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2) >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서로에게 웃음을 보이며 철수했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 촬영하느라, 몰려든 구경꾼들과 팬들 막아서느라 다들 고생한 촬영이었다.
“아, 배고프다. 진 다 빠졌어.”
송이경도 일행과 함께 한강 바람에 정신없이 흩날리는 머리를 붙들고 걸음을 서둘렀다.
회사에 들려 광고주 미팅을 하고, 인터뷰와 화보촬영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만큼 한시도 쉴 틈이 없다. 그래서 한숨 속에 차에 올라타는데, 이시현이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이경아 수고했어!”
“어, 오빠도요!”
촬영이 본격적으로 들어가고는 서로 말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인사하고, 자주 대화한다.
한번 사람을 믿으면 쉽게 인연을 놓지 않는 편이긴 해도 이렇게 빨리 타인과 말을 섞은 적은 그녀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 때문인가.’
검지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차에 오른 송이경은 검은 차창 너머로 이시현을 바라봤다.
최재환 팀장과 함께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여름 어느 날 운동장에 서 있는 소년의 웃음을 보고 있는 것처럼 따뜻하고 환하다.
가이드라인 너머의 팬들 앞에서도 이시현은 스타일리스트의 팔에 엉겨 붙어있었다.
그건 마치 ‘추워?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이경아, 밥 뭐 먹을까? 회사에 가기 전에 뭐 좀 먹고 가자.”
송이경은 차창에서 시선을 떼고 운전석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잠시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바나나우유가 마시고 싶네.”
“바나나우유? 너 딸기우유밖에 안 마시잖아? 웬 바나나.”
강 실장이 이마를 접고 물었지만, 송이경은 미소만 살포시 꺼냈다. 그런데 진한 키스 씬 탓인지 입술이 얼얼해서 미소 끝이 떨린다.
‘바나나우유 맛이 나는 입술이란 말이지.’
그리고 부드러웠다는 사실.
송이경이 아주 잠깐 그 부드러움을 떠올리는데, 엔진이 헛도는 소리가 들렸다.
“왜요?”
“아 이런.”
**
“광고주 만났다가 저녁에 스텝팀 회식 참석할 거예요.”
최재환이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기콘부와 통화 중이다.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여전히 회사 얘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귀가 쏠린다.
“시현아.”
통화를 끝낸 최재환이 나를 돌아봤다.
“응?”
“오늘 애들 프로필 촬영 있대.”
“연습생들?”
최재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표님이 프로필 다시 찍으라고 했다나 봐. 잘하면 데뷔 초읽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연습생들이 기뻐할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입가에 미소를 새기고 말했다.
“잘됐네.”
“잘될지 말지는 정글에 나가봐야 아는 거지.”
최재환이 차에 시동을 걸며 한숨이다. 그러더니 히터를 틀고 수첩을 펴들기에, 문득 궁금해졌다.
“어디서 찍는데?”
“청담동 스튜디오.”
“흠, 우리 구경하러 갈까?”
최재환이 다시 뒤돌아 나를 본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요리조리 쳐다보더니.
“너 그런 취향이냐?”
“뭐?”
“연습생이나 신인이 니 취향이냐고. 아니 지난번에 큐티즈인가 하는 걸그룹 애들 이름도 알고 있고··· 이상하네 이거.”
요즘 최재환은 나한테 연애 안 하냐는 말을 자주 한다.
물론 지금 상황에 그럴 때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는 내가 연애할 나이니까.
“아니거든?”
“아니면 말고.”
싱겁기는.
“우리 잠깐 들리자. 응원 좀 하게.”
“언제 청담동을 들려. 그 시간에 좀 쉬는 게 낫지.”
너무 바로 거절하니 할 말이 없어서 입맛을 쩝 다셨는데, 왠지 입안에서 딸기 맛이 느껴진다. 방향제를 바꿨나.
“알았어.”
고집 피울 일은 아니니 바로 포기했다. 그저 대본이나 손에 쥐면서 풀죽은 얼굴을 숙였더니 최재환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
이제 출발하려던 참에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차창을 열자 밖에 얼굴을 찌푸린 강 실장이 서 있었다.
“왜?”
“우리 차가 맛이 갔는데?”
“시동 안 걸려?”
“몰라 맛이 갔어. 세루모터만 헛돌아. 일단 보험은 불렀는데, 우리 바로 회사 가봐야 하거든. 광고주 미팅 있는데 시간이 애매해.”
최재환이 잠시 고민한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너 오늘 청담동 가야 할 팔자였나 보다.”
송이경이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갈색빛이 감도는 머리를 펄럭이며 밴에 올라탔다. 뒤이어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인 강 실장이 춥다며 어깨를 부르르 떤다.
“오빠, 저 때문에 스케줄 꼬인 거 아니죠?”
“아니야.”
송이경이 미안하다며 반달 눈썹을 기울이고 나를 본다. 눈동자는 또 어찌나 큰지. 웬만한 남자들은 저 눈을 3초 이상 마주치기 힘들 거다.
