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45화 (145/227)

<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4) >

“선배··· 저 싫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약이나 바싹 올릴 생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친절하게도 먼저 시비를 걸어왔으니, 그럼 또 받아주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이 자식 보게. 눈을 왜 그렇게 떠? 눈 안 깔아?”

“깔고 있는 건데. 선배가 저보다 키가 작잖아요.”

“너 지금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지? 그지?”

굳은 얼굴, 싸늘한 시선이 나를 잡아먹을 듯 본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밀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그다음은 주먹으로 툭툭.

“하. 너 이 생활 그만두고 싶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까!”

순간 하승진이 눈을 부릅뜨기에 뒤로 살짝 피했다. 어쭙잖은 주먹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어쭈?”

하승진 눈에 독이 바싹 올랐다. 근데 입은 왜 자꾸 피식피식하는 건지 모르겠네. 혹시 촬영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이 개세······.”

정신 못 차리고 기세 좋게 다가오던 하승진이 멈칫했다.

똑똑.

-니들 안에서 뭐하냐?

체육관 관장 역의 중견배우 백성규 목소리였다.

“이 새끼 운도 좋네.”

누가 운이 좋은지 모르겠는데, 어찌 됐든 하승진은 화장실 문을 열어 환한 얼굴로 관장을 맞이했다.

“니들 안에서 뭐했어?”

“아휴 선생님도 참. 시현이랑 얘기 좀 했죠.”

시현이?

“하여간 요즘 애들 금방 친해져.”

관장은 하승진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 변기 앞에 섰다. 그래서 나도 담담히 미소 한번 보이고 화장실을 나왔는데, 저만치 앞서가던 하승진이 코너 앞에서 멈칫.

그러더니 오른손을 들어 총 쏘는 시늉을 하고 입술을 벙긋한다.

‘빵야?’

허.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네.

분명하다. 저 새끼 약 먹은 거 백 프로다.

“시현아, 빨리 와.”

테이블에 먼저 앉은 하승진이 태연하게 미소 짓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저거 아주 또라이다. 상또라이. 아마 사람들 눈에는 우리 둘이 화장실에서 회포라도 풀고 온 것처럼 보일 테고.

‘나 지금 저 새끼한테 휘둘리는 거야?’

황당하지만 지금은 뭐.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저 자식이 선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하. 매니저님, 시현이 성격 진짜 좋네요.”

하승진이 최재환에게 술병을 기울이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지은을 주시하는 모습이, 내 눈에는 보인단 말이지. 미치겠네.

“시현아 너도 한잔해.”

“제가 먼저 따라드릴게요.”

“그럴래?”

히죽히죽 웃는 하승진과 마주 앉으며, 소주병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바로 따르지 않고 맥주를 손에 집었다.

“형. 나 오늘 선배님이랑 끝까지 가기로 약속했으니까, 말리지 마.”

최재환이 무슨 소리냐는 듯 보는데, 하승진의 송충이 눈썹이 들썩인다.

“좋아. 그러자구.”

처음엔 소주잔, 그다음은 맥주잔, 그리고 밥그릇, 이제는 냉면 그릇이 나왔다.

나는 소주병을 양손에 들고 콸콸 들이부었다.

그런 다음 하승진 앞에 내려놓고, 또 내 앞에도 내려놓고.

“이 자식들 아주 미쳤네.”

관장은 옆에서 혀를 내두르고 있고, 스태프들은 구경꾼이 돼 누가 먼저 포기할지를 두고 내기 중이다.

“와··· 시현이 너 술 좀 마시네.”

“선배님이야말로 대단하신데요.”

남자들 제일 할 짓 없는 게 술 싸움인데, 또 제일 할만한 게 술 싸움이다. 근데 하승진 주량이 제법이다. 이거 밀리게 생겼다.

꿀꺽꿀꺽.

툭 튀어나온 목젖이 내 눈앞에서 쉼 없이 움직인다.

하승진이 기어이 다 마시고 트림을 삼키며 빈 그릇을 내려놓자, 나도 그릇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나는 몇 모금 마시고 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

나를 응원했던 스태프들이 아쉬움에 탄성을 쏟는다. 이 양반들이 진짜 돈 걸었나.

“후··· 제가 졌습니다. 선배님.”

나는 시원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물론 내 패배를 하승진은 못마땅해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풀린 눈동자가 나를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뭐야 싱겁게.”

