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33화 (133/227)

<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 필요할 때 (3) >

머리는 지끈거리고, 눈은 아프고, 입술은 바싹 마르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눈앞의 녀석을 마주하는 것뿐이다.

“왜 그렇게 쳐다봐. 사람 무안하게.”

저 싹수없는 말투, 무표정한 얼굴, 다듬어지지 않은 스타일.

지금 내 앞에··· 이시현이 있다.

“그러게 조심해야지. 매니저가 교통사고가 뭐야? 쪽팔리게.”

이시현은 둘러맨 가방을 소파에 놓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내, 꼰 다리 위에 척 올리고 나를 쳐다본다.

“아무도 안 왔어? 너무한다 진짜. 아무리 로드라지만··· 3W 애들은?”

못마땅한지 콧잔등을 찌푸리고 계속 묻는 녀석.

“그러길래 적당히 하라니까. 형 같은 타입은 골치 아파. 뭐하나 빠지면 집중하는 타입? 그거 좋은 거 아니야. 정신병이야.”

녀석은 나를 타박하면서 손에 든 걸 넘겼다.

저거 연습용 대본인데··· 목이 메서 말이 안 나온다. 피곤한 모양인지, 녀석은 대본을 잠시 내려놓고 미간 사이를 꾹 누르며 이마를 찌푸렸다.

“너··· 알바하냐?”

내가 말한 건가. 아니면 내 기억의 목소리인가.

“알바는 무슨. 그런 거 안 해.”

자식이 거짓말은.

주방에서 일하는 거 알았으면 내가 작살을 내줬을 텐데.

“그래. 알바같은 거 할 시간에 대본 한 번 더 봐.”

“그러고 있잖아.”

녀석은 대본을 내게 흔들어 보였다. 그걸 보면서, 내 기억은 다시 말하고 있다.

“대본 보는 거 좋지 않냐?”

“별로.”

이시현은 숫기 없는 놈이었다. 겉으로 별거 아닌척하면서도, 나름대로 신경 쓰는 놈이었다. 나보고 성격이 정신병자네 어째네 해도, 녀석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왜? 대본 보는 거 좋잖아?”

처음 연습용 대본을 받았을 때, 복사본을 가져왔냐고 툴툴거리면서 자꾸만 들여다보던 녀석이었다.

대본을 손에 쥔다는 것.

비록 책 한 권일지라도, 어떤 이에게는 인생이다. 손 위에 인생의 무게가 있는데 설레지 않을 리가 없지.

“좋을 때도 있고······.”

언제가 술 한잔 마시면서, 그때 녀석은 그랬다.

대본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안에서 춤추는 것 같다고.

물론 실제로 녀석의 춤 수업은 마이너스였지만.

뻣뻣한 놈이었으니까.

남들이 잘생겼네, 여자가 따르네 어쩌네 그럴지 모르지만··· 내가 본 저놈은 연애고자였다. 나보다도 더. 원래 그럭저럭 생긴 놈들이 연애는 더 잘하는 법이니까.

“나쁠 때도 있고.”

“언제가 나쁜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 아니 저렇게 해보면 어떨까. 너무 튀는 건 아닐까. 어우러지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 들 때.”

“작가한테 물어봐. 그쪽이 왕이야.”

“경험 없는 작가는 덫이라고, 심 선생님이 그러더라. 대본의 완성은 배우가 하는 거라고.”

그래도, 이때는 열심히 했는데.

카메라 울렁증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는 진짜 열심히 했는데.

녀석이 대본을 촤르르 살핀다. 빼곡히 뭔가가 적혀있다.

많은 배우가 손때와 메모로 대본을 괴롭힌다.

그래, 대본의 완성은 배우가 하는 거다.

처음 대본은 작가의 대본이지만, 배우가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곁들여 대본을 채웠을 때, 그건 배우의 대본이다. 그걸 잘 아는 놈이었는데.

“다친 데는?”

녀석은 대본을 보다 말고 툭 던져 물었다. 정작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으면서 말이다.

“없어.”

“나이롱이구만. 합의금 받으면 밥이나 한번 쏴.”

“그래.”

