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28화 (128/227)

< 청춘스타들 (3) >

-흠이 없는 연기였다, 청춘의 목소리가 지닌 울림, 배우와 가수의 경계를 넘나들다, 찬란한 젊음, 지금 이시현은 명실공히 청춘스타! 와우··· 여러분 제가 지금 읽어드린 건 어제 나온 기사에서 제목만 간추린 건데요,

톡톡 튀는 현승아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신호를 살피며, 성 팀장은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여러분, 청춘스타가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의 청춘과,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라는 뜻의 스타. 그래서 흔히들 대중으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스타를, 우리는 청춘스타라고 부르죠. 오늘 함께하고 있는 시현 씨처럼 말이에요. 시현 씨, 지금 인기가 대단한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인기는요 무슨.

-무려 5만 명의 팬이 잠실종합운동장을 가득 채웠어요. 이래도 발뺌하실 거예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마치 시현 씨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데뷔한 것 같은데··· 사실 시현 씨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죠? 8.15특집드라마 ‘우리 오빠’에 출연하기까지?

-예. 오디션도 보고, 연습도 하고 그런 시간이 있었어요.

-그럼, 우리 광고 듣고 온 다음에 2부에서 그 얘기 계속 들어볼까요? 여러분 2부에서 또 만나요.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머리끄덩이라도 잡아야 하나?’

전의를 불태우며 차 키를 뽑은 성 팀장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찬바람에 코트 자락을 붙잡고, 건조한 입술을 핥으며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린다.

띵.

기다림에 비해 올라오는 건 금방이었다.

성 팀장은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현관에 발을 들였다.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는 세면대 옆에 놓인 플라스틱 대야를 손에 쥐었다. 콸콸, 물을 받아서 소파에 누워 있는 이수정 앞에 섰다. 그리고 확!

“엄마!”

비 맞은 생쥐처럼 흠뻑 젖은 이수정.

“나, 지에스 기획콘텐츠개발부서 성시원 팀장이에요.”

성 팀장은 매서운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눈썹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

자다가 봉변당한 게 억울해서 바르르 떨리는 안면근육.

“자, 닦아요.”

이수정은 성 팀장이 건넨 수건을 낚아챘다.

얼굴을 닦는 그녀를 보면서, 성 팀장은 여기 온 목적을 얘기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거예요? 주거침입죄로 신고할 수도 있어요. 그런 건 알고 있어요?”

이수정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허공만 노려봤다. 시청률 50프로를 넘긴 드라마에 출연한 여배우치고는 꽤 초라한 모습이다.

“이 일로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시현 씨 광고 끊기면 위약금이 수십억인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시현 씨가 만만한 거예요? 우리 회사가 만만한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무슨 생각으로 여기 있는 건데요?”

“생각나는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호텔을 가던가 하지. 친구 없어요?”

성 팀장은 책망하듯 물었다. 답답하고 한심해서.

“그렇게 보지 마세요.”

붉게 상기된 얼굴을 든 이수정이 잠시 성 팀장과 눈을 마주했다. 이마에는 젖은 머리가 삐뚤빼뚤 붙어있다.

“할 얘기 끝나셨으면 일어날게요. 어차피 나가려고 했으니까.”

“뭐라고요?”

“청소하고 나가려던 참이었다고요. 잠깐 소파에 기댔던 건데······.”

그제야 성 팀장은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했다.

거실에 여행 가방 하나 놓여 있는 것 빼곤, 집 안이 흐트러짐 없이 깨끗해 보였다. 그래서, 성 팀장은 괜스레 입맛을 다시면서 물었다.

“계약 만료됐다면서요? 이상하네요. 이수정 씨면 그래도 시청률 50프로를 기록한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계약할 곳이 없어요?”

“···믿을 곳이 없네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정은 수건과 대야를 챙겼다.

“옷만 갈아입고 나갈게요.”

여행 가방에서 옷을 꺼내고, 화장실에 대야와 수건을 가져다 놓은 뒤, 이수정이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정말 이시현하고 별 사이 아닌 거 맞아?’

이시현 얘기로는 이수정이 무작정 집에 들어왔다는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둘이 뭔가 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닐까?

‘종잡을 수가 없네.’

뭐가 어찌 됐든 지금 이시현은 떨어지는 낙엽 잎에도 조심해야 한다.

지에스가 소속 연기자들의 사생활에 관대한 편이라지만, 이시현은 안 된다. 스타니까. 과거 박한영이 그랬듯이.