싱겁기는 임마.

끝까지 달려봐야 내 몸만 망가지는데 미쳤다고 계속 마시냐.

문득, 내 마음의 소리를 녀석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아주 살살 약 올려서 발광하게 만들 텐데 말이다.

“그럼 내가 이겼으니까··· 하.”

하승진이 입술을 쓸어내린다. 숨을 고르는 얼굴이 창백하다.

“좋다. 오늘 술값은 내가 낼게.”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린다. 저런 멋있는 선배가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폼이란 폼은 다 잡는 하승진의 모습에, 나도 엄지를 척 내밀었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하하.”

하승진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나를 슥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화장실로 따라오라는 것 같은데, 지금은 저 녀석을 똥이라고 생각하고 다가가지 않을 거다.

근데. 후.

나도 제법 취기가 올라온다.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머리꼭지가 빙글빙글 돈다.

“왜 미련하게 술 싸움을 해요.”

“응?”

송이경이다. 그녀가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본다. 천장의 은은한 주황 등이 그녀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저 입술. 계속 눈에 띄네.’

정말 이러다가 실수라도 할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내 옆에서··· 얘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놀랄 정도로 딱 붙은 이지은이 살살 웃고 있었다.

“오빠가 일부러 져준 거죠?”

눈치 하나는 좋네.

그래서 나도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하승진이랑 만나지 마. 나중에 정말 후회한다.’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티가 금방 나서 이 험난한 곳을 어떻게 버틸지.

괜히 답답해서 하얀 이마에 살짝 꿀밤을 때려줬다.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니 왠지 정이 가면서도 씁쓸하다.

하. 나 지금 뭐하는 거냐.

나는 입을 헹구려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지금 뭘 하고 있나를 생각했다.

살면서 남자와 여자라는 그 하나의 사실 때문에 이뤄지는 거래, 말썽, 사건을 수없이 많이 봤다. 생각해보면 잊고 싶은 걸 참 많이 본 것 같다.

비디오, 협박, 자살.

하지만 내가 이런다고 이지은의 삶이 달라질까.

확실한 건 이 아이의 현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회사도 그대로일 테고, 하승진이 소속사 선배라는 것도 변하지 않는다.

“왜요?”

빤히 쳐다보는 나 때문에 이지은이 눈을 기울인다. 봄철 새순처럼 아직 덜 익은 미소가 내가 좋다며 들썩인다.

“미안하다.”

“뭐가요?”

순진한 듯, 순진하지 않은 듯한 그녀의 눈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내 목소리에 최재환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한자리 떡 차지하던 그가 일어나자 스태프들이 어디 가냐고 난리다.

“가시게요?”

이지은이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또 보자.”

아쉬워하는 그녀를 두고 최 감독과 임 작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어둡고 좁은 계단을 내려오는데, 최재환이 등 뒤에서 물었다.

“너 화장실에서 무슨 일 있었냐?”

“뭔 일 있는 것 같아?”

웃으며 물었더니 그가 나른한 하품과 함께 말했다.

“너 열 받는 일 있으면, 유독 더 웃잖아.”

“그래?”

“그래. 그건 나하고 똑같아.”

내가 그랬나.

“하승진 저거 소문 안 좋아. 주먹들이랑도 어울린다고 그러고. 하승진이 너한테 뭐라고 했냐?”

“뭐라고 하면 어때. 나야 강 실장님도 있고 형도 있는데.”

그 말을 꺼냈더니, 마치 무거운 닻에 두 발이 묶인 기분이다. 나를 지켜줄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너무 크다. 특히 이곳에서는. 에라 모르겠다.

“잠깐만.”

나는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이지은이 사람들 틈에서 음료수를 홀짝이고 있다. 언뜻 보면 화기애애한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한 외톨이다.

“하승진 선배 어디 있어요?”

매니저에게 물었더니 아직 화장실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배탈이라도 난 모양인데, 잘됐다 싶어서 이지은에게 다가갔다.

“지은아.”

내 그림자에 그녀가 고개를 든다. 눈을 깜빡.

“가자. 데려다줄게.”

**

“개XX.”

차가 움직이기 무섭게 욕이 들리자 매니저는 룸미러를 힐끗 쳐다봤다. 하승진이 휴대폰을 붙든 채 통화버튼을 계속해서 누르고 있었다.

“왜요? 전화 안 받아요?”

