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25화 (125/227)

< 고고, 강한놈들 (11) >

“제수씨. 무슨 일이야? 나 지금 바쁜데?”

주태곤은 휴대폰을 어깨와 목 틈에 붙이고 손을 닦았다.

화장실 거울에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비친다.

-아주버님. 나 뭣 좀 하나 물어보려고요.

“뭔데요?”

-그것이 궁금하다··· 거기 나온 가해 학생, 현이 아니죠? 가해 학생 부모, 아주버님 아니죠?

“···아니야.”

주태곤은 마른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눈의 초점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거기 나온 목소리가 아주버님이랑 똑같아서···

“아니라니까! 나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해요!”

주태곤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젠장!’

방송 나가면 가만 안 둔다고 엄포를 놓았는데도, 그놈들이 기어이 방송을 내버려서 쓸데없는 사단을 만들었다.

“이 새끼들을 그냥!”

거울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그는 누군가 들어오자 서둘러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코너를 돌자, 카페 창가의 테이블에 여전한 자세로 앉아 있는 최재환이 보인다.

“어때요? 결론 내렸습니까?”

주태곤은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으며 물었다.

그러자 최재환이 사진을 한자리에 모았다.

“잘 생각했어요. 서로 좋은 거잖아? 경찰서 가서 내 딸이 주동자가 아니란 것만 얘기해요. 그러면 그쪽 스캔들도 안 나고, 우리 딸도 유치장에서 나오고.”

“지금이면··· 인터넷에 기사 떴을 겁니다.”

“뭐?”

주태곤의 눈이 찌푸려졌다. 최재환은 그 찌푸림을 보면서 계속 얘기했다.

“3W 권혜선이 힘든 시기 곁에 있어 준 매니저에게 잠시 호감을 느꼈던 사실을 본지가 확인했다. 하지만 취재결과··· 두 사람이 오랜 대화 끝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무슨 수작이야!”

주태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최재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를 계속할 뿐이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덕분에, 선수 칠 수 있어서.”

“뭐 이런 미친놈이······.”

주태곤은 할 말을 잃었다. 스캔들을 빌미로 딸을 유치장에서 빼낼 생각을 했는데, 화장실 갔다 올 동안 결정하라고 시간을 줬더니, 그 시간에 선수를 쳤다고?

“이렇게까지··· 이러는 이유가 뭐야?”

머릿속은 굳었지만 주태곤은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자 최재환은 사진을 가지런히 쌓고 그를 마주 봤다. 찌푸려진 미간에 눈썹이 출렁거린다.

“어른들이야 조금 아프면 되지만, 효정이 그 아이는 평생 그 기억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애한테··· 내가 덜 아프자고 거래를 하자고 그래? 당신이야말로 미쳤어?”

“우리 애도 피해자야! 이제 학교생활 어떻게 해? 우리 애가 평생 가질 상처는 생각 안 해? 그래 씨발! 좋아··· 어차피 고등학생이야. 기껏 해봐야 보호관찰밖에 더 받아? 내가, 너 어떻게 해서든······.”

“이봐요 주태곤 씨.”

최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한 시선이 주태곤에게 드리워진다.

“나 바쁘니까, 나머지 얘기는 법원에서 하죠.”

“법··· 원?”

“그쪽 따님이 주효정 폭행한 거 잊었습니까? 지금 그쪽 따님 잡혀간 건 학교폭력특별단속에 걸린 거고, 효정이 폭행 건은 별개지.”

“그게 무슨······.”

“폭행 고소할 거고, 민사까지 갈 겁니다. 준비하고 계세요. 우리 지에스 법무대리인 어딘지 아시죠? 유성입니다. 끝까지 갑니다.”

그 말을 들은 주태곤은 힘이 풀렸는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최재환은 재킷 자크를 끌어올리며 다시 말했다.

“솔직히 오늘 보자고 했을 때, 사과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설마하니 무릎이라도 꿇고 그러면 어쩌지 싶었는데.”

“······.”

“따님한테 얘기 전해주세요. 그렇게 계속 살라고. 미안하지도 말고, 사과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뭐?”

