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05화 (105/227)

< 해를 품은 달 (3) >

“아주 어이가 없었다니까. 지가 팀장이면 팀장이지, 어디서 감히 촬영을 중단시켜?”

윤 감독은 장 미디어 대표 장승태에게 하소연을 시작했다.

배우 매니저가 촬영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키더니, 급기야 현장에서 배우와 함께 떠나버렸다. 뭐라더라? 디렉션 하나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감독 의자에 앉아서 ‘다시’만 외치고 있으면 다냐고? 허!

“정환아.”

장 대표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그 매니저, 지에스 팀장이라고?”

“그렇다니까요.”

발길질 대신, 윤 감독은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툭 내려쳤다.

이 상황이 열 받는 것도 있지만, 현장에서 지에스 팀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입이 절로 다물어졌던 스스로가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많은 스태프들 앞에서 감독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으니까.

“근데, 송이경이가 그렇게 연기를 못해? 여고시절 나온 거 보니까 잘하던데.”

그 말에 윤 감독은 입맛을 쩝 다셨다.

실은, 실컷 혼낸 뒤에 잘해주면서 꼬셔 볼 생각이었다. 배우들이란 원체 감정 기복이 심한 인간들이라서 달궜다가 식히기를 반복하면 틈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아니 뭐, 적당히 갈 수도 있는데, 그래도 더 좋게 화면에 담으려고 한 거죠. 그래야 우리 장 미디어 작품들 퀼리티 좋다는 얘기 나오는 거고, 배우 입장에서도 결과물이 좋으면 지 좋은 일인데······. 안 그래요?”

책임을 떠넘기듯 질문을 던지자, 장 대표가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지에스하고 얘기해볼게.”

“아니요. 저 이거 그냥 못 넘어갑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연제협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해야죠.”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야, 그럼 일이 너무 커진다. 그냥 적당히 사과받고······.”

“대표님, 아니 형님. 이거 그냥 넘어가면 우리 앞으로 엔터기획 애들한테 굽실거리면서 일해야 해요. 그러면 어느 누가 여기 와서 일하겠어요? 형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연제협이야 제가 꽉 잡고 있으니까, 이번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자신에 찬 윤 감독의 표정에 장 대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연제협 회장이 윤 감독의 매부니까.

**

「다음 날. KIS 수원 세트장」

“그래서 최 팀장은?”

“슬슬 날이 추워지니까 사무실에서 안 나오려고 하는데요?”

너스레를 떨며 말했더니 최미숙이 깔깔 웃는다.

“아이고, 그럼 최 팀장은 연애는 어떻게 한대?”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내가 연애를 못 했던 건 아니다. 아내와 만나고, 또 결혼하기 전에 만난 여자들이··· 그 정도 외모는 됐거든. 분명히.

아무튼 이제 아내를 만날 일은 없고, 최재환은 앞으로 더 바빠질 테고··· 그러니 지금 연애 좀 해야 하는데, 녀석이 도통 여자를 만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소개팅이라도 해줘야 하나.

“내가 최 팀장 중매 한번 서볼까?”

마침 최미숙이 넌지시 물었다. 그녀 정도면 이 바닥 마당발이니 빈말은 아닐 거다.

“내 주위에 괜찮은 애들 많은데. 진짜 그래볼까?”

“선생님이 그래 주세요. 요즘에는 재환이 형이 차에 타면 홀아비 냄새가··· 아후.”

“하하하!”

최재환 녀석 지금쯤 귀가 무척 가려울 텐데, 실컷 웃은 최미숙이 대기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오늘은 스타일리스트가 한 명뿐이네?”

“송이가 감기 걸렸거든요.”

“아, 걔? 그래, 잘했다. 괜히 너 감기 옮기면 큰일인데.”

“선생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나는 미소와 함께 그녀의 팔을 꾹꾹 주물렀다. 이 정도 관계는 아니었는데, 이번 삶에서는 한번 정을 붙였더니 그녀라는 존재가 정말 가까이 느껴진다.

“그만해, 힘들어.”

“괜찮거든요? 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어이구, 넌 어쩜 이렇게 착하니?”

“저 안 착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가로젓자, 최미숙이 눈웃음과 함께 내 볼을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조연출 황동태가 대기실에 들어왔다.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미안, 나 찾았어?”

“이제 슛 들어가요.”

황동태가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말한다. 그 모습에 최미숙이 눈을 기울이며 그 얼굴을 들여다봤다.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니? 왜 이렇게 힘들어 보여? 박태 감독이 또 뭐라 그래?”