나는 대본에 집중하는 이시현을 바라봤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미소가 떠오를 정도로 행복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원래 우리 사이에 대화는 그다지 없었다. 그저 내가 훈계하거나 가끔 장난을 걸긴 했지만, 나란 놈도 말 없는 건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이건 꿈일까. 아니면 오늘 사고의 후유증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충분히 많이 놀랐던 삶이니까. 그냥 오랜만에 녀석을 볼 수 있어서 나쁘지 않을 뿐이다.

“형.”

“왜?”

“나중에. 나 뜨면··· 아, 웃지 말고.”

“그래 뜨면.”

“그래도 내 매니저 해라. 그럼 소갈비 사줄게.”

잠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가슴이 먹먹해서, 그래서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녀석이 말한다.

“그 미친놈 소리 좀 그만해.”

이시현이 피식 웃는다. 나를 보고.

**

“하하. 우리 선생님들이 어젯밤 시현 씨를 많이 괴롭혔다고 해서, 제가 아주 혼쭐을 내줬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아닙니다. 제가 모두 들어오시라고 했어요.”

흰머리가 수북이 쌓인 병원장이 넉살 좋게 웃었다.

어젯밤 내 병실을 찾은 간호사들과 의사 선생님들을 아주 혼내줬다며 너스레다. 정작 본인도 오자마자 사진 한 방 찍었으면서.

“구토 증세나, 어지럼증··· 밤새 이상한 거 있으셨어요?”

나는 어제 일을 떠올렸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모르겠다. 그저 자고 일어났을 때, 정말 오랜만에 푹 잔 느낌이었다.

“그럼, 퇴원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장의 말에 최재환이 안도한다. 하얀 가운 입은 이들이 병실을 우르르 나가자, 그는 소파에 잠시 앉아서 옷을 입는 나를 바라봤다.

“강 실장하고 아린이는 여기 온다고 하는 거 내가 오지 말라고 그랬다. 대표님은 어제 일본에서 넘어오겠다고 했는데, 내가 괜찮다고 말했고.”

“잘했어.”

나는 씩 웃었다. 그리고 옷을 다 입고 병상 한편에 놓인 대본을 손에 집었다. 그러자 최재환이 미리부터 고개를 내젓는다.

“그만 좀 봐라. 쉬엄쉬엄해야지, 대본만 붙잡는다고 연기가 되는 게 아니야. 사람도 좀 보고, 바람도 쐬고. 그렇게 완성하는 거야.”

“아이고 그놈의 잔소리.”

언제는 딴짓하지 말고 대본 한 번 더 보라더니.

나는 대본을 펼치지 않았다. 그저 보고 쓰다듬을 뿐이다.

인생의 무게는, 어떤 이에게는 너무 무거워서 살이 짓무를 정도인데··· 지금은 또 왜 이리 가벼운지.

“근데, 너 그거 아냐?”

“뭐가?”

돌아봤더니, 최재환은 병실을 눈에 담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 재작년에 여기 입원했었는데. 대표님이 그래도 특실 챙겨줬었잖아. 기억 안 나? 너도 병문안 한번 왔었는데.”

그래 왔었지.

“갑시다.”

“휴··· 그래 가자.”

최재환은 몇 없는 짐을 쇼핑백에 구겨 넣었다. 그런 뒤 나를 향해 선글라스를 툭 내민다.

“자.”

그래서 선글라스를 손에 집어서, 근사하게 착!

“그럼, 이제 뭐 하지?”

오늘 내 스케줄은 빵. 설 연휴 동안 나는 자유.

“형, 오늘 뭐 해?”

“나야 뭐··· 비상대기지”

입사 후 단 한 번도 연휴에 쉰 적 없는 나였다.

더구나 이놈은 팀장에다, 회사 중역들이 모두 일본에 갔으니 서울을 벗어날 수 없는 위치고.

“그럼 형. 우리 바람이나 쐬자.”

“됐어 임마. 남자 둘이서 뭘 하겠다고. 차라리 연습생들 상담을 하겠다.”

휘휘 손을 젓는 최재환. 자식이 가자면 가는 거지.

“가자아, 소갈비 사줄게.”

**

-가긴 어딜 가 임마? 거기 지금 분위기 안 좋아. 니가 뭐라고 거기에 가? 괜히 갔다가 이시현 팬들한테 걸리면 너 죽어! 더구나 오늘 퇴원한다는데.

