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1) >
-KIS 공개홀에 이시현이 떴다고? 드라마에서 여심을 뒤흔든 그가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 그럼 이시현을 보러 출발!
성우의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시작한 VJ 스페셜 방송은 이시현의 음악뱅크 출근길을 함께했다.
“안녕하세요!”
새벽 4시에 삼성동 아파트를 찾은 VJ 스페셜.
여전히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차에 탄 이시현은 비몽사몽 속에서도 카메라를 향해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현 씨, 어제 몇 시에 잔 거예요?”
“몇 시더라. 형 몇 시지?”
“3시.”
“그럼 1시간 자고 일어나신 거예요?”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이시현의 얼굴에는 순한 미소만 둥둥 떠다녔다. 푸르르 입을 풀면서, 물티슈로 눈을 꾹꾹 누르면서 정신 차리려 애쓰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시현 씨, 아침부터 왜 그렇게 즐거우세요?”
입가에 좀처럼 미소가 가라앉질 않은 모습에, VJ가 질문했다.
“기분 좋아서요. 우리 팬들 만나는 날이잖아요.”
“팬이 그렇게 좋아요?”
“싫을 이유가 없잖아요?”
싱긋 눈웃음을 보이는 이시현.
방송국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그는 기다리는 팬들에게 짧은 인사를 하고 음악뱅크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서의 차분한 모습, 리허설에서의 집중한 모습, 슬기와 수다 떠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다.
-드라마면 드라마, 노래면 노래, 그 어디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오늘도 팬들의 입가에 미소가 활짝!!
VJ 카메라는 방송국 앞에 모인 이시현 팬들도 밀착 촬영했다.
“자기소개 좀 해주세요.”
“시현 수포 카페 부회장 조별아라고 합니다!”
“별아 씨, 왜 이시현이 좋아요?”
“음, 시현이 오빠는 거리감이 크게 안 느껴지거든요.”
“왜? 이시현 지금 엄청 스타잖아?”
“그러니까, 음··· 그런 거예요. 단순히 멀리서 볼 때는 와 대단하다 하는 그런 스타인데, 가까이서 보잖아요? 막 뿌듯하고, 막 오빠 같고. 막 그래요.”
팬들은 들뜬 분위기 속에서 추위도 모르고 있었다.
다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VJ 카메라는 이시현의 파격 변신으로 화제가 됐던, 노랑머리로 염색하는 과정도 고스란히 담았다.
팬에게 거짓을 보이고 싶지 않다던 이시현은 힘들게 물들인 머리를 그날 자정에 다시 검게 물들였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서였다.
“시현 씨한테, 팬은 뭐예요?”
VJ 스페셜 마지막 촬영 날, 드라마 촬영장으로 향하는 이시현에게 VJ가 마무리 질문을 건넸다. 무거울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 이시현은 바로 대답했다.
“제 전부요.”
떠나는 VJ 스페셜의 카메라에는 몇 번이나 허리 숙여 작별인사를 하는 이시현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담겼다.
**
“제 전부요··· 아흐! 나 어제 오빠 때문에 밤새웠다니까.”
“방송국 앞에서 팬들한테 가려고 곰 매니저하고 티격태격하는 것 봤어?”
“완전 귀여워!”
교실은 어제 있었던 VJ 스페셜 방송으로 떠들썩했다.
개중에는 그날 음악뱅크를 보러 갔다가 VJ 카메라에 잡힌 친구들도 있었다.
“얘들아 신문 가져왔어!”
교실 문이 열리고, 신문을 손에 쥔 여학생이 들어왔다.
단발머리를 펄럭이며 들어온 여학생은 책상에 둘러앉아서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 틈에 끼어들었다. 그런 다음 펼친 건, 오늘자 세러데이 서울.
신문 1면에 송이경과 함께 있는 이시현 사진이 걸렸다.
