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02화 (102/227)

< 드디어 우리가 만날 시간 (6) >

“지훈아 뭐하냐?”

방문을 불쑥 열고 들어온 매니저 때문에 성지훈은 서둘러 인터넷 창을 껐다. 그러자 매니저가 게슴츠레 쳐다본다.

“야, 너 아직 안 죽었어. 왜 혼자서 이상한 짓을 해?”

“뭐라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어휴······.”

한숨을 쉬더니.

“형이 빌려줘? 동영상 좋은 거 있는데.”

“아이 진짜.”

짜증을 확 내고 방을 나가는 모습에 매니저는 안쓰러운 얼굴로 뒤를 쫓았다. 부엌으로 들어간 성지훈이 주방을 뒤적여 라면을 꺼내 들자, 그 안쓰러움은 한층 더 커졌다.

“임마. 라면은··· 나도 먹을래.”

둘이서 라면을 후딱 해치우고 스케줄 이동을 준비한다.

성지훈은 드레스룸을 가득 채운 옷가지들을 헤집으며 전신거울에 자신을 비췄다. 꼼꼼함 뒤에 고른 옷은 체크무늬 바지에, 셔츠, 긴소매 티셔츠, 그리고 향수를 칙칙!

현재 스타일리스트가 공석이다. 물론 구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성지훈이 요즘 슬럼프라서 혼자 다니길 원하고 있다.

“이시현 요즘 난리더라.”

매니저의 얘기에 성지훈이 거울을 보다가 멈칫했다.

“알아 나도.”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해도 TV만 틀면 이시현 얘기니까.

“참내 그 자식 순발력도 좋아. 어떻게 거기서 그런 멘트를 할 수가 있지?”

“대본이겠지! 그리고 형! 내가··· 하······. 아침부터 그런 얘기 들어야 해?”

그 말에 매니저는 텁텁한 입술을 핥으며 속마음을 꺼냈다.

“니가 계속 신경 쓰니까 염장 지르려고 물어본 거다. 너 임마 이제 걔 그만 신경 써. 니 할 일 하라고! 너 성지훈이야! 아직 안 죽었어! 너한테는 노래가 있잖아? 이시현이가 없는 무기가 너한테는 있다고!”

“알아! 아는데··· 조별아 걔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

“뭐?”

생각지도 못한 조별아 얘기가 나오자 매니저가 눈을 찌푸린다.

“이시현보다, 조별아 때문에 열 받아.”

성지훈은 명동대첩이 있던 그 날, 조별아가 연락을 해온 사실을 고백했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매니저의 질문에 성지훈은 드레스룸 문을 쾅 닫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그날 일을 떠올린다.

「명동대첩. 2000년 9월 20일 수요일」

성지훈은 늦은 밤 술 한잔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낯선 번호.

그러나 숨 막힐 듯한 고요함 속에서 들리는 상대방의 흐느낌.

이미 저녁 뉴스를 통해 일련의 사건을 알았기에, 성지훈은 직감할 수 있었다. 조별아다!

“너··· 별이니?”

다정하게. 아주 다정하게.

자세를 고쳐 앉고 부드럽게 말문을 뗐다.

“그래 별아. 네 마음 알아. 너 지금 힘들지?”

대차게 깨졌다는 얘기 들었다. 그래, 네가 이제 어디 가냐. 어서 돌아와. 와서 내가 아주 작살을··· 성지훈은 그 마음을 꽁꽁 숨기고 얘기를 계속했다.

“별이야. 어디니? 오빠가 갈까?”

-오빠.

옳지. 이제야 말문이 트였구나.

“그래. 말해.”

-미안해요.

그리고 다시 들리는 흐느낌.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나 다 이해해.”

-오빠······.

“이 바보야! 왜 말을 못해? 오고 싶다고! 다시 와서 나를 보고 싶다고··· 왜 말을 못하니!”

성지훈은 울분을 토했다. 자신 인생 최대의 연기를 하고 있었다.

-오빠··· 전 아직은 때가 아녜요.

“뭐?”

-오빠, 연어는 태어난 곳을 떠나서 바다로 간대요.

무슨 뚱딴지 없는 소리야.

-하지만 다 자라서 산란철이 되면 집으로 돌아온대요.

성지훈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얘가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지 싶은데.

-전 아직 다 자라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마에 힘줄이 빡!

“야, 내가 무슨 내 고향 6시야? 연어가 뭐 어째? 너 지금 나 놀리냐? 아줌마 돼서 오겠다는 거야 뭐야!”

-안녕······. 안녕.

**

“오케이··· 컷!”

피디의 컷 사인과 함께 이수정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현재 출연 배우들이 돌아가면서 ‘우리 오빠’ 홍보를 하고 있다. 이시현, 고우희, 최미숙. 물론 이수정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수정이 인사를 했지만, 카메라에 불이 들어올 때의 훈훈한 미소와는 달리 지금 최미숙의 얼굴은 딱딱했다. 못된 눈초리만 있었다. 그래도 이수정은 미소를 유지했는데.

