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우리가 만날 시간 (1) >
명동대첩.
팬 문화에 방점을 찍은 그 날의 사건도 일주일이 지났다.
경찰이 움직이네 마네 했지만 다행히 일이 그 정도까지 진행되진 않았다. 딱히 신고한 사람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저 팬 문화의 이슈 정도로 여겼다.
굳이 문제라면 너무 시끄러웠다는 건데, 3사 뉴스와 연예가소식, 섹션텔레비, 생방송한밤 등에서 돌려가면서 이 문제를 얘기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로 전 국민이 ‘이시현’ 이름을 알게 됐으며, 문제의 두 팬클럽 또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시현 수호천사들&포에버]
한마음 사이트의 카페 대문에는 ‘포에버 회원들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같은 문구에 힘입어, 연일 회원 수가 늘고 있다.
현재 양측의 기존 회원 수를 넘어 새로 유입된 회원까지 벌써 4만을 넘긴 가운데, 이 기세라면 배우들 팬클럽 중 회원 수 탑을 차지하는 것도 시간문제.
“후후.”
시현 수포 회장 백유진이 갑자기 미소를 보이자, 마주앉아 주스를 쪽쪽 빨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전 시현 포에버 회장 조별아.
“왜 갑자기 웃어요?”
“아니. 오빠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서.”
“훗.”
그 말에는 조별아도 크게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그래요. 밤에 막 잠을 못 자겠어. 설레서.”
꺄.
둘이서 오두방정을 떤다.
명동대첩 이후 두 사람은 베를린 장벽에 비교될, 한없이 높았던 갈등의 벽을 허물고 친구가 됐다. 그래서 앞으로도 백유진은 베일에 감춰진 회장으로, 조별아는 부회장으로 전면에 나서기로 했는데.
“여기!”
조별아가 손을 흔들자 카페에 들어온 여자가 육중한 덩치를 흔들며 들어온다. 현재 지에스엔터테인먼트 ATTM 소속의 오명숙이었다.
“왔어요?”
조별아가 반갑게 말을 붙였다.
오명숙은 이번 명동대첩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시현 포에버 회원인데, 씨름 선수 출신의 그녀가 시현 수호천사들 회원들을 들배지기로 날리던 모습은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거다.
“일찍 오셨네요.”
백유진의 눈치를 살피며 오명숙이 자리에 앉았다.
그날, 그 치열한 현장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백유진이 시현 수호천사들 회장이라는 사실에, 오명숙이 시현 포에버의 운영 스태프였다는 사실에.
“시현이사랑독차지님은 이번에 시현 수포 운영 스태프로 들어가실 거예요.”
조별아가 정리를 해주고, 백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명숙이 배시시 미소를 보였다.
“예, 감사합니다.”
이시현 얘기만 꺼내면 수줍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충분히 운영 스태프의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아, 여기!”
이번에는 백유진이 카페 입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그곳에는 모자를 쓴 여자가 서 있었다. 현재 지에스엔터테인먼트 ATTM 소속의 강보라.
닉네임 [bora]
그날 강보라는 놀랍게도 시현 포에버 회원들을 한판 업어치기로 휙! 심지어 오명숙까지도 날려버린, 명동대첩의 영웅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향수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자리에 앉자 조별아와 오명숙이 눈을 숙이는데.
“회장님, 그건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강보라는 백유진을 돌아보고 물었다. 나이는 그녀가 더 많지만 회사 밖에서는 회장이라는 존칭을 쓴다.
“이수정 건은 그냥 넘어가려고요.”
공지로 올려서 아주 혼을 내줄까 했지만, 회사에서 적당히 넘어가기로 한 이상 그냥 넘기기로 결정.
“주스 드실래요?”
백유진이 친절하게 묻자, 강보라가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바로 일어나죠.”
오늘은 시현 수포의 1회 오프라인 모임이다. 아직 카페 정비가 덜 됐지만, 이런 어수선할 때일수록 단합을 해서 뭉쳐야 한다.
“그럴까요?”
백유진이 백을 챙기려는데, 갑자기 카운터에 있던 여직원이 달려왔다. 닉네임 [시현쓰내것].
“회장님, 회장님!”
호들갑스러운 그 모습에 백유진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이유를 물었다.
“왜요?”
“지금 우리 카페에, 우리 카페에!”
숨이 멎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정확히는 이 안에 있는 시현 수포 회원들의 시선인데, 백유진과 조별아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곳에 있는 모니터를 보고.