“닥치고 운전이나 해!”

어금니를 악문 시선에 매니저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후.”

얼굴을 쓸어내리며 하승진은 입안에 배인 술 냄새를 쏟아냈다. 도저히 화를 가라앉힐 길이 없었다. 이시현 그 새끼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이지은을 데리고 떠났다.

“야.”

다시 불렀더니 매니저가 굼뜨게 고개를 돌렸다.

“대답 안 해 새끼야?”

“예, 형님.”

“후. 이시현 전화번호 좀 알아와.”

“전화번호요? 아까 두 분이 전화번호 교환하신 거 아녜요?”

“넌 애가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

“예?”

“우리가 정말 호형호제하는 것 같디? 그 병신하고 내가!”

화를 버럭 내고. 숨을 쌕쌕 내쉬는 그의 모습에 매니저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알아보겠습니다.”

그제야 하승진은 시트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눈앞이 뱅뱅 돌 정도로 술을 퍼마셔서 속이 들썩이다 못해 뭉개질 것 같았다.

“이새끼가 날 가지고 놀았어? 하.”

카메라 앞에서는 순진한 척, 사람 좋은척하는 놈들이 꼭 이렇게 한 꺼풀 벗겨놓으면 본모습이 나온다.

“그런 싸가지 없는 후배는, 선배가 교육 좀 해줘야지.”

심상치 않은 기세에 다시 룸미러를 살핀 매니저.

하승진이 차창에 비친 자신의 비린 미소를 감상하고 있었다.

**

“어디 가면 인사 꼬박꼬박 하고. 작가님 피디님 말 잘 듣고. 힘들면 잠깐 참았다가 매니저한테 힘들다고 말하고.”

“막히는 거 있으면 저 오빠한테 전화해도 돼요?”

“번호 알려달라고?”

살짝 혀를 빼물고 눈치를 살피는 이지은의 모습에, 나는 최재환에게 대답을 돌렸다.

“형. 알려줘도 돼?”

“알려줘. 애기인데 어때.”

최재환의 대답에 이지은이 어휴, 한숨이다.

“저 내년에 스무 살이에요.”

“아 그랬지. 그럼 알려주지 마.”

최재환이 다시 대답하자 이지은이 정신 사납게 손을 흔든다.

“맞아요! 저 애기 맞아요!”

“어이구.”

큐티즈 숙소 앞에서 차를 세우고, 최재환은 등을 돌려 이지은과 나를 바라봤다. 저 눈을 보니 이지은이 숙소에 들어가고 나면 잔소리가 시작될 듯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묻겠지.

아니면 미쳤냐는 소리부터 나올지도 모르고.

“니가 시현이하고 친해지는 건 좋은데, 그거 때문에 스캔들 터지면 나 가만 안 있을 거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으르렁거린다.

그런 최재환에게 서아린이 훈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애 데리고 뭐하시는 거예요.”

“장난이다 장난.”

최재환이 툴툴거리며 먼저 차에서 내렸다. 드르륵, 문을 열어주자 우수에 찬 눈이 나를 본다.

“줘.”

나는 이지은이 넙죽 내민 휴대폰을 잠시 바라보다가 꾹꾹 번호를 찍었다.

“저녁 6시 이후에는 전화하지 마. 안 받을 거야. 쓸데없는 전화도 안 받을 거고.”

당부하고 휴대폰을 건넸는데, 그녀가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로 받아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하늘을 바라본다.

“눈이다.”

그래서 우리도 하늘을 바라봤다. 진눈깨비가 슬슬 바람을 타고 있다.

“들어가.”

“들어가서 전화할게요!”

“밤에는 전화하지 말라··· 아.”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주먹을 꽉 쥐고 숙소로 달려가던 이지은이 엉덩방아를 찍었다. 아야야, 신음한다.

“저 바보.”

차에서 내려 넘어진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뻗었다.

최재환도 곁에 있으니 지난번처럼 사진 찍힐 걱정은 없을 테고.

“너 걸그룹이 무릎에 상처 남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런 건 혼을 내줘야 한다. 그래야 조심조심하지.

나는 서아린이 준 소독약을 상처에 바르고 밴드를 펴서 조심히 붙였다.

“아프니?”

대답은 없고, 고운 얼굴에 옅은 주름만 잡힌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내 앞에서 아프지 마. 신경 쓰이니까.”

<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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