“···도미파 레코드사 한희영 대표는 배우 이시현의 앨범 판매량이 빠르게 늘어 현재 백오십만 장을 돌파했으며,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반응이······.”
“아, 송이경 너무 부럽다.”
“이번에도 키스 씬 있다며? 아 미쳐!”
상상만으로도 책상에 펄썩 엎어졌던 여학생이, 다시금 벌떡 일어나 묻는다.
“너 어제 글 몇 개 올렸어?
“열 개.”
“난 스무 개 올렸는데.”
“난 백 개 올리려고 했는데, 어제 카페 터졌잖아.”
최근 수포 카페는 게릴라 이벤트 주인공이 되기 위한 팬들의 몸부림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난리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의 글이 쏟아지는 통에, 며칠 전부터는 카페가 먹통이 될 때가 있다.
“아, 우리 학교에도 한 번 왔으면 좋겠다.”
“그러게. 작년에 라디오 사연 주인공도 찾아갔었다며?”
“그때 난리였대. 야자 하다가 다들 쓰러졌다잖아.”
“아··· 시현 오빠!”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꼭 끌어안으며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간절히 부르는 그 이름. 이시현.
“야, 오늘 유리가 14화 올린대!”
복도에서 들린 누군가의 외침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 진짜?”
요즘 카페에 올라오는 팬픽 중에서 인기 탑3에 들어가는 글이 있다.
근데 작가가 이 학교 학생.
그래서 다들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데, 기분 나쁘면 절필할까 봐서, 다음 화 안 올릴까 봐서, 전개 엉망 될까 봐서, 새드 엔딩으로 끝날까 봐서.
“13화 마지막에 어떻게 됐었지?”
“왜에, 싸가지 스타가 오빠 마음에 안 든다고 시비 걸잖아.”
“맞아맞아.”
인기를 위해서 잘나가는 스타와 전략적으로 사귀고 있는 여주. 그런 어느 날 이시현에게 첫눈에 반해서 상사병에 걸리게 되는데, 이를 알게 된 스타가 자존심이 상해서 이시현과 대립한다는 스토리.
“오늘은 전개 팍팍 나갔으면 좋겠다.”
“오빠가 그냥 주먹으로 싸가지 갈기고, 여주 확 끌어안고 키스하는?”
“야, 오빠 그런 거 안 어울려. ‘우리 오빠’ 못 봤어? 부드럽게 다가가서, 말랑말랑 입술에 살포시··· 쪽!”
또다시 참새 지저귐이 요란하자,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성난 눈빛이 달라붙었다. 학주다.
“내가 학교에서 이시현 언급 금지라고 했어, 안 했어!”
**
「한강 둔치, 드라마 ‘스텝’ 촬영장」
“시현아.”
“예, 관장님.”
체육관 관장 역의 중견배우가 나를 부른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턱은 까칠한 게, 누가 봐도 방금까지 체육관 구석에서 사타구니만 북북 긁던 사람 같다.
아무튼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는 선생님 같은 늙다리 호칭 생략하고 관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그가 눈앞의 파리를 쫓듯 손을 흔들며 한숨이다.
“시현아. 이제 끝났다.”
“뭐가요?”
내가 눈썹을 올리고 묻자, 그가 피시식 김새는 바람을 뱉으며 말했다.
“우리 마누라하고 딸내미, 너한테 완전히 넘어갔다.”
“하하!”
선생님. 이제 넘어갔으면, 오히려 늦은 겁니다.
“이 자식 봐라. 나 지금 되게 심각해. 걔들 나밖에 없다던 여자들이야.”
너스레 섞인 투덜거림에, 옆에 있던 송이경이 혀를 살짝 빼물고 껴들었다.
“관장님, 포기하면 마음 편해요.”
“야, 나도 염색할 거야. 관장이면 염색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임 작가하고 최 감독 꼬드겨서 염색할 거야.”
“아이고 우리 관장님도 참. 염색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이번에는 조연출.
