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26화 (126/227)

< 청춘스타들 (1) >

「2001년 1월 15일 월요일」

“1월 둘째 주, 생방송 SBC 인기차트 영예의 1위 곡은··· 이시현과 슬기의 ‘너라서’ 축하드립니다!”

라디오 디제이 현승아가 어제 방송된 인기차트 1위 수상 장면을 재현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라디오를 진행하는 그녀 모습에 슬기 역시 즐겁게 멘트를 이어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제 슬기 씨 혼자서 무대에 섰잖아요? 그죠?”

남녀 MC의 축하 인사와 함께 무대에 흩날리던 꽃가루.

그 꽃가루를 맞으며 트로피를 받은 슬기의 곁에는 이시현이 없었다.

“스케줄 때문에, 시현 오빠는 무대에 서지 못했어요.”

“아이고. 슬기 씨 어제 그렇게 눈물 흘렸는데······.”

“아하하.”

슬기가 멋쩍은 웃음을 보이자,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현승아가 눈을 기울이고 다시 말했다.

“우느라고 수상 소감도 제대로 못 했죠?”

“예.”

“그럼 지금 수상 소감 기회 드릴게요.”

“아, 정말요?”

“예.”

큐카드를 내리며 고개를 끄덕인 현승아.

슬기는 입술을 한번 빨아들이고 마이크 앞에서 눈을 깜빡였다. 크게 심호흡부터··· 후읍!

“먼저 팬 여러분께 감사드리고요. 저희 곁에서 늘 힘이 돼주신 대표님께 고맙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수많은 이의 이름을 줄줄이 거론하고서야, 이시현과 슬기의 ‘너라서’가 흘렀다. 노래가 끝나면 연속해 광고가 이어진다.

“시현 씨 감량 중이라며?”

현승아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 헤드폰을 벗고 슬기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권투 선수 역이니까, 그래서 감량하는 것 같아요.”

“시현 씨 지금 키에 몸무게면 적당하지 않나? 지금 어떻게 되나.”

“키 180㎝ 후반, 몸무게 70kg 초반.”

슬기의 대답에 현승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본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진짜 소문처럼 둘이 사귀는 거야?”

“아니거든요? 제가 연습생 생활 하루 이틀 했어요? 보면 딱 알지.”

바로 선을 긋는 슬기의 모습에 현승아는 피식 웃으며 의자에 팔꿈치를 기대고 다시 물었다.

“그럼, 나 시현 씨 내 거 만든다?”

“예?”

놀란 토끼마냥, 슬기의 얼굴에 솜털이 바스락 섰다.

“뭘 그렇게 놀라?”

현승아는 짓궂은 미소를 띠고 슬기를 눈에 담았다. 짧은 머리와 보이시한 스타일링 때문인지, 아직은 어린 티가 풀풀 난다.

“슬기는, 시현 씨 남자로 생각해본 적 없어?”

“예에?”

재차 놀라는 슬기 덕분에 현승아의 볼이 미소로 씰룩였다.

“후훗. 이상하네. 난 처음부터 반했는데.”

“진짜요? 왜?”

“글쎄··· 난 그냥 이시현이라는 사람이 좋더라.”

현승아는 슬기를 귀여운 여동생 대하듯 했다. 눈웃음 속에 슬기의 반응을 살피고 묻는다.

“슬기도 데뷔한 뒤로 연애했었지?”

“아 뭐······.”

괜스레 제 입술을 빨아들이는 슬기.

하지만 이어진 질문에 경기를 일으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혹시 지금 누구 만나고 있어?”

“아니요! 예전에 잠깐 만났던 거예요! 진짜예요.”

불그스름해진 슬기의 볼이 무척 뜨거워 보인다.

그래서 현승아는 웃음을 감추고 다시 헤드폰을 착용하며 속삭였다.

“뭐 어때? 청춘이 연애하는 게 어떻다고. 연애해.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

제작 - 지에스 C&C

연출 - 최한국

작가 - 임예진

장태원 역 - 이시현

권여름 역 - 송이경

윤시진 역 - 성지훈

······.

대본에 새겨진 한 사람의 이름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드라마 ‘스텝’.

지에스엔터테인먼트는 ‘지에스 C&C’ 출범과 함께 드라마 제작이라는 큰 분야에 뛰어든 만큼 최고의 연출진 구성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3월 이전에 촬영을 마무리해야 하는 만큼 여유 있는 일정은 아닌데, 그나마도 이시현의 음반 활동으로 촬영이 지연된 상황이다.

