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만빠 (2) >
회의가 끝나고 저마다 담배를 입에 문 매니저들이 옥상에 모였다.
“역시, 대표님이 남수혁을 버린 이유가 있었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난간 너머를 내려다본 1팀 매니저가 혀를 내두른다. 새까만 머리들이 보이는데, 리더 남수혁의 탈퇴로 블랙엔젤스 애들이 회사 앞에서 연일 시위 중이다.
“이시현은 못하는 게 뭐야?”
“부러워하지 마라. 부러우면 지는 거야.”
“그럼 이제 이시현은 1팀이야, 2팀이야?”
“바뀌는 게 뭐 있어. 지금처럼 하는 거지. 어차피 2팀은 밖으로 나갈 거잖아? 거기서 집중 케어하겠지.”
“아, 나도 2팀 가고 싶다.”
회사는 지난 3분기 블랙보이와 3W, 그리고 이시현으로 인해서 매출액 최고치를 달성했다.
특히 이시현이 괄목한 성장을 보였는데, 앞으로 그 성장세는 눈에 띄게 두드러질 것이다. 그래서 2팀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두고 ‘사실상 이시현을 위해서’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럼 ‘스텝’ 여주인공은 누가 하는 거야?”
“글쎄, 이시현이 송이경 얘기했다는데?”
“송이경? 오소리가 더 낫지 않나? ‘명이’ 촬영 끝났잖아?”
“모르지. 조 부장이 어떻게 나올지.”
매니저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시현의 행보를 점쳤다. 연기자나 매니저나, 어떻게든 이시현과 겹치면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하··· 날이 슬슬 추워지는구만.”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
「2000년 11월 30일 목요일」
서아린이 안경을 들썩이며 ‘스텝’ 대본을 들여다봤다. 그 자세를 유지하고 진지하게 대본을 읽는다.
“나 여기 트레이너 자격으로 있는 거거든? 너 때문에 있는 거 아니야.”
“누가 뭐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신경 안 쓰고 있으니까. 청소 끝났으면 링에서 내려올래?”
“그럴 거야!”
이제 링에서 내려오던 권여름이 자기가 했던 걸레질에 미끄러져서 휘청거리고, 그 순간 팔을 뻗어 그녀를 붙잡는 장태원의 씬이 이어지는데.
“오빠, 저 안으세요.”
“뭐?”
서아린이 내게 바싹 다가오더니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양팔을 벌렸다. 왜 이래··· 얘 가끔 이러면 왠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단 말이야.
“미끄러지는 거 잡는 장면이니까, 오빠가 저 안으면······.”
“됐다. 그만하자.”
“예?”
서아린이 속눈썹을 끔벅이면서 나를 바라보는데, 옆에서 빵을 입에 물고 있던 한송이가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근데, 이거 여주인공은 누구예요?”
“아직 미확정.”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 드라마는 송이경이 주인이다.
그래서 차 대표에게도 송이경을 여주인공으로 추천한 상태인데, 그녀를 관리하는 강 실장은 좋아서 입이 찢어졌다. 그러면서도 괜히 튕기기는. 뭐라더라, 대본이 좋아야 하는 거라고?
“근데, 이거 지금 노리는 사람들 많던데? 오소리도 있고, 우리 승연이도··· 있고?”
한송이가 내 눈치를 슬며시 보며 말했다. 이 자식 지금 제 동생 꽂아달라는 건가.
“야 빵순이.”
나는 한송이의 단발머리 사이로 두 손을 쓱 집어넣었다. 하얀 눈동자, 동글동글한 얼굴, 짙은 눈썹, 붉은 입술··· 너 대체 화장을 얼마나 진하게 한 거야?
“왜, 왜요?”
한송이가 턱을 쑥 내민다. 눈에 띄게 건방진 그녀의 모습에 내 손이 근질거린다. 이 녀석 이마에 딱밤 한 대만 때렸으면 좋겠는데.
“공과 사는 지켜라. 네 동생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
“선생님이 실력이 없는 것 아닌가요?”
그 선생이 나잖아!
“아니지. 선생님은 되게 노력하고 있거든. 근데 제자가 많이 부족해서, 참 힘드네. 거기다 극성스런 보호자까지!”
“흥!”
한송이가 콧바람을 휙 뿌리는데, 마침 ATTM 사무실에 강 실장이 들어왔다. 자식이 늦바람이 들었는지 최근에는 아줌마 파마를 하고 다닌다. 느끼하게.
“준비 다 됐으면 빨리 가자. 스태프들 다 모였겠다.”
오늘, 드라마 우리 오빠의 종방연이 있다.
사무실을 나온 우리는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는 잠시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빠르게 바뀌는 숫자를 바라봤다.
‘후······.’
최근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 것 같다.
MNC 다큐멘터리야 그쪽에서 알아서 제작되고 있지만, 나는 내년에 있을 영화도 준비해야 하고, 드라마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노래까지.
