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고, 강한놈들 (6) >
출연진이 한자리에 모여 인사를 나누는 동안, SBC 일산제작센터 앞 오프닝 촬영장은 몰려든 인파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타 프로그램 피디와 스태프들, 시민들까지 이시현을 보기 위해 모여든 상황. 방송국 내 직원들도 이시현을 보려고 창가를 서성였다.
“진짜 이시현이 왔어······.”
“금 피디는 이시현을 어떻게 잡은 거야?”
지난주 전국을 울린 ‘다시 만난 우리 오빠’ 이후··· 노래와 영화, 드라마, CF등 쏟아진 수많은 러브콜을 제치고 폐지 직전의 ‘고고, 강한놈들’에 이시현이 출연한다는 사실에 SBC는 발칵 뒤집혔다.
심지어 SBC 뉴스팀도 카메라를 들고 오프닝 촬영장에 끼어들었다.
“일단 이시현은 카메라 한 대는 계속 쫓아다녀야 해.”
“몇 번을 얘기해? 걱정하지 마, 종일 붙어 다닐 거니까.”
촬영 감독은 자신보다 한 뺨은 작은 금 피디의 신신당부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당부 없어도, 오늘 하루 이시현의 하품하는 모습까지도 카메라에 담을 각오니까.
“아, 눈 그친다.”
금 피디가 하늘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예고 없던 눈 때문에 스튜디오로 옮겨야 하나 잠시 고민했기 때문인데, 이러는 사이에도 스태프들은 이시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야, 그냥 화보네 화보.”
내린 눈에 비친 햇빛이 반사판 역할까지 해주고 있어서, 이시현의 얼굴은 오늘 제대로 빛나고 있었다.
“저런 애는 대체 어디 숨어 있다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대한민국 좁다 좁다 해도, 작은 나라가 아니라니까.”
금 피디와 촬영 감독이 이시현을 보며 혀를 내두르는 사이, 모여 있는 출연진 앞에서 조연출이 두 팔을 벌리고 손뼉 칠 준비를 마쳤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짝!”
**
“고고! 강한놈들!!”
MC 김진석의 구호에 출연진은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바람도 불지 않고, 하늘도 맑아서 촬영하기 좋은 날이다.
“여러분! 사연을 해결해줄 영웅을 소개합니다. 배우 이수정! 가수 성지훈! 그리고 이시현!”
MC 김진석은 이전 촬영 때와 달리 리액션에 힘이 잔뜩 붙었다.
지난번 번개콘서트를 통해서 이시현 효과를 제대로 확인했던 김진석은 오늘도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김진석뿐 아니라 ‘고고, 강한놈들’ 제작진 일동이 이시현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첫 번째 영웅을 소개합니다, 이수정 씨!
“안녕하세요, 배우 이수정입니다.”
귀밑머리를 쓸어올린 이수정이 카메라를 향해 고운 미소를 보였다. 가죽 장화에 블랙진, 회색 스웨터 차림의 그녀 모습에 남자 스태프들의 시선이 쏠린다.
‘얘는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네.’
성지훈은 그녀를 힐끗 눈에 담았다.
몇 번 마주치긴 했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시선이 갔다.
듣자 하니 성격이 무척 드세다는데··· ‘우리 오빠’ 촬영장에서도 문제를 일으켰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찌 됐든 시청률 50프로를 넘긴 드라마 덕에 제법 콧대가 오른 모습이다.
‘뭐,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이수정이 자신의 근황을 얘기하는 동안 성지훈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에스와 계약 후 첫 공식 스케줄.
계약과 동시에 쏟아진 기사들만 봐도 지에스의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으니까.
“지훈 씨는 곧 컴백하시잖아요?”
“예!”
“4집 타이틀곡 살짝 들려주세요.”
성지훈은 MC의 요구대로 타이틀곡 ‘그리워서’ 클라이맥스를 살짝 불렀다.
지난번 미팅에서 금 피디가 홍보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했듯, 질문이 좀 더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이시현의 소개.
‘윽!’
성지훈은 이시현의 이름이 호명되면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박수를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제히 터진 팬들의 환호성에 움찔해서 타이밍을 놓쳤다.
촬영이 들어간 잠깐 사이, 이시현의 팬들은 더 늘어서 주변 일대를 가득 메웠다. 카메라는 대체 몇 대가 이시현을 찍고 있는 건지···
눈앞에 보이는 카메라만 열 대가 넘는다.
