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19화 (119/227)

< 고고, 강한놈들 (5) >

“난 널 도와주지 않을 거야.”

주효정의 눈동자가 절망의 끝에 선 것처럼 흔들린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가 가진 아픔이 안타까운 한편으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오랜만에 내가 잘하는 일을 할 생각이니까.

“대신, 애들이 너를 괴롭히지 않게 만들 방법을 알려줄 거야.”

“방법이요?”

“그래 방법. 그리고 그 방법을 알려주고 나면, 그때부터는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

“어떤··· 방법이요?”

“그건.”

얘길 꺼내려는데, 문이 열리고 슬기와 욱이 매니저가 녹음실에 들어왔다. 슬기를 본 주효정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 이 나쁜 놈들!”

주효정의 눈물 섞인 사연을 들은 슬기는 분개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기까지 했다. 가만둬서는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성난 고양이다.

“악마 같은 놈들!”

슬기가 아픔을 공감해서인지 주효정의 눈물샘이 마르질 않는다.

“그래서, 오빠는 얘한테 어떤 방법을 알려줄건데요?”

슬기가 노란 눈썹을 올리고 나를 쳐다봤다. 제대로 안 도와주면 가만두지 않을 기세인데.

“가사.”

“가사요?”

이번 팬 미팅에서 최초 공개할 ‘스텝’의 OST 곡.

그 곡의 가사를 주효정에게 맡겨볼 생각이다.

“스텝 OST 곡 가사를 효정이에게 맡겨보려고요.”

내 말에 슬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귓불의 귀걸이가 치렁치렁 흔들리는 모습에 잠시 정신을 뺏겼는데, 그녀가 다시 물었다.

“가사를 쓰는 게 뭐가 도와주는 거예요?”

그 질문에 나는 미소만 보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에게 설명할 순 없으니까.

“아, 웃지만 말고요. 효정이가 작사를 어떻게 해요? 했다 쳐도 걔들은 효정이가 가사를 썼는지 알지도 못할 텐데. 알았다고 해도,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더 괴롭힐걸요?”

슬기가 한쪽 눈을 찌푸리고 다시 묻는데, 누가 보면 주효정의 친언니인지 알겠다.

“효정이가 작사할 수 있을지 없을진,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죠. 그리고 걔들은 모를 수가 없어요. 전 국민이 알게 될 테니까.”

나는 슬기와 욱이를 눈에 담고, 마지막으로 주효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 아이를 잠깐이나마 스타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학생들의 워너비로 말이다.

**

「2000년 12월 15일 금요일」

성지훈은 눈앞에 드리워진 계약서를 보고, 또 자신의 도장을 손에 들면서 현실을 직시했다.

‘후······.’

다만 께름칙한 건, 최재환이 아닌 조 부장이라는 사람이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상은 서글서글해 보이는데 눈빛이 날카롭다.

“너무 급하게 가는 것 같아서······.”

성지훈은 도장을 찍는 것에 망설였다.

처음 제안이 오고 오늘까지, 겨우 며칠 만에 속전속결로 계약서 앞에 앉았다.

그렇다고 계약서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VVW와의 계약 자체가 최악이었기에, 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다.

“원래 계약서를 앞에 두면 다들 그렇죠. 하하하!”

조 부장이 사람 좋은 웃음 뒤에 시계를 쳐다본다.

“좀 더 고민하고 도장 찍어도 좋은데, 난 지훈 씨 데리고 빨리 우리 회사 구경시켜주고 싶네요. 지훈 씨한테 붙여줄 스타일리스트, 매니저, 그리고 앞으로의 구상까지··· 얘기하고 싶어서 입이 아주 근질거리네.”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조 부장의 달콤한 얘기가 이어지자 성지훈은 더 망설임 없이 사인을 휘갈겼다.

“잘해봅시다.”

환한 미소와 함께 조 부장이 내민 손.

성지훈은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지금 막, 인간 성지훈의 인생 제2막이 시작됐다.

“대표님하고는 저녁에 식사하면서 인사드리고, 회사 사람들하고는 나중에 회식 때 인사하고··· 일단은 매니저부터 소개해드릴게요.”

조 부장은 계약서를 바인더에 챙기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부장실 유리문을 젖혀 목소리를 높인다.

“용현이 들어와라!”

잠시 뒤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성지훈은 예상외로 잘생긴 매니저의 등장에 눈썹을 추켜세우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디서 뵌 것 같네요?”

넌지시 묻자, 조 부장이 피식 웃으며 설명한다.

“어제까지 이시현 돌보던 친굽니다.”

“아.”

“앞으로는 지훈 씨만 담당할 거예요. 물론 이 친구 한사람뿐 아니라, 최 팀장이 지훈 씨를 책임질 겁니다.”

“최 팀장님이요?”

“최재환이 데려왔으니, 최재환이 책임져야지. 하하.”

대우를 받는 느낌.

성지훈은 지금 그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럼 스타일리스트는······.”

“흠, 아직 도착을 안 했나? 용현이 너 내려갔다 와라.”

