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03화 (103/227)

< 해를 품은 달 (1) >

「2000년 11월 8일 수요일」

‘오빠는 제게 언제든 전화해도 되는 사람이에요.’

권혜선의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했던 최재환의 계획은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그래서··· 실수가 분명해 보이는 선택을 했다.

“최 팀장님.”

“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그의 모습에 성 팀장이 피식 웃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계세요?”

“생각은요 무슨··· 아무튼 다행이네요. 빠듯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최재환은 괜히 이마를 긁적이며 수첩을 뒤적였다.

영화 반추의 제작 일정이 잡혔는데, 이시현에게는 충분한 준비와 휴식을 병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일정이었다. 물론 중간에 작품 하나를 들어가게 된다면 빠듯한 여유지만.

2001년 3월 반추 제작 발표(예정)

2001년 5월 반추 1부 크랭크인(예정)

2001년 11월 반추 1부 크랭크업(예정)

2002년 5월 미국 / 한중일 동시 개봉

“감독이 누구인지는 아직 얘기 없어요?”

그 질문에 성 팀장은 옅은 눈웃음을 띤 얼굴로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크랭크인 들어가기 전날까지 철저히 비공개로 간다는 게 페이 프로덕션 입장이에요.”

“엄청 까다롭네.”

혀를 내두르던 최재환이 눈썹을 꿈틀 올린다. 성 팀장이 계속해서 눈웃음을 띠고 그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봐요?”

“이상하네··· 요즘 최 팀장님 얼굴이 폈어. 연애해요?”

“심심하시죠? 훗. 일 있으면 또 전화주세요.”

수첩을 챙겨 일어난 그가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오니 지난번 이시현 첫 방 팬 미팅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던 백유진이 보인다.

짧게나마 눈인사를 하고, 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빈 연습실 한 곳에서 이시현이 대본을 살피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인기척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저 대본··· 그건가?’

최재환은 이시현의 모습을 보면서 구석의 철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도 한때는 연기자가 되길 희망했기에, 어느 정도 녀석의 생각을 엿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저 녀석은 어떻게 저렇게 빠져들까. 어떻게 그렇게 녹여낼까.’

문득 최재환은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 연극판을 기웃거릴 때,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연극대본이 있었다.

극 중 인물에게는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가끔 퇴근길에 과일을 사 들고 집에 온다. 그저 식탁에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갈 뿐이다.

일과 사람에 치인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과일이며 과자 같은 간식거리를 집에 사 온다.

그러던 어느 날 식탁에 놓인 귤껍질을 보게 된다. 아내가 귤을 먹은 흔적인데, 그는 그 길로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 대성통곡을 한다.

해당 에피소드는 극단에서 하는 짧은 공연 중 하나로, 5분짜리 에피소드 여러 개가 연속해서 이어지는 공연이었다.

당시 최재환은 연극대본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서 선배에게 조언을 청했었다. 선배님 이게 무슨 의미예요? 그러자 선배는 소주 한잔에 입을 열었다.

‘극 중 인물의 아버지도 가끔 과일이나 간식을 사 온 날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극중 인물은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거지. 그 자신이 힘든 날 귤을 산 것처럼, 아버지 당신에게도 힘든 하루가 있었다는 사실을··· 극 중 인물이 그걸 아는 나이가 된 거지.’

때로는 삶을 살아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모든 것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배우가 작가의 의도를 이해 못해 설명을 듣고서야 어렴풋이 표현한다는 것은, 연기가 아닌 단순한 흉내내기일 뿐이다.

그런데 이십 대인 이시현은 나이와 달리 대본을 보는 깊이가 있다.

단순히 지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음, 제 것으로 소화한다. 어설픈 애드리브가 아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카메라 앞에 내놓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지난 촬영에서 거침없이 드러냈다.

“형.”

어느새 곁에 온 이시현이 그에게 대본을 내밀었다.

[스텝]

“이게 그거야? SBC 공모전 대본이라는 게?”

최재환은 제목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SBC에서 우연히 작가와 마주쳤고, 그녀에게 부탁해 대본을 회사에 보내달라고 했다는 얘기.

“흠······.”

최재환은 A4용지에 출력된 대본을 빠르게 훑었다. 대본 양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을 보니, 아마추어 작가의 작품이다.

“니가 보기에는, 대본 어떤 것 같은데?”

“고민 중이야.”

이시현은 의자를 펴서 최재환과 마주 앉았다. 싱글싱글 웃는 그 모습에 최재환이 콧잔등을 찌푸린다.

“뭐가?”

“이걸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 말에 최재환은 빠르게 넘기던 대본을 다시 들여다봤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면 단순하게 볼 대본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라고?”

“응. 아마도.”

