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37화 (137/227)

< 스타와 나 사이에 (2) - 수정 >

“왔어?”

녹음실 구석에 이영태 작곡가가 자리를 트고 있다.

육중한 몸에, 춥다고 옷까지 잔뜩 껴입고 있어 소파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는데··· 저러니까 저거 심근경색으로 훅 가지. 저걸 살려 말어.

“왜 활동을 안 하는 거야?”

한 인간을 구제해야 하나 살짝 고민하는 사이에, 다짜고짜 하소연부터 하는 이 여자.

굵은 테 안경, 흰머리가 희끗희끗.

하지만 얼굴은 너무 하얘서 소녀 티가 남은.

레코드사 한희영 대표가 우리가 앉기도 전에 하소연이다.

그녀 정도면 목에 부목을 대고 살아도 좋을 정도의 위치인데도, 허례허식이 없어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물론 나와도 앞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질 테고.

“우리 음반 활동하기로 했잖아? 삼사 음악방송 한번 나오고 땡이구만, 그게 음반 활동이야? 지금 ‘영웅’도 4위야! 알아?”

이제는 나를 등지고 토라진 얼굴이다.

그럴만한 게, 지금 타이틀곡 ‘너라서’가 수록된 음반이 70만 장을 돌파했다. 정규 앨범이라기보다는 싱글 성격이 강해서 크게 기대하진 않았는데, 벌써 70만 장 돌파.

그래서 나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레코드사 입장이나 차 대표 입장은 다른 모양이다. 뭐, 내가 대표여도 그럴 테지만.

“시현아, 왜 안 나가는 거야?”

다시 내게 얼굴을 보인 한희영 대표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울상이다. 볼이 너무 가까워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저 배우예요.”

“이런!”

표정이 확 바뀐 그녀가 나를 때리는 시늉을 한다. 그래서 아파하는 척했더니, 그녀가 깔깔 웃으며 진짜 주먹으로 툭.

하여간 이 여자 손이 장난 아니게 맵단 말이야.

“장난하지 말고!”

“글쎄요.”

물론, 당연히 연기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촬영도 정신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주인공인 내가 딴살림을 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드라마는 나 혼자만의 판이 아니다. 스텝에 출연하는 다른 배우들도 드라마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나 또한 지금은 한창 극에 몰입해야 할 때고.

“차 대표님은 뭐라셔?”

한희영이 이제는 ATTM 한지웅 팀장을 본다.

겨울 찬바람에 입술이 부르튼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주는 음악방송 나갈 겁니다.”

“팀장님?”

듣지 못한 얘기.

그런데 이미 최재환은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

괜한 죄의식이 스며든 옆 모습을 보니 자식이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어쩔 수 없잖아.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뭐라고 그러냐?”

얼씨구 어깨까지 으쓱거리고.

가만 보니 이 자리···

“이야, 나 지금 함정에 빠진 거구나?”

나는 한희영, 한지웅, 이영태, 최재환을 바라보며, 그들 눈동자에 비친 기가 찬 내 얼굴을 감상했다.

특히 최재환 이 자식.

그래도 둘이 있을 때 먼저 얘기하면 좋잖아 임마.

“팬들 봐서라도 나가자.”

한희영이 내 팔을 붙잡고 조른다.

“에휴.”

사실 노래 부르는 순간이 싫은 건 아니다.

좋다. 너무 좋지.

내가 없던 재능을 맘껏 누릴 수 있는데 싫을 리가 없잖은가.

단지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음악방송 한번 출연하려면 종일 다른 일을 못 한다.

아니 못해야 정상인데, 잡힌 스케줄은 또 소화해야 하고. 나를 부려 먹지 못해서 난리다. 그래, 반성한다. 이게 다 업보지 뭐.

“오케이 그럼 나가는 거로 알고. 우리, 이번에 분위기 반등 제대로 한번 하자.”

“저 아직 고개 안 끄덕인 것 같은데?”

“에이 왜 그래.”

그녀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웃는다.

이렇게 된 거 더는 거부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알겠습니다. 단, 효정이는 안돼요.”

나는 오랜만에 주효정을 언급했다.

현재 ‘너라서’는 KIS에서 3주 연속 1위로 골든컵 수상과 함께 차트에서 빠졌는데, 주효정과 함께한 ‘영웅’이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알았어 알았어. 근데 그거 걔한테 안 좋은 거다? 활동만 하면 저작권료 많이 나올 텐데.”

투덜투덜.

그렇게 입이 뾰족 나와 있던 한희영이 이영태를 향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아랫입술을 살짝 문다.

“그럼, 뭐 좋은 수 없어?”

“뭐가요?”

“방송이야 나가는 건데, 반등을 치는 김에 확 올려야 할 거 아니야.”

“편곡하시게요?”

한희영이 생각하는 게 눈에 훤해서, 내가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가 손가락을 딱 부딪치며 나를 향해 환한 치아를 보인다.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이야, 이제 완전 가수네 가수.”

