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8) >
하승진이 나를 노려본다. 잡티 하나 없는 잘생긴 얼굴이 아까울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앉으세요.”
“니가 왜 여기 있어? 선생님은 어디 가고.”
“관장님에게 부탁드렸어요. 자리 좀 만들어 달고.”
“하. 지난번 팬 미팅 때도 그렇고, 후배님이 아주 쥐새끼처럼 왔다 갔다 잘하시네.”
얼마나 대궐 같은 집에 살기에 나만 한 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리에 앉고도 하승진의 찌푸린 미간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그 상태로 고개를 갸웃하고 속삭인다.
“근데 이상하네. 형님이 오늘 너하고 만나기로 했다는 것 같은데.”
“그쪽은 제 매니저가 만나러 갔어요.”
건달은 최재환이 마무리 짓기로 했다. 나는 널 맡고.
“그래?”
하승진이 말꼬리를 올리고 반달 눈썹을 찌푸린다.
때마침 미닫이문이 열리고 여직원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자 찌푸린 눈썹은 바로 제자리를 찾았다.
“저기··· 사인 좀 해주실 수 있나요?”
테이블에 음식 세팅을 마친 여직원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주세요.”
하승진이 바로 사인 하나를 뚝딱 그려서 푸근한 미소를 곁들여 그녀에게 건넸다. 자식 진짜 얄밉네.
“감사합니다!”
사인 두 장 덕에 달뜬 얼굴이 미닫이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승진의 본색이 튀어나왔다.
“하여간 골빈 애들 참 많아.”
대체 저놈한테 팬이란 무슨 의미일까.
하긴, 팬을 우습게 생각하는 스타가 저놈뿐이겠냐만.
“사과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뭐 일단 꾹 다문 미소나마 한번 끄덕였다. 그러자 녀석이 나를 향해 중지를 그럴싸하게 내밀고 입꼬리를 슥.
“좆까.”
참내.
“왜? 또 치게?”
방 안의 조명이 하승진이 눈동자에 내려앉는다.
쯧쯧.
옛말에 눈빛이 맑으면 인성도 밝다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다. 저놈은 눈빛도 가짜, 미소도 가짜, 팬들 앞에서 하는 말도 가짜인 놈이니까.
“그럴 생각 없습니다. 주먹 쓰는 거, 기분 더러운 거예요. 자주 쓰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주 고귀한 분 나셨네. 뭐 그래도 지에스는 좀 비빌 구석이 있는지 알았는데.”
“그러게요. 저도 그럴지 알았는데.”
“그지?”
“그래, 선배 너 말이야.”
내가 툭 말하자, 탕수육을 짚던 녀석이 멈칫.
찌푸려진 녀석의 이마가 마음에 들어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선배가 믿는 게 지금 세 가지죠?”
나는 오른손 엄지부터 중지까지, 손가락 세 개를 내밀어 보였다.
“첫째 선배 회사. 아무리 선배가 거지 같아도, KSH는 그래도 선배 버리기 힘들죠.”
“이건 또 뭐야? 너 지금 연기하냐?”
“둘째 MNC. 사전제작이라는 모험으로 큰돈을 쏟아부었는데, 방송국이 선배 하나 때문에 손해 보고 싶진 않겠지. 근데 그 손실 내가 보전해주면 어떨까?”
나도 깐족거리는 건 제법 체질인 모양이다. 지금 순간 무척 재미가 붙는다. 뭐랄까 숨겨진 재능을 찾은 기분이랄까.
“마지막으로 셋째. 조직폭력배?”
“지금 뭐하자는 거야? 진짜 한번 똥통에 빠지고 싶어?”
하승진이 으르렁거린다. 튀어나온 송곳니가 나를 짓이길 기세인데, 그래서 나도 시계 한번 살피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지금쯤이면 첫 번째는 해결됐겠네. 아니다, 한꺼번에 두 개인가.”
**
“그거 아니라고. 우리가 낸 것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잖아?”
김 대표가 휴대폰을 붙든 채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연신 훔치며, 거친 숨소리를 토하며 직원들 사이를 지나친다.
-대표님, 저희 이미 사실관계 다 확인했어요. 그날 이시현 여의도에서 회식한 것도 확인했고, 거기에 승진 씨 들린 것도 확인했고. 둘 사이에 이상 기류 맴돌았다는 직원 얘기도 이미 땄고.
“아니라니까 그러네!”
잠시 걸음을 멈춘 김 대표는 자신의 사무실을 바라봤다.
덩치 좋은 40대 남성과 호리호리한 50대 남성이 유리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지에스의 박 상무, 또 하나는 지에스의 정 이사.
둘 다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이 마치 목 거두러 온 사신 같다.
