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고, 강한놈들 (8) >
“수고하셨습니다.”
카메라가 꺼지면 현장은 또 다른 의미로 분주해진다.
촬영 스태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스타와 매니저들.
뭐가 그렇게들 바쁜지.
스케줄이 있든 없든 항상 바쁜 티를 내는 게 스타들이다.
그들이 타고 온 차가 현장을 떠나면 붕 뜬 분위기도 가라앉는데, 그때가 정말 촬영이 끝나는 순간이다.
“자, 다들 모여봐.”
장비 차량이 철수하는 동안 연출진이 한자리에 모여 오늘 촬영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방송국 들어가면 지치니까, 금 피디는 가능한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편이다.
두런두런 모여 편집점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메인 작가가 머리띠를 고쳐 쓰며 말했다.
“아까 연기할 때, 수정 씨가 이시현 노려보는 거 봤지? 장난 아니더라. 진짜로 싫어하는 것 같던데?”
“에이 설마요. 이시현 출연할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자기도 꼭 출연하고 싶다고 한 게 이수정이에요.”
“그런 말을 했어? 하여간··· 연기자는 속내를 모르겠어.”
가만히 작가들의 대화를 듣던 금 피디는 얼굴에 손부채를 하며 지친 미소를 드러냈다.
“이 날씨에도 종일 뛰어다녔더니 입에서 단내가 나네.”
“그래도 오늘은 진짜 제대로 찍었잖아요.”
촬영팀도 간만에 일한 것 같다고 했을 정도니까.
“근데, 아까 성지훈 씨 매니저와 무슨 얘기하신 거예요? 그 매니저가 이시현 키운 매니저 맞죠?”
조연출의 질문에 금 피디는 손부채를 멈추고 말했다.
“지훈 씨 좀 챙겨달라고 그러더라. 너무 이시현한테만 초점 잡지 말아 달라고.”
“그런 거 보면 회사라는 게 참 그래요. 어제까지 남이었어도 같은 회사 됐다고 챙겨주고.”
“괜히 잘나가는 매니저겠어? 그렇게 제 사람 단단히 챙기니까, 3W에 이시현까지 연달아 홈런 치는 거지.”
시답잖은 얘기는 이쯤하고.
금 피디는 안경을 고쳐 쓰고 작가들을 일일이 바라봤다.
“내일부터 이시현 따라다니는 거··· 작가 하나 붙일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이시현은 팬 미팅 전까지 주효정을 매일 만나 연습할 거라고 했다.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어떻게 생각하긴요. 당연히 붙여야지. 애들 바쁘니까··· 내가 갈게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메인 작가의 사심성 발언에 서브 작가들이 바로 반발이다.
“얘들 보게··· 내가 놀러 가니?”
“그러지 말고, 막내 니가 가.”
“제가요?”
금 피디가 바로 노선 정리를 했다. 메인 작가는 이맛살을 구겼고, 서브 작가들은 질투와 부러움의 시선으로 막내를 바라봤다.
“근데 너 오늘 머리에 힘 좀 줬다?”
늘 귀신처럼 머리를 축 늘어트리고 다니던 막내 작가가, 오늘은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서 올림머리를 하고 왔다.
“진작 좀 그러고 다니지. 그렇게 하니까 얼마나 보기 좋니? 이마도 예쁘고 뒷머리도 볼록하니 예쁘기만 한데, 왜 그렇게 가리고 다녔어?”
“그야 뭐··· 바쁘니까.”
괜스레 딴청을 피우는 모습에 작가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끼어들었다.
“이시현 왔다 이거지. 그러니까 힘쓴 거 아니겠어요?”
“우리 막내가 언제 시집가나 했더니만, 이루지 못할 꿈을 꾸고 계셨네.”
“왜 막내한테 그래? 그러는 너는? 뿌리염색 다시 했네? 그리고 너. 오늘은 웬일로 머리 감았어?”
“저 매일 감거든요?”
서브 작가의 항변에 다들 얼굴을 찌푸린다.
**
차에서 내린 강 실장은 이맛살을 구기고 하늘을 바라봤다. 숨죽여 내린 눈 사이로 그가 뱉은 하얀 입김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이런 날은 따뜻한 국물에 소주 한 잔 마셔야 하는데.”
여전히 차 문을 열어놓은 채로, 강 실장은 나를 향해 술타령을 하고 있다.
매운탕, 닭볶음탕, 김치찌개 같은 얼큰한 찌개를 언급하면서 오만상을 구긴 채 한잔 마시듯 손을 꺾는다. 그런 다음에야 한송이와 서아린을 눈에 담았다.
“지훈이 샵에 내려주고 바로 녹음실로 갈 거니까 편의점에서 간단히 때우자. 너희들 뭐 먹을래?”
“저희가 갔다 올게요.”