철컥.

방에서 이수정이 나왔다.

가방을 챙기더니 성 팀장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

“신세 많았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시현 씨, 수고하셨어요.”

현승아는 이시현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헤드폰에 눌린 잔머리를 정리하면서 그의 하얀 얼굴, 은은한 미소, 맑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현 씨 고마워요. 바쁜데 이렇게 와줘서.”

“고맙긴요. 제가 고맙죠. 잘 챙겨주셔서.”

“후훗. 다음 스케줄 어디에요?”

“백화점 사인회요.”

“아하.”

이시현은 먼저 라디오 부스를 빠져나갔다. 피디와 작가들에게 인사를 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현승아도 대본을 챙겨 부스를 빠져나왔다.

“시현 씨.”

“예.”

떠나려던 이시현이 멈칫했다. 곁에 서 있는 매니저 강 실장이 힐끗 쳐다보자, 현승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때는 알아서 피해줘야 할 것 아니야.’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강 실장이 자리를 피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무슨 할 얘기 있으세요?”

“나랑 밥 한번 먹어요. 언제 시간 돼요?”

“아······.”

“시간 없다는 말은 하지 말고요. 매니저 허락받아야 한다는 유치한 얘기 하지 말고, 휴대폰 있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우리 밥 한번 먹어요.”

설마하니 지난번처럼 휴대폰이 없다느니, 그런 소리를 할까 봐 현승아는 미리 못을 박았다.

“예. 제가 조만간에 밥 살게요.”

“앗싸!”

주먹 쥔 손을 흔들며 그녀는 맑게 웃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언제요? 조만간이 설마 내년인 건 아니죠?”

“아. 들켰네요.”

“치사하다··· 진짜 밥 한번 먹기 왜 이렇게 힘들어요? 우리 같은 회사인데.”

“농담이에요. 흠, 이번 주 금요일 어때요? 스케줄 있으세요?”

“금요일이면, 라디오 말고 없어요.”

“그럼 저녁 6시. 어때요?”

“오케이!”

현승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이시현을 올려봤다. 어쩜 이렇게 든든한지. 보고 또 보고, 그래도 보고 싶은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그럼, 그날 봐요.”

이시현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스튜디오를 빠져나가자, 작가들이 딱 벌어진 입을 하고 현승아에게 다가왔다.

“우와, 승아 씨 짱!”

“역시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에이, 겨우 밥 한번 먹는 건데 뭐.”

현승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직은, 넘어온 건 아니니까.

“야, 너 진짜 현승아하고 밥 먹기로 했어?”

강 실장은 룸미러를 통해 이시현을 보며 물었다. 녀석은 차에 타자마자 대본부터 손에 들었다.

“예.”

“미쳤구나? 지금 연애를 한다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강 실장은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지금 순간 박한영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

“너 자칫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겁을 주며 물어도, 이시현은 대본만 들여다볼 뿐.

“인기 추락하는 건 문제도 아니야. 광고주들, 스캔들 그냥 안 넘겨. 위약금이 얼마나 될 것 같냐?”

그동안 벌어들인 돈에 몇 곱절이 빠져나갈 거다.

“너 절대 안 된다. 언제 보기로 했어?”

“금요일 6시요.”

이시현의 대답에 강 실장은 운전 중임에도 수첩을 들어 스케줄을 살폈다. 이 만남, 절대로 안 된다고 속삭이면서.

“금요일 6시면··· 니가 매니저들 한턱낸다는 날 아니야?”

“맞아요.”

“허.”

강 실장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과 함께 수첩을 덮었다.

영악한 놈.

회식자리에 현승아를 부르겠다니.

“야, 그건 좀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해요. 거절하기도 그렇고. 아니면 진짜 따로 만나 밥 한 끼 할까요?”

“그건 안 되지. 넌 지금 만인의 연인인데··· 안 그러냐 아린아?”

귀에 이어폰을 꽂던 서아린이 멈칫하더니.

“안 걸리기만 하면 되죠.”

“뭐?”

“그치 아린아? 안 걸리기만 하면 되지?”

이맛살을 구긴 강 실장과 달리, 이시현은 실실 웃으며 그녀와 말장난을 주고받았다.

“오빠, 그럼 우리 연애할까요?”

“그럴까? 훗.”

“그만들 해라 이놈들아.”

잠깐의 농담을 끝내고 이시현은 다시 대본에 집중했다.

