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스타들 (2) >
얘가 대체 왜 여기서 자고 있을까.
심지어 내가 들어왔는데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뭐야? 술까지 마신 거야?”
코를 들이대지 않아도 알코올 냄새가 물씬 풍겼다.
황당한데, 지금 상황에 이 여자를 끌어내리지도, 그렇다고 곁에 다가가지도 못하겠다. 이수정 얘··· 지금 핫팬츠에 브라톱만 걸치고 있으니까.
청춘드라마 같았던 오늘 하루가 졸지에 19금 에로영화로 바뀐 기분이랄까.
“얘 아주 미쳤네.”
지난번 샵에서 나를 협박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런 식으로? 이런 콘셉트로 막 나가기로 작정을 한 건가?
‘하······.’
어찌 됐든 단둘이 이곳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부엌 식탁에 엉덩이를 붙이며 휴대폰을 꺼냈다.
강 실장을 다시 오라고 부를 생각인데. 아니면 서아린이라도 여기 있어야지, 까딱했다가는 내 배우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 큰일이다.
띡.
휴대폰 단축번호를 누르려는데, 뒤척이는 이수정이 보인다.
신음을 하며 두 다리를 끌어안는다. 술에 취해 이불도 없이 잤으니 추운 모양인데, 번들거리던 그녀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왔어?”
그녀가 태연하게 눈을 비비며 자세를 바로 한다. 그러더니, 일어나서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가 이불을 꺼내와 소파에 다시 앉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나야 하는데, 너무 황당하니까 넋 놓고 쳐다만 보게 된다.
“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택배 받으라며?”
이수정이 이불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만원이더라··· 문 따는데.”
고해성사하듯 속삭이더니, 이수정은 긴 다리를 뻗으며 제 할 말을 계속했다.
“당분간 신세 좀 질게.”
“여기서?”
“나 계약 만료됐어··· 대표님이 그러더라. 나 보고 접대나 하라고.”
술기운이 아직 남아있는지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고개를 돌려 베란다만 주시하고 붕어처럼 입만 벙긋벙긋.
“됐으니까, 친구 집에 가든지 호텔에 가든지 해.”
나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강 실장이 지금 어디쯤 갔을까.
“일주일만. 조용히 있다가 갈게.”
쓸데없는 소리.
“아 몰라. 신고하려면 신고해.”
이수정이 이불을 훌렁 덮어쓰고 소파에 누웠다.
환장하겠네.
쟤는 지금 이 상황이 드라마인 줄 아는 건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이불을 확 뺏었다. 그랬더니 이수정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소리 지른다?”
입술을 벌릴 듯 말 듯, 그 소름 끼치는 모습에 나는 다시 식탁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다.
‘실수였어.’
그때 CCTV 건을 제대로 매듭지었어야 했다.
대충 그냥 넘어갔던 일이 틈을 만든 거다.
지금 상황, 이수정이 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마른 굴뚝에 연기가 솟구치기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
“너 정말 어떻게 하고 싶은데?”
“말했잖아. 일주일만 참아달라고.”
이수정의 목소리에는 계산이 깔려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 자신은 손해 볼 게 없다는 계산. 내가 내쫓지 못할 거라는 계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적당히 까불어. 나 진짜 화났으니까.”
어린 애가 어디서 이런 못된 짓을 배웠을까.
지난번 샵에서의 일도 대책 없더니, 문을 따고 이 집에 들어오는 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살면서 별의별 미친놈을 봤지만 이런 유형은 또 새롭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팬들은 내가 삼성동으로 이사한 걸 알고 있다는 거고, 이곳 명의는 회사 앞으로 돼 있다는 거다.
나는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든 결정을 내려야 하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나도 다칠 걸 각오해야 했다.
“하루 줄게. 내일 안에 여기서 나가.”
“갈 데 없다니까? 누군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갈 데가 없어? 네 몸에 걸친 것만 팔아도 충분히 전셋집 얻어.”
“그거 다 회사 거였어. 명품 가방, 목걸이, 반지··· 다 빌려서 가지고 다녔던 거야.”
이수정은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몸에 둘렀다.
그 모습을 보니 더 얘기해도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술 취한 사람한테 떠들어봤자 입만 아프고.
“최미숙······.”
이수정의 속삭임.
휴대폰을 다시 쥔 나는 힐끗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그 아줌마하고 작품 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는데. 우리 아빠가··· 좋아하던 배우였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술주정도 이정도면 정신병 수준이다.
“그래서··· 캐스팅 확정됐을 때 아빠 찾아갔어.”
이수정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아빠 딸··· 아빠가 좋아했던 최미숙하고 연기한다고. 하늘에서 잘 보고 있으라고. 그 여자보다 더 멋있는 배우 될 거라고.”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뚝.
“그래서 그랬던 거야. 질투 나서.”
“질투? 죄 없는 사람 강간범으로 누명 씌우려고 한 이유가, 고작 질투 때문이라고?”