“허!”
조별아가 숨을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시현입니다.]
“꺄아아!”
조별아의 비명과 함께 다들 몰려들었다.
그러자 ‘시현쓰내것’이 마이크를 쥐고 카페에 올라온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말과 긴 무명생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각오와 자세, 현재의 근황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해보니,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분을 그리워한 것 같습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꺄! 어떻게 해!!”
비명이 들썩인다. 이시현이 카페에 글을 올렸다는 건, 공식 팬클럽으로 인정했다는 얘기다.
“자, 다들 이동하죠!”
백유진의 힘찬 외침에 카페 안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난다.
모두가 시현 수포 회원들.
그녀들이 카페를 빠져나가 또다시 명동 거리를 가득 채우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시현쓰내것님이 얼굴을 찌푸리고 백유진을 불렀다.
“회장님!”
“왜요?”
“이거 보세요.”
“뭔데요?”
시현쓰내것님이 가리킨 모니터 화면.
“안티··· 카페가 생겼어요.”
**
“저 화보촬영중인데······.”
이수정은 숨죽여서 대답했다. 물론 화보촬영중은 아니다. 드라마 분량도 다 짤렸는데, 회사에서는 벌이랍시고 집에만 있으라고 그녀를 가둬놨다.
“왜, 왜요?”
-집이라고? 그럼 이따가 한 3시쯤에 우리 집 가봐.
“거기를 왜.”
-가면 택배 올 거 있어. 택배 좀 받아.
“예?”
-3시다. 아, 그리고 착불이야.
이수정은 끊어진 전화를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지금 배우 이수정한테, 택배 받으라고 시킨 거야? 그것도 착불이라고?
“꺄아아!!”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헝클어뜨리는데, 아무리 이래도 답이 없다. 에잇! 자리를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난 이수정은 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켰다.
타타타 아이디를 넣고.
타타타 비번을 넣었다.
그런 뒤 클릭, 클릭, 카페에 들어갔다.
[이시현의 가면을 벗기려 노력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회원 수는 한 명······.
“어? 한 명 늘었네?”
이수정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뜬다. 카페 개설은 그녀가 했는데, 그녀의 생각에 동조하는 한 명이 생겼다는 거니까. 서둘러 누군지 확인.
“영원한스타?”
무슨 구식 유물 같은 닉네임인데.
아무튼 환영한다고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카페에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여러분 이시현은 가식 덩어리입니다. 흔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죠. 하는 행동도 모두 계산된 거고, 사람들은 지금도 속고 있습니다. 저는 그 정체를, 가면을 꼭 벗길 겁니다.
이곳은 이수정의 대나무 숲이다. 오로지 이곳에서만, 할 얘기 못 할 얘기 마음껏 다 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글을 쓰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문득 시계를 보는데 2시 반.
순간 이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 생각을 중얼거렸다.
“3시까지 가려면 지금 출발을······.”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다시 비명을 지른다.
“이시현!!”
**
「김포공항. 2000년 9월 27일 수요일」
“나올 때가 됐는데.”
박용현은 입국게이트 앞에서 시계를 살폈다. 오늘 신재인이 귀국하는데,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본다.
그동안 매니저들은 몬스터 프로젝트를 풍문으로만 들었다. 그래서 그 애가 대체 어느 정도 실력인지, 어떤 아이인지, 다들 궁금해하고 있다.
“형님.”
“왜?”
“누구한테 전화하세요?”
최재환은 어딘가로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
“동생.”
“아······.”
지난번 최재환의 어머니 장례식을 떠올린 박용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듣자 하니 여동생하고 사이가 소원하네 어쩌네 했는데, 이제 연락은 하고 사나 보다.
“전화를 안 받네.”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은 최재환이 입국장을 바라보자, 박용현은 그 옆모습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근데 시현이 걔는 청바지에 반소매 셔츠 하나 걸쳤을 뿐인데, 어떻게 그래요?”
아침에 오피스텔에서 픽업한 이시현을 떠올리며 박용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뭐, 선글라스 하나 걸쳤는데 완벽 그 자체였다. 요즘에는 인기 때문인지 하루가 다르게 잘생겨지는 것 같고.
“용현아.”
최재환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불렀다.
“예?”
“니 얼굴이 세수하고 거울을 보면 그냥 박용현인 거야.”
“그게 무슨.”
“그럼 이시현이 세수하고 거울을 보면 뭘까?”