새로운 것을 준비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인데··· 내가 지에스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계속 찜찜하다.
물론 결국은 최재환이 지에스 C&C를 맡게 될 테고, 나는 계속 연기를 하겠지만··· 그런데, 지에스에 영원히 있을 수 있을까?
차가 막혀서 종방연이 있는 여의도 식당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먼저 스타일리스트들이 차에서 내리고, 나는 내리기 전 강 실장을 불렀다.
“실장님.”
“왜?”
“여점례 할머니 손녀, 내일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내 말에 강 실장은 바로 손을 저었다.
“너 스케줄 안돼. 내일 CF 관계자들 만나고, 레슨에 인터뷰까지, 스케줄이 여섯 개야.”
“잠깐만 들려요.”
안 된단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차에서 내렸더니, 식당 입구에서 박태 감독이 환히 웃고 있다. 이미 술 한잔 걸친 얼굴인데, 서둘러 안에 들어가자 다들 나를 반긴다. 검은색 롱 카디건을 걸친 최미숙도 보이고.
“안녕하세요, 선생님.”
“인사는 됐고, 시작한다!”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드라마 ‘우리 오빠’ 마지막 방송이 시작한다.
[마지막 회]
잿빛 하늘 아래는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어느 것도 성한 게 없다. 살아남은 이들은 쫓기는 토끼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나 역시도 한 마리 토끼일 뿐이다.
타타타타!
시체를 넘고 또 넘었다. 총구는 앞을 향한 채 달리면서 쏘고 또 쏜다. 아마 나도 몇 발 맞은 것 같은데, 그래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야만 사니까.
제발···
달리면서 나는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내 앞에 오지 마. 내가 사람을 죽이게 하지 마.
“으아아!”
내 옷에 묻은 것은 내 피일까. 저들의 피일까.
나는 괴물이 된 걸까.
콰쾅!
폭음··· 흙먼지··· 앵앵거리는 소리.
“컥!”
흙바닥을 끌어안고 막힌 숨을 토한다.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은데, 웃음이 나온다. 훗··· 꼭 술 취한 사람 같겠구나. 희재 네가 봤으면 날 놀릴지도 모르겠다.
타타타타!
희재야.
철모 아래서 보이는 세상은 지옥이다.
사람들은 총을 쏘고, 죽이고, 절규한단다.
손이 날아간 어떤 이는 흐느껴 울고, 고통을 못 이겨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도 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밤톨머리 소년병은······.
“지욱아? 지욱아!”
나는 피범벅이 된 녀석의 몸을 정신없이 더듬었다. 팔다리 멀쩡하고, 몸에 구멍 뚫린 곳도 없어 보인다.
“일어나! 일어나!”
희재야, 내가 이 녀석을 데리고 여길 벗어날 수 있을까? 불가능하고 거추장스럽겠지만··· 이 녀석을 보니 네가 생각나서 뿌리칠 수가 없구나.
“일어나라니까!”
목덜미를 잡아끌고 이동했다.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몇 걸음 떼지 못하고 나는 적들을 향해 총을 휘갈긴다.
타타타타!
총구가 불꽃을 뿜는 것도 잠시.
철컥. 철컥.
“젠장!”
나는 다시금 소년병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지욱아. 정신 차려라.”
찰싹! 찰싹!
몇 번이나, 녀석의 뺨을 때렸다. 그제야 그을음 검은 얼굴 속 하얀 눈동자가 번쩍 뜨인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가득 고여 있었다.
“형.”
“그래 내다. 니 엄니 보러 가야지.”
“엄니······.”
“그래, 엄니. 어여 가자!”
우리는 남한군이 파놓은 참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진흙과 시체가 발을 붙잡고, 총알이 뒤를 쫓아오지만 오로지 앞만 바라봤다.
“형!”
바닥에 고꾸라진 소년병을 일으켜 세운다.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이대로 쭉 벗어나서 숲으로 들어가면···
“가자, 어여 가자.”
늘 그랬다. 총알이 빗발치는 이곳에서 나는 매번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달렸다. 희재 너는 모를 거다. 내가 너를 얼마나 생각했는지. 총에 맞은 아픔보다, 어두운 밤 사무친 외로움보다, 나는 오로지 네 걱정뿐이었다.
“헉, 헉, 헉!”
요즘에는 옛 생각이 자주 난다.
엄니, 아버지, 그리고 희재 너···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던 기억도 나고, 소 새끼 여물 주러 가는 길도 기억이 나고, 마을 어귀를 지나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여름 어느 날도 기억이 난다.
콰쾅! 쾅!
희재야. 나는 겁이 난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이런 내 모습을 니가 무서워하진 않을지. 니가 겁을 내면 안 되는데.
“하··· 하······.”
얼마나 달렸을까. 어린 소년병이 주저앉은 나를 돌아본다.
“형! 형!”