두툼한 점퍼에 지퍼를 턱 끝까지 끌어 올려서 둔해 보이는 그를 흘겨보며, 관장이 턱을 불쑥 내민다.
“그럼 뭐가 문젠데?”
“이게 다르잖아요.”
조연출이 제 얼굴 위에서 손을 파닥파닥 흔든다.
“이 한주먹도 안 되는 새끼가.”
다리를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는 관장 덕분에 송이경이 깔깔 웃는다. 그러더니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나 하늘을 보며 시원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우리 다 같이 사진 한번 찍을래요?”
파란 하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던 관장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난 싫어.”
“그렇지. 비교되니까.”
옆에서 깐족거리는 조연출과 티격태격하고는, 스태프들까지 함께 모여 강 실장이 손에 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활짝 웃고, 김치, 찰칵!
“근데 니도 참 대단하다. 종일 촬영하고 그 몸으로 팬을 만나러 가? 이놈아, 돈이 되는 걸 해.”
관장이 찌푸린 미간에 혀를 내두르며 나를 본다.
“돈이 뭐가 중요한가요. 팬이 중요하지.”
“하하하. 재수 없어. 하하하. 진짜 재수 없어.”
관장의 웃음소리가 크다.
스태프들도 이제는 고개를 흔들며 체념 중. 뭐, 무슨 상관이람. 내가 내 팬들 좋다는데.
“근데, 관장님 스케줄 안가세요? 오늘 관장님 매니저님이 바쁘다고 그러시던데.”
“가긴 어디를 가. 니들 키스 씬인데 내가 미쳤다고 가냐? 그거 보고 가야지.”
관장의 짓궂은 미소에 송이경이 괜스레 입술 한번 빨아들이고 미소를 보인다.
“아, 부럽다. 나도 청춘스타였던 적이 있는데.”
“또또 거짓말하신다.”
조연출은 오늘 아주 날을 잡은 모양이네.
“야, 우리 마누라한테 물어봐! 나 보려고 팬들이 촬영장에 허구한 날 찾아왔었어 임마. 저기 밖에 있는 시현이 팬들? 자식아, 저 정도는 나한테 식전 애피타이저 수준이었어.”
펄펄 뛰는 관장을 보며 조연출이 피식 입꼬리를 올린다.
“에이, 저번에 사모님 고사 때 오셨잖아요? 그때 들으니까 연극판, 독립영화, 드라마를 거치는 동안 선생님 따라다니는 팬을 본 적이 없다던데?”
“그게 바로 여자의 질투야 임마. 질투 때문에 못 본 거지. 하긴, 그때는 나한테 눈이 멀었지.”
둘이 아주 주거니 받거니 하네.
앞에 소주잔이라 놓아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근데, 시현이 이거 키스나 제대로 할 수 있나 모르겠네.”
관장이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 쳐다본다. 허. 이거 왜 이러시는지.
“저 우리 오빠 촬영 때도 키스 씬 있었어요.”
“야, 그게 키스 씬이냐? 뽀뽀지?”
아이고. 도저히 아저씨 말발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서 잠시 피신하려고 일어났다. 그러자 송이경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곱게 묶어 단정한 이마에 갸름하게 다듬은 눈썹이 쫑긋.
“어디 가요?”
“바람 좀 쐬게요. 다음 씬 찍을 생각 하니까, 가슴이 떨려서.”
내 말에 관장이 또 재수 없다고 난리다. 스태프들도 혀를 내두르고.
아, 그래. 나는 이제 모든 남자의 적이지.
걸음을 내디디면서, 나는 최재환이 뭘 하나 주위를 둘러봤다. 누구와 전화를 하는 모습인데, 그래서 서아린은 뭘 하나 봤더니 분장팀과 대화 중. 그럼 다들 한눈팔고 있으니까··· 지금이 기회.
“아, 시현 씨 안 됩니다.”
