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24화 (124/227)

< 고고, 강한놈들 (10) >

“하··· 하··· 하······.”

숨 가쁜 걸음으로 진행 요원들 사이를 지나쳐온 백유진이 대기실 문을 힘껏 열었다.

덜컹.

안에 있던 댄서들, 스태프들, 지에스 각 부서 팀장을 비롯한 매니저들, 그리고 이시현의 시선까지 그녀에게 닿았다.

“어떻게 됐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대요!”

“젠장!”

한지웅 팀장이 인상을 팍 쓰고 구둣발로 바닥을 찍자, 성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무전기!”

누군가 무선 인터컴을 건넸다.

낚아채듯 가져간 성 팀장이 악을 써가며 외친다.

“감독님! 이시현 무대 바로 올라가요!”

“블랙보이 이 자식들 불안불안하더라니.”

분노한 강 실장이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사이, 스타일리스트 서아린은 눈을 부릅뜨고 이시현을 최종 체크했다.

“운동화 오케이, 바지 오케이, 티셔츠, 머리 오케이! 그리고 얼굴··· 오케이.”

“슬기는?”

“슬기도 준비 끝!”

청바지에 스웨터를 걸친 슬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린다.

하얗게 탈색한 머리에 하얀 피부.

팬 미팅 콘서트 촬영을 담당한 스태프가 놓치지 않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데, 이시현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기야.”

순하디순한 얼굴에 미소를 곁들이고 말한다.

“가자.”

**

첫 라이브, 첫 무대.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했던가.

그래 얼마나.

“우린 언제까지 친구로만 남아야 할까”

슬기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시선이 내게 닿고, 내 미소와 설렘이 그녀에게 화답한다.

“사실은 말이야 난 오래전부터 널 바라만 봤어”

넌 기억할까 내 키가 너보다 좀 더 작았을 때를.

나한테 네 첫사랑 얘기를 했을 때를.

그 날 난 알았어.

어쩌면 내가 널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걸.

“가끔 투덜댔던 것도 가끔 너를 피한 것도 그건 무서워서였어”

우리는 호흡을 섞으며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내가 기억하는 3W 슬기는 철없고, 수다스러운 아이였는데, 지금 내 옆의 슬기는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다.

그리고 내 팬들.

어쩌면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에 시선을 빼앗긴 것처럼 넋이 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처럼··· 저 친구들도 시선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겠다.

별이 아닌 내게 말이다.

“나 이젠 말할게”

“아니 내가 먼저 말할게”

사랑해.

슬기의 미소를 끝으로 나는 마이크를 내렸다.

현기증이 밀려와서, 고개를 들고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타다타다타다.

바람을 가른 헬기가 하늘을 선회한다.

헬기에 탑승한 카메라맨이 상공에서 잠실종합운동장을 카메라에 담고 있을 거다.

잠실종합운동장을 가득 채운 코발트블루 색상의 풍선.

카메라맨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텁석.

따뜻한 손의 온기에 고개를 돌려 내려다봤다. 슬기가 미소를 띠고 나를 본다. 팬들을 바라보라고 속삭였다.

그래서 앞을 봤더니, 팬들은 한목소리로 단 하나의 이름을 외쳤다.

바로 내 이름.

-이시현!!

잠실종합운동장이 들썩인다.

내 이름을 외치고, 내 이름에 환호하는 수많은 팬이 흔드는 풍선이 아름다운 파란 물결을 만들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무대에 설치된 메인 스크린과 두 대의 보조 스크린에 비친 나와 슬기의 모습.

내가 저런 미소를 짓고 있구나.

내가··· 저렇게 행복해하고 있구나.

슬기는 추위 때문인지, 열기 때문이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팬들은 계속해서 슬기와 내 이름을 연호했다.

그래서 잠시 이 순간에 빠져든 동안, 진행자로 무대에 오른 연기자 이성연이 미소를 띤 채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시현 씨. 팬들에게 지금 무슨 말 하고 싶어요?”

나는 팬들을 바라보고, 파란 물결을 향해서 미소 지었다.

“우리 시현 수포··· 사랑해.”

때로 팬들의 함성을 듣고 있으면 여름 장마철 쏟아지는 빗속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눈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스며들어, 너무 벅차 눈시울이 붉어진다.

“시현 씨 제가 장담하는데··· ‘너라서’ 분명 금주 인기차트 1위합니다.”

진행자 이성연의 호언에 장내는 다시 들끓었다.

“오늘 시현 씨 팬, 몇 분이 오셨는지 아세요?”

“후···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물론 견적이야 나온다.

딱 봐도 운동장 3층까지 꽉 채웠으니까.

근데 말이야.

빈말이 아니라 나는 여기 있는 팬들 반만 왔어도, 아니 그보다 못했어도 지금처럼 눈시울을 붉혔을 거다.

“자그마치, 무려 5만 명이······.”