“지욱아··· 뒤 돌아보지 말고··· 가야 한다.”
“형 일어나요.”
“내는 더 못 가겠다. 등이··· 등이 아파··· 못 가겠다.”
소년병이 나를 살폈다. 내 등을 만진 녀석의 손에 피가 흥건히 묻어난다.
“형······.”
“가라.”
멀리 가라. 잡히지 마라. 죽지 마라. 살아라.
‘희재야······.’
잠이 솔솔 온다. 그래서 잠시만 쉬었다 가야겠다. 비바람이 내 몸에 묻은 피 냄새를 씻어줄 때까지만. 그래야 희재 네가··· 놀라지 않을 테니까.
**
8.15특집드라마와는 다른 죽음이었다.
장엄하지 않은, 전쟁 중 죽은 수많은 이들처럼 쓸쓸한 죽음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의 모습도 특별할 것 없었다. 폐허가 된 서울에서 억지로 희망을 그리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은 그저 가족과 친구를 만나 기뻐하고, 부서진 삶의 터전에 절망하고, 그래도 살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마지막은 박희재가 장식했다. 하늘의 별이 가득한 밤, 평상에 앉아서 하늘을 보던 그녀는 외로운 미소를 띠며 속삭였다.
-오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식당 안에 박수 소리가 터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나 역시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촬영 기간 고생한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향해서.
“수고하셨습니다!”
박희재 역을 열연한 고우희는 눈물범벅이 됐는데, 이번 드라마에서 그녀는 많은 것을 얻었다. 인기야 당연한 거고, 앞으로의 가능성도 충분히 드러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박태 감독에게 다가갔다. 그는 술이 진득하게 취해서, 나를 보고 함박웃음과 함께 양손 엄지를 마구 내밀었다.
“이시현 짱! 짱! 짱이다!”
“감독님도 참.”
“동태야! 사진 찍자!”
바닥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불려 다니던 황동태가 카메라를 들고 왔다. 그리고 이런 때 늘 그렇듯, 다들 모여 김치를 외친다.
“감독님, 밖에 지금 난린데요?”
종방연을 파하면서, 식당 밖을 살피고 온 스태프가 호들갑이다. 비공개 종방연인데도 식당 앞에 기자들이 잔뜩 모였다고.
“좋았어. 다들 한꺼번에 내려가자고!”
박태 감독의 제안에 다들 우르르 내려가는데.
“시현 씨, 여기 좀요!”
“이시현 씨! 종방 소감 좀 말씀해주세요!”
“종방 분위기 어땠나요?”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진다. 사방에서 정신없이 쏟아지고 우리를 밀어붙인다.
“어머? 이시현인가 봐?”
“저기 이시현이다!”
지나던 사람들까지 합세해서 순식간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지금 순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시작이라는 것을.
**
[16부작 대단원의 막을 내린 우리 오빠!]
[KIS 드라마 우리 오빠, 마지막 방송 시청률 50.1%]
[배우 이시현의 활약, 이변은 없었다!!]
[드라마 우리 오빠 때문에 밤새 눈물지은 대한민국]
[자, 이시현의 다음 행보는?]
이번 드라마로 이시현은 명실공히 20대 남자 배우 원톱으로 자리 잡았다. 앞으로 사건 사고만 없으면, 최악의 작품만 고르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시현의 인기가 계속될 게 분명하다.
“하······.”
그런데 지금 가장 즐거워야 할 홍 피디가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손에 쥔 신문을 내려놓았다.
“행보는 무슨.”
지금 이시현 잡으려고 방송국에, CF 관계자들에 난리도 아니다.
KIS는 9시 뉴스에 이시현을 초대한다는 얘기도 있다는데··· 그러니 누구보다 환호해야 할 다만빠 팀인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다들 어제 드라마 봤어?”
“예. 이 나이 먹고 눈물 콧물 쏙 뺐네요.”
메인 작가가 착잡한 얼굴로 말한다.
“진짜 KIS는 신의 한 수를 뒀어. 8.15특집드라마에 성지훈 빼고 이시현 넣었을 때만 해도 난리난리, 그런 난리가 없었는데···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
“지에스가 무서운 거죠.”
불과 4개월 만에 스타를 탄생시켰으니, 지에스의 기획력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럼 이제 우리 어떻게 할까요?”
작가들이 홍 피디를 바라본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뭐 어떻게 해, 여기까지 온 거··· 이제 흘리자. 보도 자료 돌려. 대신, 너무 들뜨지는 마. 지금 할머니 몸 상태도 안 좋으시고, 할아버지 치매까지··· 솔직히 최악의 상황이니까.”
기획의도가 감동의 물결인데, 상황이 좋지가 않다. 어쩌면 다큐멘터리도 엎어질지 모르는 상황.
“아이고.”
대한민국은 지금 드라마 속 남매의 이야기로 들떠있는데, 홍 피디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 다만빠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