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11화 (111/227)

< 다만빠 (3) >

유리문을 밀치고 최재환이 들어왔다.

늘 칙칙한 티셔츠에 냄새날 것 같은 면바지 차림이더니, 오늘은 파란색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있다.

“오··· 최 팀장 너 뭐야? 선 봤어? 요즘 들어 스타일이 사는데? 이상해.”

부장실에서 나온 조 부장이 그를 보며 감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재환은 벽에 붙은 스케줄 보드를 보며 물었다.

“오늘 한승연 누가 데리고 나갔습니까?”

“거기 적혀 있잖아 임마. 용현이가 데리고 갔어. 오늘 한승연이 ‘체험 현장 투데이’ 촬영 있어서.”

“그래요?”

최재환은 심드렁하게 묻고 콧바람을 내쉬었다.

스케줄 보드에는 배우들과 가수들의 스케줄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그 옆으로 배우들 사진 밑에 개개인의 일정이 따로 적혀 있다.

이시현의 오늘 스케줄이 다섯 개.

그중에는 녹음실 일정도 포함돼 있었다.

“하······.”

스케줄을 보던 최재환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자 조 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종일 떠들고 노래가 나오겠어요? 스케줄 조절이 안 되네.”

“야 녹음은 원래 저녁에 하는 거야. 그리고 이 정도는 양호한 거지. 강 실장도 열심히 하고 있다.”

최근 최재환은 지에스 C&C 문제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중이다. 그래서 매니지먼트 사업부 2팀 문제를 강 실장이 상당 부분 안아 가고 있었다.

“그럼, 지금 시현이 강 실장이랑 있어요?”

“욱이하고 나갔어.”

“욱이요? 욱이도 4팀 합류했어요?”

“그래. 녹음실이야 1팀 애들이 더 들락거리잖아. 그래서 보냈어. 강 실장이 녹음실에서 픽업할 거고.”

대충 설명하고, 조 부장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근데 홍 피디 얘기는 뭐야? 지금 상황 되게 안 좋다며?”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다 건강이 안 좋으시니까. MNC 분위기가 뒤숭숭한가 봐요.”

“하··· 이거 큰일이네. 이러다 나가리 되는 거 아니야? 감동의 물결은커녕 분위기만 뒤숭숭하잖아.”

“그러게요.”

최재환이 한숨과 함께 스케줄 보드에서 시선을 떼자, 조 부장이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멈칫했다.

“아, 너 여동생이랑은 연락하냐?”

“예?”

뜬금없는 얘기에 최재환이 눈꺼풀을 들썩인다. 그러자 조 부장은 책상 칸막이에 팔을 기대고 계속 말했다.

“그 친구 이제 혼자잖아. 세상천지에 기댈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시 만난 우리 오빠 컨셉 들으니까, 제일 먼저 너 하고 네 동생 떠오르더라.”

“그러잖아도 가끔 연락해요.”

최재환이 마지못해 말했지만, 조 부장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네 성격 모르냐? 그냥 구실 찾아 전화해서, 대충 목소리만 듣고 끊을 거 아니야?”

틀린 말이 아닌지, 최재환이 입맛만 다신다.

“올해 졸업이라고 들었는데, 취직은 했대? 임마, 피보다 무서운 게 정이다. 네 입장 모르는 거 아닌데··· 나중에 후회한다. 형 말 들어.”

조 부장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자, 최재환은 착잡한 얼굴로 다시금 스케줄 보드를 눈에 담았다.

**

“승연 씨! 빨리 움직이세요!”

“예!”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사무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옷들, 바닥에 늘어놓은 구두들, 그리고 가방들까지··· 한승연은 이 난장판 같은 사무실을 정신없이 누볐다.

“승연 씨, 다 했으면 여기 전화해서 성지훈 씨 매니저한테 스케줄 좀 확인해봐요.”

“예!”

냉큼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받았지만, 뒤돌아 한숨부터 내쉰다.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니 뭐부터 해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전화는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카메라는 그런 그녀를 열심히 담고 있는데, 머릿속은 금방이라도 붕괴 직전.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고맙습니다.”

한승연은 도움의 손길에 너무 기뻐서 냉큼 자리를 내줬다. 그러자 천사의 미소를 띤 여자가 책상에 앉아 전화기를 가리키고 나긋나긋 설명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QQ 매거진 한승연 에디텁니다. 성지훈 씨 화보촬영 스케줄 관련해서 연락드렸어요, 라고 말씀하시면 돼요.”

“하··· 이거 너무 어렵다.”

한승연은 푸념을 뱉고 도와준 여자를 바라봤다.

“언니는 여기 다닌 지 얼마나 되셨어요?”

“전 아직 수습이에요.”

속삭여 말하는 여자의 목에는 ‘서민지 에디터’라는 목걸이 명찰이 걸려 있었다.

“그럼 승연 씨가, 직접 해보세요.”

“예!”

지금 한승연은 ‘체험 현장 투데이’를 촬영 중이다.

