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09화 (109/227)

< 다만빠 (1) >

“후······.”

천천히 입을 풀며 긴장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대본을 손에 쥐고, 다시 한 번 심호흡을···

[다시 만난 우리 오빠]

지난 8월 MNC 방송국은 KIS 8.15특집드라마 ‘우리 오빠’의 실제 인물인 여원기 할아버지의 생사를 찾는 ‘만남의 장’이라는 기획을 지에스에 제안했다.

MNC는 할아버지의 생사를 떠나서, 찾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내 목소리를 내레이션으로 더하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드라마틱한 상황이 펼쳐졌다. 할아버지의 가족이 MNC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온 것이다.

-시현 씨 준비됐죠?

“예!”

-그럼 시작합니다.

녹음실 부스 밖에서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헤드셋을 착용했다. 후.

“처음 우리는 막막했습니다. 광복 이후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할아버지의 행적을 좇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요.”

부스 밖 모니터에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기록영상에 이어서 현재의 발전된 서울의 모습이 흐른다.

“제작진은 먼저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동생이자, 그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여점례 할머니를 만나보려고 했습니다.”

여점례 할머니의 손녀와 가족들이 모니터에 나오고, 그들의 대화가 헤드셋을 통해 내 귀에 들려온다.

“하지만 제작진은 할머니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 8월 15일의 이산가족상봉. 할머니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우리 오빠를, 이번에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할머니는 사무친 그리움으로 몸져눕고 말았기 때문······.”

나는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녹음실 부스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얘기를 듣긴 했지만, 대본을 읽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니까.

-시현 씨, 다시 갈게요.

“예, 죄송합니다.”

그 이후로도 NG와 다시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오늘 예정된 내레이션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후······.”

부스 밖으로 나오자마자 의자에 주저앉았다. 지친 숨을 몰아쉬는 내게, 엔지니어가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내레이션 어렵죠?”

“그러게요.”

“이게 쉬워 보여도, 신경 쓸게 한둘이 아니라니까요.”

분야별로 내레이션을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겠지만, 다큐멘터리에서는 현실감과 이해도를 높이면서 상황을 해설하는 중요한 장치다.

목소리, 발음, 톤, 이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어긋나면 자칫 밋밋하거나, 극의 재미, 현실감을 저하할 수가 있다. 물론 하다 보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어지지만···

“근데 시현 씨 목소리 좋네. 안정감이 있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진짜야. 처음엔 다들 NG 많이 내는데, 시현 씨는 크게 실수도 없었고.”

“그거야 잘 리드해주셨으니까요.”

“하하. 그런가?”

서로에 대한 공치사는 이쯤하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녹음실을 빠져나왔다. MNC 작가들이 녹음실 밖 휴게실에서 회의 중이었다.

“고생하셨어요, 시현 씨!”

“고생은요. 근데, 제 매니저는 어디 갔어요?”

최재환이 안 보인다. 어디 있는 거야.

“좀 전에 전화한다고 나갔는데······.”

“전화요?”

“여자 친구 전화 같던데?”

“에이.”

그럴 리가.

“왜? 시현 씨가 모를 수도 있지. 최 매니저님도 한창 연애할 때지.”

그 곰이 몰래 연애를?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고 그녀들과 마주 앉았다.

“아 시현 씨, 여긴 우리 다만빠 팀 막내.”

아까 보이지 않았던 어린 친구가 나를 향해 인사를 꾸벅한다. 눈썹도, 피부도 까무잡잡해서 문득 오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건강미가 넘쳐 보이는 여자다.

“반가워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녀가 손을 주저한다. 입술을 바르르 떠는 모습에, 다시 만난 우리 오빠, 그러니까 다만빠 팀 메인 작가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얘가 시현 씨 왕 팬이거든.”

“에이, 진짜요? 빈말이죠?”

“진짜야. 포옹 한번 해줘.”

짓궂은 장난에 막내 작가는 얼굴 가득 홍조를 띠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여간 어디를 가나 신입만 들어오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시현 씨 이따가 우리 막내 사인해줘야 해?”

“그 정도만 하세요. 작가님 불편해하시잖아요. 아, 잠깐만요.”

문득 머리카락이 눈에 띄어서, 손을 뻗어 메인 작가의 어깨를 털어냈다. 그러자 작가들이 깔깔거린다.

“뭐야, 작가님 얼굴 빨개졌어.”

“내가 언제? 흠! 아무튼, 내일 중국 팀 귀국하거든요.”

메인 작가가 제 얼굴에 손부채를 하며 말했다. 얼굴이 빨개졌는데··· 뭐, 이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이 잘생김이 가진 힘은 거침이 없으니까.

“중국 촬영은 잘 끝났어요?”

“두만강 찍느라 고생 좀 했다는데, 그만큼 잘 나왔겠지.”

지금까지 다만빠 팀은 촬영팀을 중국과 국내로 나눠서 여원기 씨의 행적을 좇았다. 이미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극적인 요소를 더 넣기 위한, 감동을 끌어내기 위한 연출이 필요하니까.

“방송 날짜도 잡혔어요. 12월 10일, 11일.”