카메라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산이 성지훈의 눈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한때는 성지훈 자신도 스타였고, 활동하면서 수많은 스타를 봤지만, 이시현을 향한 이 열기는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배우예요, 가수예요?”
MC가 짓궂은 질문을 담아 이시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배우 이시현입니다.”
이제 외모 면에서 성지훈은 이시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저런 미소. 저거 반칙이다.
“하하하! 시현 씨는 참, 말도 잘해.”
이시현의 말 한마디에 MC는 뭍에 올라온 생선마냥 팔딱팔딱, 아주 흥분해서 야단법석이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상반된 리액션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은 약육강식의 세계니까.
게스트들의 소개가 끝나고 MC는 고민 사연의 주인공과 영웅을 나란히 세웠다.
성지훈 ? 운동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인 고교야구선수 백승준
이수정 - 앞으로 뭘 하며 살지 잘 모르겠다는 잘생긴 남학생 서진운
이시현 -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여학생 주효정
성지훈은 파트너 백승준을 바라봤다.
다소 주눅이 든 모습.
177센티미터인 성지훈보다는 조금 작아도 어깨가 딱 부러져 있는 게 제법 단단해 보이는데··· 눈썹이 매직이라도 그려놓은 듯 무척 진했다.
“제가 야구에 재능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건장한 덩치와는 달리 다 죽어가는 목소리.
“지금 포지션은 뭔데요?”
“투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했습니다.”
백승준은 무척 수줍어했다. 어색한 미소와 머뭇거림이 계속해서 입가에 묻어 있었고, 여드름을 가리려는 건지 이마를 자꾸만 매만졌다.
“지훈 씨는 왜 승준이의 고민을 택하셨어요?”
“그건······.”
성지훈이 이 학생의 사연을 채택한 이유.
그 역시도 데뷔 전인 중학교 시절 야구를 했기 때문이다.
투수였고, 당시 구속은 120KM 전후로 나왔었다.
‘내가 한때는 유망주였다고!’
성지훈은 이시현에게 보란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물론 이시현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프닝을 마치고,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백승준이 재학 중인 인근 고등학교.
제작진과 출연진은 3대의 미니버스에 나눠탔는데, 이동하는 길에 스태프들은 이시현하고 사진 한번 찍겠다고 난리를 폈다.
“저기.”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이시현에게 쏠려 있는 사이, 조금 떨어져 앉은 잘생긴 남학생이 주효정에게 말을 붙였다.
“말 놔도 돼요?”
“예?”
주효정은 깜짝 놀라서 남학생을 쳐다봤다. 마주친 시선에 숨이 텁 막힌다.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괜스레 손등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왜요?”
“싫으면 뭐······.”
“아, 아니에요. 말 놔도··· 돼.”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여학생과 남학생.
우연히 그 모습을 눈치챈 성지훈은 호기심의 시선으로 둘을 지켜봤다.
“난 서진운이라고 해.”
“난 주효정.”
수줍게 인사를 나누고, 서진운이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실은, 나도 중학교 때 왕따였거든.”
“정··· 말?”
주효정은 얇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진운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힘내라고.”
“으응!”
주효정의 얼굴이 붉게 피어오른다.
성지훈은 둘의 모습에서 눈을 떼고 자신의 파트너인 백승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승준아, 효정이 예쁘지 않냐?”
“예에?”
놀란 백승준이 눈을 크게 뜬다. 새까만 눈썹이 꿈틀.
“너 여자친구 있어?”
“아, 아니요.”
“그럼 이따가 한번 말 걸어봐.”
“아, 아, 아니에요.”
백승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성지훈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니가 운동만 하니까 금방 지쳐서 그래. 이럴 때는 마음을 나눌 상대가 필요한 법이야.”
그 말을 뱉은 순간, 성지훈은 이마를 찌푸렸다.
지금 막 머릿속이 번뜩였으니까.
‘그래. 연애야말로 마음의 걱정을 치유할 수 있는 완벽한 치료 약이 아닌가.’
성지훈은 지금 막 백승준의 고민을 해결해줄 방안을 찾은 것 같았다.
사연의 주인공들끼리 사귀게 되면, 또 그 가운데에서 오작교 역할을 하면, 프로그램도 흥하고 자신의 주가도 높아진다.