“예.”

“난 버림받았어···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거야···.”

한송이가 혼이 나가서 뭐라뭐라 쉼 없이 속삭인다.

벌써 30분째 같은 모습에, 3W 스타일리스트 강보라가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쳐다보고 말했다.

“로테이션하는 거야. 잠깐 쉰다고 생각해.”

“그래요 언니. 요즘 정신없이 바빴잖아?”

오명숙까지 묵직한 엉덩이를 소파에 기대며 거들었지만, 한송이는 여전히 넋 나간 얼굴이다. 더 있다가는 침까지 질질 흘릴 모양새인데,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그동안 온갖 장난을 받아줬는데!”

재미도 없는 썰렁한 개그를 칠 때도, 틈만 나면 딱밤을 때릴 때도, 팬들에게는 실실거리다가도 악마처럼 변해서 괴롭히는 걸 다 참아냈는데!

“내가 이대로는 못 가!”

분노한 그녀 모습.

“이건 음모야!”

급기야 음모론까지 꺼내 드는데, 마침 문이 열리고 박용현이 들어왔다.

“송이 너 뭐하냐? 올라오라니까.”

“싫어요! 안 갈 거예요.”

저항하듯, 소파 팔걸이를 붙드는 그녀 모습에 박용현이 강보라를 돌아보고 물었다.

“왜 저래?”

“못 간다고 난리네.”

“전 어차피 아티스트 계약이니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거든요?”

“그 대신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냐?”

박용현의 말에 한송이가 콧잔등을 구겼다. 볼에 불만을 빵빵하게 채우고 그에게 되묻는다.

“오빠는 화 안나요?”

그 말에, 내내 태연해 보이던 박용현도 머뭇거리더니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 나도 이시현 덕 좀 보나 했더니만··· 올 설에는 가족들 앞에서 어깨 좀 세우나 했더니만. ”

졸지에 두 사람의 한숨이 ATTM 사무실 바닥에 깔리자, 보다 못한 강보라가 두 사람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만해라. 송이 너, 그동안 시현이 오빠 덕 많이 봤어. 실력도 늘었고, 시현이 오빠 덕에 성과급도 많이 받았고··· 그리고 용현이 오빠도 그동안 시현이 오빠 따라다녀서 인사고과 많이 챙겼잖아요? 보니까 내년이면 승진할 것 같은데.”

둘 다 말은 없는데, 여전히 눈은 이글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오명숙이 옆에서 혀를 차며 속삭였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

「2000년 12월 18일 월요일」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길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제 전화해보니까 한 줄도 못 썼다고 그러더라. 역시 애한테 가사 쓰게 하는 건 무리였어.”

강 실장이 차창 넘어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애가 작사를 해본 것도 아니고,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해보는 거죠. 잘 안 돼봤자,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그저 시간을 조금 허비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작사에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쓰고, 또 쓰고, 고치면 된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나중에 전문가가 다듬으면 되고.

그런 방식이야 흔하게 써먹는 방법 중에 하나다.

특히 아이돌에게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을 때.

“그래도 랩은 정말 아닌 것 같은데.”

조수석에 앉은 ATTM 한지웅 팀장이 텁텁한 입에 물 한 모금을 적시고 말했다. 내가, 주효정에게 랩 가사도 쓰라고 했으니까.

“솔직히 무대 설 비주얼은 아니잖아?”

한 팀장이 주효정의 외모에 관해 얘기했다.

160센티미터의 키가 작은 건 아닌데, 지에스 연습생들에 비해선 사실 전반적으로 한참 부족하다.

“그건 아린이가 책임질 거예요.”

서아린의 메이크업과 무대 조명이 더해지면 외모는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

“무대에 오르고 싶은 연습생들 많은데, 꼭 걔여야 해?”

강 실장의 얘기도 틀린 건 아니다.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서, 수년간 노력한 연습생들로서는 공정치 못한 일이며 기회를 뺏기는 것과 같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도 주효정의 운명이고 기회다.

그 아이는 기본적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기획사 연습생이라는 흔한 스토리보다는, 왕따를 당하고 있는 학생이 직접 가사를 쓰고, 배우 이시현과 함께 무대에 올라서 자신을 증명한다는 스토리가 더 먹힐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주효정를 무대에 올릴 생각이다.

“마치 꼭 그 아이를 데뷔시키려는 것 같네요.”

서아린이 내 생각을 정확히 짚었다. 한 팀장은 여전히 못마땅한 것 같고.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무대 아무나 오르는 게 아닌데.”

“죽을 각오도 했는데, 그거 못하겠어요?”

우리는 주효정에 대한 얘기를 이쯤에서 멈췄다.

어찌 됐든 주효정은 그저 스케줄의 일환일 뿐이고, 또 다른 스케줄은 계속 이어지니까.

눈이 도롯가에 쌓이기 시작할 즘, SBC 일산제작센터에 도착했다.

“눈이 이렇게 오는데 야외 촬영을 할 수 있나 모르겠네.”

강 실장이 중얼거리며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건물 입구에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물든 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얘들이 대체 몇 명이나 온 거야.