마침 이영태도 깍지낀 손을 하고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차 대표님한테 연락받고 준비했습니다. 너라서 편곡 버전.”

“대표님이요?”

이젠 놀랍지도,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냥 차 대표라는 거.

깜깜한 밤.

겨울에는 해 떨어지는 속도가 점심밥 소화하는 것보다 빠르다. 먹은 것도 없지만.

주차장에 차를 댄 최재환이 괜스레 룸미러를 살피고 있다. 자식··· 나는 일부러 다리를 잔뜩 꼬고 녀석의 뒤통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형.”

“어?”

흠칫 놀란 어깨. 그러더니 뭉그적거리며 뒤돌아본다.

“뭐야? 나한테 왜 얘기 안 했어?”

애초 음반 활동은 1월 중순까지만 하기로 했다.

물론, 행사와 프로모션을 제외한 부분이었고 그마저도 공중파 음악방송에 한 번씩 출연한 게 전부였다. 둘째 주부터는 슬기 혼자서 나가야 했고.

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거 아는데.

3주 연속 1위 가수가 음악방송을 안 하고 있다는 건, 만일 다른 가수가 이러고 있으면 방송국에서 벌써 불만이 터졌을 일이다.

“대표님이 그렇게 하라니까, 이번 주만 너 고생 좀 하자.”

“또?”

나는 일부러 힘든 티를 냈다.

너무 티를 안 냈더니, 요즘 좀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사전 녹화할 거니까, 한 번만 힘내자.”

최재환이 나를 달랜다.

꼭 떼쟁이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이다.

“기분전환한다 생각하자. 너 지금 극에 너무 몰입했어. 눈빛도 사납고. 그러다 팬들한테 눈 흘긴다?”

“아휴. 말은.”

일부러 티 한 번 더 내자, 허리를 틀어 뒤돌아본 그가 내 다리를 툭 치며 말했다.

“잠깐 내리지 말고 있어 봐.”

“왜?”

먼저 내린 그가 차 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근사하게 포즈를 취하고 손을 내민다.

“이제 내리십시오, 톱스타님.”

최재환이 요거.

요즘에는 또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훗.”

나는 콧바람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

겨울밤의 콧바람이 찬바람을 가뿐히 밀어낸다.

**

똑똑.

“으흠.”

부스스 눈을 뜬 이우정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차창 밖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들이닥친 후레쉬 불빛.

“언제 갈 거야?”

차 문을 살짝 열자, 경비 아저씨의 밤눈이 이우정을 비쳤다.

“으흠. 아.”

일단 목부터 풀고.

“이시현 아직 안 왔죠?”

“뭔 소리야? 벌써 도착해서 들어갔구먼.”

“예에?”

놀란 그녀가 헐레벌떡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웬걸.

이시현의 차가 떡하니 주차돼 있는 게 아닌가.

“아이씨.”

괜스레 구둣발로 바닥을 탁 내려치는 그녀에게 경비가 딱하다는 얼굴이다.

“기자도 할만하네. 남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말이야.”

“그러게요. 할만하네요. 그래도 아저씨 자제분은 절대 기자 시키지 마세요.”

“돈은 나와?”

“박봉이에요, 박봉.”

고개를 내젓던 그녀는 문득 다시 고개를 들었다.

차가 있다는 거, 아직 매니저는 아파트에서 안 내려왔다는 얘기 아닌가.

“아저씨.”

“왜?”

경비가 뒷짐을 쥔 채로 밤의 주차장을 눈에 담는다.

“매니저 아직 안 내려왔죠?”

“자고 가지 않나?”

“에이.”

설마하니 그러려나?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시계를 슥 쳐다봤다.

자정을 막 넘기려 하고 있었다.

“모르겠고, 이제 가. 계속 있으면 딱지 붙인다.”

“에이, 제가 아저씨한테 드린 박카스 약발이 있지.”

경비가 껄껄 웃으며 자리를 뜨자, 이우정은 한숨을 내쉬다가 차 문을 잡았다. 그런데.

“어라?”

그녀는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덜컹. 덜컹. 덜컹덜컹!

손잡이에 달라붙어 낑낑거려도 열리지 않는 차 문.

“아 미치겠네. 이 고물차 같으니라고! 아야!”

타이어를 걷어차다가 괜스레 발가락만 삐끗.

그래서 바닥을 내려찍었더니, 굽이 댕강 부러졌다.

“아 제발.”

이시현한테 잘 보이려고 간만에 힐을 신었더니 컨트롤이 안된다. 비틀거리면서, 그녀는 눈만 정신없이 깜빡였다.

“휴대폰도 안에 있는데······.”

되는 게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어?”

문득 고개를 치켜든 이우정은 갑자기 느껴진 차가움에 이마를 쓸어내렸다. 빗방울이 그녀의 둥근 이마를 톡톡 두드린다.

“하나님, 나 좀 내버려둬요.”

