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48화 (148/227)

<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7) >

하승진 팬 미팅에 이시현이 왔다. 공지도, 안내도 없었던 상황에 등장했으니 한마디로 서프라이즈였다.

“이시현이 어떻게 여길 왔어?”

“둘이 친분이 있었어?”

“아 그게 뭔 상관이야 일단 찍어!”

기자들은 이게 무슨 상황이냐 싶으면서도 셔터를 눌러댔다.

무대 위에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진다.

모든 걸 갖춘 젊은 스타의 하얀 얼굴에 스며들어, 그의 미소와 눈웃음을 완전무결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박! 이시현 장난 아니다.”

“이햐, 머리 진짜 작다.”

“오빠보다 키가 더 커. 비율 쩐다.”

“와 진짜 잘생겼다. 이시현 팬 카페가 어디더라···.”

하승진 팬들의 웅성거림, 관객석이 들썩거렸다.

아나운서도 넋이 나가 마이크만 만지작거리는데, 그래도 연예부 기자들은 이미 수없이 본 이시현이기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한목소리로 외쳤다.

“시현 씨, 여기 좀 봐주세요!”

“손 한번만 흔들어주세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좀 봐주세요!”

기자들에게는 이시현이 담긴 한 컷, 그리고 여기에 온 이유 한 줄이면 충분하다. 어차피 이시현은 그냥 스쳐 찍어도 화보니까, 일단 많이 찍는 게 남는 거다.

오후 9시 20분.

‘명이’의 첫 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번쩍이는 플래시는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마지막까지 미소를 보이던 이시현이 하승진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찾아와 응원해주신 이시현 씨에게 감사드리며, 이제 하승진 씨의 팬 미팅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무대를 빠져나가는 이시현의 뒷모습을 찍기 위해 카메라 플래시는 멈추지 않았다.

“재밌게들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0분의 짧은 팬 미팅을 마치고 하승진은 손을 흔들며 무대를 내려왔다.

이제 대기실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팬들 몰래 관객석 2층에서 같이 드라마를 감상할 계획인데··· 지금 순간 그의 속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젠장!’

이시현이 무대를 올라왔다가 떠난 뒤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일부 기자는 이시현을 찾아 밖으로 나갔고, 일부 기자들은 데스크에 전화하느라 행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팬들은 또 어떻고.

질문의 반이 이시현과 어떤 사이냐는 거였다.

그 자리에서 별로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빙빙 돌려서 까면 속 좁은 놈밖에 안 되는 거다. 그래도 겨우겨우 질문들에 답은 했는데, 시종일관 똥 밭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속에서는 열이 나는데, 매니저와 스태프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잘생긴 배우, 미소가 멋있는 배우, 대한민국의 스타를 향한 시선들이다.

“형님, 이시현 대기실에 있다는데요?”

대기실을 다 와서 매니저가 속삭였다.

“뭐?”

걸음을 잠시 멈췄지만, 하승진은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대기실 문고리를 붙잡았다.

쾅!

대기실 안에, 이시현이 있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아주 여유롭게 다리까지 꼬고서.

“다들 나가 있어.”

음산한 목소리에 스타일리스트와 매니저가 뒤로 빠져나갔다. 하승진은 문을 잠그고, 이시현에게 다가갔다.

“이 개새끼가.”

**

내가 드라마 준비하는 동안 복싱을 몇 달을 배웠는데.

“하··· 하······.”

아마 하승진의 머리에는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림이 있었을 건데, 그게 자신이 될 줄은 몰랐을 거다.

“하··· 하······.”

나는 천천히 하승진과 눈높이를 맞췄다. 악에 받친 얼굴이 잡아먹을 노려본다.

“선배가 머리에 갓 쓰고 포도청 종사관 노릇 할 때, 저는 링 위에서 숨이 목구멍을 틀어막을 때까지 뛰어다녔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밀도 있는 상황을 원했는데, 뭐 예상은 했다. 지난번에도 주먹부터 휘둘렀으니까. 한번들인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하··· 카메라 앞에서는··· 세상 착한 것처럼 굴더니만··· 이거 아주··· 나랑 맞먹네.”

그래 늘 좋은 사람으로 사는 거,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심하긴 하더라. 근데 지금 한 말은 틀렸다.

“선배랑 맞먹는다고? 아니야. 난 선배보다 더 악당이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

“사람들 밖에 있으니까 바로 본론 들어갈게요.”

“이 새끼··· 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하면 넘어가 줄게요.”

“씨X. 니가 먼저 시작한 거야!”

“그래. 그렇다 쳐요.”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내가 먼저 한 걸 수도 있다.

“그래서 사과할 용의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랬는데, 찌라시는 너무 치사하잖아. 그리고 애들 건드리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싫다고 하면, 더 얘기해봤자 시간 낭비다.

