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13화 (113/227)

< 다만빠 (5) >

녹음실에 도착한 성지훈.

스타 다큐 팀은 녹음실 실루엣만 잡고 철수했다. 피디가 이유도 말하지 않고 촬영을 접고 떠나버린 건데, 작년만 해도 방송국에서 이런 대우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 상황이 천지 차이라는 것은 성지훈도 잘 알고 있다.

탈세에, 마약에, 살인사건까지···

그런 쓰레기가 본부장이던 회사 덕분에 성지훈은 바닥까지 추락했으니까.

그것뿐인가.

재기를 위해서 고르고 고른 노래는 표절 시비에, 뮤직비디오 감독은 해외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를 고스란히 베끼는 터무니없는 짓을 했다.

“저 성지훈 매니전데요. 서민지 에디터하고 통화 좀 가능할까요?”

매니저 오성식은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녹음실 부스에 있는 성지훈을 살폈다.

-예, 서민지 에디텁니다.

“아, 저 성지훈 매니접니다.”

오성식은 한 번 더 성지훈을 눈에 담고 녹음실 밖으로 나왔다.

추위가 물씬 느껴지는 파란 하늘, 찬바람을 얼굴에 고스란히 맞으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얘기를 계속했다.

“딴 게 아니고요. 어제 내가 소리 좀 친 거··· 그거 방송에 나가는 거 아니죠?”

어제 한승연인가 뭔지 하는 새내기 배우가 QQ에서 ‘체험 현장 투데이’를 촬영했다. 그리고 오성식은 한승연의 전화를 받고 짜증을 엄청 냈었다.

애가 말을 왜 그렇게 버벅거리는지.

물론 그게 한승연인지도, 촬영 중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피디님이 편집하신다고 하셨어요.

“진짜죠? 확실한 거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나 이거 나가면 가만 안 있습니다?”

방송국 놈들 말을 믿느니 일기예보를 믿지.

-저한테 얘기하셔봤자···.

“그쪽에서 일벌인 거잖아요!”

그럼 방송국에 전화해서 따지리?

누구 찍히는 꼴 보고 싶냐?

“왜 지훈이 스케줄을 확인하는데, 한승연인지 뭔지··· 여보세요?”

실컷 한소리 하는데 목소리가 끊겼다. 휴대폰을 보니 화면이 꺼져있다.

“에잇, 또 꺼졌네.”

오성식은 볼을 찡그렸다. 고장난 휴대폰을 바꾸고 싶어도 현재 성지훈의 자금 사정이 많이 안 좋다.

더구나 녀석은 지금 사는 곳의 월세가 얼마가 나가는지, 공과금은 어떻게 나가는지, 한 달에 지출이 어느 정도인지··· 그런 건 전혀 모르는 놈이다.

너무 어려서 데뷔하는 바람에 웬만한 일은 모두 매니저가 맡아서 했으니까. 통장이나 만들 줄 알까.

“하······.”

오성식도 앞으로는 월급 걱정을 해야 할 처지다.

회사를 박차고 나왔으니 이제 돈 나올 곳은 성지훈밖에 없는데··· 한숨을 다시 내쉬고 있자, 녹음실 유리문이 열리고 성지훈이 나왔다.

“거기서 뭐 해?”

“어? 아, 전화 좀 했어. 하하!”

누가 그랬던가. 힘들면 웃으라고.

외로워도 슬퍼도···

괜스레 환히 웃으며 성지훈에게 안기자 녀석이 짜증이다.

“아 징그러워!”

“자식아, 날씨 춥잖아. 너 감기 걸리면 어쩌냐?”

“아 저리 가!”

두 사람은 투덕거리며 지하로 내려왔다. 녹음실 엔지니어가 녹음 장비를 만지던 중에 두 사람을 돌아봤다.

“지훈 씨, 우리 싸비만 다시 한 번 딸까요?”

“왜요? 이상해요?”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닌데··· 그럼 한번 들어봐요.”

엔지니어가 팔짱을 켜고 뒤로 물러난다.

그런데··· 녹음실 안에 성지훈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다른 걸 틀었네.”

“잠깐만요!”

노래를 멈추려는 엔지니어를 멈춰 세우고, 성지훈은 귀를 기울였다. 눈을 감고, 소리에 빠져든다.

“이거··· 누가 부른 거예요?”

성지훈은 녹음실을 가득 채운 잔향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놀라서 물었다. 그런데 엔지니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검지를 불쑥 내밀었다.

“지훈 씨!”

