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를 품은 달 (2) >
배우 송이경과 작가 주원경.
두 사람은 고급 레스토랑의 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가끔 시간이 나면, 송이경이 주 작가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편이었다.
“짠.”
젊은 여배우와 중년의 작가는 와인잔을 부딪쳐 서로의 만남을 자축하고 수다를 이어갔다.
“작가님, 이번에 SBC 공모전 심사 어떠셨어요? 쓸 만한 작품 좀 나왔어요?”
“별거 없어. 다들 열심히는 쓰긴 한 것 같은데, 딱히 눈에 띌만한 게 없네.”
주 작자는 입안 가득 오물거린 스테이크를 삼키고 와인으로 입가심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걱정 마. 이경이는 내가 어떻게든 끌고 갈 테니까.”
“훗. 얘기만 들어도 배부르네.”
안도하는 송이경의 모습에, 주 작가는 손에 쥔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에 놓고 냅킨을 들었다. 그러길 잠시. 중대한 사실을 얘기한다는 듯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비밀인데··· 프로복싱선수를 소재로 써보려고.”
“프로복싱선수요?”
주 작가는 대략적인 드라마 줄거리를 송이경에게 얘기했다. 송이경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린다. 마음에 들고 자시고를 말하기도 전에 이미 얼굴은 환히 웃고 있었다. 역시 여배우. 선이 고운 얼굴의 미소는 지켜보는 이도 들뜨게 만든다.
“와, 재밌겠다!”
“이거 분명 대박 칠거야.”
“작가님, 그 작품 저 꼭 쓰셔야 해요?”
지에스에 들어왔다고 송이경의 인생이 확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일거리를 찾아 홍보부에 쌓인 시나리오를 살펴야 하고, 기콘부도 들락거린다. 물론 강 실장도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고.
하지만 딱히 이미지에 맞는, 한방짜리를 찾기 어려웠는데.
“아, 맞아.”
가방을 뒤적인 송이경이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이게 뭐야?”
“선물.”
“아, 이런 거 안 줘도 돼.”
“에이, 얼마 전에 단막극 촬영할 때 협찬받았는데, 작가님 손에 걸면 예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하나 샀지. 가격 그렇게 안 비싸요.”
나근나근하게 얘기하는 송이경과 달리, 케이스를 열어 시계를 꺼내 든 주 작가는 눈을 반짝이며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컷! 수고들 하셨습니다.”
준비하고 대기하는 시간만 두 시간이 걸린 연예가소식팀 촬영이 끝났다.
스튜디오를 나온 우리는 바로 대기실로 이동했다. 한승연도 지친 모습이다. 이마의 솜털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힘들지?”
“아니요. 오빠가··· 아, 선배님이 더 힘드시죠.”
한승연은 의미 없이 뱉은 오빠 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더니 주변을 살폈다. 여린 얼굴이 겁에 질렸다. 첫 촬영이 끝나고 내가 꽃을 선물했는데, 그 때문에 인터넷에 그녀의 안티 카페가 생겼다. 그 뒤로 주눅이 든 눈치다.
하지만 그건 통과의례 같은 거니 어쩔 수 없는 일.
끼워 팔기로 드라마에 합류했으니 그 정도 잡음은 예상했어야 한다. 대신, 그때 나는 팬 카페에 손편지를 써서 직접 올렸다.
우리 지에스 신인배우 한승연 좀 좋게 봐달라고.
‘그나저나 앞으로 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한 씬 짜리 단역이던 한승연이 아직도 드라마에 남아 있다.
일본인 선생님 역을 맡은 이수정이 김 작가와 박태 감독에게 찍혀서 비중이 줄었는데, 그 부분을 메우면서 예상외로 한승연이 기회를 잡았다.
KIS 역시도 그 일에 동조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시청률을 확 뽑아먹으려고, 촬영 전반에 걸쳐서 간섭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극 중 인물 박희재(고우희)의 삶에 초점을 맞추려 했던 김은수 작가의 생각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물론, 그럴수록 시청률은 오르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촬영장에서 고우희 본 적 있니?”