서아린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일어나려 하자, 강 실장이 손등을 휘젓고 한송이를 향해 물었다.
“너는?”
“전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요.”
그 말에 다들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한송이가··· 입맛이 없다고? 세상에.
“실장님, 내가 지금 뭐 잘못 들었어요? 아린아 밖에 한 번 봐봐, 전쟁 난 거 아니야? 한송이가 입맛이 없다니? 이게 말이 돼?”
“아 진짜! 더 이상의 놀림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한송이가 나를 향해 검지를 내밀고 콧바람을 쏴쏴 뿜는데, 나는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놀리고 싶어도 못 놀리지. 우리는 이제 한 팀이 아닌데.”
“아우 그냥!”
“그만들 좀 해라. 니들은 그게 재밌냐? 애들도 아니고.”
부들부들 떠는 한송이의 모습에 강 실장이 한숨을 푹 내쉰다. 반면 함께 탄 성지훈은 쿡쿡 웃고 있는데, 차가 퍼져서 내 차로 이동 중이다.
아무튼 나는 한송이의 이마를 꾹 눌러서 밀어내고 강 실장에게 말했다.
“실장님, 얘들 데리고 근처 식당가서 식사하고 오세요. 지난번처럼 녹음실에서 짜장면 시켜먹으면 이영태 선생님 난리 칩니다.”
“야, 그 형 결벽증이야. 그거 고치려고 내가 일부러 시켜먹는 거야.”
강 실장의 짓궂은 웃음을 보니까, 지금쯤 이영태의 귀가 꽤 간지러울 것 같다.
“그냥 식당에서 편하게 드시고 오세요. 선배님은 다이어트 중이시죠?”
“예. 난 괜찮아요.”
성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강 실장은 끙 신음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먹을만한 곳이 있나 모르겠네. 아린아 내려라. 빨리 먹고 오자. 송이 너는 진짜 안 먹을 거지?”
안 먹기는. 아까부터 꼬르륵 소리가 나더만.
“송이 너도 가서 먹어. 나 좀 조용히 있고 싶거든? 너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좀 쉬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더니 송이가 으르렁거린다. 왜 자기가 없으면 조용해지냐고.
얘가 정말 몰라서 묻나?
결국 한송이도 마지못한 듯 내리더니만, 눈에 불을 켜고 식당을 찾는 모습이 차창 너머로 보인다. 강 실장과 한송이의 모습은 굶주린 하이에나였다.
“훗.”
성지훈이 피식 웃었다. 인근 국밥집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혼잣말하듯 나 들으라고 말한다.
“이제 정말 겨울이네요.”
“그러게요.”
나는 겨울이 질색이다. 곰도 추위는 타니까.
그래서 가을 겨울은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지금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
건강한 몸.
나는 지금 건강하다. 그래서 아침마다···
“시현 씨 주위는 웃음이 끊이질 않네요.”
둘이 남으니, 성지훈이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그냥 농담 따먹기 하는 거예요. 항상 같이 붙어 다니니까.”
내 말에 성지훈이 찌푸린 미소를 보였다.
“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내가 한송이 씨 뺏었네요.”
“뺏어가긴요. 전 오히려 조용해져서 좋은 걸요? 하하. 근데··· 송이 실력 좋아요. 선배님에게 도움 많이 될 겁니다.”
성지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쳐다봤다.
“오늘 촬영 고마워요.”
“뭐가요?”
“시현 씨가 나 많이 배려해주고 있는 거 알아요.”
“에이. 저 그런 재주 없어요.”
그리고 남자들끼리 이런 대화 싫거든? 징그럽다 임마.
“오늘 시현 씨 계속 내 옆에서 있었잖아요. 일부러 화면 겹치게 해준 거 알고 있어요. MC 질문 들어오면 나한테 넘겨주기도 했고.”
자식, 눈치는 있나 보네. 하긴··· 그러니 버티고 있지.
사실 그동안 성지훈이 나 때문에 알게 모르게 손해 본 게 많을 거다.
비록 희대의 발연기로 드라마 망쳐 욕먹는 것에 비하면 이게 더 나은 인생일지 모르지만, 그거야 나밖에 모르는 사실이고.
성지훈에게 있어선 아쉽게 놓친 기회였을 거다.
“주효정 학생은, 정말 무대에 올릴 거예요?”
“예.”
“궁금하네. 어떤 무대가 나올지.”
“효정이 잘할 거예요.”
그렇게 믿을 거다. 잘할 거라고.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후후. 그거 알아요?”
성지훈은 굽은 어깨를 펴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시현 씨는, 왠지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거.”
나는 잠시 말을 잃어서, 성지훈의 얘기를 곱씹었다. 아마도 내가 매니저였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실은, 나 시현 씨한테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요?”
성지훈의 표정이 심각하다.
“나 여기랑 계약할 때, 최 팀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내 연기하는 모습 보고 싶다고.”