-이상한 건, 왜 승진 씨가 거기에 갔냐 이거죠. 근데 또 재밌는 건, 거기에 큐티즈 멤버도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추측하기를···
“알았으니까, 내가 다시 전화할게. 30분만 기다려줘.”
-30분입니다. 전화 안 주시면 바로 인터넷 기사 올리고, 내일자 1면입니다.
기자는 경고성 짙은 목소리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김 대표는 길게 내쉰 숨을 다시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
“나 실장아!”
창가 자리에서 회색 정장을 입은 큐티즈 관리 실장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김 대표가 바로 대표실을 가리키며 안으로 들어가자 그도 뒤따라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지?”
김 대표는 적당히 그린 미소와 함께 지에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눈꼬리를 올려 나 실장을 올려보고 말했다.
“가서, 지은이 데려와.”
“아닙니다. 됐습니다.”
박 상무가 손을 가로젓고 말했다.
“오늘은 김 대표님 의향을 들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 그래. 내가 한 번 더 설득해 볼게.”
김 대표는 턱을 쓸어내리고 말했다. 그러자 박 상무가 넓은 어깨를 가까이 숙여 눈을 기울였는데, 가는 눈꼬리에 한기가 서렸다.
“대표님. 지금 뭔가 오해를 하시나 본데요. KSH의 대처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린 지금 대표님에게 의향을 묻는 겁니다. 하승진을 버릴지, 아니면 계속 안고 계실지.”
“박 상무. 아무리 못나도 우리 배우야.”
김 대표는 ‘우리 배우’를 강조하며 읍소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뿐.
“그래서, 계속 안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안고 간다기보다는, 한 번 더 설득해서 정리할게.”
이마를 잔뜩 기울이고, 김 대표는 재차 부탁했다.
그래도 소속 배우 아닌가.
“후··· 그래. 승진이가 오버하긴 했는데, 사실 그래도 이시현보다는 한참 선배잖아? 굽히고 들어가는 건 좀 그렇잖아.”
“좋아요. 대표님 생각 잘 알겠고, 그럼 우리식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아휴,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지 말자고. 찌라시야 우리가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 아직 기사가 뜬 것도 아니니까, 그런 잡음이야 자연스레 가라앉을 거고.”
뭐라도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박 상무는 말없이 눈만 부릅뜨고 있다. 그래서 김 대표는 떨리는 혀끝으로 입술을 훔치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MNC 생각도 해야지. 그쪽에서도 승진이가 문제 생기면 좋겠어? 사전제작에 돈이 한두 푼 들어갔냐고. 이시현도 언젠가는 MNC 출연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대표님 얘기는 MNC와 껄끄러워지기 싫으면 이쯤 하라 이건가요? 하승진하고 MNC가 그 정도 사이인 줄은 몰랐네.”
박 상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뱉는 족족 토막 냈다. 그래서, 김 대표는 손바닥에 축축이 느껴지는 땀을 쥐고 차분히 다시 얘기를 꺼냈다.
“내 말은, 명이 이제 첫 주 방송했잖아. 그러니까 하는 얘기지.”
“그렇게까지 수를 계산하시는 분이 왜 진즉 막지 못했을까요.”
“어허. 박 상무. 말이 좀 그러네.”
발끈 한 번 했더니 박 상무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라도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 잔뜩 긴장한 김 대표 앞에서, 그가 꺼내 든 건 휴대폰이었다. 그러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김 대표에게 건넸다.
“받아보세요.”
“누군데?”
찜찜함 속에서, 일단 전화를 받은 김 대표는 몇 마디 꺼내지 못하고 마른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통화가 끝나자 김 대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MNC 사장님이 뭐라십니까?”
박 상무가 전화를 도로 받으면서 물었다. 대답 없는 김 대표의 모습에, 내내 침묵을 지키던 정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는다.
“하승진이 전에 VVW에 있었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 대표.
“대표님도 VVW 어떻게 됐는지 보셨을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김 대표가? 미쳤어? 길거리 나앉고 싶대?”
하승진 얼굴에 먹구름이 스민다.
“뭐? 내가, MNC 출연금지라고?”
번개도 쾅쾅 내려치고.
“야 너 지금 회사야? 김 대표 바꿔봐. 어···”
그런데 실컷 떠들던 하승진이, 갑자기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한 얼굴이 됐다.
와우. 지금 순간 내 귀에까지 욕설이 들려온다.
하승진 매니저가 그동안 쌓인 게 얼마나 많았는지 욕이란 욕은, 사투리까지 섞어가며 찰지게 뱉고 통화를 끊었다.
“이 씨X.”
하승진이 열이 오른 얼굴을 구겨가며 끊어진 전화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또 문자 하나가 왔는지 바로 폴더를 젖혀 확인한다.
“계약 해지 문자라도 왔나 봐요?”
그냥 한번 찍어봤는데, 맞은 모양이다.
