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99화 (99/227)

< 드디어 우리가 만날 시간 (3) >

몇 숟가락 뜨지 않은 밥을 두고, 최재환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 실장, 시현이 좀 부탁해.”

“걱정마.”

최재환은 쫓아오는 이시현의 시선을 뒤로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회사로 돌아왔더니, 평소보다 훨씬 많은 팬이 운집해 있다. 그것만 봐도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매니지먼트 사업부에는 1팀 김태호 팀장과 블랙보이 리더 남수혁이 있었다.

‘X새끼.’

평소 하지 않는 거친 욕을 삼키고, 최재환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남수혁을 내려다봤다. 쇠붙이처럼 차갑고 날 선 시선이 닿는데도 녀석은 태연하게 그를 마주 본다. 그 모습에 최재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뭘 보냐?”

“팀장님이 먼저 쳐다보셨는데요?”

“이런 X새끼를 봤나.”

최재환의 입에서 나온 욕설에 김 팀장뿐 아니라 사무실 직원들도 행동을 멈추고 쳐다봤다. 최재환이 가끔 맛이 가긴 해도 욕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최 팀장, 흥분 가라앉히고 일단 앉아.”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는 남수혁의 모습에 최재환은 머리끝이 저리는 것을 참고 녀석에게서 눈을 뗐다. 그런데 김 팀장과 마주 앉자,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허······.”

어이가 없으니 웃음만 나온다.

‘1팀은 대체 블랙보이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입에서 실바람을 뿜는 최재환의 모습에 김 팀장도 찌푸린 얼굴로 얘기를 꺼냈다.

“미안하게 됐어.”

“그래서 뭐 주기로 했어요?”

최재환은 서론은 듣기 싫어서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김 팀장이 입술을 매만지더니.

“이시현, 캐스팅 인터뷰 영상.”

어김없이 찌푸려진 최재환의 얼굴에 김 팀장은 괜스레 입술을 쩝쩝거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우리 팀 붕괴 직전이야. 보이스레이드 개자식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고, 이번에 이 일까지 터지면··· 우리 애들 혼수상태 된다. 그리고 생각해봐, 적당히 시기도 좋아. 어차피 MNC 촬영 전까지만 숨기면 되는 거 아니야?”

“지금 MNC 철통 보안으로 움직이는데, 시현이 캐스팅 영상을 공개한다고요?”

MNC에서 기획 중인 프로그램 ‘다시 만난 우리 오빠’는 아주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영상 모자이크 처리해서 넘기기로 했어. 너무 걱정하지마. 나쁘지 않다니까?”

김 팀장은 재차 괜찮은 딜임을 강조했다. 한숨 뒤에, 최재환은 다시 물었다.

“그게 다예요?”

딜이란 건, 서로가 원하는 거다.

천만 해외 팬에, 국내 팬이 백만에 육박, 해마다 드림콘서트가 있을 때면 지방에서 팬들 실어 나르는 버스가 삼백 대가 넘는다.

그런 엄청난 팬덤을 보유한 블랙보이 스캔들을 잡은 놈들이 이깟 거에 만족하겠는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거다.

역시, 최재환의 짐작대로 김 팀장은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금 얘기를 꺼냈다.

“별거 없어. 걔들도 블랙보이 함부로 못 건드려서 딜하는 거야.”

“그러니까 뭐냐고요.”

“이시현이 고아인 거······.”

“이 일, 대표님도 압니까?”

더 들을 필요가 없어서, 최재환은 김 팀장 말을 끊었다.

차 대표가 이걸 용인했을 리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차 대표는 이시현이 돋보일 최적의 타이밍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식의 방식을 용인할 리가 없다.

하지만 김 팀장은 최재환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했다.

“이거, 대표님이 지시한 거야.”

김 팀장은 그 말을 하고 어쩌겠냐는 듯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내내 찌푸리던 최재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제가 싫다면요?”

**

“야, 어제 우리 오빠 봤어?”

“봤지. 이시현 진짜 잘생겼더라.”

여자애들 수다가 한창이다.

“근데 난 좀 재미는 없더라.”