“항상 그런데요 뭐.”

“후후.”

피식 미소와 함께 나를 돌아본 그녀가 손을 흔들며 대기실을 나갔다. 그제야 박용현이, 서아린이 조금은 편한 자세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너 진짜 마음에 들어 하나 보다.”

“내가 좀 잘하니까.”

“허.”

이제 박용현과도 제법 친해졌다. 매니저와 스타의 관계를 흔히 부모자식, 혹은 부부사이라고 한다. 그만큼 서로를 잘 알 수밖에 없는 가까운 거리다.

“근데 오빠는 연애 안 해요?”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나도 박용현도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화장대에 앉아 있는 서아린이 은테 안경 속 차분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다. 처음 봤을 때 그녀의 단발머리도 이제는 제법 많이 자랐고.

“그냥 궁금해서요. 연애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야, 그런 소리하지 마라. 시현이가 지금 연애할 때냐?”

“걸리지만 않으면 되죠.”

서아린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얘기한다.

그래, 걸리지만 않으면 되지. 문제는 걸렸을 때 일어나는 거니까.

피 끓는 청춘들, 외로운 청춘들, 대한민국의 잘생기고 예쁜 친구들이 모인 이곳에서 연애하지 말라는 것은 온종일 굶은 사람에게 눈앞의 음식을 보고만 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을 거다.

“어이구, 시현이 너 행여나 저 소리에 현혹되지 마라. 아니다, 너 혹시 몰래 연애하는 거 아니지?”

“안 해요 안 해.”

나 좋다는 그 현승아도 찼거든? 지금도 가끔 생각나거든?

“그래. 지금 그럴 때 아니야. 그래도 진짜 연애하고 싶으면··· 회사에서 해라. 회사 내에서 만나.”

박용현이 적당히 해답을 제시한다. 같은 회사의 연습생 혹은 배우와 사귀면 관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물론 헤어지면 그만큼 껄끄러운 사이도 없지만.

“근데, 너 팀장님한테 무슨 소리 못 들었냐?”

“뭐가요?”

“어제 송이경 촬영장에서 무슨 일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요.”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들었다 해도, 죽을 일 아니면 신경 쓸 생각 없다. 최재환은 알아서 잘할 테니까.

잠시 대화가 끊긴 대기실은 침묵이 내려앉은 듯 조용해졌다.

박용현은 이때다 싶었는지 잠시 눈을 붙였고, 서아린은 역시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화장대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

그 모습이 떠들썩한 한송이와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저 아이는 연애를 어떻게 할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일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은 또 뭐가 있을까··· 그런 흔한 궁금증.

끼익.

노크도 없이 대기실 문이 열렸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1팀 김 팀장이다. 터질 것 같은 셔츠 속 배를 내밀고 들어왔다.

“팀장님?”

눈을 뜬 박용현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어, 쉬고 있었냐?”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오늘 수혁이 인생극장 촬영하잖아.”

블랙보이 리더 남수혁.

“아, 연말 특집이요? 블랙보이 멤버들 다 출연하는 거예요?”

박용현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래, 벌써 12월을 준비할 때구나.

패션 잡지가 여름 화보를 5월에 미리 촬영하듯, 방송 역시도 늘 앞을 준비한다.

그러잖아도 KIS 예능국에서 신년맞이 예능 한번 하자고 했는데, 도저히 스케줄을 낼 수 없어 정중히 사양했다. 그래도 꼭 예능을 피하는 건 아니라서, 하나 해보고 싶은 건 있다.

몰래카메라.

대상은 내가 아닌 최재환.

내가 납치됐다는 설정도 재밌을 것 같고, 사고가 났다는 설정도 재밌을 것 같고. 훗. 최재환이 어떤 모습을 보일까.

“근데 하실 얘기 있으세요?”

박용현이 눈치껏 묻는데, 김 팀장 뒤로 남수혁이 모습을 비췄다. 마른 얼굴에 앞머리가 눈 하나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바지는 통바지, 윗옷은 비닐인가? 촌스럽지만, 지금은 저런 옷이 유행이니까.

“시현이 오늘 촬영 많이 남았냐?”

“한 씬만 찍으면 끝인데요?”

“그럼, 코디 좀 빌리자.”

“코디를요?”

박용현이 자연스레 시선을 돌려 서아린을 바라봤다. 그녀가 머리카락에 파묻힌 귓속에서 이어폰을 빼고 마주 본다.

“블랙보이 코디는요?”