“안녕하십니까, 장태원 역을 맡은 이시현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우 이시현.

그가 일어나 허리를 숙이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누구는 잘생겼다고 속삭이고, 누구는 넋을 잃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누구는 시기 어린 시선을 감추고 그를 바라봤다.

다시 이어진 의자 소리.

이번에는 여배우 송이경이 일어났다. 볼륨감 있는 회색 스웨터에 붉은 치마가 돋보인다.

“권여름 역을 맡은 송이경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갈채 속에 그녀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지에스 소속의 여배우뿐 아니라 많은 여배우가 눈독을 들인 역이다. 그 역을 차지했으니, 지금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는 이 자리의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윤시진 역을 맡은 성지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성지훈까지, 주조연 배우 세 사람의 인사가 먼저 끝났다.

셋 모두 지에스 소속이라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며, 우려와 기대가 동시에 생길 수밖에 없는 캐스팅이었다.

‘후··· 미치겠네.’

성지훈은 손에 쥔 대본을 보며 심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벌써부터 등줄기에 땀이 줄줄···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막상 대본리딩 현장에 오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배우들의 인사가 모두 끝나고, 감독 최한국이 두 손을 모은 채 대본리딩 현장을 가득 채운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스텝’은 제가 MNC에서 나오고 처음 연출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많이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겨울이니까··· 다들 몸 관리 잘하시면서 끝까지 사고 없이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호리호리한 외모의 최 감독은 초록색 남방셔츠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그 모자 사이로 눈빛을 보이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다들 대본은 이미 5부까지 받아보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닌 분 없으시죠? 그럼, 전체대본리딩 시작하겠습니다. 누가 저 시계 좀 치워라.”

최 감독이 회의실 벽시계를 가리켰다.

오후 3시.

조연출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떼는 동안, 대본 넘기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지문은 제가 직접 읽겠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최 감독은 바로 대본을 펼쳤다.

“씬 넘버 1,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는 권여름. 지친 얼굴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반면 그 반대편 플랫폼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의문의 남자 장태원. 그녀가 지하철에 타는 모습을 보고서야 안심한 듯 휴대폰을 손에 드는데.”

지문이 끝남과 동시에 이시현의 목소리가 대본리딩의 시작을 알렸다.

“관장님 접니다.”

“저가 누구야?”

체육관 관장 역을 맡은 중견배우가 인상을 찌푸리고.

“저 태원이요.”

“···장태원?”

“예.”

“이 개새끼야! 끊어 임마!”

중견배우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이 출렁인 순간, 성지훈은 마른침을 꼴깍 넘겼다.

‘뭐야··· 뭘 이렇게 오바해?’

연습이니까 그냥 대충하면 될 것을.

“씬 넘버 2, 윤시진의 묘, 연인의 묘를 찾은 권여름은 문득 묘비 옆에 놓인 소주병을 바라보는데. 반쯤 비워진 병.”

“오빠··· 친구 왔었나 보네?”

송이경의 목소리가 흐른다.

슬픔이, 그리움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우리 오빠··· 오늘 좀 취했겠다.”

목소리를 놓칠세라, 성지훈은 이마를 찌푸려가며 귀를 기울였다.

“나 어제 가게 오픈했어. 친구들도 찾아오고, 주변에 떡도 돌리고··· 관장님이 화환도 보냈어. 후후. 웃기지? 꽃가게에 무슨 화환을 보내냐. 돈을 보내지.”

한 호흡 쉬고.

“오빠··· 나도 한잔 마시자.”

소주병을 손에 쥔 그녀는 술 한 모금을 머금었다.

“보고 싶다. 오빠······.”

그냥 대본리딩일 뿐인데, 송이경은 눈물까지 흘렸다.

몇몇 배우들이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다.

“씬 넘버 3, 과거, 권투 시합장, 장태원과 윤시진의 최종라운드.”

이제 드디어 성지훈의 등장.

1화 대본에서 그나마 제일 긴 씬이다.

‘후······.’

성지훈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가쁜 숨을 토하는 윤시진. 초점 잃은 시선으로······.”

“풋!”

누군가 터트린 웃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에 배우들의 웃음소리가 짙게 깔렸다. 최 감독은 배를 잡고 끅끅 웃고, 임 작가는 애써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

‘뭐야?’

뭔가 싶어 고개만 두리번거리는 성지훈에게 이시현이 속삭였다.

“지문은 안 읽으셔도 되는데.”

“아······.”

“지훈 씨, 왜 내 지문을 뺏어가?”