“하긴 그건 그렇더라. 이시현 대사도 별로 없고, 그나마도 앞으로 분량 줄어든대.”

“누가 그래?”

“이시현 팬 카페에서 봤지. 어제 가입했거든.”

“분량을 왜 줄여? 이시현 지금 완전 대세잖아.”

“작가가 이시현보다 고우희의 분량을 늘린대. 개연성 어쩌고 하면서.”

“미친 거 아니니?”

그녀들의 대화가 한창 이어지는 가운데, 고우희는 화장실을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야, 고우희 연기 좀 과하지 않냐?”

“걔 원래 연기 못해. 이시현이 멱살 잡고 드라마 끌고 가는 거야. 솔직히, 우리 오빠에서 볼 배우가 누가 있냐?”

빠직.

고우희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 소리.

“지난번에 인터넷에 촬영장 영상 올라온 거 있었잖아?”

“맞아. 그때 고우희 칭찬 엄청 올라왔잖아.”

“그거 SN에서 댓글 장난친 거래.”

“누가 그래?”

“카페에서.”

뭐만 하면 팬 카페로 매듭이 된다. 대체 이시현의 팬 카페는 뭐가 있다는 거야.

“근데, 한약방 딸인가?”

“아, 걔? 이시현이 수줍은 얼굴로 말 걸던 애?”

“은근히 잘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둘이 러브라인 들어가면 재밌을 텐데.”

아쉬워하는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고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밖으로 나왔다.

세면대 거울에 교복 입은 그녀 모습이 비친다.

아직은 고등학생, 촬영이 없으면 꼼짝없이 학교에 와야 하는 신세.

‘신경 쓰지 말자.’

질투는 항상 있었다.

‘예쁘니까.’

또 여배우니까.

“윽, 똥 냄새.”

서둘러 손을 닦고 화장실을 나온 고우희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왔다. 지금쯤이면 교무실에 간 매니저가 조퇴 허가를 받았을 거다. 예상대로 주차장에 매니저가 딱!

“오빠!”

고우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자 그가 깜짝 놀란다.

“오빠, 어제 방송 봤어?”

“봤지.”

눈을 크게 뜨고 묻는데, 매니저가 괜스레 하늘을 본다. 청명한 가을 하늘. 천고마비의 계절.

“나 어땠어?”

“아이구, 네 연기 최고였지. 니가 아니면 드라마 안 돼.”

“마지막 장면 어땠어?”

“마지막 장면?”

매니저가 머뭇거린다. 그러면서 시계를 보더니.

“늦었다. 어서 가자.”

“마지막 장면 어땠냐고.”

“당연히 끝내줬지. 니 연기는 최고라니까.”

“마지막 씬은 이시현이 나왔는데, 내 연기 얘기가 왜 나와?”

“여보세요?”

“오빠, 안 봤지!”

매니저가 휴대폰을 들고 차에 탔다. 잠시 뒤 고우희가 콧바람을 쏴 내쉬며 차에 탔는데, 매니저는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예. 예.”

전화를 끊더니 매니저가 고개를 돌렸다.

“우희 너, 블랙보이 멤버랑 전화번호 교환한 적 있지?”

“응. 예전에.”

전에 한번 방송국에서 부딪친 적이 있다. 그때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이따금 문자 한 번씩 보내는 수준이었는데.

“전화번호 지워. 그리고 누가 물으면 그냥 안부 문자 몇 번 보냈던 걸로 끝이다. 알았지?”

매니저의 표정이 갑자기 변해서, 고우희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근데 왜?”

“블랙보이 이번에 뭐 하나 터질 것 같다.”

**

“미안합니다.”

펜을 쥐려고 손을 뻗은 나보다 앞서, 강 실장이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여자애들은 아쉬움에 뒤로 가면서 강 실장을 죽일 듯이 쳐다봤다.

“뭐야 재수 없어······.”

“곰 매니저는 어디 간 거야? 웬 기생오라비 같은 매니저가 붙었대?”

“얘들아 다 들린다!”

강 실장이 화를 버럭 내자 꺄! 소리와 함께 도망치는 여자애들. 그러자 이번에는 화살이 나에게 쏠렸다.