뭐 데려다주는 거야 어차피 애들 얼굴 한번 볼 생각이었으니 문제는 아닌데··· 정작 지금 내 문제는 자꾸 송이경의 얼굴에 시선이 간다는 거다.
촬영 중에야 당연히 역에 집중하지만 카메라 불이 꺼지면 현실로 돌아온다.
때로는 공허함, 때로는 외로움 같은. 아무튼 별의별 감정이 밀려드는 이런 상황에서 하필이면 오늘 키스 씬을 촬영한 송이경과 함께 차를 타게 될 줄이야.
나는 그녀를 눈에 담으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예쁜 얼굴을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건 남자의 본능이라서.
‘봄이네. 훗.’
차가 한강을 벗어나자 송이경은 굽이진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기며 대본을 펼쳤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옆모습을 보니 겨울이 무색해진다. 저기에는 꽃이 활짝 피었으니까.
“그때 생각나네.”
뜬금없는 소리에 강 실장이 고개를 돌려 최재환을 쳐다봤다.
“뭐가?”
“예전에 우리도 차 고장 나서 소리 차 얻어탄 적 있거든.”
“그러게. 우리 오소리 선배 차 얻어탔었는데.”
문득 나 역시도 한동안 못 본 오소리의 미소가 떠올라서 내 입가에 그 입꼬리를 새겨봤다. 까무잡잡한 얼굴도 눈에 아른거리고.
“그때 차 얻어 탄 덕에 우리 잘됐는데.”
그 일을 계기로 바이바이 CF를 차지할 수 있었고, 회사와 재계약도 하고, 뮤직비디오도 촬영하면서 승승장구했으니까.
“맞아. 우리가 소리 차 얻어타서 운을 좀 얻었어.”
최재환도 인정한다는 듯 말하자 강 실장이 싱겁다는 투로 중얼거린다.
“소리도 이번에 드라마 잘돼야 할 텐데.”
“뭐 배우들 얼굴이 있으니까 잘되겠지. 하승진 지금 잘 나가잖아.”
“하승진 연기 잘하냐?”
“뭐 그럭저럭하더라.”
매니저들끼리 시답잖은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촬영장 얘기, 배우들 얘기, 회사 얘기···
듣다듣다 차라리 라디오를 틀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꿈틀거리는데, 송이경이 대본에서 눈을 떼더니 나를 본다.
“저기 오빠.”
“응?”
“큐티즈라고 아세요?”
“큐티즈?”
내가 아닌 최재환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팀장님 아세요? 데뷔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지난번에 시현이 음악뱅크 나갔을 때 대기실에 인사 왔더라고. 이경 씨가 걔들 어떻게 알아?”
최재환의 말에 송이경이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저 전에 그 회사였잖아요. 그래서 애들 연습생일 때 제가 가끔 밥 사주고 그랬거든요.”
“아 그래?”
“엊그제 통화했는데, 걔들 그날 음악뱅크에서 오빠 본 뒤로 상사병 걸렸어요.”
큐티즈를 언급하는 송이경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꽤 친한 모양인데 나는 지금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차 안에서 큐티즈하고 하승진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으니까.
‘하승진이··· 큐티즈 애들 다 건드렸었지 아마.’
그 희대의 쓰레기.
‘그러고 보니 오소리 상대역이 하승진이었구나.’
이거 왠지, 찝찝하네.
**
「청담동 스튜디오」
“승진 씨, 이제 드라마 방영 앞두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명이’의 주인공인 하승진이 청담동 스튜디오에서 MNC 섹션텔레비와 인터뷰 중이었다.
작년 KIS 드라마 ‘가을의 추억’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진 배우 하승진은 잠시의 휴식도 없이 바로 MNC 드라마 명이를 촬영했다.
“여름에 촬영하느라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만큼 감회가 새롭네요.”
하승진은 차분한 목소리와 따뜻한 시선으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명이에서 포도청 종사관 역할을 맡으셨는데, 어떤 인물이에요?”
“포도청 종사관 ‘주선’이라는 인물인데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고, 자존감이 강한 친구예요. 그런 주선이 역적의 딸이자 관노비인 명이를 추격하면서 그녀에게 연민, 동정, 그리고 애정을 갖게 되면서 점차 변화하게 되죠.”
적절한 제스처와 함께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하승진.
조각같은 외모에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시선이 더해지자 섹션 피디와 작가는 흡족한 얼굴로 촬영을 지켜봤다.
“소리 씨하고 호흡은 어떠셨어요? 뭐 소문에는 키스 씬 촬영 분위기가 그렇게 좋았다던데?”
리포터의 은은한 미소에 하승진이 크게 웃고 말했다.
“글쎄요. 소리 씨가 워낙 연기 폭이 넓잖아요? 오히려 제가 민폐가 안됐나 모르겠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인터뷰가 끝이 나고, 하승진이 스태프들에게 공손히 인사 뒤 다음 스케줄을 위해서 스튜디오를 먼저 떠났다.
“하승진 진짜 잘생겼네.”
“그러니까 배우지.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빨리 가자.”
