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스타들 (4) >
“나 기억 못 해? 나 인희야.”
눈을 깜빡이고, 또 깜빡여도, 기억이 날 리 없다.
“섭섭하다 야.”
큰 키에 잘 가꾼 체형을 가진 그녀가 내게 섭섭함을 말하는 동안, 나는 찬바람에 흔들리는 그녀의 앞머리를 보면서 생각을 거듭했다.
변인희.
모델 출신으로 드라마 단역을 전전하다 어느 순간부터 TV에서 볼 수 없었는데··· 이 여자가 이시현하고 아는 사이였다고?
“학원 관두고 뭘 하나 했더니만··· 이렇게 스타가 돼서 나타나면, 너무 치사한 거 아니니?”
모델 학원 친구였나.
신입 매니저 시절, 나는 모델 학원에서 이시현을 캐스팅했다. 그때 녀석에게는 세상과 동떨어진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혼자만의 세계가 있던 놈이다.
“진짜 나 기억 안 나?”
기분이 상했는지, 그녀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그러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고 다시 물었다.
“어렴풋이도··· 떠오르지 않는 거야?”
“미안. 기억이 안 나네.”
어떻게든 내 기억을 깨우려는 듯, 가까이 다가와 애틋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에게 나는 스쳐 간 찬바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빙빙 돌려 어수선한 대화를 잇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
“그렇구나··· 훗. 나만 들떴네.”
변인희는 크게 실망한 모습이다.
짙은 빨강 입술이 갈라지면서 아쉬운 숨이 새어 나온다. 피어오르는 하얀 입김을 보면서, 나는 적당히 틈을 보다 말했다.
“그동안 정신없이 살았거든. 근데 넌, 어떻게 날 금방 기억했네?”
“내가 너 좋아했었잖아.”
뭐?
“놀라긴. 농담이야.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는구나.”
상대방이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한다는 건, 마치 중간이 뭉텅 잘린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아무튼,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 고개를 돌렸는데, 문득 출입문 너머의 성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밤이 외로운 늑대가 우리 둘을 지켜 보고 있다.
자식, 신인 여배우나 꼬셔서 데이트할 생각이나 하고.
저거 아직 철들라면 멀었지.
나는 다시 습관처럼 입에 밴 미소를 짓고 변인희와 눈을 마주했다.
어찌 됐든 옛날얘기 아닌가.
이 여자가 시현이를 좋아했든 아니든, 나는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잘됐으면 사진 한 장이라도 남아있었겠지.
성수동 오피스텔을 다 뒤져봤지만, 여자의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에이, 또 이수정 생각나네.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야?”
잠시 스쳐 간 악몽을 뒤로하고 대화 주제를 바꿨다.
옛날얘기 계속한들 나한테 유리할 게 없으니까.
“응. 나 많이 도와줘. 열심히 할게.”
“그래.”
“전화번호··· 받을 수 있을까?”
나는 현재 휴대폰을 두 대 쓰고 있다.
하나는 원래 시현이가 쓰던 건데, 요즘에는 그냥 꺼놓고 있다. 이따금 음성 메시지를 확인할 때 빼고는 켜지 않는다.
“미안.”
“괜찮아. 이해해. 넌 이제 스타고··· 나는 고작 신인이니까.”
변인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제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시현이 얘를 좋아했을까? 이 아이와 좀 더 얘기를 나눠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스쳐 가게끔 한다.
“매니저가 휴대폰 관리하거든. 미안하다. 근데··· 나 지금 시간이 없어서.”
“아 그래. 내가 괜히 바쁜 사람 붙잡았네.”
“그럼 촬영장에서 보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서는데, 손끝에 따뜻함이 닿았다. 나를 붙잡은 변인희는 붉은 빛이 물든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너 이제 행복해 보여서.”
**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카페에 들어왔다.
두툼한 털점퍼 차림의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뚜벅뚜벅 걸어 카페 구석 자리로 향했다.
“후······.”
의자에 앉은 그는 한숨부터 내쉬고 카페를 둘러봤다.
“여기도 이시현이구먼.”
카페에 흐르는 이시현과 슬기의 노래.
그게 못마땅한 듯, 남자는 좀처럼 이마를 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집 구했어?”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
이수정은 매니저의 선글라스 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모자에 마스크만 덜렁 쓴 초라한 모습.
“호텔 어디? 사람들이 안 알아봐?”
선글라스를 벗은 매니저는 측은함과 답답함이 섞인 시선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모르던데?”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겁이 나서 호텔 대신 이시현의 집에 쳐들어갔던 건데··· 결국 호텔에 갔더니 알아보기는커녕 관광객이냐고 묻는 지배인의 모습에 이수정은 로비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어버렸다.