“임마, 넌 애가 왜 모질지 못하냐? 이러니 팬들이 그냥 친구 먹자고 하지.”

“알았거든요.”

팬한테 사인한번 해줬다고 이렇게 구박이라니.

“자기 이름 불러준다고 대답을 하질 않나, 회사 앞에서 수다를 떨지 않나. 아까 그 애는 뭐? 언니?”

강 실장이 고개를 절레 흔든다. 스타일리스트 두 녀석도 피식 웃고.

그도 그런 것이, 무슨 이유인지 팬 중에 내게 시현 언니라고 부르는 애들이 있다. 하여간 여자애들이란.

“이제 경호원을 대동해야지, 매니저 하나로는 벅차네.”

걸음을 재촉하면서 강 실장이 힘들다고 혀를 내두른다.

솔직히 너무 빨리 달라지는 주변 풍경에 나도 적응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쫓아다니는 팬들, 나를 챙겨주는 회사, 현장에서 날 인정해주는 감독과 배우들.

방송국 풍경도 달라졌다.

전에는 내가 먼저 크게 인사를 했는데, 이제는 상대가 먼저 인사를 해오니 미쳐 허리 굽힐 틈도 없다.

“이시현 씨!”

더구나 조연출이 직접 마중까지 나오고.

오늘 생방송한밤과 인터뷰를 해야 해서 등촌동 SBC에 들렸는데, 1시간 내로 인터뷰를 마치고 또 다른 스케줄로 이동해야 한다.

“이시현 씨 안녕하세요!”

스튜디오로 이동했는데, 갈색 머리의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면서 다가와 나를 반겼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확 밀려오고···

하얀색 재킷에 투톤 원피스, 단아한 헤어스타일이 한눈에 봐도 ‘나 생방송한밤 MC예요’ 하고 있었다. 후, 오랜만에 보네 이 친구.

“안녕하세요, 선배님!”

내가 넙죽 인사하자, 그녀가 자신을 가리키고 눈썹을 올린다.

“저 누군지 아세요?”

“알죠, 이성연 선배님.”

“하하, 진짜 기분 좋다. 저 시현 씨 팬이에요. 사진, 사진!”

이성연이 손을 흔들자 생방송한밤 스태프가 디지털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그녀가 내 팔에 찰싹 달라붙고. 김치, 그리고 찰칵!

“요즘 바쁘죠?”

그녀가 눈을 기울인다. 내가 너무도 안쓰럽다는 시선인데.

“바빠야죠. 전 좋아요 지금이.”

“어제 드라마 첫 방송에 팬 미팅했다면서요? 잠은 좀 잤어요?”

팬 미팅이 끝내고, 우리 팀과 맥주 한잔 마시고, 운동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이 새벽 3시.

“나는 당사자도 아닌데, 어제 드라마 보고 설레서 잠도 못 잤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쪽이 왜? 라고 물을 수는 없어서 미소만 띠고 있는데, 머리가 반쯤 벗겨진 생방송한밤 피디가 앓는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뭐야 성연 씨, 우리 드라마는 안 봤어?”

“그러는 피디님은요?”

“나야 뭐 딸아이가··· 하하하!”

한밤 피디가 껄껄 웃더니.

“시현 씨 매니저님, 잠깐만 대기실에서 기다리면 여기 준비 마치고 다시 모실게. 10분이면 됩니다.”

한밤 피디가 미소와 함께 말하자,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한밤 작가와 스태프들.

“이것들이!”

“아닙니다. 저 괜찮습니다.”

한밤 피디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다가가서 스태프들과 일일이 사인과 사진을 찍고 대기실로 잠시 이동했다.

“팀장님 괜찮을까요?”

서아린이 내 메이크업을 살피며 입을 연다. 옆에서 한송이도 맞장구를 치고.

“그치 언니? 아까 화 많이 난 것 같았지?”

식당에서 나가던 최재환의 모습은 험악 그 자체였다.

“원래 이런 식으로 거래하고 그래요?”

“흔해. 서로가 원하는 게 다르면 적당히 나눠가질 필요도 있는 법이거든.”

