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우리가 만날 시간 (4) >
스튜디오 카메라의 빨간불이 꺼지자, 등받이 없는 스툴에서 이성연이 긴 다리를 뻗고 일어났다. 갈색 머리를 펄럭이면서 나를 보는데, 스튜디오 조명 때문에 마치 가을 하늘의 노을이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시현 씨 수고했어요.”
“선배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녀에게 스타일리스트가 달라붙고.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주위를 돌며 한밤 피디와 스태프들을 향해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방송국에 좋은 인상을 남겨두는 것은 상식이니까.
“선배님, 저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제 정말 작별 인사를 하는데, 브러쉬로 이성연의 입술을 덧칠하던 스타일리스트가 한발 물러났다. 조금 더 붉어진 미소를 띠고, 이성연이 나를 본다.
“시현 씨, 우리 전화번호 교환해요.”
“아, 제가 휴대폰이 없어서요.”
“어머. 지에스 너무 한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큰 성인인데.”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다 큰 성인이니까 문제지.
“그럼, 나중에 또 보면 알려주기예요? 그때는 있겠지.”
“예.”
손을 흔드는 그녀를 뒤로하고, 우리는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우와, 이성연 실제로 보니까 진짜 예쁘다.”
아무래도 한송이가 흠뻑 빠진 모양이다. 하긴, 여자가 봐도 멋있겠지. 인터뷰 내내 여유 있고, 미소 띤 얼굴 또한 경직됨 없이 부드러웠으니까.
“그 립스틱 색도 되게 예쁘더라. 그치 언니?”
서아린이 대충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거 어디 거지? 물어볼걸 그랬다.”
“왜?”
내가 툭 묻자 한송이가 아쉬운 듯 말한다.
“저도 한번 발라보고 싶어서요. 아, 놀리지 마요.”
얘는 이제 무조건 나를 경계하네. 뭐, 그래서 놀리는 맛이 쏠쏠하긴 한데.
“내가 사줄게.”
“에에?”
일초의 생각도 없이 나를 흘겨보는 한송이.
“이거 또 나 놀리는 거죠?”
“립스틱 얼마나 한다고. 사줄게.”
“진··· 짜? 진짜?”
“뻥이지 임마.”
“아이!”
펄쩍 뛰는 그녀를 두고 걸음을 서둘렀다. 뒤에서 투덜투덜 소리가 들리는데, 저녁에 얘들한테 선물 하나씩 해줄 생각이다. 지난번 우천 촬영에서 고생 좀 했으니까. 한송이 저 녀석은 그 마음을 알라나 몰라.
“어? 이시현이네?”
복도에서 마주친 방송국 직원들의 시선이 어김없이 달라붙는다.
“어머. 여긴 왜 왔대?”
“생방송한밤 인터뷰했대.”
놀라는 모습도, 놀라는 표정도 제각각인 사람들.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복도를 가로질러 온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우리 앞에 섰다.
“어머 세상에! 어떻게 여기서 만나?”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 딱 봐도 날 기다린 눈친데.
“시현 씨, 나 어제 드라마 봤어요. 짱!”
“감사합니다.”
“와 확실히 우리가 인연은 인연이다. 나는 취재하러 왔는데, 뭐 건질 것 없나 해서.”
능청스러운 여기자와 수다를 떠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30분 내로 여의도로 넘어가야 하니까.
“기자님 미안한데, 우리 빨리 여의도 넘어가야 해.”
강 실장이 눈치껏 나를 끌고 가려는데, 이우정 기자가 뜬금없이 손뼉을 부딪쳤다.
“아! 나도 여의도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강 실장이 게슴츠레 쳐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축 내리고 나를 우러러봤다.
“시현 씨, 저 좀 태워 주면 안 돼요? 차 수리 맡겼거든요.”
기자란 존재는, 알아두면 좋지만 너무 가까우면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뭐,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
“그래요. 같이 가요.”
“진짜요?”
“대신, 아무것도 물어 보기 없기.”
“물론이죠!”
이우정 얘는 이때부터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을 했네.
젊은 그녀의 모습이 신기해서 잠시 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버튼을 꾹 누른 강 실장이 느닷없이 한숨이다.