그리고 야구 선수가 남자친구인데, 누가 감히 주효정을 괴롭힐 수 있을까?
‘나··· 천재 아니야?’
성지훈이 제 생각에 감탄하는 사이에 백승준의 학교에 도착했다.
“뭐야?”
버스에서 내린 금 피디가 당황해서 조연출! 조연출! 외친다.
“야 애들 보충수업 지난주까지라며?”
“그랬는데, 애들이 자발적으로 나온 거래요. 이시현 보려고.”
눈썹을 휘날리며 교무실에 다녀온 조연출이 숨을 몰아쉬었다.
“미치겠네.”
금 피디는 이마를 북북 긁으며 학교 건물을 바라봤다. 창문마다 아이들의 얼굴로 가득하다.
이시현을 향한 환호성은 어디에서든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차분하게 진지한 장면을 찍고 싶었는데···
“쟤들 최대한 조용히 시켜!”
시현 오빠!!
이시현 사랑해, 여기 좀 봐줘요. 오빠오빠오빠!!
출연진이 버스에서 내리자 온갖 환호성이 이시현을 향했다.
팬들에게 손 흔들고, 주효정 챙기고, 이시현이 아주 분주하다. 그래서 성지훈 역시 경쟁적으로 백승준을 챙기며 귓속말을 쉼 없이 했다.
“승준아.”
“예.”
“형이라고 불러.”
“예··· 형.”
“형이 너 오늘 여자친구 만들어준다.”
“예에?”
“자식아 나만 믿어.”
“저는······.”
머뭇거림 속에서, 백승준의 시선이 잘생긴 서진운에게 닿는다. 성지훈이 백승준의 등을 팡 두드렸다.
“야, 잘생긴 거 아무 쓸모 없어. 사람은 마음이 제일 중요해. 잘생긴 애 중에 착한 애 별로 없다?”
그 말에 백승준이 성지훈을 슥 쳐다보더니, 다시 주효정 옆의 이시현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왜?”
“이시현 되게 착할 것 같은데요?”
성지훈이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백승준이 소속된 야구부가 운동장에 등장했다.
“감독님, 우리 승준 학생 어떤 선수예요?”
모자 아래 눈매가 매서운 야구부 감독이 딱딱한 자세로 카메라 앞에 서자, MC는 백승준의 학교생활부터 물었다.
감독이 카메라를 의식하며 입을 연다.
“우리 백승준 투수는, 장래가 매우 기대되는, 인재로서, 우리 야구부의 미래이자, 우리 백현고의 꿈이며······.”
금 피디의 한숨.
몇 번에 걸쳐 감독의 인터뷰 장면을 찍는 동안 백승준이 유니폼을 갈아입기 위해 카메라 앞을 벗어났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성지훈은 카메라 앞에서 야구 지식을 한껏 뽐냈다. 분량을 뽑기 위한 그의 노력을 응원하듯, 카메라 밖에서 최 팀장이 엄지를 척.
“아, 지훈 씨가 야구선수였구나.”
“한때였어요.”
성지훈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지만, 지금 전의를 불태우는 중이다.
때마침 백승준이 몸을 풀고 마운드에 섰다.
“백승준 파이팅!!”
마운드에 오른 백승준에게서, 촬영 내내 수줍어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휘익!
펑!
단단한 야구공이 포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갔다.
투구하는 모습에 카메라와 스태프들의 시선이 쏠리고, 이시현을 보러 등교한 학생들도 지금만은 백승준을 연호했다.
펑!
몇 번의 투구가 끝나자, MC의 제안으로 성지훈이 마운드에 올라갔다. 물론 이 순간이 올지 알고 성지훈은 새벽부터 헬스장에 들려 몸을 풀고 온 상태였다.
휘익!
성지훈의 투구폼이 제법 그럴싸하다.
펑!
“와아!”
출연진들도 놀라고, 학생들도 환호했다. 야구부 감독도 놀란 모습.
그런데 이때, MC가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시현 씨도 한번 마운드에 올라가 보시겠어요?”
**
펑!
이시현의 투구가 끝나고···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공을 잡은 포수는 엎어진 상태로 글러브를 끌어안은 채 신음하고 있었고, 성지훈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저 야구부 감독의 당황한 목소리만이 운동장에 퍼졌다.
“야! 누가 스피드건 가져와 봐!”
< 고고, 강한놈들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