잘만 떠들던 이수정은 이번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헛소리 좀 그만해라.”
더 말을 섞기 싫어 현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수정의 가정사는 관심 없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상황을 내가 자초한 것 같아 짜증이 날 뿐이다. 신발을 신는데,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왜 이렇게 됐을까?”
돌아봤더니, 다리를 끌어모은 이수정이 무릎에 턱을 기대고 쓸쓸한 모습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그냥···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연기가 하고 싶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숨부터 쏟았다.
“하··· 저 또라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 발로 나갈 것 같지도 않고. 이 밤에 강제로 끌어낼 수도 없고.
성 팀장이라도 불러야 하나.
잠시 앞으로의 대처 방안을 고민하던 중에, 나는 손에 쥔 휴대폰에 흠칫 놀랐다. 전화였다.
“예, 실장님.”
-너 지금 잠들었냐?
“아니요.”
-대표님이 지금 와인 한잔하자는데?
“지금이요?”
전부터 자리 한번 갖자는 말은 있었다.
-최미숙 선생님도 같이 계신대.
“거기가 어딘데요?”
-내가 지금 너한테 다시 가고 있어. 거의 다 왔거든, 슬슬 내려··· 너, 왜 내려와 있냐?
멀리 밴이 보인다.
점점 다가와, 내 앞에서 차를 멈춘 강 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다.
“너 누구 만나러 가?”
“그럴 일이 있었어요.”
지쳐서 말할 기운도 없다. 차에 서아린은 보이지 않았다.
“아린이는요?”
“택시 태워 보냈지. 하··· 집에 좀 일찍 들어가나 했더니만.”
강 실장이 한숨과 함께 핸들을 붙잡는다.
**
“어? 이시현이다!”
“진짜 이시현이네.”
“와······.”
레스토랑 직원들의 수군거림과 시선이 내게 달라붙었다.
매장에 적막이 차 있는 걸 보니 영업시간이 끝난 모양인데,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차 대표와 최미숙이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곰 같은 놈과 권혜선이······.”
차 대표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최미숙이 나를 슥 쳐다보더니, 환한 미소로 반겼다.
“왔어? 앉아.”
최미숙이 직접 의자를 빼줬다. 나는 차 대표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에게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미안하다. 갑자기 불러서.”
차 대표는 손에 쥔 와인잔을 흔들며 나를 응시했다. 출렁거린 붉은 와인에 레스토랑의 샹들리에 빛이 뒤섞인다.
“촬영, 수요일부터 들어가지?”
“예.”
내가 대답하자, 차 대표가 와인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는 최미숙에게 눈을 돌렸다.
“이번 거 잘 끝나면, 다음 작품은 누님이 주연 맡아서 하나 들어갑시다.”
“훗, 웬 선심이야?”
“왜긴. 돈 벌려고 그러지.”
차 대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제안이 최미숙을 위한 배려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여태 주연 자리 한 번 꿰찬 적이 없으니까.
젊었을 적에는 그녀보다 예쁘고 늘씬한 배우들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는 젊고 어린 배우들 때문에. 그 덕에 적당한 포지션에서 자리를 지키는 법을 알게 된 그녀니까.
“됐어. 돈 벌기는··· 망한다 그거.”
“누님 나 모릅니까?”
차 대표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오간 시선.
최미숙이 옅은 미소에 콧바람을 섞으며 입을 열었다.
“시현아.”
“예. 선생님.”
“너 차 대표 무대 본 적 있어?”
“중학생이었을 때 본 기억이 납니다.”
가수 출신의 그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던 게 벌써 10년은 넘은 일.
“그래? 그때 참 멋있는데··· 젊고, 유쾌하고, 멋있고.”
최미숙이 속삭인 미사여구에, 차 대표는 쓴 미소를 머금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이시현이 너.”
차 대표가 나를 쳐다본다.
저 얼굴과 저 시선, 내게는 씁쓸함으로 남은 것들.
“최재환이 일. 알고 있었어?”
“몰랐습니다.”
사람 일을 내가 어떻게 다 알까.
그뿐만 아니라 내게는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다.
최재환이 권혜선하고 만나고 있었다니··· 놀라서 죽는지 알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단 말이지.
“너는?”
“저요?”
“너는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없습니다.”
“있으면 지금 말해. 아니면, 오늘 이 자리 나가면 정리하던가.”
그 말에 최미숙이 차 대표를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연애 좀 하면 어때? 매일 감정 소모하는 게 배우인데, 그렇게라도 버텨야지. 오히려 연애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야.”
“애 헛바람 넣지 마. 시현이가 뭐 누님 같은지 압니까?”
차 대표는 그 말을 하고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다시 들었다. 최미숙이 젊은 시절 여러 남자 울렸다는 소리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아이고. 내가 지 찼다고 아직도 꽁해있네.”
“누님?”
차 대표가 당황해서 와인잔을 만지작거린다. 물론, 나는 그것도 잘 알고 있다.