휴대폰에서 무술 감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래서 장준우는 바싹 마른 입술을 빨아들이고 다시 말했다.

“그래도 가봐야죠. 제가 잘못한 건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니 사과 같은 건 그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아. 그 양반들이 사과한다고 넘어가고 그런 사람들인지 아냐?

“후······.”

하필이면, 사고를 쳐도 그런 대형사고라니.

장준우는 어제 일을 떠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됐어!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무술 감독은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위로 섞인 말을 해줬다.

-근데 말이야··· 너 웬일로 그런 실수를 했냐?

액션 씬은, 수차례 합을 맞추고 당일 리허설까지 거친 뒤에 촬영에 들어간다.

물론 촬영 중 사고야 전혀 없는 일은 아니지만, 여태 실수 한 번 없었건만. 더구나 어린 나이에 일도 열심히 한다고, 평소 무술 감독이 잘 봐주는 편이었다.

“그게······.”

장준우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날 그때.

“생각보다 움직임이 빠르더라고요.”

-뭐?

무술 감독의 목소리가 삐끗거린다.

“이시현이 달려드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저도 모르게 타이밍을 놓쳤어요.”

서로가 타이밍을 짜고 들어간 상황에서 한쪽이 타이밍을 못 맞추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액션.

-내가 그래서 더 신경 쓰라고 그랬잖아! 이시현이 복싱 배우는 동안 연습량이 보통이 아니었다니까. 유별날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하더라. 배우는 속도는 또 오죽 빨라? 내 평생 그런 놈 처음 봤다. 그래서 내가 방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죄송합니다, 감독님.”

-뭐 어쩌겠어. 이미 일 벌여진 거. 지에스에서 너 자르라고 하니 어쩌겠냐. 어휴 이놈아. 이거 좋은 기회였는데··· 내가 이번에 최 감독한테 술을 얼마나 먹였는지 아냐? 한 씬만, 이놈 얼굴도 괜찮은 놈이니까, 한 번만 타이트하게 제대로 잡아달라고. 스턴트맨한테 배역 돌아오는 거 흔한 일 아니잖냐.

“죄송합니다.”

-하루 이틀 구른 놈도 아니면서··· 쯧쯧. 연휴 잘 보내고. 지에스에서 준 한우 맛있더라. 그거 먹고 푹 쉬어.

“예.”

-내가 분명히 말했다. 병원 가지 말라고. 어제 잘 얘기했으니까, 넌 연휴 끝나면 촬영장 한번 들려서 이시현한테 사과해.

“예, 감독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끊어진 전화에 장준우는 한숨을 구름에 흘려보내고 옥상을 내려왔다.

설 연휴, 큰집.

이 두 가지 구색이 맞아서 친척들이 죄다 밥상 앞에 달라붙어 있는데, 엄마는 가스레인지 앞에 붙박이마냥 달라붙어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했어?”

“아, 아니에요.”

장준우는 눈치껏 밥상 앞에 앉았다.

“형, 이거 고기 진짜 맛있다.”

“이거 이시현이 선물해준 거래.”

중학생 친척 여동생이 고기를 금덩이 보듯 하고 있다.

“진짜?”

“준우 오빠 이시현이랑 같이 촬영하고 있잖아.”

“우와!”

다들 숙덕숙덕.

이시현 얘기에 젓가락질도 잠시 멈췄다.

“준우 너, 그 드라마에 잠깐 나온다며?”

수다쟁이 작은어머니가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냥 스파링 씬에서 잠깐······.”

“아이고 우리 형님 이제 신세 피셨네. 지금 이시현 하면 대한민국이 난리잖아. 근데 준우가 이시현하고 TV에 딱, 같이 나오면 그냥 뜨는 거지. 안 그래요?”

꿀꺽.

마른침이 가시처럼 날카롭게 느껴지는 장준우.

“아휴, 잠깐들 비켜봐요.”

엄마가 프라이팬을 가져와서 고기를 접시에 덜었다. 작은어머니의 말이 싫지 않은지 입가에 미소가 스며있다.

“텔레비전에 잠깐 나온다고 성공하면 다 성공하게?”

“맞아요. 그냥 잠깐 스쳐······.”