“그래서 멈출 생각 진짜 없어요?”

“너 같으면, 멈추겠냐?”

“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화장대에 놓인 곽티슈를 뽑아 하승진의 수트에 묻어 번들거리는 침을 닦아주며 말했다.

“냉정하게 판단해요. 내가 선배 여자 문제를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아니, 나만 알고 있는 걸까?”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아서, 뒤돌아 대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팔짱을 켠 채로 벽에 기대고 있는 최재환이 보인다.

“끝났냐?”

나는 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주먹을 쓰다듬었다.

**

이시현이 떠나자 하승진은 욱신대는 배를 붙잡고 휴대폰을 붙잡았다. 10분 가까이, 숨을 몰아쉬면서 좀 전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 형님, 그냥 여기서 끝내시는 게······.”

매니저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이새끼가.”

하승진은 서슬 퍼런 눈으로 매니저를 노려봤다. 배가 욱신거리지만 않았으면, 분명 휴대폰을 집어 던졌을 거다.

“넌 뭐가 그렇게 매번 걱정이야?”

질문에, 매니저가 망설이며 살이 부르튼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에스가 힘이 있으니까. 얘네들 오늘 찌라시봤으니까 곧 대응할 거예요. 이러다 괜히 형님한테 안 좋은 일 생길까봐 그러죠.”

하승진은 피식 웃었다. 배가 아픈데도, 입꼬리의 들썩임이 멈추지 않았다.

“야. 어차피 기획사는 방송국 못 이겨. 그리고 MNC는 명이 때문에 나 못 버리고. 이제 방송 시작인데 주연배우가 문제 생기면 좋겠냐? 그런 상황에 지에스가 날 누른다? MNC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너도 아까 봤잖아, 겨우 여기 와서 깜짝 놀래키는 게 전부인 놈들이야. 그리고 소문 좀 나면 어때. 이 바닥은 말이야, 선배하고 감독한테만 안 찍히면 돼.”

하승진의 얼굴이 의기양양했다.

단지 그 모습을 보는 매니저의 얼굴이 그만큼 더 굳어갈 뿐이었다.

**

「2001년 2월 22일 목요일」

눈발이 거세져 촬영을 서둘러 끝내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파라솔 아래서 흩날리는 눈을 보며 커피 한잔과 함께 휴대폰을 귀에 꼭 붙이고 있다.

-학교생활 너무 재밌어요. 근데 지금은 봄방학이라서, 어서 개학했으면 좋겠어요.

그 일 이후 오랜만에 통화인데, 주효정의 목소리가 밝다.

학교에 가고 싶다니 정말 다행이고.

-오빠, 스텝 언제 볼 수 있어요?

“글쎄. 아직 방송국 편성도 안 잡혔어.”

오로지 나라는 이름만 가지고 시작한 드라마다.

물론, 아직은 내가 잘 나가니 편성 문제는 없을 테고.

그럼 어디가 가져가려나. MNC? KIS? SBC?

-오빠··· 많이 바쁘시죠?

“응. 드라마도 촬영해야 하고. 이제 영화도 찍고. 그래서 봄 오면 스타일리스트도 더 뽑을 거야.”

-그렇구나.

눈앞에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주효정이 보이는 것 같다.

“돈 입금 됐지?”

-아, 그거 때문에 전화하신 거예요?

겸사겸사.

-그거··· 엄마가 너무 많이 받은 것 같다고······.

“아니야. 너 그만큼 받을 자격 있어.”

주효정은 스텝 OST 주제가 ‘영웅’을 작사하고, 또 나와 함께 불렀다. 그러니 저작권료 일부는 그녀의 정당한 권리다.

“또 전화할게.”

나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래 기다렸다는 듯, 송이경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심장 놀라게.

“어제 하승진 선배 팬 미팅 들렸다면서요?”

“춥지도 않아? 부츠를 신지 왜 샌들을 신었어.”

나는 샌들 끈에 억눌린 그녀의 발에서 눈을 떼고, 아이라인 꼬리가 살짝 흔들리는 눈을 마주 봤다.

“말 돌리지 말고요.”

“그래. 팬 미팅 들렸어.”

원하는 답을 했는데, 송이경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다.

가는 팔을 쓸어내리며 한숨이다. 하얀 입김이 눈 사이로 퍼진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하승진 선배가 찌라시 출처인 건 알겠는데, 어제 팬 미팅은 왜 갔어요?”

“사과받으러.”

송이경이 속눈썹을 흔들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너 미쳤니?’ 하는 시선이 분명하다.

“그래서 뭐래요?”

“사과 안 한대.”

“후··· 지은이를 회식 자리에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푸르르 입술 한번 떨고 송이경이 다시 말했다.