“너 지금 나 약 올리는 거지?”

“아, 아니요!”

그날 이후 최미숙은 이수정이 뭐만 하면 삐딱선이다.

“너 이제 내 앞에서 웃지 마.”

“선생님······.”

죽어가는 목소리와 함께 턱 끝을 숙이는 이수정의 모습에도 최미숙은 흥! 콧바람으로 그녀를 밀치고 앞을 지나갔다.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그 모습에, 최미숙의 매니저가 한마디를 건네고 뒤따라간다.

“오래 못 가. 저러다가 말거야. 수정 씨 요즘 잘하고 있어. 그럼 수고!”

“감사합니다!”

무심한 듯, 등을 보이고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최미숙의 매니저.

스튜디오를 빠져나온 이수정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또각또각. 베이지색 구두가 한걸음 씩 내디딜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왜 그렇게 근심이야.”

보다 못한 이 실장이 툭 말하자 이수정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니까. 하지만 눈치 없는 이 실장은 다시 말을 걸었다.

“아 맞다. 이시현 여기 온다고 하던데.”

“뭐?”

이수정이 놀라 눈을 치켜뜬다.

“아까 연예가소식팀 얘기하는 거 들으니까, 이시현이 오늘 스튜디오 촬영한다고 하더라고. 아, 너 이시현이 라디오 소식 들었지? 장난 아니더만. 지금 뉴스에도 나오고 난리던데.”

“오빠 빨리 가자.”

이수정은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순간 이시현하고 마주칠까봐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그렇다고 이시현이 그녀에게 뭘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몇 번 심부름을 시킨 뒤로는 연락도 안 해온다. 하지만, 그게 더 무서운 거다. 뭔 짓을 할지 모를 악마니까.

“이시현이 고아였다니. 참내, 그러니까 라디오 사연에 동병상련을 느낀 거지. 솔직히, 지난번 일로 조금 그랬는데··· 안쓰럽더라.”

“안쓰러워?”

“뭘 그렇게 쳐다보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입술을 꽉 깨물고, 부리나케 주차장에 도착한 이수정은 순간 걸음을 멈칫했다. 그녀의 차 옆에 밴이 한 대 섰는데.

“아,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서로가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성지훈··· 오랜만에 보네.’

한물간 가수는 최근 활동이 저조한 편이다. 더구나 전과 달리 표정도 밋밋해 보이고. 하지만 매니저와 함께 가는 그 뒷모습에, 이수정은 이유 모를 감정을 느꼈다.

“이상하게··· 남 같지가 않네.”

**

야자시간.

수능을 코앞에 둔 3학년들이기에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책만 들여다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 분위기가 오래 유지되긴 쉽지가 않은 법. 누군가 방귀를 뿡! 내뿜자 곳곳에서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다.

“야!”

안경잡이 반장이 고함을 빽빽 지르며 교실 창문을 열었다.

피식··· 홍은미도 잠시 웃고 다시금 책에 집중했다. 웃고 즐기는 시간은 짧지만, 대학 이름은 평생 가니까. 그리고 그녀에게는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드르륵.

“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 헬멧을 쓴 남자가 교실에 들어왔다. 가슴에 엄청 무거워 보이는 박스를 들고 있는데, 냄새가 솔솔. 여학생들의 시선이 일시에 쏠렸다.

“누구세요?”

반장이 다가가자 남자는 헬멧을 벗지 않고 말했다.

“피자 시켜서 왔는데요.”

굵은 목소리.

마치 일부로 그렇게 내는 것처럼.

“저희 피자 시킨 사람 없는데.”

“에이, 여기 맞아요. 홍은미 학생이 누구예요?”

그 말에 가만히 있던 홍은미가 고개를 들었다.

“전데요?”

하지만 눈만 깜빡인다. 영문을 모르겠으니까. 저 남자가 왜?

“맞네 그럼.”

남자는 그 말을 하더니 무작정 품 안의 박스를 빈 책상에 올려놓았다.

“아저씨 누구세요? 은미야 진짜 니가 시켰어?”

“나 아니야.”

그럴 돈도 없다. 그런데 남자는 자꾸만 맞다고 한다.

“맞다니까요. 홍은미 학생 맞아요.”

“아저씨 누군데요?”

아이들이 재촉하자, 그제야 남자가 헬멧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꺄아!!”

한밤중 여고에 터진 비명.

헬멧 속 남자는.

갑자기 들린 비명소리에 다른 반 학생들이 복도에 튀어나왔다.

“뭐야, 뭐야?”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그 근원지인 홍은미의 반에서 이시현을 발견한 학생들. 그녀들을 뒤흔든 스타의 등장. 재차 쏟아지는 함성에 학교는 마비상태가 됐다.

“이시현!!”

“오빠아아!”

발을 구르고, 악을 지르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는 학생들.