“왜요?”

성지훈은 엔지니어의 손길을 따라 옆을 돌아봤다. 그런데, 매니저 오성식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형?”

“커헉! 시, 심장이······.”

**

막내 작가가 따뜻한 커피를 내왔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 여원기 할아버지의 큰아들이 회의실을 둘러보면서 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목 넘긴다.

홍 피디는 종이컵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보면서 잠시 기다렸다가 얘기를 꺼냈다.

“아버님께서는······.”

그 말을 꺼냈을 뿐인데, 큰아들이 고개를 가로젓고 속삭인다.

“전에는 그래도 이따금 한 번씩 기억이 돌아오고는 했는데······.”

홍 피디는 여원기 할아버지 댁에 방마다 카메라를 설치했다.

혹여나 할아버지의 기억이 돌아올까 싶어서였다.

그 잠깐의 순간이라도 촬영하고 싶었고, 가족들도 그에 동의해서 그 순간이 오면 할아버지께 현재 상황을 알리기로 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던 만큼, 결과는 이렇듯 허무했다.

“저쪽 가족분들하고는 연락하십니까?”

남매는 서로 떨어져 있던 그 긴 시간 동안, 각자의 가족을 이뤘다. 그래서 방송국 측에서는 지난달 두 가족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그 날의 순간도 카메라에 담았다.

“예. 오늘도 전화 통화했습니다.”

큰아들의 얼굴에 그제야 옅은 미소가 베인다.

홍 피디는 그 미소에 위안을 받는 기분이었다. 다큐멘터리가 비록 재회한 남매의 감동은 보여주지 못할지라도, 그 자식들의 인연의 끈은 이었으니까.

“댁에 설치된 카메라는 다음 주 중에 철수하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홍 피디는 더는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날까지 기적이 찍히면 다행이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할아버지의 큰아들이 빈 컵을 내려놓자, 홍 피디는 곁에 있는 시디 한 장을 그에게 건넸다.

“이거, 이시현 배우가 무대에서 부를 노랩니다. 듣기로는 아버님께서 직접 만든 노래라고 하네요.”

“아······.”

감탄사와 함께 얼굴을 구긴 큰아들이 조심스럽게 시디를 손에 쥐었다.

“한번 댁에서 들어 보세요. 저희 제작진은 듣고 다 울었습니다. 하하.”

낮은 웃음을 흘리는 홍 피디를 보며, 큰아들은 주름진 손으로 시디를 쓰다듬었다.

**

“수고했어요!”

스케줄을 마치고 회사에 돌아오자 매니저들이 너도나도 내게 인사를 건네온다.

어떤 놈은 물도 떠다 주고, 어떤 놈은 실실 쪼개고.

이 징그러운 자식들이 전에 없이 친근하게 군다.

“시현 씨는 참 보기 드문 배우야. 보통 배우들은 회사에 잘 안 오는데.”

“그거 이제 알았어? 나는 시현 씨 예전부터 알아봤어.”

전에는 이시현 이시현 하더니만 호칭은 시현 씨로 통일된 모양이다.

“야야, 꺼져 꺼져. 이것들이 거머리도 아니고 왜 이렇게 달라붙어?”

강 실장이 손을 휘휘 저으며 나를 잡아끈다.

우리는 스케줄을 확인하고 바로 3층으로 내려왔다.

요즘 들어 ATTM 출입이 잦은 편인데, 이곳에는 연습생들이 특히 많이 출입한다. 아무래도 트레이너들이 모인 곳이니 연습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의상실로 향하는데, 한승연이 풍성한 머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청바지에 하얀 스웨터를 입은 그녀 모습이 제법 연예인 티가 난다.

“체험 현장 투데이 찍었다며?”

“예.”

한승연이 맑게 웃는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희 언니 퇴근했는데.”

“예, 통화했어요.”

“그래, 또 보자.”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조금 피곤하다. 나이 먹고 잠을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만··· 아니면 이 몸에 완전히 녹아든 걸까.

의상실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눕다시피 앉았다.

강 실장이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인다.

“자식들이 요즘 더럽게 달라붙네. 너 좋겠다? 인기 많아서.”

피식 웃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얘기를 꺼낸다.

“주일희가 너랑 팀 짜기 싫다고 그러더라.”

보이스레이드 주일희.

“그래요?”

뭐 그건 상관없다. 걔들은 어차피 해체하니까.

잠적한 보이스레이드 백종현은 지금 강원도 어디쯤에서 자신이 무슨 격정의 시대를 사는 뮤지션이라도 된 마냥 고뇌에 빠져있을 테고.