“에휴, 우리 송이경은 언제쯤이나 빛을 보려나.”
강 실장 이놈, 지금 이우정 기자 들으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다.
기사 좀 내달라고.
물론 나야 송이경이 성공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결과일 뿐, 그녀가 선택한 작품들과 인생 과정까지 세세하게 아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송이경이 성공이라는 결과를 낼 거라곤 확신할 수 없다. 강 실장이 그녀의 매니저가 된 건, 송이경의 인생에 있어 꽤 큰 변수가 될 테니까.
‘송이경이 주원경 작가를 언제 만나더라.’
그 둘이 손을 잡으면서 송이경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텐데.
‘뭐, 알아서 되겠지.’
그보다 지금은 최재환이 궁금하다. 잘하고 있을까? 힌트는 줬으니 판단은 녀석의 몫이다. 팀장 자리도 제법 익숙해진 것 같으니 지금이라면 잘해낼 거다.
“아, 그렇지 않아도 제가 송이경 씨 특집 기사 준비하고 있어요.”
이우정 기자가 턱을 빼들었다. 거봐 역시 나밖에 없지! 하는 시선으로 강 실장을 본다. 강 실장도 흡족한 모양이다. 실실 웃더니.
“기자님, 차에서 5분 드릴게요.”
뭐야 이 자식. 왜 제멋대로 선심성 공약이야?
내 황당함은 둘째 치고, 강 실장의 말을 들은 이우정 기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그 어이없는 모습을 보는 사이 1층에 도착했는데,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강 실장이 어떤 여자와 부딪쳤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동글동글 살이 오른 얼굴, 알이 무척 큰 은테 안경, 윤기 없는 머리카락, 펑퍼짐한 치마와 색이 바랜 스웨터를 입은 여자다. 하필이면 그녀가 떨어트린 서류봉투에서 프린트물이 촤르르······.
“괜찮으세요?”
나는 그녀보다 앞서 허리를 굽히면서 물었다. 삐져나온 프린트물을 서류봉투에 밀어 넣는데··· 대본이잖아? 아무래도 작가인 모양이다. 기억에는 없지만.
“대본이네요?”
“예, 공모전에 제출하려고······.”
나는 미소와 함께 대본을 대충 살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안경을 고쳐 쓰고 나를 보더니 헉! 놀란다.
“아, 작가님이시구나.”
대본을 다시 서류봉투에 밀어 넣는데, 문득 대본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스··· 텝?”
제목에 놀라서, 아니 당황해서, 나는 그녀의 얼굴과 대본을 번갈아 살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시현아 뭐하냐.”
“실장님, 잠깐만요.”
서둘러 첫 장을 넘겼다. 방송국 공모전에 제출하는 작품은 반드시 시놉시스와 인물 설정을 첨부해야 하니까.
‘이거··· 주원경 작가 건데?’
[스텝]
시놉시스 : 결혼식을 앞두고, 연인이 시합 중 사망했다.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 여자는 그가 없는 집에서 홀로 아픔을 견디는데. 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그를 죽게 만든 프로복싱선수 장태원이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금 링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
권여름 : (NA) 처음에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장태원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아픔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지막 여주인공 내레이션까지 순식간에 훑어봤다.
송이경은 이 드라마 ‘스텝’으로 단숨에 인기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게 왜? 이건 주원경 작가 건데. 이 여자 혹시 작가가 아닌가? 심부름꾼이나 뭐 그런 건가?
“작가님 맞으세요?”
“예.”
의아해서 다시 물어봤지만, 그녀는 수줍은 얼굴을 바로 끄덕였다. 안경 속 검은 눈동자는 티 없이 맑았고.
“시현아 가야 돼.”
강 실장의 재촉에도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대본, 작가님 작품이세요?”
“예. 이번에 SBC 드라마 대본 공모전에 내려고요.”
“저기 작가님, 이 작품 저한테 한 부 보내주실 수 있나요? 꼭 읽어보고 싶어서요.”
“예? 저, 저야 좋죠.”