“너 무슨 짓 한 거야? 김 대표가 나 버리고 살 수가 없는데··· 나 아니면 애들 월급도 못 주는데······.”
“그럼 이제 세 번째 차례네요?”
내 미소에, 하승진이 휴대폰을 다시 보더니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하염없이, 신호만 가는데, 하승진의 눈동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
“전화 받으시죠. 시끄러운데.”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대기 전, 최재환은 남자의 전화벨 소리에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
“이리 중요한 자리에서 전화 받고 그라믄 안되지.”
남자는 생각보다 말쑥한 모습이었다. 말투만 빼면 주먹보다는 머리를 쓰며 살 것같이 점잖은 모습이고, 콧대에 걸친 안경은 심지어 지적으로 보인다.
“뭐 그럼. 여기 있습니다.”
최재환은 커피 한 모금을 냉큼 삼키고 종이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 ‘억’이 들어 있다. 남자는 수표를 꺼내 보더니 콧바람 한번 크게 내쉬고 말했다.
“이건 아닌데. 내가 이거 받자고 한 건 아닌데.”
“이쯤에서 서로 정리하죠.”
최재환은 눈빛 한번 흔들지 않고 말했다.
“이시현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이렇게 큰돈을. 하긴 괜한 구설수로 광고라도 끊기면 그게 더 손해지.”
남자는 천천히 봉투 앞뒷면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잘 아시네요.”
“그래도 아쉽네. 이시현이 얼굴 한번 보나 했더만.”
“매니저가 괜히 매니접니까.”
“말 하나하나 맘에 드네.”
남자가 봉투를 가슴에 챙겨 넣고, 다시 말한다.
“그래도 사과는 제대로 해야 하는 거라. 자리 마련할 테니까, 와서 승진이한테 인사 한 번 하고 끝내자고.”
최재환은 대꾸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 뚫어진 시선에 남자가 만족한 듯 걸걸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라게 처음부터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지. 그쪽도 참 답답하겠어. 배우가 오지랖이 넓어서 말이야.”
“오지랖이 아니라. 착한 겁니다.”
“두 번만 착하면 개고생하겠네. 또 보자고.”
남자가 뒤돌았다.
이때, 그 앞을 낯선 남자들이 막아섰다.
“뭐야?”
당황한 남자가 다시 돌아봤다. 그제야 최재환이 미소를 끌어올리고 눈을 부릅떴다.
“뭐긴 뭐야, 너 잡으러 오셨지.”
**
[끝났다]
최재환에게 온 세 글자 문자가 휴대폰에 떠 있다.
“다 끝났나 보네요.”
하승진이 눈만 깜빡인다. 너무 빨리 상황이 돌아가니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천천히 일어나자, 하승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나를 바라본다.
“자, 잠깐.”
“이제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매니저도 없고, 회사도 없으니까. 그래도 아직 광고 계약 건은 있으니 당분간은 버틸만할 겁니다.”
“··· 그래. 하하! 좋아.”
이건 또 뭔지.
하승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여기까지 하자. 사과받아줄게.”
지금 순간, 이번에는 내가 당황해서 눈만 깜빡였다.
“미안하다고. 내가 좀 오버했어.”
이놈이 정신이 나가버린 걸까. 맛이 간 걸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게 뭐든, 이 면상 더 보고 싶지가 않을 뿐이다.
“진작 멈출 걸, 멈출 수 있었는데··· 그런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야 이시현!”
하승진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래서 한번 쳐다봤더니, 지레 흠칫 놀라서 한발 뒤로 물러나며 나를 노려본다.
“너 이새끼 지금은 니가 이긴 것 같지?”
“예.”
그래 내가 이겼다.
“아니, 아직 안 끝났어.”
“그러시던가.”
하지만 니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내가 이겼다.
**
똑딱.
이우정이 긴 메모 뒤에 볼펜을 내려놓고 수첩을 덮었다.
저 수첩에는 이번 일의 전말이 담겼으며, MNC 드라마 ‘명이’의 종방 이후 적당한 시기를 봐서 공개될 거다.
“관장님이 그날 화장실에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거, 시현 씨는 알고 계셨어요?”
“예.”
“하승진만 몰랐던 거네요. 그래서 관장님 찾아가서 중재 요청했다가 물벼락 맞은 거고.”
어쩐지 아직 안 끝났다고 으름장을 놓더니만, 하승진이 그날 바로 관장을 찾아간 모양이다. 그리고 물벼락을 맞고 쫓겨났다나 뭐라나.
“개인적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우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통 이런 일 나서기도 어렵지만, 사실 수습하기도 어렵거든요. 대게는 잡음이 생길까 봐 적당히 합의하고 끝내는 편인데. 시현 씨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궁금하네요. 회사가 지에스라서?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글쎄.