주태곤이 겨우 얼굴을 들자, 최재환은 손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사진을 챙겼다. 바지 뒷주머니에 밀어 넣고.

“실컷 괴롭혀놓고 사과 한마디로 털어내면··· 당한 사람이 너무 억울하잖아. 안 그래요?”

최재환은 하얗게 뜬 얼굴을 쓸어내리는 주태곤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탁.

차에 타자마자 한숨이 쏟아진다.

잠시 진동으로 돌려놨던 휴대폰은 그사이 전화와 문자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았는데.’

배우든, 가수든, 들키지만 않으면 연애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들키면 멈춰야 한다.

‘후.’

**

「학교폭력근절 홍보대사 및 명예경찰 위촉식」

경찰청장에게서 감사패와 위촉장을 받아들자 곧바로 플래시가 쏟아졌다.

“시현 씨 여기요!”

“이쪽 좀 봐주세요!”

“시현 씨, 위촉장 조금만 아래로 내려주세요.”

경찰청 회의실을 가득 메운 기자들은 어떻게든 좋은 사진을 건지려고 경쟁적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그사이 포돌이는 내게 마이크를 건넸다.

“시현 씨!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요!”

나는 일단 가볍게 미소부터 보이고 말문을 열었다.

“제가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명예경찰까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여러분, 저 오늘 경장 됐습니다. 하하.”

기자들 웃음소리가 잠시 들썩인다.

“음··· 학교폭력은 잠깐의 노력으로 없어질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도 어른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겁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물론, 저도 열심히 홍보대사 활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포토타임을 가진 뒤에 우리는 서둘러 경찰청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곧장 다음 스케줄로 이동해야 하는 만큼 잠시의 짬도 없다.

“청장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이고, 차 한잔 하고 싶었는데.”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경찰청장이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제가 나중에 한번 다시 들릴게요.”

“그래요, 우리 약속한 겁니다?”

“예.”

경찰청장과 악수를 하고 건물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팬들과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들이댔다.

우리는 간신히 차에 올라타 경찰청을 빠져나왔다.

“하··· 죽겠네.”

겨우 한숨을 돌린 강 실장이 시간을 살핀다.

“이거 늦겠는데? 하필이면 제작발표회 날 위촉식이 겹쳐서. 하여간 경찰들··· 여론 안 좋아지니까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뭐 어때요. 덕분에 잘됐지.”

바람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분다.

주효정의 팬 미팅 콘서트 무대로 그녀에 관한 관심이 폭발했고, 기자들은 그 앞에다 불을 피우고 열심히 부채질했다.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경제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아이템에 어떻게든 나를 엮어서 기사를 써댔다.

“그래도 여론이 무섭긴 무서워요.”

그 덕에 형사기동대까지 나섰으니까.

후.

나는 서아린이 편히 메이크업할 수 있도록 눈을 감았다.

“실장님. 우리 라디오 들어요.”

“오케이.”

강 실장이 라디오를 틀었다. 치치직 소리가 들리고.

-여러분 지금 어디에 계세요? 학교에? 집에? 아니면 거리에 계신가요? 아, 거리면 우리 방송 못 듣겠네요. 후후··· 오늘 제가 여러분을 찾아오기 전에 여의도 공원을 걸었어요. 겨울 날씨 같지 않고 화창한 봄 날씨 같더라고요.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도 잠깐 햇살 아래를 걸어보는 게 어떨까요? 연인하고, 혹은 친구하고··· 뭐, 정 싫으시면 이 노래를 듣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겁니다.

지에스와 계약을 하고 얼마 전에 새 라디오 프로그램에 들어간 현승아의 목소리가 흐른다.

-요즘 가장 핫한 노래죠. 이시현과 슬기의 ‘너라서’, 그리고 역시 이시현과 주효정의 ‘영웅’ 두 곡 들려드릴게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이시현 씨 드라마 제작발표회가 있네요? 또 어떤 모습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지금까지 현승아의 ‘기분 좋은 오후’였습니다.

그럼··· 우리 내일 또 함께해요. 사랑해요!

이제 노래가 흐른다.

