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31화 (131/227)

<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 필요할 때 (1) >

「설 연휴 하루 전. 2001년 1월 22일 월요일」

“컷!”

다섯 번째 NG 컷을 외치고 일어난 최 감독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고,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그의 셔츠 속에 붉은 열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있다.

“후······.”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감독이 나를 쳐다보는데, 눈빛이 마치 ‘시현이 넌 내 맘 이해하지?’ 하는 것 같다.

그래 이해하는데, 근데 성지훈이라고 오죽하겠나.

하고 싶은데 안되는 그 마음.

“지훈아······.”

한숨을 크게 내쉰 최 감독은 고개를 돌려 성지훈을 바라봤다.

매를 들고 싶은데 겨우 참는 선생님의 모습이랄까.

그래서인지 환자복 차림의 성지훈이 최 감독의 눈을 제대로 보질 못한다.

“하, 많이 어려워? 뭐가 어려운 거야? 얘기해봐.”

최 감독이 모자를 벗어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묻는다.

그 모습이 마치, 군시절 유격장 조교가 내게 얼차려를 주기 직전 모습 같은데··· 아무튼 지금 촬영할 씬은 무리한 시합으로 뇌에 이상이 생긴 윤시진에게 주인공 장태원이 찾아온 장면.

“지훈아, 잘 들어봐.”

억지 미소를 띠고 성지훈에게 붙은 최 감독이 디렉션을 재차 주입하는 동안, 나는 대본을 손에 집었다.

17# 병원 / 낮

장태원과의 경기를 앞둔 윤시진.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은 펀치드렁크 증상을 보이고, 그럼에도 윤시진은 끝까지 링에 오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장태원 : 시합 미뤄. 내년도 좋고.

윤시진 : (인상을 쓰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꺼져.

장태원 : 이 상태로 나 이기려고? (실소하며)

윤시진 : (표정) 왜? 쫄았냐?

장태원 : (실소 사라지고) 그래 쫄았다. 그러니까 내년에 하자고.

윤시진 : (찌푸림을 감추려 뒤돌아서고) 내일 퇴원할 거니까, 넌 타이틀 반납할 준비나 하고 있어.

윤시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장태원.

그런데 갑자기 윤시진이 발작하며 쓰러지는데.

장태원 : 야 윤시진, 시진아! 여기 사람 쓰러졌어요! 여기 사람 쓰러졌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는 씬이지만, 내 생각엔 꽤 어려운 씬이다.

윤시진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자신의 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년이 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런 그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장태원에게 들켰으니 여러 감정이 뒤섞일 수밖에 없다.

쪽팔리고, 화나고, 열 받고.

하지만 무엇보다 이 씬이 중요한 이유는 여주인공 권여름의 오해와 장태원의 진심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권여름은 장태원이 무리하게 시합을 주도해서 연인 윤시진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장태원이 윤시진을 말리러 왔었다는 감춰진 진실.

극 중반부에 밝혀지면서 시청자들이 장태원이라는 인물을 한층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될 씬이기 때문에, 극에 있어 중요한 장치라고 볼 수 있는 포인트 지점이다.

“좀 쉬었다 가자.”

최 감독이 잠깐의 디렉션으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촬영을 잠시 멈췄다.

반사판을 든 스태프와 붐 마이크가 뒤로 물러나고.

카메라 밖으로 나온 내 곁에, 촬영을 지켜보던 임예진 작가가 다가왔다.

“많이 힘든가 보네요.”

그녀의 안경알에 성지훈과 최 감독의 뒷모습이 비친다. 둘이 어디를 가고 있는데··· 설마, 갈구려는 건 아니겠지.

“잘할 거예요.”

나는 크게 성지훈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동안 성지훈의 노력을 봤으니까.

윤시진이라는 인물을 분석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고, 실제로 펀치드렁크 현상을 겪은 환자의 가족을 찾아가 얘기를 듣기도 한 모양이고.

같은 소속사, 함께 대본을 분석하면서, 어쩌다 보니 제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게 됐다.

그리고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이 어딨나. 깨지고 부딪치면서 배우는 거지.

“시현 씨는 어려운 점 없어요?”

임 작가는 그 말을 하고 바로 실수했다는 듯 미소를 가로저었다.

“나도 참. 시현 씨한테 실례되는 말을 했네요.”

“아니에요. 저도 어려운 점 많아요.”

“정말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임 작가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럼요.”

사실 장태원이라는 인물에 몰입하기가 힘들어서 고생 중이다.