KIS 드라마 ‘우리 오빠’ 종방 뒤다.

“그럼 이제 제가 할 일은······.”

“노래죠.”

10일 방송은 다큐멘터리 방송.

이어진 11일 방송에서는 실향민의 아픔과 지난 8월의 이산가족상봉을 되새기고, 마지막에 가서 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뒤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만난다. 그런데.

“할머니는, 많이 편찮으세요?”

내 질문에 작가들의 표정이 어둡다. 어떤 이는 뾰족한 송곳니로 입술을 괴롭히고, 어떤 이는 쓴 미소를 보였다.

“원래 부정맥이 있으셨는데, 갑자기 쓰러지셔서··· 아직 기면상태세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어르신들 언제 가실지 모르는 거잖아요.”

나를 위로하려는 건지, 아니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작가들의 말투가 귀에 거슬린다.

“아무튼, 노래는 너무 큰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음정 박자만······. 하하.”

수다스러운 작가들.

얘들 교양 프로그램 작가들 맞나?

“아, 성지훈이네?”

메인 작가가 휴게실 벽을 보고 송충이 눈썹을 크게 들썩였다. 가수와 배우들의 사진이 붙어 있는데, 성지훈 사진을 보는 작가들의 표정이 무척 안타까워 보였다.

“저 때 진짜 잘 나갔는데······.”

**

타다타다타다

-안녕하세요, 영원한스타님.

-안녕하세요, 운영자님.

-안녕하세요, 시현블랙님.

그 밖에 많은 회원들.

-다들 활동은 잘하고 계시죠?

-예. 전 어제 우리 오빠 보는 엄마를 데리고 외출을 나갔어요.

-저는 우리 오빠 할 시간에는 TV를 꺼놓아요.

-이시현만 보면 그냥 밥맛이.

-그럼 오늘 리뷰할게요. 종영을 한주 앞둔 우리 오빠 시청률이 44프로에서 멈췄어요.

-역시 거기까지라니까요. 50프로짜리는 아니지.

-맞아 맞아. 개나 소나 50프론가. 크크. KIS 뻘쭘하겠다. 그렇게 50프로 어쩌고 기사 내더니.

-그래도 안심하긴 이르지. 원래 마지막에 최고 시청률 찍잖아요.

-님, 지금 이시현 편드는 거?

-아니, 말이 그렇다 이거지.

-허, 운영자님 여기 신고!

채팅방 강퇴.

“허.”

성지훈은 어이가 없어서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시청률 44프로가 어디 애 이름인가. 그걸 50프로가 안 넘었다고 지들끼리 킥킥거리고 있다.

“이런 병신들을 봤나.”

블랙보이 폭행 루머 이후 이시현 안티 카페 회원 수가 급증했다. 그 때문에 조용하고 아늑했던 성지훈의 대나무 숲은 더럽게 변질됐다.

분명 운영자도 맛이 간 것 같다. 깔 때 까도 냉정하게 까야지. 이건 뭐 별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찐따들끼리 자축이나 하고 있으니.

“아휴 짜증 나!”

사타구니를 북북 긁으며, 성지훈은 방을 나와 소파에 주저앉다. 얼마나 열이 오르는지 11월 늦가을에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 꾹 눌렀는데, 테이블에 놓인 신문을 주워들자마자 또다시 현기증이.

[성지훈 신곡 뮤직비디오 폐기 결정!]

[성지훈도 당했다. 윤 감독의 표절은 어디까지?]

[뮤직비디오는 시작? 성지훈 신곡 ‘구름소녀’ 표절 의혹]

이제는 화도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성지훈은 어느새 신문을 북북 찢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후······.”

이 가을에 땀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뚝 흐른다.

되는 일이 없어도 어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마치 불행이 머리 위에서 쏟아진 기분이다. 그리고 그 모든 불행의 정점에 항상 지에스가 있다.

철컥.

현관문 소리에 성지훈은 찌푸린 얼굴을 돌렸다. 매니저가 묵직해 보이는 하얀 봉지를 양손에 들고 있다. 라면에, 과자에, 맥주.

“그거 뭐야?”

“이거? 아 맞아, 너 다이어트 중이지······.”

짐짓 시선을 피하는 매니저의 모습에 성지훈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가 끓어올라 코평수가 들썩인다.

“형이 먹으려고 사 온 거 모를지 알아?”

“미안.”

“하··· 인내. 인내. 인내!”

참을 인을 가슴에 새기는 그를, 매니저가 무심히 지나친다. 그러더니 식탁에 과자와 라면을 놓고, 냉장고에 맥주와··· 이 냄새는?

“통닭도 사 왔어?”

“냄새나냐?”

웬수가, 이런 웬수가.

“형,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성지훈은 결국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라이브나 하려고 차 키를 찾는데 매니저가 낄낄 웃는다. 저 인간이 미쳤나 싶은데.

“지훈아.”

“왜!”

“너, 계약 해지야.”

“뭐?”

눈을 끔뻑.

“회사에서, 너 놔주기로 했다. 이번 일로 내가 아주 깽판 쳤어. 물론 나도 관뒀고. 그러니까··· 오늘 맥주 한잔하자고.”