누가 보면 여기서 팬 미팅하는지 알겠네.

“오빠 왔다!”

“시현 오빠!!”

먼저 차에서 내리자, 나를 향해 쏟아진 환호성이 눈송이에 스며든다.

“추운데 왜 나왔어?”

나는 팬들에게 다가가 그녀들의 머리를 덮은 눈을 치워주며 말했다. 몽실몽실 입김들이, 미소가, 따듯한 시선이 내 주위를 감쌌다.

“오빠 기다리는데, 춥고 더운 게 무슨 상관이에요.”

시현 수포 회원이자, 지난번 라디오 사연의 주인공이며, 곧 대학 입학을 앞둔 홍은미가 나를 반겼다.

“어이구 이 바보들··· 실장님, 얘네 뭐라도 좀 먹이자.”

“오빠 괜찮아요. 저희가 오뎅 차 불렀어요.”

홍은미가 까치발을 들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오뎅 차?”

“오빠 촬영하는데 고생하시니까.”

얘들이 정말.

“내가 홈페이지에 공지 올렸잖아? 선물 금지라고.”

타박을 해도 웃기만 하지.

“니들 내가 그렇게 좋지?”

“완전 좋아요!!”

이 착한 녀석들은 핫팩에, 목도리에, 심지어 장갑까지 나한테 끼워주려고 한다.

“됐으니까 너희들이나 챙겨. 나는 너희들만 있으면 안 춥고, 안 배고프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이제 너희들 없으면 나는 춥고 배고프다는 얘기야.”

“예!”

팬들과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가 들어왔다.

성지훈의 차. 스케줄을 마치고 이제 도착한 듯한데, 건물 주차장으로 바로 들어간다.

반쯤 차창이 열린 운전석 너머로 나를 보는 최재환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갑자기 소름이 쫙!

“아린아 지금 봤어? 송이지?”

“당분간 송이 피하세요. 잘못하면 저주에 걸려요.”

서아린이 실없는 농담을 했지만, 한송이를 성지훈에게 보낸 건 내가 아니라 최재환이다. 정확히는 데려갔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두고 가면 안심이 안 된다나 뭐라나.

아무튼, 요즘 자꾸 발신자가 확인되지 않는 문자가 도착한다. 배신자라고···

“아린아.”

“예, 오빠.”

“너 송이 보일 때마다 나 메이크업 좀 고쳐줘.”

“왜요?”

“송이 약 좀 올리게. 그러니까 하는 척만 해.”

“후후.”

우리는 싱거운 농담을 하며 야외 촬영이 있을 본 건물 앞에 도착했다.

“시현 씨!”

정신없이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로 금 피디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 옆에선 카메라 한 대가 나를 찍고 있고.

“벌써 시작이에요?”

“우리야 시현 씨만 있으면 스탠바이지.”

금 피디가 푸근한 미소를 보이더니 눈을 찡긋했다.

“그런데, 진짜 우리가 팬 미팅 현장 찍어도 돼?”

“예. 대신 말씀드렸던 부분은 편집하시면 안 됩니다.”

주효정과 내가 무대에 서는 순간은 꼭 방송돼야 한다.

주효정을 괴롭힌 그 녀석들이··· 전 국민이 봐야 하니까.

“당연하지.”

금 피디가 무척 들뜬 모습이다. 나를 섭외한 것도 모자라,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니까 입가에 웃음이 지워질 기미가 안 보인다.

“아, 애들 도착했다.”

고개를 돌리니 마침 미니버스에서 내리는 주효정을 볼 수 있었다.

그녀를 비롯해 사연의 주인공들이 내린다.

덩치 좋은 남자도 내리고, 꽤 잘생긴 남학생도 내렸다.

그리고 또 한 대 멈춘 차에서는··· 이수정이 내렸다.

지난번 ‘우리 오빠’ 종방연에서도 나하고 아주 멀찍이 떨어져 앉았던 그녀인데, 이번에는 나를 보더니 묘한 시선과 미소를 보인다.

뭐지 저 불쾌한 시선은?

진심으로 짜증이 확 치솟는 기분이 드는데, 마침 강 실장이 손을 치켜들었다. 최재환과 성지훈이 촬영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곁에서 짐을 들고 오는 한송이의 모습에서는 칼바람이 생생!

“안녕하세요, 선배님.”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자 성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걱정거리가 많이 사라진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 오늘 잘해봐요.”

“예.”

한송이의 질투 어린 시선이 이글거리는 사이, 최재환은 성지훈을 데리고 금 피디에게 향했다. 홀로 남은 한송이가 내게 다시 레이저를 쏘아붙인다.

“송이야. 지훈 선배님이 잘해줘?”

“엄청! 누구와 다르게! 엄청!”

“잘됐네. 근데 내가 너 보낸 거 아니다. 재환이 형이 데리고 간 거야.”

그 말에 한송이가 내게 한발 다가온다.

눈초리를 당기고,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더니.

“I will be back!”

< 고고, 강한놈들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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