내가 ‘우리 오빠’에서 박춘삼의 역에 몰입했을 때는, 이 몸으로 살게 되면서 부딪친 혼란과 적응이 한몫했다. 그래서 박춘삼에 쉽게 이입할 수 있었는데··· 장태원이라는 인물은 또 다르다.

이 자식은 바보처럼 우직하고, 고독하다.

물론 인물 설정만 따지고 보면 실력 있고, 잘생겼고, 성격은 시원함을 넘어서 때로는 싹수없게 비친다. 제멋대로인 것은 보너스고.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외로움이 감춰져 있다. 깊고 깊은 외로움이.

“시현 씨?”

내가 고개를 들자 임 작가가 좀 전과 달리 이마를 찌푸리고 있다. 나를 유심히 살피며, 그녀가 물었다.

“괜찮아요?”

“뭐가요?”

“갑자기··· 뭔가 분위기가 달려져서요.”

임 작가의 눈동자가 낯선 이를 보듯 나를 비추고 있다.

최근에 나는 장태원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가끔 주위를 잊어버린다.

그건 일본에서 가경 작가를 만났을 때, 가부키 거리 공연에서 느꼈던 몰입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굳이 따지자면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기분이랄까.

“아, 작가님은 연휴 때 뭐 하세요?”

나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이번 설 연휴에는 촬영을 멈추는데, 그 대신 다들 주말을 반납하기로 했다.

“지에스 덕분에··· 이번에는 집에 다녀올 것 같아요.”

임 작가의 눈이 촉촉해진다. 그녀는 눈시울을 훔치고, 주책없다며 혼잣말을 속삭였다.

쫄쫄 굶어가며 쓴 대본은 뺏길뻔했고, 곰팡내 나는 반지하방에서 골병에 시름시름 앓던 그녀였다.

지금의 순간들이 꿈이라고 말하는 그녀지만, 스텝이 방영되면 더이상 돈도 명예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될 거다.

“시현 씨는요?”

“전······.”

고민 끝에 나온 답은 그저 미소.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 딱히 연휴에 찾아갈 곳도 없다.

내게 있는 건 우리 팀과 그리고 스케줄뿐.

근데 성지훈은 왜 안 오는 거야.

최 감독에게 깨지고 있을 녀석을 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저벅저벅 다가오는 중견배우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시현아.”

B팀 촬영을 마친 최미숙이 밝게 웃으며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랬듯 미소와 함께 그녀를 맞이했다.

“선생님 촬영 끝나셨어요?”

“넌 아직 안 끝났네?”

“예. 아직.”

나는 스태프들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모두 성지훈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세월아 네월아 병원 복도를 차지하고 있다. 어서 빨리 끝내고 고향 집에 내려가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시현이 너, 저녁에 스케줄 있니? 우리 이따가 저녁같이 할까?”

“죄송해요 선생님. 저 감량 중이라서요.”

“아, 맞다. 한창 잘 먹을 나이인데··· 하긴 배우는 그래야 해. 살을 빼야 할 때도 있고, 억지로 쪄야 할 때도 있고. 숙명이다, 숙명.”

“누님. 가야지.”

최미숙이 얘기를 멈추지 않자, 그녀의 매니저가 묵직한 목소리를 뱉고 나를 스쳐봤다. 그래도 최미숙보다는 양심이 있는지 나를 제대로 보질 못하는 모습이다.

“알았다, 가자.”

마지못한 듯 투덜대면서도, 최미숙은 바로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런데, 내내 태연하더니 지금 순간은 눈이 망설이고 있다.

“그럼 시현아. 우리 연휴 끝나고 보자.”

“저 선생님.”

“응?”

“선생님 댁에 간장게장 보냈어요. 여수돌게장, 선생님 그거 좋아하시잖아요.”

“어떻게··· 알았어?”

의외였는지, 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 선생님 정말 좋아한다니까요.”

“······.”

뒤돌아선 그녀가 매니저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임 작가가 속삭인다.

“지금 뭔가, 굉장히 큰일이 스쳐 간 것 같네요.”

훗. 눈치는 있는 모양이다.

마침 최 감독과 성지훈이 다시 왔다.

“자, 다들 일어나. 빨리 찍고 체육관으로 이동해야지! 집에 안 갈래?”

나는 최미숙이 남기고 간 화장품 냄새를 밀어내며 다시 촬영 동선에 섰다.

다시, 내 가슴 속 장태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시진이가 링에 오를 일도 없었고, 시진이가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야!”

권여름의 눈에 원망이 가득하다.