압구정 백화점으로 이동하면서, 강 실장은 이따금 룸미러를 통해 녀석을 눈에 담았다.

‘참내. 어쩌다 내가 저놈을 데리고 다니네.’

최재환이고 이시현이고 그렇게 싫었었는데··· 백암산 촬영으로 인연이 되더니, 지금은 이렇게 서로를 걱정하고 챙기는 관계가 됐다.

“시현아.”

“예?”

대본에서 눈을 뗀 이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너 어제 대표님하고 무슨 얘기 했냐?”

“별거 없었어요. 그냥, 여고생하고 대화 좀 나눈 거?”

“여고생? 여고생 누구?”

의미심장한 이시현의 미소에 강 실장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물었다.

“너 대표님이 차 뽑아줬다며?”

“아, 잊고 있었네.”

그 중요한 일을 잊고도, 이시현은 거스름돈 놓고 온 마냥 어깨만 으쓱 올렸다. 그러자 강 실장은 혼잣말을 나직이 속삭였다.

“참 앞일 모르는 거야. 불과 반년인데, 외제차에 삼성동 아파트에. 통장이야 뭐··· 할만하네, 연예인.”

비꼬는 게 아니었다. 인기가 찾아오면 스타가 되고, 통장에 돈이 쌓인다.

박한영이라고 달랐었나.

매니저는 그저 월급이나 또박또박 들어오면 되는 거고.

“하··· 사람들 봐라.”

백화점 출입구는 인파의 절정이었다.

기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데, 밴이 들어선 순간 하늘이라도 무너져 내린 듯 주변 일대가 들썩였다.

경호 팀의 안내를 받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기에 앞서 메이크업 수정이 이어졌다.

“시현아.”

강 실장은 눈을 감고 있는 이시현을 돌아봤다.

“너 우리 집에 김치냉장고하고 TV 보냈다며?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경영지원부서에 물어봤죠. 어머님께 뭐 필요하냐고 여쭤봤더니, 그 두 개가 오늘내일하신다고 하셔서요.”

더 무슨 얘기를 할까.

강 실장은 바로 차에서 내렸다. 매니저가 내렸으니 팬들의 기대치가 폭발했다.

비명, 환호성, 함성··· 그 뒤를 이어 이시현이 내린다.

명실공히 이 시대의 청춘스타가.

**

어둠이 깔린 밤.

“와, 여기가 지에스 C&C구나.”

신인 배우 변인희는 반쯤 벌린 입을 좀처럼 다물질 못했다.

‘귀엽네.’

성지훈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어제 전화번호를 주고, 오늘 만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해버렸다.

연애 세포 다 죽었는지 알았는데···

오늘 하루 재미없는 농담에도 웃어준 그녀 덕에 오랜만에 들뜬 기분을 만끽했다.

“안에 들어가 볼래요?”

“그래도 돼요?”

변인희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난다. 하늘의 별이 여기 내려와 있었다.

“안될 거 뭐 있어요? 아직 다 옮긴 건 아니지만, 연습실은 오픈돼 있으니까.”

오직 배우를 위해 설립된 엔터테인먼트.

‘지에스 C&C’

연습실을 비롯해 모든 공간이 청담동 사옥과는 차별화돼 갖춰진 곳.

“응?”

지갑에서 카드키를 꺼내던 성지훈의 눈꼬리가 치솟는다. 유리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안에서 나왔다.

“시현 씨··· 스케줄 끝났어요?”

“예.”

이 밤에 예상치 못한 이시현의 등장에, 성지훈은 눈만 깜빡이다가 급히 어깨를 돌려 옆에 있는 변인희를 가리켰다.

“인희 씨 알죠? 권여름 여동생 역. 오늘 연습실 좀 보고 싶다고 해서··· 연기 조언받으려고 만난 거니까, 오해하지 말고.”

얼렁뚱땅 소개를 마쳤지만, 이시현은 딱히 알고 싶어 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은 눈치였다. 그저 변인희에게 잠깐 시선을 줄 뿐이었다.

“선배님,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성지훈은 곁을 지나간 이시현을 뒤로하고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여전히 밖에 서 있는 변인희에게 손을 흔들며 불렀다.

“인희 씨, 들어와요.”

무슨 일일까.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지훈은 다시 나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시현아.”

찬바람에 실린 그녀의 속삭임.

“나 기억 못 해? 나 인희야.”

< 청춘스타들 (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