준우도 얼른 엄마의 말에 맞장구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래도 우리 준우면 그 배우한테 꿀리지 않지.”

쿨럭!

“에이 형님,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그건 아니지.”

다들 깔깔 웃는다.

엄마가 다시 가스레인지로 가기에, 장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 대신 프라이팬을 잡았다.

“엄마는 가서 드세요.”

“너 먹어.”

“아휴, 난 배불러. 아까 라면 먹었잖아. 가서 드셔.”

“됐어.”

엄마는 거실로 가는 대신 설거지를 시작했다.

“고기 많다니까. 저 사람들 다 먹고도 남으니까, 엄마도 가서 입 더해. 이거 빨리 안 먹으면 상해서 오늘 다 먹어야 해.”

일부러 안 드시는 걸 알기에, 장준우는 괜히 투덜거려 말했다.

“니 아버지 올 때까지는 안 상해.”

“아버지 오면 또 사면 되지. 그거 얼마나 한다고.”

“아이고··· 그래, 우리 아들 이제 텔레비전 나오는데 그깟 소고기 못 사겠어.”

엄마의 말 한마디에 가시 돋친 침을 꿀꺽.

고기 파티가 끝나고, 식구들은 또 이시현 얘기다. 친척 여동생들은 아예 TV 앞에 자리 잡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오늘 설 특집방송에 슬기 나온대!”

안경잡이 까칠이 수험생도.

“진짜? 언니, 그럼 이시현도 나와?”

질풍노도 사춘기 중학생도.

“에이, 입원했잖아.”

멋내기에 빠진 초등학생도.

“맞아. 촬영하다 입원했지. 오빠, 누가 그런 거야? 누가 시현 오빠 그렇게 만든 거야?”

“어?”

장준우는 화들짝 놀라서 마른기침을 큼!

“큰 부상 아니야. 오늘 퇴원한대.”

“진짜? 우와, 역시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사람은 뭔가 달라. 이거 기사에도 안 뜬 소식이지?”

엄지를 척 내미는 여동생들.

“아니 뭘··· 그런 거 가지고.”

“오빠 이시현 어때? 착해? 진짜 잘생겼어?”

본격적인 질문이 장준우를 휩쓸고 갔다.

시달림 속에서 본의 아니게 이시현과 죽마고우 수준까지 간 뒤에야, 그는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식히려 구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멈추지 않는 수다들.

“그럼 오늘 슬기 지원 나올 수도 있겠다.”

“그치? 이시현이 3W하고 엄청 친하잖아. 지난번에 번개콘서트에서도 도와주러 나왔고.”

“에이, 수포에 소식 올라온 거 몰라? 스케줄 다 취소됐대. 입원 때문에.”

뜨끔.

“진짜 어떤 새끼가 정말.”

“그놈 아마 되게 나쁜 놈일 거야.”

“쓰레기!”

“정신병자!”

“호로자식!”

졸지에 패륜아가 된 장준우는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대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하··· 신문에 안 나온 게 천만다행이네.’

오늘따라 천장이 왜 이렇게 낮아 보이는지. 뭔가 짓눌리는 기분이랄까.

‘많이 안 다쳤겠지?’

실수한 것보다는 그게 걱정이다. 이시현이 현장에서 보여준 행동들 때문에 더 미안했다.

스턴트맨을 한 명의 동료로 대해주는 배우는 드문데, 이시현이 그 드문 배우 중 한 사람이니까. 볼 때마다 먼저 인사를 해주고, 촬영장 떠날 때도 꼭 한 번 눈 마주쳐주고.

‘그런 사람을··· 아후 내가 죽일 놈이지.’

이제 팬들한테 밟혀도 상관없다고 한탄하면서 밖에서 들리는 TV 소리, 이야기 소리, 전화벨 소리, 우당탕 소리까지.

연휴의 백미와 다름없는 저 북적임에 끼지 못하는 신세가 문득 서러워져서 눈물 한 방울이 귓바퀴에 고였는데.

벌컥!

열린 방문.

누운 채로 얼굴만 살짝 들었더니, 여동생들이 그를 쳐다봤다. 놀란 얼굴, 빨개진 얼굴, 흥분한 얼굴.

“오빠··· 전화 받아.”

“누군데? 나 잔다고 그래.”

“얼른!”

<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 필요할 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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