순간 다시 터진 환호성에 이성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기가 질렸다는 듯 웃음만 보이다가 마이크를 흔들며 붉은 입술을 속삭였다.

“대체, 우리 신세대가 보는 시현 씨 매력은 뭘까요? 아니면 얼굴에 뭐가 묻어있나? 슬기 씨, 슬기 씨는 아세요?”

“잘생김?”

콘서트는 소리 지르려고 오는 곳이다.

그래서 내 팬들, 오늘 아주 작정한 모양이다.

“아이 이러면 진행을 어떻게 해?!”

이성연이 너스레와 함께 어깨를 으쓱.

“시현이 오빠요? 음······.”

고우희가 접히지도 않는 이마 주름을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생각에 잠겼다.

“그냥 천사.”

어이쿠.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도로 뱉을 뻔했다.

그녀의 말치레에 이어 과도한 눈빛이 내게 향했다.

큰 눈이 초롱초롱 나를 보고 있으니 팬들의 원성이 잠시 들썩거린다.

“촬영장에 매번 먼저 와있고요. 스케줄 없으면 다른 배우들 촬영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그리고 우리 시현 수포 회원들··· 밥 차 짱!”

고우희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시현 수포에서 보낸 밥 차가 촬영장을 수없이 들락거렸으니까. 아, 이 기회에 못을 좀 박아야겠다.

“저 할 얘기 있어요.”

손을 살짝 들었더니 이성연이 깔깔 웃는다.

“여기 시현 씨 세상이거든요. 손은 뭐하러 들어. 그냥 말해요.”

“다른 게 아니고··· 너희들 말 안 들을래? 돈 쓰지 마라니까! 밥 차 안 보내도 되고, 오뎅 차 안 보내도 되니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팬들의 외침이 쏟아졌다.

-싫은데!

-보낼 건데!

-말 안들을 건데!

“내가 이럴지 알았어.”

한번 피식 웃고.

“정말이야. 나는··· 너희들만 있으면 돼.”

돈도 필요 없다.

이제는 물질 욕도 없다.

사람 욕심도 없다. 아, 이건 아닌가. 팬도 사람이니까.

그래, 나는 그냥 팬만 있으면 된다.

여기 있는 모두가 언제까지고 나를 좋아해 줄 거로 생각하진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래, 지금의 거품도 사라지겠지.

이 열기도, 세상의 들썩임도, 부풀어진 거품도 사라지면, 그때는 오늘 모인 팬 중에 반의반도 안 남을지 모른다.

그래도 뭐··· 충분하다.

다시 태어난 것치곤, 대박 친 거니까.

**

무대엔 게스트로 온 최미숙과 고우희가 ‘우리 오빠’ 촬영 뒷얘기를 하고 있었다.

최근 라디오를 하는 덕인지 고우희의 언변이 수려하다.

이시현의 웃음소리도 들리고.

“꼭꼭 씹어먹어.”

성지훈은 주효정이 우황청심환을 입에 무는 모습을 지켜봤다.

“떨리니?”

무대 아래 리프트에 주효정이 올라서자, 성지훈은 물었다.

그는 이미 무대를 마쳤지만 떨고 있는 그녀를 위해 곁에 있어 주는 것이다. 물론 지에스 스태프들 모두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고.

“떨려요.”

주효정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메이크업을 막 끝냈을 때의 흥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효정아. 너 그거 알아?”

“예?”

“나 오늘 엄청 노력하고 있다? 지금, 태연한척하려고 되게 노력하고 있어.”

성지훈은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대체 청심환을 몇 알을 먹은 건지.

지금은 되레 가슴이 뜨거워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다.

“나 실은, 너보다 더 떨었으면 떨었지 못하지 않았어. 이런 무대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거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

“그렇잖아? 못하면 쪽팔리잖아.”

웃으며 말해서인지, 주효정의 얼굴에 그나마 미소가 새겨진다. 그런데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무서워요··· 실수하면 어떻게 해요?”

“너 죽을 각오도 했었다며?”

주효정은 왕따가 괴로워서 죽고 싶다고 했던 애다.

“근데 뭐가 무서워? 실수 따위 해도 돼. 안 죽어. 아니··· 오늘 그냥 죽어라. 무대에서 이시현 붙들고 죽어.”

농담과 달리 성지훈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러자 주효정도 물 한 모금을 더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죽을게요.”

어차피 물러설 곳은 없다.

성지훈도 그랬고, 주효정도 그렇다.

스태프가 그녀에게 달라붙어 마이크와 인이어를 채우고 물러났다.

-그럼 시현 씨. 다음 무대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누가 올라오나요?

무대에서 이제 주효정을 소개한다.

성지훈을 비롯해 ‘고고, 강한놈들’ 제작진은 숨죽여 기다렸다.

-어제, 그것이 궁금하다 본 사람?

지금 아마 꽤 많은 풍선이 들썩일 거다.

-거기서 왕따 당하는 친구 있었죠? 현장에서 괴롭힘당하고 있던 친구.