“시현아, 예전에 차 대표가 나 엄청 쫓아다녔다?”
“거 참.”
차 대표의 당황한 모습이 재밌어서 눈이 간다.
그런데 아까부터 차 대표 옆에 있는 서류봉투가 신경에 거슬리는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때가 된 건지, 차 대표가 서류봉투를 손에 집었다.
툭.
그 안에서 나온 건 낡은 책과 차 키였다.
“이시현이.”
차 대표가 내게 차 키를 건넸다.
B** 로고가 박혀있다.
“와, 시현이가 잘나가긴 잘나가보네.”
“그리고 이건··· 누님 거.”
차 대표는 낡은 책을 최미숙에게 건넸다. 책을 받아든 그녀가 눈을 기울이고 겉표지를 바라보더니.
“이거··· 어디서 구했어?”
“알아서 뭐하시게.”
차 대표는 더 말하지 않고 입에 와인을 머금었다. 그 사이 최미숙은 책을 조심히 넘기고 입술을 떨며 말했다.
“시현아, 이게 뭔지 알아?”
“글쎄요.”
“이거··· 내 첫 작품 대본이다.”
“아.”
놀란 내게, 그녀는 대본을 기울여서 보였다. 색바랜 표지, 원고지 같은 곳에 새겨진 대사와 지문들, 심지어 손 글씨다.
최미숙의 나이가 지금 오십 대니까, 못해도 삼십 년은 됐을 물건이었다.
“선생님은 어떤 역이었어요?”
“난··· 훗.”
그녀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린다.
“대학생 과외 선생님을 좋아하는 여고생 역.”
최미숙의 얼굴이 추억에 젖었다.
“누님, 한번 보여줘 봐.”
“뭘?”
“뭐긴. 여고생 말이야.”
“야, 그건 아니지.”
최미숙이 학을 뗀다. 하지만 나도 보고 싶었다.
“선생님 저도 보고 싶어요.”
“얘들이. 나 가지고 노네.”
“누님, 나 이거 구하느라 꽤 힘들었거든?”
“아이고.”
결국 최미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대본을 넘기는데, 한 번 더 피식 웃더니 대본을 펼친다.
“시현이가 대학생 오빠 역 해줄래?”
“예.”
그녀에게 대본을 건네받아 옆에 섰다. 물론 나보다 작은 그녀가 대본을 보기 편하게 배려해야 했다. 나는 아직 노안이 아니니까.
“시현아 이것 봐라.”
최미숙이 들뜬 얼굴로 씬을 가리킨다.
15# 방안 / 낮
순이는 태성의 가르침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과외는 뒷전이고 힐끗힐끗 그를 쳐다보는 순이.
태성 : 너 공부 안 하고 자꾸 그러면 나 화나려고 한다.
순이 : 선생님도 참. 자꾸 시선이 가는 걸 어떻게 해요?
태성 : 안 되겠다. 너 혼 좀 나야겠구나.
순이 : 선생님한테 혼나는 거라면, 나는 백번 혼나도 좋아.
태성 : 하하하! 요 녀석 참.
순이 : 선생님. 나 거짓말 아니야. 나 정말 선생님 좋단 말이야.
태성 : 순이야. 나는 선생님이고, 너는 내 제자야.
순이 : 그런 게 어딨어요? 선생님은 사랑을 못 해?
태성 : 나중에, 너 대학 들어가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그때 가면 우리의 사이에 있는 선생님과 제자라는 울타리도 사라질 테니까.
“아우 촌스러워. 나 이 대사 어떻게 했대?”
대본을 읽는 최미숙의 입가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곧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우고, 그녀는 내게 집중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주거니 받거니 대사를 섞었다.
내 앞의 그녀는 더 이상 중견배우 최미숙이 아니다. 여고생이며, 과외 선생님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1분 남짓한 시간.
그 1분 동안 최미숙은 그때 그 시절을 다녀온 모양이다.
“훗··· 어때?”
최미숙이 대본을 접으며 차 대표를 바라본다.
“어떻긴. 멋있지.”
차 대표는 그 말을 하고 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최미숙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새기고 나를 보며 물었다.
“이거 기억하는 사람이나 있을까?”
“있을 거예요. 선생님을 좋아하는 팬은 기억할 거예요.”
“그런 사람이 있나 몰라.”
왠지, 지금 순간 이수정이 떠올랐다. 그녀 얘기가 사실이라면··· 에이 모르겠다.
“시현아.”
“예. 말씀하세요.”
“젊은 거··· 그리 오래가지 않아. 마음이 청춘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그건 반쪽짜리 청춘이고. 그러니 지금 맘껏 즐기고 맘껏 행복해해. 알았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젊음은 언제까지 갈까.
근데···
‘또 이수정이 생각나네.’
그걸 어떻게 쫓아내나. 명도소송이라도 해야 하나.
< 청춘스타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