“다음 스케줄 어디예요?”

“태워 주게?”

피식 웃고 물었더니 송이경이 코끝을 찡긋하고 말했다.

“그럴까요?”

확실히 자기가 예쁜 걸 아는 여자는 자신감이 넘친단 말이야.

“야, 니들 둘이서 무슨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냐?”

마침 관장이 콧잔등을 긁으며 다가왔다.

아주 잠깐, 이 아저씨가 왜 안 오나 생각했는데.

“관장님 흉보고 있었어요.”

나는 차라리 이 양반이 떠들썩하게 해주는 게 좋아서 미소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어쩐지 귀가 간지럽더라니.”

“두 분 얘기 나누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스케줄이 남은 송이경이 작별 인사를 하고 뒤돌았다. 그녀가 뒤돌자 관장이 화를 버럭 낸다.

“이경아 이따가 가! 나 이놈이랑 둘이 있기 싫어!”

“아, 저도 싫어요.”

서로 피식 웃었다.

관장이 담배를 입에 물더니 후, 연기를 뿜으며 얘기를 꺼냈다.

“너 찌라시 뭐냐?”

“들으셨어요?”

“들었지 임마. 사실··· 나 그날 화장실 밖에서 다 들었다.”

“··· 그러셨어요?”

그건 생각지 못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을까. 그날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고, 하승진은 죽어라 으르렁거렸던 것만 기억난다.

“승진이 그놈이 선배들한테는 잘해. 근데, 그거 다 쇼하는 건 줄 내가 모르겠냐.”

삐딱하게 놓인 빨간 의자에 앉은 그가 무릎에 올린 발바닥을 주무른다.

양말 좀 사줘야겠다, 구멍이 송송이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떠올리는데, 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너 이래서 촬영에 집중할 수 있겠냐?

“그러게요.”

관장이 입맛 한번 다시고, 다시 얘기를 꺼냈다.

“오소리 말이야.”

“오소리 선배요?”

뜬금없이 걔가 왜.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관장이 담배를 뻑뻑 물며 속삭였다.

“명이 촬영감독이 내 친구인데, 걔한테 듣자니까, 하승진이 오소리한테 술자리에서 대놓고 고백했대. 퍼마시고 헷또가 돈 거지.”

“그래요?”

하긴. 맨정신으로도 또라이 같은 짓을 하는 놈이니까.

무슨 짓을 못 할까.

“근데, 오소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대.”

“그래요?”

“그래요는 임마. 그거 너라는데.”

“예?”

너무 황당해서, 현기증이 난다. 그리곤 웃어버렸다. 말도 안 되니까. 깊이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얼굴 안 본 지도 꽤 됐다.

“같은 회사에, 잘나가는 배우, 그거 너밖에 없잖아.”

내가 웃기만 하니 관장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하승진이, 그 일 때문에 너한테 대놓고 시비 건 것 같아.”

하승진이 나를 걸고 넘어간 게, 큐티즈가 아니라 오소리 때문이었다는 말.

“훗.”

뜬 소문이다. 만약 오소리가 정말 나한테 마음이 있다면 그걸 얘기했겠는가. 혼자 간직하고 있었겠지. 여배우들이 얼마나 여우인데.

“왜 자꾸 웃어 이새끼.”

그러는 관장도 피식 웃으며 담배를 짓이겨 끈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머니에 두 손 팍 찌르고 말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다. 오케이?”

“예.”

좋은 말씀에 고개 한번 끄덕이는데, 마침 저 멀리서 최재환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온다. 근데 휴대폰을 귀에서 반쯤은 떼고 있다.

상대방이 욕이라도 하나 본데.

전화를 끊은 최재환이 나를 향해 미소와 함께 말했다.

“물었다.”

“물어? 뭘 물어?”

관장이 눈을 쫑긋 세워 우리를 보는데, 그사이 나는 휴대폰을 건네받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고.

“안녕하세요 청장님. 저 이시현입니다.”

만날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엿들은 관장이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청장? 경찰청장?”

“제가 학교폭력근절 홍보대사거든요.”

“아, 얼마 전 그 얘기하는 거지? 학교폭력범 많이 잡았다고 뉴스 나왔던 때.”

정확하다. 그래서 나는 살짝 미소를 끄덕였다.

“근데 경찰청장은 왜?”

“뭐 이번에는 진짜 폭력범을 잡아볼까 해서요. 그래서 미끼 좀 던져놨는데··· 훗.”

“미끼를 던져?”

영문을 모르는 관장의 모습에 최재환도 피식 웃는데, 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속삭인다.

“그러니까, 니가 미끼를 던졌고, 고놈은 그것을 확 물어버렸다?”

“예.”

아주 제대로 물었지.

<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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