팬들의 대답에 무대가 들썩인 순간, 성지훈은 주효정의 손을 잡았다. 흠칫 놀란 그 손을 꼭 붙잡았다.

긴장될 테니까. 떨릴 테니까. 도망치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한번 도망치면 계속 도망쳐야 한다.

-얼마 전 제가 ‘고고, 강한놈들’을 촬영했어요.

-그래요?

이성연이 한 박자 쉬고 물었다.

-그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고민을, 출연자가 해결해주는 프로그램이거든요. 그리고 출연자를 영웅이라고 해요. 거기서 제가 맡은 시청자의 고민은, 따돌림 때문에 죽고 싶다는 고민이었어요.

-아··· 진짜?

-근데, 전 솔직히 이해가 안 갔어요.

-왜요? 왕따 문제 요즘 흔하잖아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 친구가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답 대신··· 지금부터 보여드릴게요.

이제 리프트가 들썩인다. 주효정은 잠시 몸을 가누지 못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지훈의 손을 놓았다.

-여러분, 그 친구가 작사한 노래입니다. ‘영웅’ 들려드리겠습니다.

마침내 리프트가 움직인다.

지에스 모든 식구가 무대로 올라가는 주효정을 향해 엄지를 흔드는 사이, 성지훈은 뒤로 물러나면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

왠지 주효정의 모습이 자신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아직 그녀의 무대는 시작하지 않았지만, 잘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데··· 문득, 성지훈의 옆에서 속삭임이 들렸다.

“멋있었어요.”

“그래요?”

“예. 역시 성지훈.”

최 팀장 동생 서민지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

[5만 명의 팬이 운집한 잠실종합운동장! 성대한 축제!]

[배우 이시현, 팬 미팅 콘서트 성공리에 마무리!]

[화려한 손님! 화려한 볼거리!]

[가수들 긴장해라! 이시현 노래에 울고 웃은 팬들!]

[이시현, 그럼에도 자신은 ‘배우 이시현’]

[SBC ‘이시현 팬 미팅 콘서트’ 오는 토요일 녹화중계!]

세상이 온통 이시현 얘기다.

TV를 틀어도 이시현, 길을 지나는 동안에도 이시현.

하지만 신문에는 축제에 관한 얘기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시현, 왕따 문제 직접 뛰어들었다.]

[우리 사회가 외면한 문제. 스타는 달랐다.]

[완벽한 작사, 완벽한 무대. 누가 그녀를 왕따라고 했는가?]

-SBC ‘그것이 궁금하다’ 제작진이 가해 학생 중 일부가 사회 고위층 자제라는 사실을 밝힌 가운데, 배우 이시현이 팬 미팅 콘서트에서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다. 주효정과 함께 무대를 마친 그는 팬들에게 물었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뭘까요?’

팬들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머뭇거렸고,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여러분 그런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왕따 당할 이유 따위는 없어요. 그저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못난 이들이 존재할 뿐입니다? 와··· 이 자식 말도 잘하네.”

신문기사를 읽던 남자는 혀를 내둘렀다. 배우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줄 알았더니만.

하지만 기사 속 이시현의 모습이 탐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일이 늘었으니까.

“형님.”

문이 열리고, 껄렁껄렁한 녀석이 들어왔다.

“기동대 애들 들어왔습니다.”

“오케이.”

남자는 신문을 내려놓고 형사과로 향했다.

가뜩이나 좁아 주겠는데, 형사과 한편에 수갑 찬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다른 형사들이 한 명씩 끌고 가서 심문하기 시작하자, 남자도 유난히 짙은 노랑머리의 여학생을 데려다 책상 앞에 앉혔다.

“우리 쉽게쉽게 가자. 빨리하고 짜장면 먹어야지?”

“아이 X”

컴퓨터 자판 앞에서 손을 벌렸던 남자가 멈칫한다.

여학생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한숨과 함께 턱을 괴고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가 웬만해서는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니들한테는 수갑을 채우진 않거든? 근데 너 지금 수갑 차고 있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내가 뭘 잘못했는데?”

“허. 임마 이거 심각한 거야. 지금 니들 때문에 나라가 들썩이고 있어. 하루에 항의 전화가 몇 통이나 오는지 알아? 배우가 나서서 학교폭력과 싸우는 동안에 경찰은 뭐하냐고 난리야 이 녀석아! 그래서 기동대까지 떠서 니들 현행범으로 잡아 온 거 아니야!”

“아이 X”

단순한 건지. 아니면 자존심인지.

말을 못 알아듣는 여학생의 모습에 남자는 더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씰룩이는 턱을 숙이며 묻는다.

“이름.”

여전히 인상만 쓰고 있는 여학생.

“이름!!”

형사과가 쩌렁쩌렁 울린다.

그제야 여학생의 얼굴에 겁이 덜컥, 스며들었다.

< 고고, 강한놈들 (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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