“좀만 버텨. 배 사장이 지금은 널 이 바닥에서 내쫓네 어쩌네 난리를 쳐도, 시간 좀 지나면 잊어버릴 거야. 하··· 이시현 일만 아니었으면, 너도 지금쯤 한창 잘나갈 텐데.”
SN의 고우희를 비롯해 드라마 ‘우리 오빠’ 출연진은 지금 TV에 얼굴 비치기 바쁘다.
“오빠.”
“왜?”
매니저는 대충 대꾸하고 입맛을 쩝 다셨다.
“현우 오빠.”
이수정이 다시 부르자, 그제야 다시 그녀를 쳐다본다.
“왜 자꾸 불러? 말해.”
“미안했어.”
“뭐가?”
“그냥 다··· 말도 안 듣고, 고집만 부리고. 제멋대로였고.”
“허. 고생이 사람 만든다더니만. 이제 좀 철드나 보네.”
“그러게.”
이수정은 마스크를 벗었다. 쓴웃음을 머금은 그 모습이 드러나자, 놀란 매니저가 의미 없이 손을 뻗었다.
“너 뭐하는 거야? 누가 알아보면 어쩌려고.”
“메이크업도 안 했는데 뭐.”
“어이구. 아주 해탈하셨네.”
이수정이 계약 만료로 나갈 때만 해도 다신 안 봐서 속이 시원하겠거니 생각했던 매니저였다. 그런데 저러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질 리가 있나. 과정이야 어떻든 이러 저래 동고동락한 사이니까.
“근데, 오빠는 왜 그만둔 거야?”
“별거 있냐. 태진엔터에서 월급 더 준다니까 간 거지. 나 없다고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태진엔터 어때? 좋아?”
“뭐 지금은 기웃거리는 수준이야. 너는? 회사 알아보고 있어?”
이수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판에 배 사장에게 온갖 협박과 모욕을 받은 뒤로 사람에게 불신이 생겨버렸다. 물론 그 일을 자초한 건 그녀 자신이었지만.
“태진엔터··· 어때? 그쪽 연기자들은 잘 지내나?”
조심스럽게 묻자, 매니저가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는 아무래도 최미숙 선생님이 공동대표니까. 배우들 대접이야 제대로 해주는 편이지.”
이수정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매니저는 다시 말했다.
“아서라. 선생님이 너 받아주겠냐? 나야 얼굴 볼일 없으니 들어갔다 쳐도··· 너는 다르지.”
“누가 뭐라나.”
“그리고 너 와봤자, 여기서 지원 못 해줘. 지금 태진에서 밀고 있는 애 있거든.”
“누구?”
“변인희라고 알아? 모델 출신인데 마스크가 좋아서 작정하고 미는 것 같더라고.”
“그래?”
“이번에 지에스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들어가. 이시현 나오는 거.”
“진짜?”
이시현 얘기에 학을 떼던 이수정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도 안 보인다. 그 모습이 더 처량해 보여서, 매니저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 나직이 속삭였다.
“지금 이시현하고 엮어보려고 선생님이 작업 중인 것 같아.”
“무슨 작업?”
“스캔들이지 뭐. 그거 터지면 인지도는 확 오르니까. 뒷감당은 선생님이 적당히 커버칠 생각인 것 같고.”
이수정 눈썹이 꿈틀.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고 너만 알고 있어. 또 선생님한테 찍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너 방송국은 앞으로 구경도 못 한다.”
매니저의 신신당부에 이수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마스크를 다시 쓰고 일어날 채비를 했다.
“어디 가려고?”
“기도하러.”
“뭐?”
생전 교회 문턱도 안 가본 이수정이 기도라니.
매니저는 카페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코를 훌쩍이며 속삭였다.
“기도? 무슨 기도? 배 사장 저주하려고 그러나.”
이수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스타일인데.
**
「2001년 1월 18일 목요일」
지에스엔터테인먼트 청담동 사옥.
“시현 씨, 고사장 분위기 그렇게 좋았다면서요?”
“예. 다들 촬영 들어갈 생각으로 들떴어요.”
“훗. 최 감독님은 시청률 50프로 나오게 해달라고 빌었다던데, 시현 씨는요?”
“저는 배우들 다치는 일 없이 촬영 잘 끝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뭐야. 무슨 매니저도 아니고.”
여기자는 볼펜을 쉼 없이 끄적거리면서 미소와 차분한 시선으로 질문을 이었다.