“그렇단 말이지······.”

시놉시스를 살피며, 최재환은 손끝을 입술에 가져갔다.

연인을 죽게 만든 프로복싱선수에게 접근하는 여자.

그런 여자의 정체를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프로복싱선수.

일단은 시작부터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이 분명하다.

여자는 남자를 증오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둘의 감정을 어떻게 끌고 갈까.

어떤 계기를 넣었고, 어떤 장면에서 임팩트를 넣었을까.

그런 궁금증이 담긴 시놉시스다.

하지만 대본은 4회까지밖에 없었다. 딱, 공모전 제출 분량이다.

“글쎄다. 이런 소재는 중간에 무너지기 십상인데.”

좋은 소재는 많지만, 소재빨로 시작된 글은 결국 그 소재 때문에 막히게 된다.

복싱, 갈등, 로맨스, 이것들을 잘 버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공모전 작품이라도, 당선됐다고 편성이 잡힌다는 보장이 없다. 설사 편성이 된들 이시현이 스케줄을 잡기에는 일정이 맞지 않을 거다.

잠시의 생각 끝에 최재환은 결론을 내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너 이거 못해. 괜히 힘 빼지 마.”

다시 대본을 건네자 이시현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글쎄.”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복싱 도장 좀 알아봐 줘.”

“야.”

“아 몰라몰라.”

어린애처럼 등을 휙 돌리는 이시현의 모습에 최재환은 피식 웃을 뿐이다.

“이시현 진짜 멋있다.”

“확실히 전하고 분위기가 달라졌다니까. 웃을 때면 그냥······.”

여자들은 연습실 창을 통해 이시현을 보면서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이제야 그에게 관심을 두는 건 아니었다. 전부터 얼굴 하나는 짱이었는데, 어쩌다 회사에서 마주쳐도 조용하고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승연이 부럽다.”

여자들은 배우로 방향을 선회한 연습생 동기 한승연을 거론했다.

월말평가에서 이시현과 연기 합을 맞춘 것도 모자라 드라마 우리 오빠에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이시현에게 연기도 배웠단다.

“걔 언니가 이시현 스타일리스트잖아. 어딜 가나 인맥이란.”

이런저런 불만은 있지만 딱히 나쁜 일은 아니다. 경쟁자가 한명 줄었으니까. 더구나 연기 쪽으로 갔으니 가수 데뷔를 꿈꾸는 그녀들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근데, 팀장님하고 이시현 은근히 잘 어울리지 않아?”

“팀장님이 이시현 캐스팅했대잖아. 5년이나 데리고 있었고. 현장에서 둘이 호흡 짱이래. 눈만 봐도 서로 다 안대.”

“아, 나도 저런 매니저 데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데뷔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지?”

킥킥 웃는데, 웃음소리가 일순 멈췄다. 곧바로 등 뒤를 돌아본 그녀들이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

그녀들의 앞으로 블랙보이 멤버들이 주르르 지나갔다.

삐딱한 자세, 거들먹거리는 시선, 싸가지는 밥 말아 먹은 것 같은 표정들.

블랙보이 멤버들은 이시현이 있는 1번 연습실을 눈에 담으며 2번 연습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들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와, 완전 살벌하다.”

“남수혁 눈 왜 저렇게 살벌해?”

“가자, 듣겠다. 이시현은 오늘 저녁에 보면 되지.”

“아, 오늘 수요일이지?”

**

[오늘도 우리 오빠를 사수하라!]

[매회 고공행진! 이번 주 시청률 40% 눈앞에 있다!]

[이시현의 끝은 어디? 이시현을 더 보고 싶다!]

[시청자들 이시현 분량 늘려달라고 요구!]

매회 시청률 기록 갱신 중인 우리 오빠.

그만큼 드라마와 이시현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가는데, 특히 이시현의 이름은 연일 방송에서 거론이 되고 있다.

팬클럽 회원 수는 폭발, 십 대부터 삼십 대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지까지.

취재 열기도 뜨거워서 기자들과 지상파 3사 방송국은 우리 오빠에 관한 건은 뭐든 찾아서 내보내고 있었다.

[서울 XX 학원가]

저녁 10시가 넘어서도 불이 꺼지지 않는 이곳에 최근 변화가 일고 있다. 수요일과 목요일만 되면 밤 10시 이전에 학생들이 썰물 빠지듯 집으로 돌아가는 건데, 기자가 이 좋은 아이템을 놓칠 리가 없었다.

“저희는 지금 서울의 유명 학원가에 나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최근 불어 닥친 우리 오빠의 열풍을 느낄 수 있는데요, 밤 10시 이후에도 불이 꺼져 있지 않던 학원가에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기자와 카메라맨이 미리 섭외된 학원으로 들어갔다. 전날 이 시간에는 학생들로 붐볐지만 오늘은.