원망의 한숨을 하늘에 쏟아부은 이우정이 부러진 굽을 챙겨서 허리를 폈다. 그 사이 빗방울은 하나둘 늘더니 그녀의 머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후······.’

오늘은 왠지 그런 날이다.

되는 거 없고, 짜증 나고, 쓸쓸하고, 버림받은 것 같은 날.

왠지 속도 계속 더부룩한 게 뭔가 얹힌 느낌이다.

투둑, 투둑, 투두둑···

“응?”

실컷 느껴지던 빗방울이 갑자기 뚝 끊겼다.

뭔가 싶어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노란 우산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왠지 그리운 느낌.

순간 이우정은 뒷머리가 바싹 치솟았다.

이 느낌, 이시현이 있을 때만 느껴졌던 건데··· 떨리는 마음으로 뒤돌아선 그녀의 눈에 비친 남자.

“안 가고 뭐 해?”

“아이 아저씨이.”

왠지 억울한 그녀다.

**

「KIS 음악뱅크, 2001년 2월 1일 목요일」

“오늘 이시현 나온다고?”

컴컴한 새벽부터 믹스커피에 맞담배를 태우는 두 남자.

음악뱅크 방혁 피디와 얘기를 나누던 박태 피디가 눈을 끔뻑였다.

“그렇다니까. 그렇게 나오라고 할 때는 안 오더니만 갑자기 나온다고 하잖아. 그래서 부랴부랴 한팀 뺐지 뭐. 그 매니저 울상 돼서 허리 숙이는데··· 아주 진땀뺐다.”

잔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오고 싶어 하는 가수야 많지만, 무대는 좁으니까.

“아. 그래서 저렇게 많았구만.”

음악뱅크 생방송이 있는 날.

이 날이면 팬들은 좋아하는 가수를 보려고 리허설이 있는 새벽부터 신관 공개홀 앞에 줄지어 선다. 어쩐지 오늘은 평소보다 많더니만.

“자식들 본방 시간에나 오지. 쟤들 학교도 안 갔을 거 아니야?”

“학교가 중요해? 좋아하는 가수 한번 제대로 볼 좋은 기회인데. VJ 스페셜 팀도 나왔다더라.”

방혁 피디가 커피를 후루룩 마시면서 멀리 보이는 여자들을 눈에 담는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좋아하는 가수 보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롭긴 하지만, 그거야 남이 보는 시선이고. 아마 저들은 즐거워서 죽을 지경일 거다.

“아이고, 그럼 이따 이시현 얼굴 한번 볼까.”

박태 감독이 거드름을 피우며 커피를 마신다.

그래도 한때 백암산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 아닌가.

하지만 방혁 피디는 콧바람을 킁, 내쉬고 비릿한 미소를 들썩였다.

“야, 지난번에는 촬영 있다고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갔어.”

무대가 끝나면, 가수들은 대기실 복도에 줄지어 서 있다가 피디가 지나가면 단체로 인사를 한다. 이게 관례건만.

“그 썩어빠진 관례는 언제까지 할래?”

“야, 내가 관두면 내 전임들은 뭐가 되냐?”

핀잔으로 대꾸하던 방혁 피디에게 박태 피디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시현이 걔 괜찮잖아?”

“인성이야 좋지. 인사도 잘하고, 허리 잘 숙이더라. 뭐 그 속이야 모르겠지만.”

“착해. 내가 백암산에서 하루이틀 겪었냐? 애가 기본이 충실해. 리허설할 때도 다른 가수들이랑 똑같이 했다며?”

“하긴 그랬어. 요청하면 좀 조정해줄까 했는데, 군말 없이 대기하고 리허설 잘하더라. 뭐, 별 걸레 같은 의상 입고 나와서 사고 치는 여자애들 비하면 걔가 백번은 낫지.”

노출 의상 문제로 지난주에도 방통위에 불려갔던 그였다.

학을 떼던 방혁 피디가 남은 커피를 마시고, 박태 피디에게 물었다.

“넌 이시현하고 연락은 하냐?”

“전화번호 당연히 있지.”

“그거 바뀌었을걸?”

박태 피디가 못 들은 척한다.

“이시현이, 이제 니가 알던 그 이시현 아니야.”

“이 자식 보게. 야, 이시현 누가 키웠는데? 우리 오빠 누가 찍었어? 나야 임마. 이시현, 내 새끼야.”

박태 피디의 엄지에 허영이 잔뜩 실렸다.

웬만하면 이런 말을 안 하지만, 이시현은 다르다.

이시현이 우리 오빠로 뜬 건,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

“임마, 인기는 오르락내리락이야. 지금이야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어도, 나중에는 나하고 호형호제······.”

얘길 꺼내던 박태 감독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줄 알았다. 팬들이 갑자기 난리를 치고, 땅이 들썩인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차, 이시현의 밴이다.

“인기가 오르락내리락? 자크나 올려 임마. 니 바지가 오르락내리락이다.”

방혁 피디가 고개를 내젓는다.

< 스타와 나 사이에 (2) - 수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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