“근데 시현 씨도 연애할 나이인데,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그냥 절 좋아해 주는 사람?”
“에이, 그럼 대한민국 여자들 다 시현 씨 이상형이게?”
“하하.”
요령이 있는 기자다. 적절한 농담 속에 나를 띄워주면서 원하는 걸 살살 긁고 있다.
“요즘 시현 씨한테 청춘스타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데, 친구들은 뭐래요? 자주 만나요?”
“다들 바빠서요.”
나는 바른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가족 친지에 대한 답은 매뉴얼처럼 준비해뒀으니까.
“하기는, 요즘 시현 씨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지. 그럼 문자는 해요?”
“가끔이요. 잘 보고 있다, 카메라빨 무시 못 한다. 그런 시답잖은 얘기해요.”
“하하. 카메라빨은 무슨. 시현 씨는 실물이 훨씬 나은데.”
“칭찬이시죠?”
“에고. 시현 씨 그렇게 웃지 마요. 나 질문을 못 하겠네. 가뜩이나 어려운 질문 많은데.”
기자는 너스레를 떨며 이맛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런 다음 우리를 지켜보는 성 팀장을 힐끗 보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럼 이제 좀 어려운 질문 해볼게요.”
“말씀하세요.”
“흠.”
기자는 괜스레 손에 쥔 볼펜을 흔들었다. 얼굴에 새겨진 미소에는 고민과 망설임이 섞여 있다.
“에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스캔들!”
더 고민하기 싫다는 듯, 수첩을 덮은 그녀가 나를 본다.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마주 웃고 있다.
“슬기 씨하고 사귄다는··· 뭐 그런 소문이 있던데.”
“에이.”
손사래를 쳤더니, 그녀가 재빨리 다시 물었다.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슬기 씨하고 정말 아무 사이 아니에요?”
어떻게든 대답을 듣겠다는 건데, 내 대답은 누가 봐도 뻔한 거 아닌가?
결국 다른 몇 가지 질문이 더 오가고서야 인터뷰가 끝났다.
탁.
기자가 덮은 수첩 위로 마른 먼지가 피어오른다.
“시현 씨, 이건 개인적으로 하는 얘기인데.”
“말씀하세요.”
“스캔들 조심해요. 지금 같은 때는 가만히 있어도, 미풍만 불어와도 흔들려요. 오늘 인터뷰 잘 응해줘서 얘기해주는 거예요.”
인터뷰가 만족스러웠는지, 여기자는 후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그녀를 배웅해주고, 성 팀장과 함께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다.
“저 기자 평판이 좋더라고. 살 붙이지 않고, 없는 얘기 짓지 않고.”
성 팀장은 기자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시현 씨 앞으로는 세러데이 기자하고 다이렉트로 연락하면 안 돼. 내가 강 실장님한테도 당부해둘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예.”
나는 성 팀장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곁에 놓인 대본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그녀가 회의실 문을 닫고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이수정이 말이야.”
“왜요?”
“괜히 안쓰럽더라. 하는 짓은 괘씸한데, 뭐랄까··· 떼쓰는 아이 같다고 할까.”
“군말 없이 나갔다고요?”
그럴 거면서 뭘 그렇게 버틴 건지.
이불 훌렁 덮어쓰면서 ‘아 몰라!’ 외칠 때는 언제고.
“그래. 그래서 나 지금 기분 찝찝하다니까. 물까지 끼얹었단 말이야. 에이··· 뭐,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진짜 갈 데가 없대요?”
“그때 일로 좀 찍혔어? 소문 다 났잖아. 촬영장에 눈이 몇 갠데. 골치 아픈 애 데리고 가서 골치 썩느니, 그냥 두는 거지.”
남몰래 얘기하듯 속삭이고는, 성 팀장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무거워 보인다.
그래서··· 잘 끝난 건가.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어디 가서 떠들진 않을 것 같지만, 성 팀장이 이번 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예측이 어렵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이 켜지는 동안 친구에 대해 물었던 기자와 변인희를 떠올렸다.
이시현을 알고 있는 여자.
한번 제대로 얘기를 해봐야 하는 걸까.
뭐 당장 급한 건 아니니, 앞으로 촬영장에서 마주치면서 천천히 생각해도 되겠지만.
‘후······.’
켜진 휴대폰을 들어 소리샘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음성 메시지 1개가 있습니다. 메시지 청취는 1번···
삐.
-저기··· 제보할 게 있어서요. 변인희라는 여자··· 조심하세요. 그쪽 회사에서 스캔들로 엮으려고 한대요.
휴대폰에서 코맹맹이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불쾌한 얘기까지.
< 청춘스타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