최 감독이 찔끔 흐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성지훈의 모습에 권여름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 최미숙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거 지에스 아니랄까 봐, 시현이랑 하는 짓이 똑같네.”

“에이 선생님도 참. 저는 그때 입도 떼지 못했잖아요.”

“하하! 그러네.”

다들 한바탕 들썩인 덕에 현장에 고여있던 무거움이 제법 옅어졌다. 그러자 최 감독은 만족한 듯 미소와 함께 다시 지문을 읽었다.

“의자에 앉아서 가쁜 숨을 토하는 윤시진. 초점 잃은 시선으로 장태원을 바라본다.”

최 감독의 지문이 끝났다.

이제 대본에서 눈을 뗀 성지훈이 입을 열 차례였다.

“수고하셨습니다!”

6시간을 넘긴 대본리딩이 끝나자 창밖이 깜깜해졌다.

희미한 박수 소리, 지친 배우들.

매니저들만이 분주히 움직여 자신들의 배우를 챙겨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연기는 개뿔.’

성지훈은 대본을 주섬주섬 챙기며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지금도 이런데 현장에서는 어떻게 할지···

후회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에게 최미숙이 지나가면서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너 아직 멀었다.”

“예 선생님!”

“너, 데뷔 첫 무대 때 마이크 떨어트렸었다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고서 데뷔곡 떴잖아? 이번에도 어리바리 탔으니, 우리 드라마 빵 뜨겠어.”

최미숙은 눈웃음을 들썩이면서 그를 지나쳤다.

‘위로야 약 올리는 거야?’

성지훈은 이시현에게 다가가 얘기를 나누는 최미숙을 잠시 눈에 담았다.

‘최미숙이 이시현을 아들처럼 대한다더니 진짠가 보네. 그나저나··· 이시현 너 진짜 대단하다.’

오늘 이시현은 대사 하나, 호흡 하나, 진짜 현장에 있는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 쏟아냈다.

그래서일까.

성지훈은 그 앞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둔 낙제생이 된 기분이었다.

“저기.”

밖으로 나오는데, 누군가 옆에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권여름의 여동생 역을 맡은 신인 여배우였다.

“저, 선배님 팬이거든요. 같이 사진 한 장 찍으면 안 될까요?”

팬이라며 다가온 신인 여배우는 수줍음이 배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팔짱까지 하고, 머리를 사뿐 기대는 바람에 성지훈은 마지못해 카메라 앞에 섰다.

찰칵!

“저 선배님, 전화번호 알려주시면 안 돼요?”

그녀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화번호요?”

“예.”

잠시 고민 끝에 성지훈은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주세요. 찍어드릴게요.”

**

드르륵.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지쳐서, 차에 오르자마자 쓰러지다시피 등을 기댔다.

“아린아. 나 죽겠다.”

“저희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말할 힘이 있으면, 아직 밭 한 마지기는 거뜬하게 맬 수 있다고.”

“하하······.”

나는 실없이 웃으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한송이라면 볼이라도 잡아당기겠는데, 서아린은 왠지 어렵단 말이야.

아. 한송이의 말랑말랑한 볼이 그리운 밤.

아무튼, 체중감량에 대본리딩까지 더해져서 몸이 녹초가 된 것도 모자라 녹아드는 기분이다.

“근데 성지훈 제법 괜찮더라?”

강 실장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예. 잘하더라고요.”

초반에는 조금 헤매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조금 기대가 된다. 이번 드라마 촬영은 꽤 재밌을 것 같으니까.

“그럼 이제 어디로 갈래? 삼성동 갈래? 성수동 갈래?”

얼마 전에 삼성동으로 집을 옮겼다. 지에스 C&C가 삼성동에 자리 잡은 김에 제법 큰 평수의 아파트로 옮겨버렸다.

“성수동으로 가요.”

그래도 아직은 성수동 오피스텔이 마음이 편하지.

후······.

묵묵히 운전하는 강 실장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낯설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차창 밖 가로등 빛을 보고 있는 서아린의 모습도 낯설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내가 요즘 많이 외로운 모양이다.

강 실장은 내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서야 오피스텔을 떠났다.

터벅터벅···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지친 걸음을 내디딘다. 오피스텔 키를 손에 쥐고.

‘응?’

하지만 나는 문을 열고 당황해서 그대로 서 있었다. 거실 등이 켜져 있으니까.

설마 끄지 않고 나왔었나?

여기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였지?

기억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혹시나 싶어 주먹을 쥐고,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자세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웬 여자가 누워 자고 있다.

이 여자··· 이수정이잖아?

< 청춘스타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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