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와 나 사이에 (5) >
“너 이거 어떻게 물었어?”
방송국 앞, 삼삼오오 모인 기자들 사이의 화제는 단연 이시현이다.
“2차 가다가 솜솜 근처 지나가는데, 밴이 서 있는 거 아니야. 근데 번호 보니까, 이시현이지 뭐야? 바로 튀어들어 갔지.”
종이컵을 입에 문 곱슬머리 기자가 오늘자 신문을 흔들며 들뜬 목소리를 뽐냈다.
[다시 배우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시현]
신문 1면에 샵에서 머리를 하는 중에 잠든 이시현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얘도 독한 놈이야. 노랗게 물들인 건 둘째치고, 또 그날 바로 다시 염색을 하냐?”
“그거, 내가 오전에 VJ 스페셜팀 만나서 들었는데, 이시현이 팬들한테 가짜 머리 보이고 싶지 않아서 염색한 거래.”
“하긴, 걔가 팬들 유독 챙기지.”
“싹싹하잖아. 성격도 좋고.”
기자들이 실컷 떠드는 중에, 이우정은 대꾸 없이 구겨진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기자, 타이틀 죽이지?”
불쾌지수 높이는 시선과 함께 곱슬머리가 이우정 기자를 향해 생글생글 웃어 보인다.
‘제목 뽑은 것 봐라.’
하지만 잠든 이시현의 모습이 와··· 모성본능을 정신없이 자극한다. 살짝 침 흘리는 모습이 너무 인간적이다 못해 사랑스럽기까지.
‘아니지. 난 기자지. 정신 차리자 이우정! 근데··· 술 처먹다가 건졌다고?’
되는 놈은 뭘 해도 된다더니.
“지에스는 블랙보이에 박한영, 이젠 이시현까지. 연타석 장외홈런이네. SN 잔뜩 긴장하게 생겼어.”
“거긴 지금 분위기 좀 그래. 하이파이브 애들도 재계약할 때 됐고.”
“당분간은 지에스야. 투자도 지금 장난 아니게 끌어오고 있대. 차 대표가 아주 작정하고 움직이나 봐.”
“아휴, 우리 부장은 이시현 거 절대 놓치지 말라고 난리다 난리. 사무실 들어가면 피가 마른다니까.”
“이 기자 너는? 최 팀장이랑 친하다며?”
기자들의 시선이 쏠리자, 신문에서 눈을 뗀 이우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여기자가 곱슬머리에게 턱짓을 하며 핀잔이다.
“이 정도 사진은 얘보다는 니가 찍어야지.”
“아, 난 요즘 바빠서 통 연락을 못 했지. 신인그룹 인터뷰 기사 정리해야지, 주간 특집기사 준비해야지, 이번 달에는 제작발표회 또 왜 이렇게 많아? 어휴, 나와바리 한번 돌면 피를 토한다, 토해.”
이우정이 엄살을 부리며 손사래를 치자, 다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종로 쪽은 길보드 다시 1위더라. 연가는 2위로 내려갔고.”
“100만 장은 확실히 넘을 것 같아. 얼마까지 가려나. 이미현도 그렇고 요즘 배우들 끗발이 장난 아니네.”
기자들은 이시현 앨범이 100만 장을 넘길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사실 발매 시점부터 가요 관계자들은 이시현의 인기를 봤을 때, 못해도 50만 장은 넘길 거로 생각했었다. 물론 50만 장은 진작 넘어섰고.
“그럼, 다들 이시현 라운드 인터뷰 참석할 거지.”
“당연하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일부 기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야, 이시현이 진짜 순식간에 컸다. 벌써 라운드 인터뷰하고.”
“왜에. 이시현 정도만 라운드할만하지. 간담회하자는 말 안 하는 게 어디야.”
“난 솔직히, 간담회하자고 해도 갈 거야.”
“야. 그건 아니지. 존심이 있지.”