“전 혼자가 아니니까요. 저를 신뢰하는 기자님이 있고, 대신해서 위험을 감수할 매니저가 있고, 저를 믿어주는 회사가 있으니까요.”
이우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수첩을 덮고 우리를 바라봤다. 나와, 그리고 이지은을.
“지은 씨, 어려웠을 텐데 용기 내서 말해줘서 고마워요.”
“예.”
가방을 챙기고 일어난 이우정이 대기실을 먼저 나가고, 우리는 로비에서 커피 한잔하고 있을 매니저들을 기다렸다.
“지은아.”
“예, 오빠.”
나는 이지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폈다.
“··· 왜요?”
어린 애가 이번 일로 많이 위축된 모습이다. 애써 태연한척하고 있어도, 회사가 흔들리는 걸 목격했고, 찌라시니 깡패니 같은 더러움에 활동도 못 하고 묻힐 뻔했으니까.
“머리 예쁘다.”
큐티즈 콘셉트가 다섯 개의 예쁜 인형이다.
물론 언제까지고 인형일 수는 없겠지만.
“근데 왜 이렇게 안 오냐.”
나가 볼까 싶어서 일어났는데, 이지은이 치맛자락을 흔들며 따라 일어났다.
“앉아있어. 내가 갔다 올게.”
“오빠.”
“응?”
“저······.”
이건 혹시.
“아니야 말하지 마.”
“예?”
“너 고백하려는 거지. 첫 고백이 차이면 평생 기억에 남잖아.”
절대 그건 싫으니까.
그래서 서둘러 뒤돌았는데, 순간 이지은이 내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좋아해요!”
이런···
**
띵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최재환은 한 손에 수첩을,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쥔 채로 내렸다.
“예, 이제 회식 가야지. 나 지금 시현이 픽업하려고 삼성동 왔어요.”
기콘부 성 팀장의 전화였다.
-시현 씨한테 ‘이시현은 내 남자친구’ 줬죠?
“아까 줬어요. 근데 읽었으려나 모르겠네. 아마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을 텐데. 하필 스튜디오에서 섹션 팀한테 걸려가지고 너무 시달렸어.”
-빨리 결정해야 해요. 그래야 작가랑 만나고, 또 교정하고 오디오북 만들려면 시간 없어요.
게릴라 이벤트 2탄은 카페에 연재 중인 인터넷 소설 중 한 작품을 선정해서 오디오북 제작 및 상금을 수여한다. 물론 이시현의 목소리도 들어가고.
“에이, 근데 이건 좀 과한데.”
최재환은 이시현에게 건네주기 전에 잠깐 봤던 ‘이시현은 내 남자친구’ 내용을 떠올렸다.
“술자리에서 여자 하나 때문에 배우들이 자존심 싸움을 하고, 깡패가 나오고, 회사와 방송국이 움직이고, 경찰청장까지?”
-뭐 없는 얘기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여자애 나이가 너무 어리잖아. 이건 아니다.”
최재환은 기가 차서 눈가에 주름을 찌푸려가며 문을 열었다.
-아무튼 회식 잘하고 오세요. 전 토요일이라서 이만 퇴근!
툭 끊어진 휴대폰.
최재환은 성수동 오피스텔에 비하면 대궐 같은 거실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이시현이 넓고 아늑한 침실 대신 소파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시현아. 이제 가야지.”
다가갔는데 아주 곯아떨어져 있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종이뭉치와 스텝 대본이 놓여 있고.
‘아이고.’
바로 깨우기가 안쓰러워서, 그는 종이뭉치를 손에 쥐었다.
[이시현은 내 남자친구]
피식 웃으며 촤르르 폈는데, 주인공과 싸가지 스타가 결판을 짓는 페이지였다.
싸가지 스타가 핀치에 몰린 상황.
다시 한 장 넘기자 이번에는 여주가 주인공에게 고맙다며 고백하는 장면. 하지만 주인공은 그녀를 밀어내고 뒤돌았는데, 여주가 그의 등 뒤에서 허리를 와락 껴안는다.
‘아, 이건 아니다.’
최재환은 신파극 같은 묘사에 혀를 차고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를 눈에 담았다.
“설레는 순간까지가 좋은 거야. 그다음은 그리워서 아프거든. 안녕.”
순간 놀라서, 최재환은 눈을 들고 이시현을 바라봤다. 아주 잠깐 녀석을 살피고 고개를 내젓는다.
“와 자식. 이 낯간지러운 걸 잠꼬대로 하네.”
기가 막혀서 헛숨을 내쉬고 잠시 고민했다.
“저걸 깨워 말아.”
회식이냐, 잠이냐.
꽤 깊은 고민 끝에, 그는 종이뭉치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홀로 집을 빠져나왔다.
<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