게 손을 들었다. 그녀가 눈웃음을 보이며 마주 손을 흔들자, 신입들 심장에 무리가 간 모양인데. 이때 슬쩍 다가온 남자.

“왔어?”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놀란 신입들이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스태프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볼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이놈들아 여기가 군대냐.”

그래도 귀여운 신입들 모습에 최재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마침 최 감독이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오고, 반사판과 붐 마이크가 이시현에게 향하자··· 최재환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부터 조용해야 한다.”

“컷.”

최 감독이 손을 파닥거리며 이시현에게 다가갔다. 쉽게 끝날 씬인데, 계속해서 NG 컷이다.

“시현 씨, 여기서 한번 악 질러볼까?”

“악을 질러요?”

이시현이 눈썹을 들썩인다.

“내가 장태원이야! 내가 장태원이라고! 막 이렇게.”

“아··· 그건 좀.”

이시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임 작가가 끼어들었다.

“그래 그거 괜찮겠다.”

“괜찮다고요?”

좀 전보다 이시현 눈이 한층 커졌다. 뭐라도 어필하려는지 입을 살짝 여는데, 송이경이 곁에 와서 손뼉 박수를 짝!

“재밌겠다. 뭔가 힘 있어 보이고.”

셋은 재밌다고 하고, 이시현은 떨떠름한 얼굴이다.

“뭐, 해볼게요.”

“그래. 아니면 자르면 되지. 지금 아니면 언제 찍어.”

다른 배우들은 아직 촬영이 남아 있지만, 이시현은 5월이면 크랭크인에 들어가는 영화를 앞두고 있었기에 촬영 일정을 최대한 조율했다. 그래서 촬영 중 때때로 즉석에서 아이디어가 나오면 바로바로 추가 촬영을 해놓았다. 찍는 게 문제지. 못 찍어 문제는 아니니까.

“좋아. 그럼 해보자고.”

최 감독이 카메라 밖으로 나가고, 임 작가도 대본을 꼭 쥐고 미소를 생긋 보이며 빠져나왔다.

“타이트 샷이죠? 바로 뒤돌아서 소리 지를게요.”

입가에 옅은 주름을 새기고 천천히 무덤에서 등을 돌리는 장태원.

저 멀리 광활한 산을 보면서 두 팔을 높이 치켜든다.

“나 장태원이야! 장태원이라고!”

미소와 눈동자에 햇빛이 찬란하게 물드는 순간.

이시현은 숨을 몰아쉬며 컷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컷소리.

“아이. 진짜.”

결국 고개를 돌렸는데, 최 감독과 스태프들이 웃음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제야 당했다 싶어, 이시현이 콧바람을 들썩인다. 그리고 컷을 외친 감독.

“오케이 컷!”

“수고하셨습니다!”

이시현이 스태프들에게 크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3개월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지에스가 직접 제작하는 드라마라서 이시현의 어깨가 꽤 무거웠던 시간.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우리 오빠’ 촬영 때도 스태프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이번에는 스태프들 집안 대소사까지 알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오빠, 고생하셨어요.”

송이경이 언제 준비했는지 꽃다발을 가져왔다.

그녀뿐일까. 스태프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꽃다발을 안겼다.

“뭐야. 시상식이에요? 다들 왜 이렇게 오버야.”

이시현은 너스레를 떨만큼 많은 꽃다발을 안고 스태프들과 함께 섰다. 눈물 찔끔 흘리는 그를 두고, 최재환이 카메라를 든 채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더니.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김치!”

우렁찬 목소리가 푸른 하늘에 울려 퍼졌다.

**

[좀 전에 이시현이 ‘스텝’ 촬영을 모두 마쳤음을 안내 드립니다.]

그래서 메이킹 영상을 한 보따리 풉니다. 또한 오디오북 MP3 파일도 무료 공개하며, 오늘 현장 사진은 내일 추가로 올립니다. 수포 팬들 그럼 내일···

-수포들 방금 올라온 메이킹 봤어? 오빠하고 송이경 눈빛 장난 아니더라. 꼭 봐라 강추다.

-이미 보고 있다. 게시판 글 올라오는 속도 준 것 보면 모르냐? 다들 이미 눈뽕 맞아서 빈혈 상태.

-대박. 우리 오빠처럼 메이킹 이렇게 한 보따리 올리는 배우 없어. 메이킹 찐 걸로만 이미 드라마 3, 4회는 본 기분.

-키스! 키스! 키스 씬을 내놔라!

-그래도 촬영 끝났다니까 왠지 쓸쓸해.

-그럼 이제 반추 촬영 들어가는 거야? 오빠는 올해도 엄청 바쁘겠다.

-바빠야 해!! 그래야 우리가 더 자주 보지!!

······

“이야.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댓글이 쏟아지네.”

MNC 드라마국 피디들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최 선배 홈런 쳤네. 쳤어.”