“자기는 배우 들러리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대. 훗··· 그래서 아마 대표님은 주일희 대신 다른 애로 팀 짤 것 같아. 뭐, 연습생이 될 수도 있고.”

차 대표는 싫다는 애 억지로 시키지 않는다.

‘너 그거 하기 싫어? 그럼 아웃.’

그게 차 대표 스타일이다.

“실장님, 저 10분만 쉴게요.”

“그래라.”

일어나 허리를 편 강 실장이 트로트 한 가닥을 근사하게 뽑으며 의상실을 나갔다. 정신없이 바빴던 오늘 하루, 나는 이제야 혼자가 됐다.

‘후······.’

소파에 누워서 눈을 감고 어제 본 할머니의 사진을 떠올렸다.

흑백 사진 속 젊은 여자는 무늬 하나 없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했고, 미소는 흐릿했다.

‘그건 어떤 기분일까.’

해마다 헤어진 오빠의 생일이면 가장 예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홀로 선 그녀.

[부르지 않으려고요.]

어제 나는 손녀의 쓸쓸한 시선을 제대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웅얼거리듯 그 말을 뱉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다고.

연민도, 미안함도 아니었다.

그저 불편했던 거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남매의 우애가.

‘서민지.’

최재환은 이제 그녀와 연락하는 걸까.

나는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서민지를 떠올렸다. 그런 뒤 눈을 뜨고 팔을 들어 손을 바라봤다.

탄탄하고 하얀 피부가, 건강미 넘치는 이십 대의 젊음이 보인다.

나는 이시현.

이제 와서 내게 여동생이란 존재는 필요 없다. 그럴 이유도, 인연도 없으니까.

하지만 최재환은··· 녀석에겐 가족이 생겨도 되지 않을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었더니 박 상무가 서 있었다.

“상무님?”

“올라가자.”

무슨 일일까.

나는 무표정한 얼굴의 박 상무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의 바뀌는 숫자들 대신 박 상무의 큰 덩치를 바라봤다.

“내리자.”

“예.”

잠시 떠오른 박 상무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말끔하게 머리를 묶은 대표실 비서가 내게 미소를 보인다.

눈인사를 살짝 하고, 대표실에 들어갔다.

‘차 대표.’

누가 저 사람을 50대로 볼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젊은 감각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 차라리 한송이 대신 저 양반을 내 스타일리스트로 쓰고 싶을 정도다.

“너 무대에서 노래하는 거 불편하다고 했다며?”

그가 내게 불쑥 묻는다. 최재환한테 들었나? 아니면 강 실장에게 들었을지도.

“너 무대에 왜 서는지 몰라?”

“······.”

“할머니 할아버지 재회하는 거? 감동? 그런 것 때문에 서는 거야?”

비꼬는 것도, 훈계하는 것도 아니다. 차 대표의 얼굴에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다. 늘 이런 식이지.

“너 제일 멋있는 순간 만들려고 거기 서는 거야. 그 무대는 오로지 배우 이시현이,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그러니 다들 놀라라고··· 그거 보여주는 거야. 아니면 너 언제 노래 부르려고? 계속 기다릴 거야?”

저렇게 쪼는 데 무슨 말을 할까.

“너 그거 하기 싫어?”

차 대표가 다시 묻는다. 짙은 저 눈동자에 담긴 감정들이 일순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아닙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나는 그날 무대에서 노래한다.

“너 지금 드라마 하나, 그것밖에 한 거 없어. 알지?”

차 대표가 두 손을 모아 나를 본다. 매서운 시선이고, 그의 향수 냄새는 여전히 나를 옥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급성장하는 스타는 불안하다. 급히 쌓은 담벼락은 성가신 바람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니까.

“가끔은 그런 감상에 젖는 거 괜찮아. 하지만 빠지진 마. 여기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그래, 나는 아직 감상에 빠져들어선 안 된다.

감동? 이 바닥은 어차피 비즈니스다.

그저 잠시나마··· 마흔일곱 꼰대의 감상에 젖었을 뿐.

“가봐.”

“예.”

짧게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는데, 차 대표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차 대표는 곧장 전화를 받았고, 나는 문을 열면서 그를 흘깃 쳐다봤다.

“뭐?”

차 대표가 눈썹을 들썩인다. 나는 문득 멈춰서, 그를 바라봤다.

“···돌아가셨다고?”

< 다만빠 (5)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