“다 지나간 얘기야.”

친구의 여자, 한때는 좋아했던, 지금도 마주하면 가슴 한편이 아리는, 그런 사람에게 비난을 듣고 있지만··· 슬프게도 장태원의 얼굴은 표정 하나 없다.

“지나갔다고? 니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5년이야. 사람들 다 잊었어. 그런 시합이 있었다는 것도, 거기서 누가 죽었는지 아는 사람도······.”

짝!

권여름의 손이 장태원의 뺨을 붉게 만들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장태원은 틀어진 고개를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가녀린 얼굴에게 말했다.

“너 혼자만, 못 잊고 있는 거야.”

“나쁜 새··· 아,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대사에 힘이 빠진 송이경이 미안한 표정으로 이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가만 보니 이경 씨가 욕을 할 줄 모르네.”

입술을 푸르르 떠는 그녀 모습에 최 감독은 타박대신 웃음을 보였다.

“아니에요. 저 욕 잘해요. 후후.”

송이경이 위아래 입술을 한 번씩 빨아들이고 수줍게 웃는다. 그러자 최 감독은 다시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한 번 욕하고 들어가자.”

민망한 요구였다.

스태프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듯 그녀에게 집중했다.

“감독님 참.”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던 송이경은 손등으로 입술을 한번 훔치고 말했다.

“나쁜 새끼.”

“에이. 좀 더 강하게!”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눈을 질끈 감고 외치는 그녀 모습에 스태프들이 박장대소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시현만이 웃지 않고 있자 그녀는 괜히 무안해서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액션!”

슛이 다시 들어가고, 이번에는 무리 없이 대사를 마쳤다.

풀샷, 바스트, 타이트 바스트 샷까지 마치고, 카메라를 벗어난 송이경이 강 실장의 곁에 다가가 물었다.

“실장님, 시현 씨 원래 저렇게 과묵해요?”

배우들에게 촬영장은 일터.

다들 사이좋게 웃고, 왁자지껄 떠들기도 하는 게 일터다.

좀 전에도 그냥 웃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본리딩에서의 즐거웠던 분위기와 달리, 현장에서의 이시현은 대본만 들여다볼 뿐 배우들과 어울리질 않았다.

그렇게 살갑게 굴던 최미숙과도 오늘은 데면데면한 모습이었고.

“시현이도 촬영장에서는 극 따라가는 타입이라서.”

강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이미 이시현을 충분히 겪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였다.

“4화부터는 극이 좀 밝아지니까, 그때 가면 좀 나지겠지.”

KIS 드라마 ‘우리 오빠’는 극 초반이 밝아서 이시현이 촬영할 때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8.15특집드라마를 찍을 때는 다들 심각했다.

그만큼 이시현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러니 송이경의 투덜거림도 얼마 가지 않을 거라는 게 강 실장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너무 무뚝뚝······.”

투덜대던 송이경이 고개를 돌리다 말고 멈칫했다.

지금 막, 이시현이 상의 탈의를 했으니까.

스파링 씬을 이어가려고 준비하는 모습이다.

굳이 상의 탈의를 할 필요는 없는 씬이지만 시청률을 생각하면 상의 탈의뿐 아니라 뭔들 못할까.

“와, 제대로 준비했네.”

스태프들이 감탄사를 터트린다.

이시현 몸이 조각처럼 근육이 달라붙은 건 아니었지만, 마른 체형에 적당한 근육이 붙은 모습이 오히려 자극적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배우분들, 촬영 끝나셨으면 퇴근들 하세요.”

최 감독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스파링 씬은 촬영 종료와 동시에 편집해서 이시현 공식 홈페이지 올릴 예정이다. 그래서 공을, 무척 들여야 한다는 얘기.

그러니 방해꾼들은 빨리 사라지는 게 좋은데···

다들 갈 리가 있나.

이시현 보려고, 이시현 찍으려고, 눈과 카메라를 들이민 배우와 그들 매니저,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슛 들어갔는데, 누구 하나 입 열면 너 알아서 해.”

촬영장에서 떠드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최 감독은 신경이 곤두서 조감독을 닦달했다.

한 방에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테이크로, 어서 빨리 설 연휴에 접어들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니까.

“시현아 준비됐어?”

“잠시만요.”

이시현이 여전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조바심을 보이던 최 감독은 이번에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시현이 몰입하면 할수록, 장태원이 제대로 튀어나오니까.

“됐습니다.”

지금 막, 장태원이 눈을 떴다.

<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 필요할 때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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