최재환이 그런 말을 했다고?
무리수야 임마.
“그래서 말인데··· 나······.”
입술을 빨아들이더니, 성지훈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마주 댄 손바닥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기 좀 가르쳐줘요.”
**
‘후······.’
푸르르 입술을 떨면서 가방을 챙긴다.
하지만 주효정은 가방을 챙기다 말고 텅 빈 학원 교실을 돌아봤다.
오늘 촬영 내내 정신이 없었다. 이시현 곁에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면서도 놀랍기도 했고.
그런데 카메라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게 허무해졌다.
이시현 옆에 있을 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사실은, 가사를 다 썼지만 차마 이시현에게 보일 수가 없었다.
‘하··· 이걸로 될까.’
드라마 주제곡이라니.
매일 쓰는 일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 주효정은 가사를 쓰면서 조금씩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죽고 싶다, 괴롭다, 학교에 가기 싫다, 누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등등··· 매일 괴로움에 대해 썼던 일기와는 달랐다.
가사는 한줄 한줄 쓸 때마다 뭔가 힘이 느껴졌으니까.
부스럭.
주효정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펼치고, 가사를 눈에 담았다.
‘요, 체키럽! 요! 제발 나를 그냥 두면 안 되겠니··· 아, 이거 아니지.’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시현이 이상한 추임새 넣지 말라고 했으니까.
제발 그냥 두면 안 되겠니.
꼭 그렇게 괴롭혀야겠니.
그냥 겁이 났을 뿐이야. 그래서 주먹을 쥐었을 뿐이야.
저 안갯속에 쓰러져 있는 건, 너라고 생각해.
저 어둠에 웅크리고 있는 건, 그건 너일 거야.
일어나서! 주먹을 뻗어.
너도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줘!
일어나서! 주먹을 뻗어.
네가 더이상 물러서지 않을 거란 걸 보여줘!
RAP) 더는 피하지 않아, 이제 그냥 맞을래. 나를 향한 장난 따위 웃으며 마주할 거야. 내가 좋아하는 것들, 사랑하는 사람도 더 이상 양보하지 않을 거야. 너는 몰랐을 거야. 언제까지 내가 너한테 무릎 꿇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 알아, 나는 그런 머저리였으니까.
좋아, 다 내 잘못이라고 여겨도 좋아. 지금까지 일 아무렇지 않아. 나는 이제부터 다른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이제 내 앞에서 꺼져······.
‘하······.’
주효정은 긴 호흡을 쏟아냈다. 몇 번을 봐도 촌스러운 가사인데, 그래도 읽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오늘 이시현에게 질문을 했었다.
왕따에, 예쁘지도 않은, 그런 여학생이 달라져 봤자 얼마나 달라질 수 있냐고. 신데렐라처럼 되는 거냐고.
그랬더니 이시현이 말했다.
마법은 동화책에서나 찾으라고. 그런 환상은 갖지 말라고. 그저 조금씩 변하면 되는 거라고. 단지 남들보다 좀 더 서두르려고··· 함께 노력하자고.
‘왠지 굉장히 위로가 되는 말이었어.’
주효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에 노트를 밀어 넣었다.
그런데···
손에서 뭔가가 빠져가는 느낌과 함께 누군가 노트를 낚아채 갔다.
“어?”
짧은 치마, 바지통 줄인 교복, 삐져나온 셔츠, 풀어진 카라, 공포의 시선들.
“그거 줘.”
주효정은 서둘러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노트를 서로 돌리기 시작했다.
“달라니까.”
“이년이 미쳤나!”
급기야 노랑머리 여학생이 주효정을 걷어찼다.
“앗!”
책상이 널브러지고, 비명과 함께 훌렁 자빠진 그녀의 모습에 학생들은 깔깔 웃었다.
“뭐야? 이거 가사야? 하하! 이거 니가 쓴 거야?”
“야 뭔데?”
“이거 봐봐.”
학생들은 주효정의 노트를 보며 깔깔웃기 시작했다. 조롱하고 비웃는다. 수치와 절망이 주효정에게 쏟아졌다.
“제발 줘.”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사정해보지만, 학생들은 계속해서 노트를 돌려보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 사이에서 그녀는 마치 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여기로 갔다, 저기로 갔다, 쓰러지고, 일어서고··· 학생들 사이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 미친X이 이거 우리 보라고 쓴 거냐?”
노랑머리 여학생이 주효정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당기고 눈을 부라린다.
“이게 진짜 죽을라고.”
더 힘껏, 노랑머리는 머리채 쥔 손에 힘을 줬다. 주효정의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단발마 비명이 터진 그때··· 누군가의 손이 노랑머리의 어깨에 올라왔다.
“뭐야? 씨······.”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노랑머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효정의 머리채를 쥔 손을 천천히 놓을 뿐이었다.
< 고고, 강한놈들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