그제야 교사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지에스의 박용현과 욱이 매니저, 최재환이 움직였다.

원래는 경호원을 대동하려고 했지만 이시현이 거부했다. 학생들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홍보부에서는 무조건 낮에,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고 했지만 이시현이 거부했다. 홍은미 학생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고, 기콘부 성 팀장까지 나섰지만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다들 뭐 하고 있어요? 피자 식어요.”

이시현이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웃는다. 그 미소에 다들 넋이 나가 있는데, 물론 이미 다른 반에도 피자와 음료수가 돌고 있다. 하지만, 지금 피자가 입에 들어갈 때인가.

“오빠아! 엉엉엉!”

느닷없이 품에 안겨 우는 여학생들을 달래고, 이시현은 홍은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앞자리 빈 의자를 끌어안고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니가 홍은미구나? 아, 말 놓아도 되지?”

“아······. 예.”

이시현은 말없이 그녀를 보기만 했다. 마치 여동생을 보듯 다정한 그 시선.

그래서일까. 갑자기 홍은미가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흐느끼기 시작했고··· 이시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바보. 울긴 왜 울어.”

**

[바보 울긴 왜 울어]

시현 수포 카페의 대문 메시지가 바뀌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있다. 카메라가 그 자리에 없었어도, 여고생들의 입을 무시할 순 없는 거니까.

하지만 지에스는 언론에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고, 학교 측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시현이 홍은미의 대학등록금을 약속한 사실도 비밀에 부쳤다.

“형, 우리 바다나 갈까?”

“바다?”

그러잖아도 지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바람도 쐬고, 형이랑 오랜만에 회에도 소주 한잔 하지 뭐.”

“임마. 그럼 운전은?”

“한숨 자고 오지 뭐.”

“촬영은?”

“펑크 낼까?”

그러더니 낄낄 웃는다.

최재환은 피식 웃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이시현이 묻는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그냥 자.”

이시현이 잠에서 깼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서울에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충남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여기 어디야?”

산길에서 차를 세운 최재환의 모습에 이시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어디긴 임마. 너희 부모님 계시는 곳이지.”

그 말에 이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한 얼굴로 최재환을 바라본다.

“가자. 해 지겠다.”

과일 몇 개, 좋은 곡주, 종이컵, 북어포 따위가 담긴 검은 봉지를 챙기고 최재환은 차에서 내렸다. 이시현이 뭉그적거린다.

“내일 갈래?”

최재환의 핀잔에 그제야 차에서 나오는데, 눈시울이 벌써 붉어져 있다.

“가자.”

이번 일을 겪으면서 최재환은 이시현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녀석의 상처를 그동안 가볍게 여겨왔음을 깨달았다.

산 중턱까지 오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이시현의 걸음은 무거웠고 얼굴은 심각했다. 마침내 도착한 묘소에는 두 개의 깨끗한 봉분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엊그제 들려서 어머님 아버님 집 청소 좀 해드렸다.”

최재환은 무심히 말하고 비닐봉지를 뒤적였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안에 든 것들을 꺼내고.

“뭐해 임마? 오랜만에 부모님 찾아뵀으면, 잔부터 올려야지.”

이시현이 붉게 변한 눈으로 종이컵을 손에 쥐었다. 최재환은 담담한 얼굴로 가져온 곡주를 따랐다.

“어머님, 아버님··· 엊그제 인사드렸는데, 또 인사드리네요.”

실없이 웃고.

“시현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시현이,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잘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있잖아요. 하하.”

또 실없이 웃고 이시현을 돌아본다.

“형······.”

“뭐해. 인사드려야지. 엊그제 보니까, 너 여기 한동안 안 왔더만. 임마, 바빠도 자주 들려야지.”

이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끈 감은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흐르고, 입술은 파르르 떨린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최재환은 녀석이 부모님께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지를 잠시 생각해봤다.

가을 하늘이 참 맑은 오늘.

최재환은 처음으로 이시현의 매니저가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좋은 동생을 얻었으니까.

**

“들어가라.”

“형 먼저 가.”

“아 자식, 들어가 빨리! 그 얼굴 지겹다.”

손을 휘휘저어서, 이시현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서야 최재환은 차에 올랐다. 차키를 붙잡았지만, 이내 한숨을 깊이 내쉬고 손을 뗐다.

“후······.”

최재환은 휴대폰을 들었다. 이제는 해결해야 할 때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었다.

띠리리··· 띠리···

신호음은 오래가지 않고 멈췄다.

“자니?”

시간이 10시를 넘기고 있다. 잘 시간은 아니지만 대답이 없자 최재환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내가 나중에 전화할까? 그래,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했지? 나중에 전화할게.”

끊으려는데.

-오빠.

“어, 혜선아.”

최재환은 휴대폰을 다시 붙잡았다. 그러자 권혜선의 목소리가 아주 조용히 들려왔다.

-오빠는 제게 언제든 전화해도 되는 사람이에요.

< 드디어 우리가 만날 시간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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