“아니요. 그 언니 되게 무뚝뚝해요. 그러다가 선배님들 오면······.”
한승연이 말꼬리를 흐린다. 괜히 뒷말하는 기분이라도 든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우희에 대한 생각을 꺼냈다.
“친해져 봐. 고우희 괜찮은 애야.”
예전의 나였다면 학을 뗐을 소리를 지금 하고 있다.
지난번 고등학교에 방문해서 라디오 사연의 여학생에게 대학등록금을 약속했는데, 실은 나보다 앞서 학교 측에 의사를 전달한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고우희였다. 절대 그런 애가 아닌데.
아마 내가 그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거나, 그녀가 조금 변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선배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
한승연은 기콘부 미팅이 있어서 먼저 움직였다. 제 언니의 손을 맞잡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그 모습에, 문득 한송이를 한승연에게 넘길까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한송이가 가면 우리 팀이 심심해진다. 놓치지 않을 거야.
다음 일정까지 여유가 있어서, 우리 팀은 방송국 대기실에서 30분 정도 쉬었다가 출발하기로 했다.
‘후······.’
피곤하지만, 또 버틸 만하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외부 스케줄을 줄이는 대신 연기와 보컬 트레이닝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움직이는 시간은 여전하다.
“피곤하지?”
매니저 박용현이 뚜껑을 딴 자양강장제를 내게 건넸다.
“괜찮아요. 근데, 쟤 좀 어떻게 해요.”
“엣치!”
한송이가 연달아 세 번의 재채기를 하고 코를 훌쩍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뭐가요?”
그녀가 눈을 흘겨본다.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데.”
“우씨!”
“난 이 씬데.”
“저는 서 씨요.”
서아린까지 맞장구 쳐주자 한송이가 또다시 재채기를 엣치! 엣치! 쟤 지금 내 쪽으로 기침하는 거지?
그 어떤 배우 팀도, 그 어떤 가수 팀도, 대기실 풍경은 평범하다. 매니저는 구석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서아린은 늘 그렇듯 이어폰을 귀에 꽂고 휴식을 취한다. 한송이는 엣치!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이것저것 생각에 잠겼다.
우리 오빠는 11월 30일 종영.
물론 촬영은 그 전에 끝이 나고··· 이후에는 MNC 프로그램 촬영이 진행된다.
정말로, 이 목소리가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을 때면 나는 현재의 나를 여실히 깨닫는다.
때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지금의 행복이 송두리째 사라질까 봐, 그저 일장춘몽일까 봐, 그래서 아침에 보는 최재환의 모습에 안심하는··· 그런 나를 깨닫는다.
‘좀 더······.’
조금 더 잘하고 싶다.
세상에 이시현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려주고 싶다. 이런 녀석이 있다고. 그동안 왜 몰랐냐고. 세상과 지난날의 나한테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다.
다만, 가수 활동을 하는 건 아니다. 음반을 낼 계획도 없다. MNC 프로그램 촬영이 처음이자, 끝이다. 이후의 예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럼 ‘스텝’은 어떻게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원경 작가가 스텝을 두고 장난을 쳤다는 거다. 그런데도 내가 고민을 했던 것은, 이 일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결과야 어쨌건, 최소한 주원경 작가의 장난은 이미 성공을 했고, 내가 그 일로 피해를 본 일은 없었다. 흥행 여부도 이미 검증된 작품이니, 내가 끼어든다고 달라질 것 하나 없다. 변수는 있겠지만.
‘찝찝함.’
예정된 운명에 끼어든다는 것은 찝찝하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고, 그럼에도 나는 늘 선택을 했다. 몬스터 신재인을 일본에서 데려온 일도. 엊그제 임예진 작가를 찾아간 일도.
고민 속에 잠시의 휴식이 끝나고 박용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여유 있을 때 움직여야지.”
이동하는 길에 대본을 살피는 게 습관이 됐다.