“그러게. 회사 생활 못 해먹겠다고 나가더니만, 나가서 첫 연출에 이시현을 잡았어.”

촬영 막바지인 스텝에 관한 피디들의 관심.

MNC를 관두고 나간 최한국 피디의 첫 연출작인 데다가 이시현의 차기작이라서 다들 관심이 보통이 아니다.

사실 ‘스텝’을 두고 방송가에서는 지에스가 무리수를 두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다. 방송국 편성도 없이 바로 제작에 들어가고, 그것도 사전제작, 작가는 무명.

필모그라피에 ‘우리 오빠’라는 드라마 하나가 전부인 이시현만 믿고 가기에는 분명 무리수로 보였다.

우리 오빠는 이시현에게 있어 흔히 말해 인생작이지만, 많은 배우가 그 인생작 때문에 주춤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지금 다들 궁금해하고 있다. 이번에도 될까라는 궁금증.

“아직 몰라. 뚜껑 열어봐야 알지.”

“열긴 뭘 열어봐. 3사 국장들이 가편시사 보고 서로 가져오겠다고 난리인데.”

“우리가 가져와야지. 그래도 우리 식구가 찍은 건데. 정이 있지.”

“야, 정이 어디 있어. 이거 많이 주는 데가 주인이지.”

피디 하나가 동그라미를 흔든다.

“SBC는 편성료 15프로 잡는다고 그랬대.”

“그게 말이 돼? 우리 지난번에 명이 잡을 때 30프로였잖아?”

“사실 뭐 편성료가 문제야. 스타 하나에 좋은 대본, 좋은 연출이면 방송국이야 뭘 해도 남는 장사지.”

“야. 그럼 이제 이시현 데려오려면 돈을 얼마나 줘야 하는 거야?”

“스텝 출연료가 회당 육백이래.”

“지들이 제작하는 거니까 상한가 쳐줬지.”

하지만 그 상한가가 이번 시청률에 따라 앞으로의 기준이 된다.

“그럼 이제 육백 아니면 이시현 못 불러오는 거야?”

피디들의 웃음이 웃음이 아니다. 회당 제작비가 사천만 원이 안 되는데, 거기서 육백을 순전히 주연 한 사람에게 떼줘야 하는 거니까. 조연 출연료까지 빼면 남는 게 없다. 그나마도 배우들 출연료는 해마다 오르고 있고.

“육백 줘도 안 올 거다. 지금 이시현 음료수, 이시현 향수까지 나와서 완판 행진인데, 고작 육백 받고 땀 뻘뻘 흘리며 드라마 찍고 싶겠냐?”

“돈 따라가면 그게 배우야? 좋은 작품 따라가는 게 배우지.”

맞는 얘기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가 않은 법이다.

**

「삼성동 N 샵」

“얘들아. 이따가 누구 오는지 아니?”

파마머리 원장이 구둣발에 요란한 소리를 달고 왔다.

“누가 와요?”

숨죽인 속삭임, 그리고 기대감이 들게 하는 시선을 하고.

“놀라지 마. 지금 가장 핫한 스타가, 샵을 옮기기로 했어. 우리 쪽으로.”

“누군데요?”

모여든 직원들이 눈을 말똥말똥하고 쳐다보자.

원장은 미소를 생긋 그리고 말했다.

“이시현.”

난리난리 이런 난리가 없는데, 안쪽에서 머리를 다듬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휙 돌리고 물었다.

“누구?”

“이시현. 왜, 자기가 작년에 단막극에 캐스팅했다가 뺐다며? 그때 많이 미안했다면서.”

원장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살피며 말했다. 그러더니.

“야, 유 작가는 강아지 과라니까! 눈을 이렇게 만들면 어떻게 하니? 얘가 정말.”

디자이너가 못 미더운지 직접 브러쉬를 챙기는 원장.

“아, 자기 이번에 드라마 땜빵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

KIS 수목극이 4월 중순에 끝나는데, 다음 편성 드라마가 촬영에 난항을 겪고 있다. 그래서 KIS에서 이번에 4부작 땜방 드라마를 결정했고, 또다시 유 작가가 대본을 잡는다.

“그거 주인공이 악역이라서 캐스팅 어렵다며?”

계속된 수다에 유 작가는 턱만 살짝 끄덕이고 말했다.

“맞아. 대본은 참 잘 나왔는데 다들 안 하려고 그래.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도 없고.”

“왜에?”

“캐릭터가, 꽃미남 살인자거든.”

“꽃미남?”

순간 손을 멈춘 원장이 눈만 깜빡거리다가 다시 속삭였다.

“자기 그럼··· 대본 한번 보여줘 봐.”

“누구한테?”

“이시현한테.”

반짝거리는 원장의 눈동자.

그 눈을 잠시 들여다보던 유 작가의 얼굴이 어느새 묘한 미소를 띤 강아지가 됐다.

< 당신이 배우라면 꼭 가져야 하는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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