한송이의 질문에 서아린이 무심하게 대답한다. SN에서의 경험으로 이 바닥 생리를 깨우친 모양인데, 한송이가 구시렁댄다.

“블랙보이 걔는 미쳤나 봐. 어떻게 팬을 데리고 차에서··· 그럴 생각을 했데?”

그것도 새벽에 회사 주차장에서.

“조용해라.”

강 실장이 눈을 흘기자 그제야 한송이가 입에 접착제를 쫙!

“김 팀장 이 인간 뭘 팔아먹으려는 거야. 시현이 넌 뭐 들은 거 없어?”

“글쎄요.”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강 실장이 혀를 내두른다.

“넌 니 일인데 걱정도 안 되냐? 다른 배우였으면 난리난리 쳤을 텐데··· 하여간, 김 팀장 요즘 인간 좀 되나 했더니만.”

투덜대는 강 실장과 달리, 나는 최재환이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볼 생각이다.

과연 최재환은 회사의 이윤을 택할까. 나를 택할까.

물론 딜에 대해서도 큰 걱정은 없다. 이따금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팔아먹어봤자 손해 볼 것을 팔았을까. 머리 좀 굴렸겠지.

또 이 바닥 불문율이, 한번 쓴 아이템은 그걸로 묻는 거다. 물론 불문율이라고 말하고, 수틀리면 뒤통수라고 얘기하지만.

“남수혁, 팬들 자주 만나고 다녔나 봐요?”

내 질문에 강 실장이 혀를 찬다.

“블랙보이 그 새끼들은 태생이 그래. 내가 언제 한번 일 저지를지 알았어. 피곤하면 인사도 안 하는 자식들이 말이야.”

“이번일로 정신 차리겠죠.”

“행여나. 남수혁이야 당분간은 죽어지내겠지. 그럼 나머지 놈들은? 똑같다니까!”

강 실장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가 멈칫하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시현아. 최 팀장이다.”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어, 형.”

-인터뷰 아직 시작 안 했어?

“응. 지금 형 전화 받고 있잖아.”

실없이 웃는 나와 달리 최재환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다.

-잘 들어.

최재환은 김 팀장과 나눈 이야기를 나한테 설명했다. 조 부장에 박 상무까지 나서서 이번 일의 정당성을 얘기했다고 한다.

그만큼 블랙보이가 지에스에 미치는 영향은 크니까.

싸가지가 있건 없건, 돈을 벌어오는 놈들이니까.

-그렇게 됐다.

“알았어.”

최재환의 목소리가 무겁지만, 회사로서는 나쁜 거래는 아니다. 내 영상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를 테고, 고아라는 사실은 동정심을 부를 테니까.

-시현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너 고아인 거, 굳이 알릴 필요 없어.

그래. 배우가 안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지금 나는 그 정도 거부권은 행사할 수 있다. 물론, 그 대가는 누군가 치르겠지만.

“내가 안 하면, 형은?”

나는 그 대가를 치를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물었다.

-내 걱정을 니가 왜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

최재환은 이런 놈이다. 꽉 막힌 놈.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될 일을, 그 질끈 감는 게 용납이 안 되는 이가 최재환이라는 답답한 놈이다.

그랬던 최재환이 결국에는 나 같은 놈이 된 거지만.

“형. 난 상관없어.”

이시현이 고아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건, 그래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 알았다.

최재환의 목소리가 힘없이 낮아진다. 그때, 대기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조연출이 들어왔다. 소파에서 일어난 강 실장이 문 앞에 서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최재환에게 물었다.

“근데 남수혁이 문제, 이걸로 확실히 해결되는 거야?”

-그렇겠지.

“혹시 말이야. 남수혁 말고 다른 애가 걸린 건 없어?”

-뭐?

최재환의 목소리가 튀어 오른다. 그래, 생각하지 못했겠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겠지.

“혹시 모르는 거잖아. 스카이데일리에서 남수혁 스캔들뿐 아니라, 블랙보이 애들 것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면? 남수혁 건은··· 간보는 거였다면?”

그렇다면 딜은 의미가 없어진다.

< 드디어 우리가 만날 시간 (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