슬기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내 목소리가 이어지고, 또 내 목소리를 시작으로 주효정의 마지막 외침이 차 안 가득 퍼진다.

일어나서! 주먹을 뻗어.

너도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줘!

일어나서! 주먹을 뻗어.

네가 더이상 물러서지 않을 거란 걸 보여줘!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주효정이 앞으로의 힘든 시간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시현아.”

살짝 졸고 있었는데, 강 실장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린다.

등을 떼고 차창 너머를 보니 ‘스텝’ 제작발표회가 있을 극장 앞에 있는 수많은 기자와 인파, 그리고 먼저 도착해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성지훈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 아직 스케줄은 끝나지 않았지.

“준비됐지?”

“예.”

“내리자!”

드르륵.

**

“원래는 바로 전학은 힘듭니다. 하지만, 이 건은 교육부에서도 특별히 공문이 내려온 거고··· 뭐, 저희도 마다할 이유가 없죠.”

부모님이 젊은 선생님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인다.

주효정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입술만 핥으며 기다렸다. 그게 안쓰러웠는지, 선생님이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효정 학생, 조금 따분하지? 학교 구경 좀 하고 있을래? 전에 촬영 때는 시간 없어서 제대로 못 봤을 거 아니야?”

“···예.”

머뭇거린 끝에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무실을 나온 그녀는 찬 기운이 남은 복도를 거닐었다.

방학, 더구나 보충수업도 끝난 기간이라서 학생들은 없을 텐데···

‘아.’

복도 끝에서 여러 명의 학생이 보이자 주효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애들인데, 낯선 곳, 낯선 상황이라는 사실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또···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시현은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워 줬지만, 하루아침에 그 시간들을 털어낼 수는 없는 법.

“어?”

학생들이 그녀를 발견했다. 교복을 입은 자신들과 달리 주효정은 사복 차림이었으니 눈에 확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효정이다!”

그녀들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얼떨떨해서, 무서워서 잔뜩 주눅 든 주효정을 둘러쌌다.

“너 이시현 팬 미팅 때, 이시현하고 함께 노래 부른 주효정 맞지?”

“맞는데··· 왜?”

“역시! 주효정 맞았어! 너 무대 완전 멋있더라? 짱짱!”

껑충껑충 뛰는 아이들 모습에 당황스러워서 눈만 깜빡이는 것도 잠시.

아이들은 그녀에게 무대에 관해서 묻기 시작했다.

그 얼굴들에는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주효정을 괴롭힌 가해 학생들의 경멸의 시선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겨우··· 그녀도 입가에 미소를 띨 수 있었다.

“우리 또 보자!”

학생들은 손을 흔들면서 다음에 다시 볼 것을 기약하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잘 됐구나.”

엄마의 말에 주효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과의 대화,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순간이었으니까.

“가자.”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저기.”

뒤를 돌아봤더니 야구부원이 서 있었다. 수줍은 그 얼굴이 눈에 익었다.

“나··· 기억해?”

백승준의 질문에 주효정이 머뭇거리자, 그녀의 부모님은 웃으면서 먼저 차에 가 있겠다고 말했다.

“여기··· 전학 오는 거지?”

모자를 벗은 백승준은 괜스레 귀를 긁적이며 물었다.

“응.”

“그럼··· 매일 보겠다.”

“응.”

“그렇구나······.”

백승준은 연거푸 입술만 핥았다.

성지훈이 이럴 때 쓰라고 멋있는 말을 잔뜩 가르쳐줬는데, 지금 순간 다 잊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바라봤는데.

“아, 눈이다.”

백승준은 하늘을 보며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내리는 눈송이를 쫓아 펼쳐진 주효정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제 손바닥에 부딪혀 녹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마치, 긴 시간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함께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나··· 전화번호 알려줄래? 아, 막 전화하고 그러지 않을게. 그냥.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 있으면 돕고, 너 무슨 일 있으면······.”

혼잣말을 정신없이 내뱉던 백승준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겨우 다물었다. 그러자 주효정이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본다.

그 미소.

더는 고민 따위는 없어 보였다.

< 고고, 강한놈들 (1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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