섹션 피디가 스태프들 대화에 끼어들어 수다를 잠재웠다.
“근데 여자 문제 안 좋다면서요? 작년에 하나 걸렸다던데?”
“야.”
곧장 섹션 피디의 흘긴 시선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입을 다문 메인 작가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세 명의 여자를 가리켰다.
“쟤들 지에스 연습생이래요.”
“그래?”
하승진 인터뷰 내내 스튜디오 한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카메라 앞 호리존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찍어갈까요?”
“우리가 무슨 자선사업가야? 쟤들을 왜 찍어.”
섹션 피디가 볼멘소리와 함께 작가를 쏘아붙였다.
“왜요? 쟤들 설 특집 방송에 나왔던 애들이에요.”
“뭐?”
잠시 이마를 구겼지만, 섹션 피디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굳이 나서서 홍보해줄 필요가 뭐가 있어.”
“그래도 혹시 알아요? 이시현도 올지?”
“너 미쳤지? 얘들이 요즘 계속 이시현 얘기야. 그런다고 걔가 니꺼 돼? 빨리 철수해. 여기 스탭들도 일해야지.”
째진 눈을 흘기며 섹션 피디가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입술이 댓바람 나온 메인 작가가 리포터를 보며 콧바람을 킁 내쉬며 말했다.
“상상도 못하나.”
“그러니까 말이야. 상상이야 자유지.”
물론 그 상상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그녀들.
“에휴. 그것 좀 서 있었다고 다리가 아프네.”
제 다리를 툭툭 두드리는 메인 작가의 모습에 리포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작가님은 이시현이 다리 주물러 주면 피로가 싹 녹을 텐데.”
“에이.”
달콤하고 즐거운 상상. 그녀들이 몸을 부르르 떠는데, 올라간 지 5분도 안 지났건만 섹션 피디가 헐레벌떡 다시 내려왔다.
“야!”
“아, 갈 거예요.”
“아니야, 철수 취소!”
“왜요?”
“취소, 취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시현이잖아?”
스튜디오가 웅성거린다. 이시현이라니.
섹션 메인 작가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이시현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최 팀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우리 연습생들 프로필 촬영 있어서요. 섹션은 여기 어쩐 일이에요?”
“하승진 씨 인터뷰 있었거든.”
“하승진? 여기 있어요?”
“갔어요 좀 전에.”
그 말에 최재환이 눈을 찌푸리는데, 마침 다가온 이시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아 시현 씨! 잘 지냈어요? 너무 반갑다!”
좀 전만 해도 이시현 어쩌고 하던 섹션 피디가 그새 이시현 앞에서 함박웃음이다.
“저야 잘 지냈죠. 피디님도 잘 지내셨어요?”
“우리야 뭐. 근데 연습생들 프로필 촬영하는데 시현 씨가 왔어?”
“응원하려고요.”
이시현이 빙긋 웃더니, 넋 나가 있는 사진작가에게 다가가 얼굴 도장을 찍고 연습생들에게 손을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우리, 잠깐만 인터뷰 좀 할까?”
사진작가가 이시현을 신경 쓰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자, 섹션 피디가 최재환 곁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예?”
“근황 인터뷰.”
“에이. 우리 당분간 방송활동 안 한다고 양해 구했잖아요.”
최재환이 턱밑에 주름을 새기고 바로 거절했다.
“양해는 방송국에 구했지 나한테 구했어? 이벤트 얘기나 좀 하자. 요즘 그것 때문에 카페 난리라며? 두 번째 팬은 언제 만나러 가?”
“아휴 피디님.”
“아휴 매니저님! 한 번만!”
어르고 달래며 티격태격하는데, 사진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영 씨, 구두 갈아 신자. 불편해 보인다.”
연습생 중 한 명이 잠시 호리존을 벗어났다. 그런데 꽉 끼는 청바지 덕에 비틀거린다.
“야 누가 의자 좀 가져와 봐.”
“아니요 됐어요.”
정작 정다영은 가만있는데, 지켜보던 이시현이 고개를 가로젓고 다가갔다.
“다영아. 그대로 있어 봐.”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는 정다영의 오른발에서 구두를 벗겼다.
“아······.”
순간 입을 벌린 작가와 리포터가 낮은 신음을 토했다.
이시현이 연습생의 맨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고, 심지어 발까지 털어서 새 구두를 신기는 게 아닌가.
“다영아.”
“예 선배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연습생이 입술을 빨아들였다.
바로 아래 이시현이 미소를 띠고 쳐다보고 있으니까.
“앞으로 이 발이 많이 힘들 거야. 더 움직이고, 많이 서 있고, 많이 걸어야 할 거야. 그래도··· 지금까지의 기다림보다는 덜 힘들 거야. 그러니까 파이팅.”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연습생을 응원하는 이시현.
그 모습을 보며 섹션 피디가 속삭였다.
“나도, 우리 마누라 저렇게 해주면 저런 분위기일까?”
하지만 섹션 피디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아무도 귀담아듣고 있지 않으니까.
<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