“보시는 바와 같이 텅 빈 교실입니다. 수요일과 목요일, 드라마 우리 오빠가······.”

기자가 말꼬리를 흐린다. 멘트와 달리 교실에 한 학생이 앉아서 자습서를 풀고 있었다. 굉장히 집중한 모습. 기자가 다가갔다.

“학생? 학생?”

재차 부르다가 어깨에 손을 가져가 흔들었다. 여학생이 놀라서 고개를 든다. 그러더니 귀에서 이어폰을 뺀다.

“학생은 이 시간에 뭐 하고 있으세요?”

그 말에 여학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하긴 뭘 하냐는 시선이다. 공부하는 게 당연한······.

“어?”

여학생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마를 찌푸린다. 그러더니 벽시계를 보고, 달력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 눈을 크게 떴다.

“아저씨, 오늘 수요일이에요?”

“예.”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학생은 절망한 얼굴로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아이씨! 우리 오빠 봐야 하는데!”

**

“저 혼자 내릴게요.”

“그래.”

박용현이 잠시 밖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골목길 가로등 빛 아래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음식쓰레기를 뒤지던 고양이 한 마리가 멀리 도망가고, 이제는 제법 코끝이 시린 늦가을의 바람이 나를 스쳐간다.

곧 겨울이 오겠지. 추운 건 질색인데.

빌라들을 지나 초록색 대문 앞에서 멈췄다. 손을 댔더니 힘없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고, 반대편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이내 칠이 벗겨진 유리문 앞에 섰지만, 초인종도 없어서 주먹으로 퉁퉁.

-누구세요?

목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하얀 맨발로 나온 그녀가 날 보고는 헉! 숨을 삼킨다.

“소리치면 안 돼요.”

재빨리 말하자, 그녀가 벌린 입술을 다물었다.

지난번 SBC에서 마주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색이 바랜 스웨터도 그대로고.

“안에 들어가도 돼요?”

“예, 예!”

경기를 일으키듯 대답하고, 그녀는 주춤거리다가 나를 안내했다. 그래서 발을 들였는데··· 안에 아무것도 없다. 휑한 반지하방이다. 낮에도 햇빛 한줄기 안 들어올 것만 같은, 심지어 칙칙한 곰팡내까지.

“여긴 어떻게?”

그녀가 물었지만 지금 내 눈에는 텅 빈 반지하방만 보인다. 가만히 서 있으니 천장이 머리를 짓누른다. 화장실은 밖에 있나? 겨울에는 어떻게 씻어?

“대본 때문에 왔어요.”

“뭐··· 마실 거라도 드려야 하는데··· 아 맞아.”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연다. 텅 빈 냉장고 안에서 캔 음료수 하나 있는 것을 꺼냈다.

“이거 드세요······.”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밥은 먹었어요?”

“배달 왔습니다!”

“얼마죠?”

“예, 만 육··· 헉!”

나를 본 배달원이 하마터면 철가방을 떨어트릴 뻔했다.

“여기 돈 있습니다.”

“아, 예예!”

배달원이 떠나고, 삐걱 소리 나는 식탁에 음식을 옮겼다. 기름진 냄새가 코를 찌르자 그녀의 목울대가, 시든 보조개가 꿈틀거린다.

“임 작가님, 식사하세요.”

대본을 보내온 서류봉투에 임예진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 이름이다. 주원경 작가는 ‘스텝’으로 명실공히 히트 작가 반열에 올랐는데, 임예진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드세요.”

탕수육과 짜장면을 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냥 봐도 며칠은 굶은 얼굴이다. 내가 먼저 탕수육 몇 점을 입에 물자, 그녀의 젓가락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업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피시방에서요. 프린트도 거기서 해요.”

우물우물.

피시방이면 작업 환경이 매번 바뀔 텐데, 거기서 대본을 썼다니.

“공모전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내 질문에, 그녀의 젓가락질이 잠시 멈춘다.

“안됐어요. 그래서 이제 그만하려고요.”

씁쓸한 미소를 가로젓는다.

“근데 진짜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설마 공모전에 떨어진 제 대본 때문에 오신 거예요? 아, 혹시 지난번에 그 매니저님이랑 부딪친 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어디 다치신 건가요?”

“아니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확인해보려고요.”

“뭘요?”

“어떤 게 진실인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나를 보다가 짜장면을 입에 욱여넣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작가님.”

“예?”

“돼보지 않으실래요?”

많이 고민했다.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또 다른 운명의 장난인가.

“뭘요?”

뭐긴. 히트 작가지.

< 해를 품은 달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