뜬금없는 난센스 퀴즈에 박용현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최재환이 피식 웃으며 바로 답을 알려준다.
“이시현인 거야.”
“무슨 얘기세요?”
“이시현은 그냥 이시현이라고. 니가, 내가··· 우리가 아무리 부러워해도 될 수가 없어.”
“아 형님, 저도 왕년에 좀 잘나갔습니다.”
나를 학창시절에 동네에서 소문 좀 났던 박용현이다. 하지만 못 믿겠다며 웃기만 하는 최재환의 모습에 박용현은 화제를 바꿔 다른 걸 물었다.
“그럼 이수정은 분량 팍 줄어드는 거예요?”
“글쎄다. 김 작가님하고 박태 감독이 어떻게 갈지 모르지.”
최재환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얘기하자 박용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걔는, 왜 그렇게 확 맛이 갔대.”
“그 얘기 그만해라. 별일도 아닌데.”
물론 큰일은 아니었다. 지에스 입장에서야 뭐.
촬영장에서의 신경전 역시 배우들에게는 늘 있는 일이고.
단지 이번에는 그 시발점이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수정이 이시현을 까려면 눈치껏 까야지 최미숙한테 들킨 게 문제였다. 차 대표가 최미숙이랑 어떤 사이인데, 감히.
“근데, 그날 시현이하고 이수정 무슨 얘기했는지 몰라?”
최재환이 샵에서의 일을 다시 묻는다.
“글쎄요. 시현이 혼자 내려오더니 원장이랑 무슨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전부였어요.”
“이수정 얼굴이 멍들어 있었다며?”
“그거 이수정이 자기 혼자 넘어진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샵 애들 중에 멍든 거 본 애 없지?”
몇 번이나 물었던 얘기를 또 묻는다.
“없다니까요. 시현이가 마스크 사서 올라가 보라고 해서 저 혼자만 봤어요.”
그때를 얘기하면서 박용현은 다시 한 번 그 상황을 떠올렸다. 뭔가 묘했던 상황. 이수정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서 눈물범벅이 됐는데, 얼굴에는 멍까지.
박용현 역시도 그때 일이 찜찜하지만, 이내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하니 시현이가 걔를 때렸겠어요? 그리고 때렸으면, 이수정이 가만있었겠어요? 옳다구나 경찰서로 직행했지.”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너무 조용하니까. 아, 거기 CCTV있지 않나?”
“에이, 그거 고장 난 지가 언젠데요.”
피식 웃는 이때, 늘씬하고 예쁜 여자들이 곁에 다가왔다. 눈앞에서 팔락거리는 파란 원피스 자락을 보며, 박용현은 미소와 함께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그런데 여자들은 그가 아닌, 최재환을 바라본다.
“배우 이시현 매니저님 아니세요?”
“예?”
최재환이 눈썹을 쫑긋 올리고.
“맞는 것 같은데··· 곰 매니저님, 사인 좀 해주세요. 저희 시현 수포 회원이에요.”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아··· 맞는 것 같은데.”
여자들이 말꼬리를 흘리며 물러난다. 놀란 박용현은 최재환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절대 누구에게 사인을 해줄 외모가 아닌데.
“팀장님 대단하시네요. 무슨 매니저한테 사인을 받아?”
“씨끄러 임마.”
“근데 혹시 압니까, 나나 형님도 죽었다 깨어나면 이시현으로 태어날지.”
시답잖은 농담. 실실 웃는 박용현을 못마땅한 듯 보던 최재환이 갑자기 눈썹을 올린다. 마침내 입국장에 정 이사가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아, 쟤예요?”
박용현은 정 이사의 옆에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모자를 푹 눌러썼는데, 어깨를 덮은 긴 머리가 인상적이다. 최재환도 비장한 얼굴로 아이를 본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어딘가로 마구 달려갔다.
모자에, 마스크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이시현.
“아 자식, 차에 있으라니까.”
박용현이 투덜거린다. 공항에 모습을 보이면 난리나니까 차에 있으라고 말했건만. 더구나 신재인이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는데··· 젠장, 이시현의 모자가 벗겨졌다.
“이시현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공항에 사람들 비명이 미어 터졌다.
“아 미치겠네.”
달려드는 팬들과 몸싸움을 각오하고 박용현이 서둘러 움직이는데, 최재환이 피식 웃으며 속삭인다.
“이시현으로 태어난다고? 미친 소리 하네.”
< 드디어 우리가 만날 시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