“에이, 이시현만큼 단독 인터뷰 받아준 배우가 얼마나 있다고. 갈 때마다 또 잘 챙겨 주고.”
“이새끼는 지에스에서 얼마나 받아먹은 거야.”
낄낄 웃던 기자들이 서둘러 남은 커피를 마신다.
“그럼 다들 수요일에 보자고. 지에스에서.”
**
「삼성동 C&C, 2001년 2월 7일 수요일」
일곱 개 매체, 매체마다 사진기자와 인터뷰 기자 한명 씩, 총 14명의 기자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죄송합니다. 한분한분 제가 직접 찾아봬야 하는데, 요즘 촬영 때문에 스케줄이 밀려서··· 이렇게 모셔서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먼저 기자들에게 두 손 모아 공손히 인사부터 했다.
신인들은 대게 기자들과 일대일 인터뷰다. 그때는 기사 하나가 아쉬울 때니, 기자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서 일대일로 찾아가서 인터뷰한다.
하지만 이렇듯 여러 매체를 모아놓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1시간 정도 하는 라운드 인터뷰를 할 때가 됐다는 건, 그만큼 급이 올랐다는 얘기.
그리고 급이 오르면, 회사에서도 그에 맞게 움직인다.
기자, 방송국, 광고주 등··· 업계의 사람들이 그 급을 인정하게끔 말이다.
“아휴 뭐 어때, 바쁜 거 서로 아는 처지에.”
기자들이 웃으며 수첩과 녹음기를 켰다.
어차피 한번은 거치는 과정. 내가 그만큼 급이 되지 않았다면 불만이 터졌거나 보이콧을 했겠지만, 이들은 인정하고 있었다.
근데··· 이우정 그 독종이 안 보이네.
“세러데이 서울은 안 오셨나 봐요?”
“그러게. 이 기자 왜 안 왔지?”
다들 고개를 갸웃했지만, 바로 인터뷰가 이어졌다.
라운드 인터뷰는 대개 1시간 내로 끊는다.
인터뷰 50분에, 사진촬영 10분 정도로 끝내는 편이라서, 편안하게 대화가 이어졌다.
“시현 씨, 지난주 음악뱅크 반응이 아주 뜨거운데, 염색하고, 바로 그날 저녁에 다시 검은 머리로 염색했어요? 그냥 가발을 써도 되지 않았어요?”
아마 염색 얘기는 한동안 계속 나올 것 같다.
“솔직히 후회 중이에요. 머리 다 망가져서. 후후.”
이제 나도 제법 입꼬리가 말랑말랑해진 모양이다.
호호, 하하, 후후.
기자들 앞에서 콧바람과 애교 섞인 눈웃음이 자유자재로 나온다. 하지만, 비즈니스 아니면 절대 하지 못할 웃음이다.
“홍보부에서 그러던데, 광고주들이 난리라면서요? 염색 한 번 더 하자고.”
“안돼요. 머리 다 망가져요. 지금도 뻗치고 난린데요?”
헤어디자이너는 내 머리 한 올 끊어질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더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눈동자에 옅은 갈색빛을 띤 여기자가 묻는다.
“사실 제가 방송에 나가는 일이 드물잖아요. 그래서 가능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요. 새로운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고.”
“이 정도 반응 예상하셨어요?”
“에이. 그럴 리가요.”
나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물론, 계산이야 끝냈지.
이 얼굴에, 파격 변신인데, 놀라지 않으면 이상하지.
“음반 100만 장 돌파.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음악뱅크 출연 이후 음반 판매량 곡선이 급상승했다. 한마디로 지붕킥을 찍었고. 한희영 대표하고 이영태가 내 볼에 뽀뽀하려는 걸 피하느라 고생 좀 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드라마에, 음반에, 지금 시현 씨 열풍인데. 이삼십대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뽑힌 거 알아요?”