“형······.”

성지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매니저의 시선이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넌 아무 걱정하지 마. 음반 날린 거야 뭐 어쩌냐, 재수가 없었지. 넌 재기할 수 있어, 내 심장을 멈추게 한 사람은··· 오직 너밖에 없으니까.”

**

“그래서요?”

“성지훈 콘서트 놀러 갔다가 응급차에 실려 간 거예요. 심장이 멈춰서.”

“헐······.”

여직원이 눈을 크게 떴다. 귀를 쫑긋 세우고 3W 스타일리스트 강보라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늘 그렇듯 연예계 뒷얘기는 재밌는 거니까.

“그래서 VVW 들어가서 성지훈 매니저 하게 된 거고.”

“그 매니저 진짜 특이하다. 어떻게 감동했기에 심장이 멈춰요?”

“모르죠, 나도 들은 얘기니까. 근데 제가 보기에는 그거 지병이에요, 지병.”

강보라는 손을 휘저으며 얘기를 대충 마무리하고 기콘부 사무실을 돌아봤다. 그러다가 백유진과 눈이 마주쳤는데.

“아휴 또 회의야. 삐삐야! 과자 좀 가져와.”

“예.”

“저도 도울게요!”

강보라는 서둘러 백유진을 쫓아갔다.

은밀한 만남.

‘시현 수호천사들&포에버’ 회장과 운영 스태프는 철저히 정체를 숨기고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회장님, 오늘 무슨 회의 하는 거예요?”

강보라의 질문에 탕비실 냉장고에서 과자와 음료를 꺼내던 백유진이 뒤돌았다. 통통한 볼이 해맑은 미소를 보인다.

“아마 팬 미팅 얘기 나올 거예요.”

“와, 진짜요?”

강보라가 눈을 크게 떴다.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순간이 왔다는 소리니까.

“예. 12월에 잠실운동장에서 할 것 같아요.”

“와, 그럼 우리 버스 대절해야겠다.”

“그러게요. 후후!”

둘이 손을 맞잡고 깡충깡충 뛰는 사이, 직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다들 이거 봤어요?”

매니지먼트 사업부 조 부장이 기콘부 사무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뭔가를 들고 왔는데,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는다.

“우와.”

잡지인데, 표지에 1미터는 될법한 엄청난 크기의 잉어를 가운데 두고 최재환과 이시현이 환히 웃고 있다.

“허.”

홍보부서 권 팀장은 헛웃음을 흘리며 잡지를 손에 쥐었다. 성 팀장도 곁에 오더니 신기한 듯 본다.

“이거 약 지어도 되겠네.”

잉어즙은 혈액순환을 돕고, 혈당수치 개선에 도움을 줘서 기운과 체력을 보충··· 별의별 소리가 나오는 중에, 모일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조 부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ATTM 한 팀장, 기콘부 성 팀장, 홍보부서 권 팀장, 그리고 과자를 깨작거리는 여직원들을 보며, 결심한 듯 얘기를 꺼냈다.

“임원회의 결과, 대표님이 4팀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조금은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높여 얘기하자 다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다.

“간략하게 얘기할게요.”

조 부장은 호흡을 가다듬고 빠르게 설명했다.

차 대표는 12월 한 달 동안 이시현의 활동을 위해서 매니지먼트 4팀을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다만빠 방송, 이시현의 공식 팬 미팅, 그리고······.

“음반 활동합니다.”

“음반 활동이요?”

음반이란 소리에 다들 웅성거린다. 팀장들이야 상황을 얼추 알지만, 매니저나 직원들은 모르고 있었으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시현이 노래한다고요? 드라마 OST예요?”

“그건, 내가 설명할게요.”

ATTM 한 팀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현재 보이스레이드 백종현이 잠적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보이스레이드 타이틀곡 ‘너라서’를 이시현과 주일희로 팀을 구성해 활동할 계획입니다.”

“그거 노래 어려운데··· 고음도 있잖아요?”

매니저들은 하나둘 의견을 냈다. 물론 다들 일반적인 상식, 그러니까 이시현을 일반인의 노래 실력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팀장은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건, 얘기만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니까.

“다들 여기 보세요.”

한 팀장은 감색 스웨터에 묻은 과자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모난 비디오테이프를 집어서 비디오데스크에 드르륵.

비디오 영상이 멈추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정말 저 노래 부르는 사람이 이시현이 맞냐, 왜 여태 숨겼냐 등등··· 다들 패닉에 빠져 질문을 쏟아내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조 부장이 손뼉을 짝!

“자! 4팀 구성은 각 부서 팀장님들이 명단 제출하시고요. 팀장 공석인 매니지먼트 사업부 1팀에서는, 제가 스케줄 확인해서 임의로 차출하겠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차 대표는 이시현의 차기작 ‘스텝’ 촬영 전까지, 12월 안에 이시현의 국내 입지를 못 박겠다는 계획이니까.

“여러분 명심하세요. 떡밥이든, 폭탄이든··· 지에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겁니다. 이시현한테.”

< 다만빠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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