거절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여자는 환한 미소로 반겼다. 내가 대본을 보자고해서 오히려 흥분한 얼굴이다.
“실장님, 이분한테 우리 회사 주소 좀 알려주세요!”
“시현아 너 지금 뭐 해?”
강 실장이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어서요!”
드르륵.
이우정 기자가 밴에 타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와, 차 좋다. 나 밴 처음 타 봐요. 킁킁, 레몬 냄새가 나네요? 방향제 좋다.”
수다쟁이 그녀를 힐끗 보고, 강 실장이 내게 속삭였다.
“시현이 너 그 여자 아는 여자야?”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대본이 회사에 도착하면 자세히 읽어보고 싶다.
아니면 내가 실수했나? 안 보낼지도 모르는 건데, 아까 그냥 제대로 확인할 걸 그랬나?
예상치 못했던 대본의 등장으로 머릿속이 정신없는데, 차가 출발하자 이우정 기자의 5분이 시작됐다. 우리 오빠 첫 방에 대한 소감, 앞으로의 행보, 차기작, 예능 출연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시현 씨 첫사랑은 어떤 사람이에요?”
“노코멘트.”
“아 왜? 이런 건 질문 축에도 안 껴요.”
“실장님. 기자님 내리고 싶으시대요.”
“아이 진짜. 그럼 최 팀장님에 대해서.”
“그건 전에도 얘기한 거잖아요.”
“그럼 가족은요? 그러고 보니까 시현 씨 가족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네.”
차 안에 정적이 흐른다. 이번 질문도 패스.
“다른 질문 하세요.”
“또? 그럼, 대표님에 대해서.”
“저희 대표님이요?”
이우정 기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은.
“노코멘트.”
**
“어떻게 알았어?”
대표실을 맴도는 은은한 과일 향이 코끝에 닿자, 최재환은 찌푸린 얼굴을 펴고 입을 열었다.
“찜찜해서 조금 더 알아봤습니다. SN 매니저 중에 스카이데일리에 인맥이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걔들, 남수혁 뿐 아니라 블랙보이 애들 것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답니다.”
최재환이 알아온 것을 얘기하자 마주 앉은 김 팀장의 턱이 씰룩거린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애초부터 터트릴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런 마당에 하마터면 이시현의 치부와 히든카드를 두 손 받쳐 건넬 뻔했다.
“다들 나가봐.”
철컥 소리마저 사라지고, 대표실이 고요해지자 정 이사는 커피 잔을 손에 쥐며 입을 열었다.
“역시 최 팀장이네요. 혜안이 있습니다.”
“······.”
“그럼 시험은 끝났고··· 이제 정리하실 겁니까?”
정 이사의 질문에 차 대표는 대표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가을 하늘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있길 잠시.
“차현성입니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간 차 대표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3% 선에서 마무리하죠. 오늘부터 블랙보이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의 3%, 스카이데일리 몫입니다.”
잠시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정 사장님··· 욕심내다가 다 잃습니다. 나 차현성입니다. 블랙보이 하나 아까워서 이러고 있는지 압니까? 걔들 천년만년 안 갑니다.”
차 대표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는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기간요? 뭐 언제까지겠습니까. 블랙보이 계약 만료될 때까지지. 그때까지 잘 부탁합니다.”
전화 한 통으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됐다.
이제 스카이데일리는 블랙보이를 공격하기는커녕 최선을 다해 지원할 거다. 그래야 블랙보이 매출이 커지고, 그 수익이 자신들에게도 떨어지니까.
“아, 한 가지 더. 거래는 이번 한 번 뿐입니다. 또다시 이런 일로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차 대표는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뿜으면서, 정 이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최 팀장이야 지난번 오소리 일도 그렇고, 이번에도 잘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김 팀장이 허당이네요.”
위기에서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남수혁 스캔들하고 이시현 캐스팅 영상하고 딜이 될 거라 생각했다니······.”
피식 웃는 정 이사를 보며, 차 대표는 담배 연기를 바닥에 깔고 속삭였다.
“비교가 되질 않지. 지에스 간판이 될 이시현을··· 어딜 소모품 따위와.”
< 드디어 우리가 만날 시간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