“열풍은요. 드라마야, 다른 제작진, 배우분들이 열심히 한 거고, 음반이야 슬기가 많이 노력해서 된 거고··· 저야 뭐, 그저 얼떨떨하죠.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에이 거짓말. 시현 씨도 본인이 잘생긴 거 알면서.”
기자의 말에 나는 미소만 배시시 짓는다.
그래, 사실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보기 드문 원석, 지에스라는 든든한 배경, 그리고 차 대표의 지원. 그 세 가지가 뒷받침되는데 성공하지 못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
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또 내가 이렇게 잘 적응할 줄은, 그건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슬기 씨와의 호흡은 어때요?”
“슬기가 절 많이 배려해줘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무대 경험이 많으니까요.”
음악과 관련한 가벼운 대화가 오가면서, 기자들의 눈도 점점 진지해졌다.
그들도 나처럼 미소에 비즈니스를 심고, 입에선 달콤한 말을 꺼내지만, 눈빛은 뾰족한 펜촉이 되어 내 안에 숨은 것을 캐려고 한다.
생각해보니, 이거 밀당이네.
“시현 씨는 유독 팬들하고 가까운 편인 것 같아요.”
“예.”
“다른 회사는 신비주의니, 뭐니 해서 팬들하고 거리를 두려고 하는데, 시현 씨는 굳이 그렇게 가까이 가는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저는 팬들이 좋아서요. 그게 단데.”
드라마 촬영하고, 음방 나가는 것보다는 솔직히 팬들하고 수다 떠는 게 재밌다. 아는 얼굴들 자주 보면 더 친근하고. 팬들이 내 외로움도 덜어가 주고.
처음에는 그것도 계산이었을지 몰라도 이젠 아니다.
그리고 사실 최재환 보는 것도 뭐, 맨날 보는 거니까.
스케줄도 바쁜 탓에 회사 사람들하고 얘기할 기회도 적고.
뭐랄까.
나는 배우보다는 직원들에게 친구로 다가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배우와 일반인의 관계가 되는 기분이랄까.
“앞으로도 그렇게 팬들하고 소통하실 건가요?”
“예. 팬들과 저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내 활동의 모든 중심은 팬이다.
팬, 그들만은, 그들에게만은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
이거··· 집착인가.
“그럼, 방송활동을 더 한다는 얘기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건 아니고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송활동은 팬들을 위한 서비스이면서, 잠재적 팬의 발굴과 인지도를 위해서는 필요한 코스다.
하지만 나는 방송활동은 처음부터 크게 고려치 않았다.
배우로서, 극에 집중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팬들을 찾아가려고요.”
“찾아··· 간다고요?”
기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다. 끝에 앉은 곱슬머리 기자가 엉덩이를 들썩인다. 가만 보니, 저놈이다. 나 샵에서 졸고 있을 때 사진 찍고 토낀 놈.
자식이 침 흘리는 건 좀 수정해주지.
“어떻게?”
여기자가 눈을 끔뻑 올린다. 단정한 스타일이다.
지난달에 성 팀장이 데려와서 나와 일대일 단독 인터뷰했던 기자다.
“일종의 이벤트인데요, 이제 보름에 한 명씩, 팬분을 직접 찾아가려고요.”
나는 잡생각을 지우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팬을, 직접 찾아간다고요?”
다들 나를 의하게 본다. 어차피 팬들이 보러오는데 뭘 찾아가냐고 되묻는 기자도 있다.
“지방에서 저를 보러오기 힘든 팬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드문 일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찾아가서 얘기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으려고요.”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방송활동을 겸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각 끝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직접 팬을 찾아가기로.
50분 동안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설 연휴 방송에 나왔던 연습생들 얘기도 했고, 첫 CF였던 바이바이에 대한 얘기도 했다. 바이바이송도 한번 부르고.
이참에 오소리 얘기도 잠깐 했다.
원래 그녀의 CF였다는 얘기에 기자들도 흥미진진한 얼굴.
사진촬영까지 끝내고, 기자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손편지와 수첩, 최신형 녹음기를 선물했다. 물론 선물에 공짜가 어디 있겠나.