팬들을 볼 생각으로 걸음을 내디디는데, 이런. 경호실장이 나를 발견하고 제지한다.
부리부리한 눈에 단단한 몸. 외모도 깔끔한 편이라서 요즘 수포 카페에 종종 사진이 올라오는 남자다.
“실장님 잠시만 갔다 올게요.”
나는 경호실장의 눈을 마주했다. 확고한 내 시선에도 그는 표정변화 없이, 턱 끝에 미동도 않고 말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래, 듬직해. 듬직한 건 알겠는데.
“부탁드려요. 잠깐만 보고 올게요. 애들 추운데 여기까지 와서 저 기다리잖아요.”
“안 됩니다.”
경호실장은 바늘로 찔러도 내 앞에서 비키지 않을 모양인가 보다. 내 눈을 보더니 다시금 분명히 말한다.
“안 됩니다.”
이거 너무 듬직한데.
“시현 씨, 이번 건 하이로 가야 한다.”
감독이 쫙 펴든 손을 위로 올린다. 감정을 끌어올리라는 얘기다.
“예!”
촬영에 앞서 반사판을 든 스태프와 붐 마이크가 우리 주위를 에워싸는 동안, 송이경과 나는 다시 한 번 대본을 점검했다.
“감독님, 손찌검부터 들어가죠?”
“어.”
“그럼 여기서, 손찌검······.”
송이경이 감독에게 질문을 하고, 바로 내 얼굴에 살짝 손을 가져왔다가 작은 웃음과 함께 대본을 다시 살폈다.
이번 씬은 권여름과 장태원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이후 급격히 치솟은 갈등이 가라앉은 뒤에는, 빠르게 예전의 사이로,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분기점이 되는 씬인데··· 어찌 됐든 키스 씬이다.
물론 ‘우리 오빠’에서도 키스 씬 촬영을 했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우리 오빠는 애절함 속에서 이뤄진 키스였다면 지금 씬은 허락받지 못한 키스라는 점.
“왜? 너 나한테 미련 있냐. 화가 나서 바로 손찌검.”
송이경이 눈을 깜빡이며 대본 속 내 대사와 자신의 지문을 읽고. 나 역시도.
“뺨을 쓸어내리다가··· 강제로 입맞춤.”
대본의 지문대로 나는 송이경에게 가까이 갔다.
서로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자세에서, 송이경이 발버둥 쳐 나를 밀어내고, 손찌검하려다가 멈칫.
“여기서 내가 좀 확 갈게.”
뭔가 밋밋해서 제안했더니, 송이경이 대본을 스타일리스트에게 맡기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래요?”
“내가 어떻게 할 거냐면.”
“얘기하지 말아요.”
송이경이 고개를 가로젓고 맑은 눈동자에 나를 담아 말했다.
“그냥 바로 해요. 그게 더 살 것 같아.”
하긴. 이 씬 자체가 권여름은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키스를 당하는 씬이니 바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자 들어갑니다. 배우분들 슬레이트 한번 쳐줘요!”
감독의 요구에 송이경이 장난스럽게 두 팔을 올리고 손뼉을 짝 부딪쳤다.
“오케이, 액션!”
**
카메라가 돌아가자 송이경이 이시현의 뺨을 때렸다.
가이드라인 너머에서 숨죽인 팬들이 촬영을 지켜보는데, 순간 파도가 치듯 술렁였다.
“세상에······.”
“미쳤어··· 미쳤어.”
“안돼요······.”
“오빠······.”
카메라가 돈 순간, 이시현은 갑자기 송이경의 머리를 끌어안더니 강제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흡사 진공청소기처럼, 송이경의 작은 입술을, 그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빨아들일 듯이.
그 모습에 경호팀이 긴장하는데, 신기하게도··· 멍한 얼굴의 팬들은 다들 제 입술만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주 집중해서.
< 거칠거나, 아니면 부드럽거나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