그러고 보니 첫날에도 그랬지. 최재환이 대시보드 서랍에서 대본을 꺼내면서 나를 핀잔하고 윽박지르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바닷사람들 이야기’ 대본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겨우 한 줄짜리 대사들.
‘반추, 우리 오빠, 스텝.’
그런데 이제는 3개의 두툼한 이야기 뭉치가 내 차에 있다.
우리 오빠 종영은 이달 말. 반추는 내년 5월에 촬영.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준비기간이 최소 두 달이 필요하다. 그러니 스텝은 12월부터 2월 안에 촬영을 마쳐야 한다.
“쌀은 사서 들여놨고, 중국집하고 인근 식당에 얘기해서 언제든 주문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일단은 임 작가 통장에 오백 입금했어.”
박용현이 운전을 하며 임 작가를 만나고 온 얘기를 꺼냈다.
“잘하셨어요.”
엊그제 본 그녀는 대본을 집필하는 것보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더 시급해 보였다. 알아보니 월세도 밀려있었고.
“근데 정말 어쩌려고?”
스텝에 관한 것은 현재 최재환과 박용현밖에 모른다.
차 대표도 모르는 일.
어떤 드라마가 성공할지 미리 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제작을 해서 방송국 편성을 받는 거다. 수익이 보장되니까. 그리고 나는 스텝이 성공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스텝이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냐는 점이다. 드라마의 성공 여부가 좋은 시나리오와 좋은 배우의 출연이라는 단순함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니까.
하······. 자꾸 생각만 늘어나는 일상.
하필 강 실장은 그날 방송국에서 왜 임 작가와 부딪쳐서.
문득 뒤를 돌아보니 한송이가 골골대고 있다. 눈도 해롱해롱한 것 같고.
“안 되겠다. 병원으로 가요.”
“엣취! 저는, 괜찮아요.”
“됐어.”
“저 어른이거든요? 이 정도 감기쯤은. 엣취!”
어이구, 너 걱정되는 게 아니라 나 걱정돼서 그러거든? 감기 옮을까 봐서!
아무튼 어린애 말은 무시하고 병원으로 이동한다.
2000년 11월 어느 오후의 도로를 달린다.
“송이야 다 왔다.”
병원에 도착하자 한송이가 비실비실 차에서 내린다. 박용현이 나는 내리지 말라고 했지만, 한송이는 우리 팀이다. 나는 우리 팀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장소에서, 그 어떤 식으로 노출돼도 상관없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한송이가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오빠··· 어머!”
힘없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가로 눕혀서 품에 안았다. 그렇게 응급실로 향하면서.
“애기야, 가자.”
**
MNC 홍재광 피디는 최재환을 만나기 위해 직접 발걸음을 했다. 기자들이 낌새를 채면 안 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만남이 최선이다.
“그래서요?”
최재환이 빨대를 입에 물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홍 피디와는 전에 한번 본 적이 있기에 서로가 편하게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그게 말이야. 여원기 씨는 자신이 북한군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름도 바꾸고 신분까지 바꿔서 살았던 거야. 그러니까 찾지 못했던 거고.”
홍 피디는 잠시 얘기를 멈추고 커피에 각설탕을 하나 넣으며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지난번 이산가족 상봉 방송이 있고 여원기 씨 아내가 우리 방송사에 사연을 보낸 거지. 남편의 여동생을 찾고 싶다고 말이야.”
지금 드라마 우리 오빠의 박춘삼, 그 실제 모델 여원기 씨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MNC 내부에서 말이 많은 기획이었다.
왜 중국까지 가냐, 브로커까지 끌어들이냐, 공영방송 먹칠하냐 등등. 그런데 어이없게도 당사자가 제 발로 걸어온 거다.
“이 사실, 여점례 할머님 측에는 언제 얘기하실 겁니까?”
“할머니는 모르시고, 그 자식들에겐 이미 언질 했어.”
“그럼 촬영은 언제부터 들어가요?”