“요즘 코디들 감기가 유행인가 보다. 골골대서 집에 보냈어.”

**

예고 없이 내린 비에 촬영이 멈췄다. 박태 감독은 이마를 긁적이며 하늘을 바라봤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에 비구름이 모이고, 비 냄새가 코끝에 스며든다.

“안 되겠다. 오늘은 그냥 가고, 스케줄 새로 잡자고.”

“예.”

인사를 하고 뒤돌려는데, 박태 감독이 나를 부른다.

“그거 왜 그런 거야?”

“뭐가요?”

“최 팀장 어제 송이경 촬영장에서 한바탕 했다며?”

“예?”

첨 듣는 얘기에 내가 눈썹을 들썩이자 박태 감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 조감독이 내 후배야. 듣자니 감독이 계속 NG 컷 외치니까 열 받아서 송이경 데리고 촬영장 박차고 갔다는데.”

“그래요?”

“최 팀장이 배우 아끼는 건 내가 잘 아는데, 이번 건 좀 참았어야 했는데··· 그런 행동, 배우한테 좋지 않아.”

박태 감독이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뭐, 시현 씨한테 피해 가겠어? 내가 괜한 얘기 했네.”

전후 사정을 모르니 인사만 하고 분장실로 이동했다. 박용현도 모르는 것 같아서 묻지 않았고.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소문까지 난 걸까 싶지만, 아마 최재환이 지에스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한 행동을 아닐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안 좋았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감독이 누구인지, 무슨 촬영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내 기억 속에 담겨 있는지.

분장실에 돌아오니 서아린이 남수혁의 머리를 세팅 중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고, 눈빛은 그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왜 벌써 와?”

김 팀장이 우리를 보고 물었다.

“밖에 비 와서요. 촬영 접는다네요.”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남수혁이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그런 나도 그냥 가는 거예요?”

“넌 실내 촬영이잖아.”

“에이.”

아쉬워하면서, 남수혁이 서아린을 쳐다본다.

“근데, 이름이 뭐예요?”

“서아린입니다.”

“못 보던 얼굴이네. 실력 좀 있으시다.”

저거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SN에서 왔다는 코디가 아린 씨였구나.”

“예.”

“어쩐지 실력이 좋더라. 그럼 혹시, 우혁이랑 사귀었다는 애가, 아린 씨야?”

그 말에 서아린의 손끝이 멈췄다.

“아닌가? 하긴, 우혁이가 말한 애는 몸매도 좋고, 얼굴도 모델 급이라고 했는데······.”

“아린아.”

더 듣기 싫어서 그녀를 불렀다.

“가자.”

그러자 김 팀장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두툼한 볼을 들썩였다.

“야, 오늘 하루 빌려달라니까. 너희는 ATTM에 전화해서 지원받아.”

“아린아.”

“예, 오빠.”

재차 부르자 그녀가 손을 멈췄다.

“뭐해. 가자니까.”

“야 이시현, 너 뭐 하는 거야?”

뭐하긴. 내 식구 챙기는 거지.

“저희 가봐야 해요.”

“이 자식 보게··· 내가 말했잖아. 쟤 좀 빌려달라니까?”

“그래 시현아. 우리 그냥 가자.”

박용현이 옆에서 내 팔을 붙잡았지만,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쟤, 물건 아니거든요. 우리 팀입니다.”

김 팀장이 나를 노려보고, 남수혁도 아니꼽게 쳐다본다. 그래서 뭐.

“가자, 아린아.”

**

‘촬영 잘하고 있으려나.’

최재환은 빨랫감을 옷걸이에 걸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오랜만에 이시현의 오피스텔을 청소 중이다. 물론 대부분 옷이 협찬이라서 한송이와 서아린이 수거해가지만, 속옷만은 어쩔 수가 없으니까.

“하여간, 이 자식은 팬티가 금방 헐어.”

최재환은 실밥이 뜯어진 팬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다음 옷걸이에 마저 걸고 청소기를 돌렸다.

윙윙.

요란한 청소기 모터 소리. 하지만 얼마 못가 멈췄다.

“이거 또 고장 났네.”

그래서 손을 들어 청소기를 두드리려는데, 주머니 속 휴대폰이 정신없이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팀장님, 저 이우정입니다.

“예, 어쩐 일이세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일? 무슨 일?”

-저희 쪽에 연제협 공문 내려왔거든요. 지에스의 최재환 팀장님하고, 배우 송이경··· 보이콧한다고.

“예?”

< 해를 품은 달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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