하루 동안 열심히 일해서 받은 일당을 기부하는 프로그램인데, 그녀가 오늘 일하게 된 곳은 국내 패션잡지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QQ 잡지사.

“안녕하······.”

실수하고.

“아, 안녕하세요, 저, 저 한승연인데요······.”

더듬거리고.

“아, 저 QQ······.”

말문이 콱 막히고.

수차례 도전 끝에 성지훈 매니저에게 구박만 잔뜩 받고 전화통화를 마친 한승연 대신, 서민지가 성지훈의 일정을 확인했다.

‘체험 현장 투데이’ 촬영 중이었다고 양해를 구하자, 성지훈 매니저가 자기가 욕한 거 빼달라고···

선배 에디터의 다음 지시로 한승연은 서민지와 함께 1층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야, 선 밟으면 어떻게 하냐!”

“죄송합니다!”

“민지야, 종일 고개만 숙이고 다닐래? 정신 똑바로 차려!”

“죄송합니다!”

스튜디오는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혼이 쏙 빠지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미안해요 언니, 저 때문에 더 힘들죠?”

“아니에요. 저야 원래 하는 일인데요.”

서민지는 언니 같은 미소로 한승연을 대했다.

“근데 너무한다. 언니만 일 시키고.”

반나절을 일했더니 회사 돌아가는 게 보이는 한승연이었다.

서민지 말고도 수습이 더 있는데, 점심시간에 얼핏 들으니 임원 자제들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후훗··· 오늘 어땠어요? 배우 일이 힘들어요? 잡지사 일이 힘들어요?”

“아후, 전 앞으로도 열심히 배우 할 거예요!”

한승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전에 일이 터져서 인쇄소로 달려갔고, 성지훈 스케줄 확인하다가 그 매니저한테 욕먹었고, 이것저것 심부름하느라 엉덩이 한번 의자에 붙일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난생처음 하는 경험에도 그녀는 굳은 소리 한번 안 하고 열심히 일했다. 물론 곁에서 도와준 이가 있었서 가능한 일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한승연은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스튜디오 대기실로 향했다. 바로 다음 스케줄로 이동해야 해서 할 수 없이 이곳에서 메이크업까지 마쳐야 했다.

한참 뒤 한승연이 사무실에 돌아왔다. 정장 차림에, 하얀색 카디건을 걸쳤는데, 그 모습에 스튜디오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일순 쏠렸다.

“와··· 예쁘다.”

감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서민지의 모습에 곁에 있던 선배 에디터가 피식 웃으며 묻는다.

“너 한승연 전화번호 땄어?”

“아니요.”

“종일 붙어 다녔으면서 뭐했니? 이럴 때 인맥 하나 뚫어야지. 정신 차려라, 정신. 이래서 언제 수습 딱지 떼고 어시할래?”

서민지가 이런저런 구박을 받는 사이, 한승연은 사장에게서 오늘 일당이 든 봉투를 건네받았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구두쇠 사장은 일당을 더 넣었다고 잔뜩 생색 중이다.

“민지야.”

“예, 선배님.”

“너 여기 왜 들어왔냐?”

선배 에디터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서민지를 바라봤다.

“너 에디터 되려면 어시 몇 년 해야 하는지 알아? 난 4년 했어. 4년 동안 매일 야근, 오늘도 야근, 내일도 야근··· 아 집에 가고 싶다.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 먹고 싶다.”

신세 한탄하는 그녀 모습에 서민지가 풋풋한 미소를 보인다.

“이건 내가 그냥 하는 소리인데, 너 여기 다니면 만년 심부름꾼이야. 쟤들 일도 니가 해야 해.”

선배 에디터는 멀리 있는 두 명의 수습을 가리켰다. 임원 자제라서 하는 일이라고는 복사용지 갈고, 수다 떠는 것밖에 없는 애들이다.

“알아요.”

서민지가 체념하듯 말했다. 더 할 얘기가 없어서, 선배 에디터는 시선을 피하고 혼잣말을 했다.

“하, 이시현이 정장 입혀서 화보 걸면 좋겠는데.”

올 한해 판매율 만년 2위였던 J 잡지사가, 얼마 전 이시현 특집 화보로 단박에 1위를 탈환했을 정도로 지금 이시현 기세가 장난 아니다. 그래서 요즘 에디터들은 무슨 얘기를 하다가도 끝은 항상 이시현이다.

“민지야.”

“예?”

“너 이시현 연줄 있어? 이시현하고 연줄 있으면 넌 그냥 회사에서 놀고먹기만 해도 돼. 편집장이 너 업고 다닐걸?”

우스갯소리를 하고 선배 에디터가 피식 웃는다. 그러는 사이, 한승연의 매니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썹만 치켜떴는데.

“저기.”

“예?”

“혹시,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어요?”

한승연의 매니저가 묻는다. 선배 에디터가 아닌, 서민지를 향해서.

“이상하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이거······.”