“일단 중국 가서 찾는 과정도 찍고, 수소문하는 것도 찍고, 그러다가 방송국에 제보된 사연을 찾아봤더니 딱 나왔다 이거지. 기적처럼 말이야. 그럼 또 확인 과정 거치는 거 찍고··· 그러고 나서 상봉 무대 만들어야지. 우리 오빠 드라마 끝나고 바로?”
그 말에 최재환은 눈을 숙이고 빨대를 쪽쪽 빨았다. 지금 홍 피디 얘기는 절대로 KIS에 도움주긴 싫으니, KIS 드라마 끝나고 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근데 문제가 있어.”
얘기를 다시 꺼낸 홍 피디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 할아버지, 치매야.”
순간 최재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가 힘없이 풀렸다.
“잔인한 일이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리워했는데, 이제는 여동생을 봐도 기억 못 할 테니까.”
“증세가 심각합니까?”
그 질문에 홍 피디는 굳은 얼굴만 보여줄 뿐이었다.
연출 입장에서야 이래저래 사연 있고, 상황이 더 안 좋을수록 쾌재를 부를 일이지만 인간적으로 이건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이다.
“그건 둘째 치고, 이시현이 노래 연습은 하고 있어? 너무 음치면 또 그렇잖아?”
상봉 전, 이시현이 노래를 부른다면 감동뿐 아니라 시청률까지 잡을 수 있는데, 노래의 퀼리티에 따라서 그 방향은 달라진다.
“그건 뭐······.”
최재환은 말꼬리를 흐렸다. 차 대표는 이미 서예대 장연화 교수와 논의를 끝냈다. 그래서 언제든 이시현을 내놓을 타이밍을 잡고 있다.
이시현은 몬스터 신재인과 달리 오래 묵힐 놈이 아니니까.
그리고 정말 전 국민을 울게 만들 상봉에 앞서 이시현이 노래를 부른다면, 지금의 인기에 화룡점정이 될 게 틀림없다.
최재환은 주차를 마치고 휴대폰을 챙겼다.
강 실장이 집안에 일이 생겨서 송이경을 부탁했지만, 예정에 없던 홍 피디와의 미팅 때문에 이제야 촬영장에 도착했다. 급한 대로 송이경에게는 신입 매니저 하나를 붙였는데··· 잘하고 있을지는.
차에서 내려 걸음을 서둘렀다.
비좁은 주택가에 스태프들과 촬영 장비들이 보인다.
송이경의 오늘 촬영은 인터넷 업체 ‘한마음’의 CF.
고등학생이 짝사랑하는 옆집 누나에게 편지를 쓰고 또 쓰지만, 악필로 인해 포기하고 한마음 사이트의 메일로 사랑을 고백하는 순수한 마음을 표현하는 스토리다.
“실례합니다.”
스태프들을 지나 가까이 다가간 최재환은 웃고 있을 송이경을 기대했다. 하지만······.
“컷! 컷!”
감독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뱉는다. 한눈에 봐도 촬영장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이경 씨, 자연스럽게 미소 띄우라는 말 몰라요? 벌써 몇 번째야?”
“죄송합니다.”
“지에스 배우라고 하더니만··· 지에스도 엉망이구만. 기본도 모르는 애를 가지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허리 숙여 사과하는 송이경과, 구시렁대며 돌돌 말아 쥔 콘티로 제 허벅지나 두드리고 있는 감독.
최재환은 어금니를 깨물고 촬영을 지켜봤다. 신입 매니저가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지만, 날이 선 시선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사이 NG컷이 반복됐다.
“아 진짜··· 다시 갑시다!”
“나와.”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재환의 목소리도 현장에 튀어나왔다. 그 때문에 오디오가 겹치자 감독이 인상을 쓰며 뒤돌아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경 씨 나와.”
최재환은 손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촬영 때려치우고 나오라고. 당황한 송이경이 머뭇거리자, 감독이 의자에서 일어나 삿대질하며 묻는다.
“당신 누구야?”
“나 송이경 매니접니다. 뭐해 이경 씨! 나오라고!!”
< 해를 품은 달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