“기자님, 제 얘기는 대충 써주셔도 좋으니까요, 저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설 연휴 방송에 나왔던 연습생들 얘기다.
걔들 펑펑 울던 모습이 아직 가슴에 남아서 한 말이었다.
데뷔가 결정된 건 아니지만, 기자들이 푸시해주면 차 대표의 마음이 움직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 시현 씨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요?”
곱슬머리. 내 사진 찍고 토낀 놈. 스카이데일리 기자다.
저놈은 아까부터 뭘 그렇게 물을 게 많은 건지. 오늘 질문 중 4할은 이놈 지분이었다. 입에 아주 모터 달았어.
“예, 말씀하세요.”
“시현 씨에게 염색이란?”
자식, 또 염색 얘기네.
“태지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
[지에스엔터테인먼트 공지]
-오늘부로 이시현은 현재 촬영 중인 드라마 ‘스텝’의 원활한 촬영을 위해서, 모든 방송활동을 중단합니다. 아울러 연기 외적인 일에서도 최소한의 스케줄만 이어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희 지에스엔터테인먼트는 이시현이 팬 여러분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고, 이에 따라 이달부터 보름에 한 명씩, 팬을 직접 찾아가 만나는 게릴라성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금번 이벤트는 1탄으로, 추후 2탄과 3탄으로 이어지는 연속 이벤트임을 안내 드립니다.
-게릴라 이벤트 1탄 상세 안내 드립니다.
한마음 사이트 ‘시현 수호천사들&포에버’ 카페에 한 번이라도 글을 올린 팬(공식 사이트에 등록된 정회원 기준이며, 두 사이트의 닉네임이 일치해야 합니다)중 무작위로 선정해 이시현이 직접 팬을 찾아갑니다.
찾아가는 일시와 장소 등은 미리 연락 드리지 않지만, 가족 혹은 지인과는 사전에 연락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방문을 원치 않으시는 수포 팬이 있다면, 공식 사이트상에 등록된 회원정보의 자기소개란에 ‘게릴라 이벤트 참가 원하지 않음’이라고 적어주시면 됩니다.
항상 이시현을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시현은 언제까지고 여러분의 곁에 있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 이거였구나.”
닉네임 ‘내사랑시현’으로 활동하는 카페 운영 스태프 조다현.
지난번 부회장이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거라고 하더니, 이거였나 싶다.
그녀는 엊그제 올라온 공지를 꼼꼼히 읽은 뒤에야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모니터에는 이시현의 노랑머리 무대 사진과, 지난주 신문에 실렸던 이시현의 졸고 있는 모습이 담긴 바탕화면이 떠 있다.
“으아 내 심장!”
보고 또 봐도, 볼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새겨진다. 특히 저 침. 꿀이 떨어지고 있다.
“후후.”
실실 웃으면서 팔을 쭉 뻗어 올렸다.
“아······.”
부장님이 그녀에게 맡긴 서류가 한 무더기.
복잡한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분류하고 가려면, 한숨부터 나오는데.
“왜 하필 나야.”
야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부장이 오늘은 한 명한테 일감을 몰아주자는 제안을 했다. 그것도 가위바위보를 해서 다른 거 낸 사람이 야근 당첨이라나 뭐라나.
“이놈의 가위! 어휴, 라면이나 먹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아, 연애하고 싶다. 이렇게 야근할 때 남자친구가 도시락 사서 찾아오면 얼마나 좋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달콤한 상상을 하면서, 선반에서 라면을 꺼냈다. 탈탈 털어 라면 수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나무젓가락을 챙겨 자리에 돌아오는데.
“어.”
사무실에, 천사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조다현의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그냥 죽으라는 건지, 살인미소와 함께 이시현이 말했다.
“뭐야, 라면 먹으려고? 에이 내가 도시락 사 왔는데. 훗. 같이 먹을래?”
< 스타와 나 사이에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