손녀가 내게 건넨 것은 사진첩이었다. 나는 말없이 사진첩을 넘겼다. 한 장 한 장의 사진들. 흑백에서 컬러까지, 그 많은 사진 중에는 할머니 홀로 카메라를 마주한 독사진이 많았다.

“할머니는 생사를 알지 못하는 오빠의 생일이면 깨끗이 머리를 다듬고, 좋은 옷을 입고, 홀로 사진을 찍으셨대요.”

손녀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할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을 눈에 담았다.

쓸쓸해 보인다. 외로워 보였다.

그나마 사진의 색이 컬러로 바뀌고, 할머니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지고서야··· 남편이, 아들이, 딸이, 손자가, 손녀가 그녀의 외로운 등을 채웠다.

“할머니 상태는 어떠세요?”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손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힘없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한숨이 나온다.

“하······.”

나는 물 한 모금에 목을 축이고 다시 얘기를 꺼냈다.

“죄송해요. 제가 한번 찾아뵀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그날 저녁 초대해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웠었어요. 할머니, 그날 밤 너무 즐거워하셨거든요.”

김은수 작가가 할머니와 손녀를 초대했던 날, 그날이 8월이었으니 벌써 3개월이 지났다.

“할아버지 가족은 보셨어요?”

“예.”

내 질문에 손녀는 씁쓸함이 담긴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보조개 속에 아픔이 고이는 기분이다. 그녀는 말했다.

“참 안타까워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그렇게 서로를 그리워했는데.”

손녀의 눈시울이 붉게 타오른다. 지금 여점례 할머니는 병상에서 깨지 못하고 있고, 여원기 할아버지는 치매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래서 세월이란 것이 참 모진 거다.

기억 속 서로의 모습은 온전한데, 세월이란 게 묻으면서 그 기억 속 모습은 훼손되고 변해간다. 하다못해 감정을 담을 그릇마저도 온전치 못하면··· 그 오랜 기다림이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다.

“시현 씨가, 그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눈물을 훔치고 겨우 미소를 보인다.

“사실 그 날 시현 씨 노래 듣고 정말 놀랐었는데. 왜 사람들 앞에서 안 부르나 궁금했거든요.”

그녀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나는 말했다.

“부르지 않으려고요.”

“예?”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그녀에게서, 가을 낙엽이라도 밟은 마냥 바스락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

강 실장은 이시현의 저녁 스케줄을 인계받기 위해서 먼저 서초구에 있는 녹음실에 도착했다.

“자.”

블랙보이 2집 전곡을 프로듀싱했던 작곡가 이영태가 육중한 몸을 흔들며 그에게 차 한잔을 내왔다.

“아니, 형님은 살이 더 쪘어. 먹고살 만한가 봐?”

“이 자식이 오랜만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러는 넌 임마, 그 파마머리는 뭐냐? 징그럽게 시리.”

“이게 어때서? 솜솜에서 한 거야.”

강 실장은 옅은 갈색이 비치는 파마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허이구. 솜솜 애들이야 오죽했겠냐. 이시현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해준 거지.”

“질투 좀 적당히 합시다. 내가 이래 봬도 좀 먹히는 얼굴이잖아?”

시답잖은 소리로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누고, 강 실장은 제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녹음실 전경을 눈에 담았다. 블랙보이 화보가 입구 벽을 채우고 있었고, 휴게실에는 3W 멤버 개개인의 화보가 붙어 있었다.

“칙칙하네. 방향제 좀 뿌려요, 레몬 향 같은 거 있잖아?”

“왜 남의 녹음실 와서 난리야. 요즘 최 팀장은 많이 바빠?

“C&C 때문에 정신없긴 한데, 그것보다 이시현한테 지금 4팀 붙었잖아요.”

“아, 그래?”

이영태는 놀랐지만 이내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시현에게 지에스의 투자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방송 출연이나 예능 출연이 없어서 이상할 정도니까.

“그럼, 이시현이 오늘 뭐 하려고 여기 오는 거야?”

“왜긴 왜야? 녹음하러 오는 거지. 오늘 왜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신데.”

“무슨 녹음?”

이영태는 딱히 전해 들은 게 없었다. 그래서 준비를 해놓은 것도 없다. 그저 녹음실 스케줄을 잡아놓았을 뿐이고, 지에스 ATTM 한지웅 프로듀서가 와야 뭘 해도 할 수 있는 상황인데.

“나 바쁜 사람이야. 아무리 이시현이라고 해도, 드라마 OST나 녹음하려고 나 여기 앉아있는 거 아니야. 오늘 성지훈도 녹음해야 한단 말이야.”

이영태가 괜스레 비싼 척을 한다. 실상은 이시현이랑 녹음한다는 소리에 카메라부터 챙겨둔 그였지만, 없어도 있는 척하는 게 이 바닥 아닌가.

“들어보시면 압니다. 오늘 형님이 시간을 버리는 건지, 아니면··· 예고편을 보는 건지.”

“뭔 예고편?”

“뭐겠어요. 이시현이라는 스타의 화려한 비상이지.”

< 다만빠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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