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시현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2) >
“차 대표, 내 말 좀 들어봐. 수정이가 실수한 거야. 우리가 지에스 배우를 건들 이유가 없잖아?”
전화기를 귀에 바싹 붙인 채, 배 사장은 담배를 입에 물고 눈을 흘겼다.
이수정 매니저란 녀석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실장이란 놈은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치만 살피고 있다.
“여자들 한 달에 한 번 그러잖아. 이수정이 오늘 딱 그랬어. 그래서 빗속 촬영 못 하겠다고 한 건데, 또 상황이 그러다 보니까, 그냥 투정 좀 부린다는 게······.”
-상황이 그러면, 언제든 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아니, 아니지!”
화들짝 놀란 배 사장은 손을 내저었다. 구겨진 이맛살을 펴질 못하고 차 대표의 목소리만 기다린다. 손가락 사이의 담배에서는 연기만 피어오르는데.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지금 손님이 와서.
“차 대표? 차 대표!”
전화가 끊어지고, 배 사장의 손에서는 담뱃재가 툭 떨어졌다. 그 순간 날카로운 시선이 실장에게 꽂혔다.
“이 실장, 넌 뭐했냐?”
“그게······.”
“이수정이 기가 세니까 신입한테만 맡겨두지 말고 니가 관리하라고 했어, 안 했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질끈 눈을 감는 이 실장을 보며 배 사장은 숨을 고르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할래?”
“수정이 건은 제가 김 작가님 직접 찾아가서 좋은 쪽으로 정리할 수 있게끔······.”
“그럼 다른 애들은?”
지금 이수정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주연이 CF는 어떻게 할 건데? 지에스에서 주연이 빼자고 하면?”
이번에 블랙보이와 함께 화장품 CF를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지금 분위기면 지에스에서 황주연 빼라고 대놓고 요구할 게 뻔하다. 차 대표가 어떤 사람인데.
“유진이는 또 어떻게 할 건데?”
현재 방영 중인 KIS 월화 드라마 후속작에 김유진이 여주인공으로 성사되기 직전이다. 그런데 이미 낙점된 남자 배우가 지금 최미숙 소속사 애다.
“너 이 바닥 하루 이틀이냐? 물리고 물린 게 이 바닥인데, 왜 이시현을, 그것도 지에스를 건드려서 이런 사단을 만들어!”
“죄송합니다.”
“하······.”
한숨 뒤에 배 사장은 이수정 매니저를 노려봤다. 나이 서른 넘어 매니저 하겠다고 들어온 놈인데, 그럭저럭 일 잘하고 있는 것 같더니만.
“이수정이 어디 있어?”
“집에 있습니다.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임마, 걔 옆에 붙어 있어야지!”
“사장님이 당장 오라고 하셔서······.”
그것도 변명이라고. 배 사장은 아랫입술을 한 움큼 깨문 채로 콧잔등을 찌푸렸다. 맘 같아서는 두 놈 다 작살을 내주고 싶은데, 지금은 수습이 우선이다.
“니들, 내일 이시현한테 가서 사과하고 잘 구슬려.”
“그러지 않아도 아까 현우가 전화했더니, 그냥 끊었답니다.”
“너 같으면 전화를 받고 싶겠냐? 그러니까 찾아가 보라고! 아니면 내가 가리? 가서 그 어린놈한테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럴까?”
“아, 아닙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서둘러 대답한 이 실장. 그때, 이 실장 주머니에서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머뭇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든 그 모습에 배 사장이 눈을 찌푸린다.
“뭐해 전화 안 받고?”
“스카이데일리 기잔데요.”
“기자? 기자가 왜?”
배 사장이 재차 얼굴을 구기자, 이 실장이 사무실을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한참 뒤 뭉그적거리며 들어온 놈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뭐야?”
“이시현하고, 이수정 일··· 저희 입장발표 듣고 싶다고.”
**
「2000년 9월 20일 수요일」
“하!”
커튼을 젖혔다. 창을 넘어온 햇볕을 맞으며 기지개를 쭉 펴고, 소파에 앉았다.
“어디보자.”
오랜만의 여유로운 아침.
꺼진 휴대폰 배터리를 갈고 전원버튼을 꾹 눌렀다.
띵, 띵, 띵, 띵···
문자가 계속 쏟아지는 것을 확인하고 일단은 샤워부터.
차가운 물줄기에 정신이 바싹 든다.
구석구석 닦고, 늘 그렇듯 거울에 비친 알몸에 한번 놀라고, 허리에 수건 걸치고 나오는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어, 형.”
-임마 전화를 꺼놓으면 어떻게 해?
“어디야? 순천이야?”
-회사야. 지금 용현이가 너한테 가고 있으니까, 오늘은 오전 광고주 미팅만 하고 쉬어.
“왜? 무슨 일 있어?
-그냥 쉬라고.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전화하고. 알았지?
“어.”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전만 하라고? 왜?
아무튼 일단 속옷을 입고, 대충 셔츠 걸치고, 청바지에 다리를 쭉 밀어 넣었다. 마침 초인종 소리도 들린다.
띵동. 띵동.
서둘러 현관으로 향하다가 멈칫했다. 이상하네. 박용현이 벨을 누를 리가 없잖아? 그냥 열고 들어올 테니까.
그래서 터벅터벅 걸어 현관문에 달린 렌즈를 봤더니.
아 이 또라이.
무슨 아침부터 찾아오고 난리야.
“시현 씨, 안에 있는 거 알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모른 체할까. 그런데··· 이 호기심이란 게 뭔지.
잠금장치를 걸고 문을 열었다. 철컹! 소리와 함께 열린 문. 그 좁은 틈으로 이수정이 보인다.
“무슨 일이세요?”
“잠깐 얘기 좀 해요.”
화장이 둥둥 떠서 눈썹만 유난히 까맣다. 내가 아는 그 이수정이 맞나 싶은, 밤새 잠 못 든 얼굴··· 그 얼굴을 보니 호기심이 팍 죽었다.
“그냥 가세요. 할 얘기 없으니까.”
“제발요. 사과하려고 왔어요.”
“사과는 저 말고, 최미숙 선배님하고 감독님한테 하세요.”
문을 닫으려는데, 그 틈으로 하얀 손이 불쑥 들어왔다.
“뭐하는 거예요?”
“사과할게요. 선배님하고 감독님한테 사과할게요. 그전에, 시현 씨한테 먼저 얼굴 마주하고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이봐요 이수정 씨.”
“제발요.”
문 안 열어주면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다. 아이고. 쯧쯧.
“알았어요.”
그래서 일단 대답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금장치를, 열지 않았다.
“사과 필요 없으니까 가세요.”
“야!”
곧바로 쾅쾅 소리가 울린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사람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지. 문을 열어줬어도 형식적인 사과였을 게 뻔하다.
문 너머에서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린다.
내가 잘못한 게 뭔데? 너 가식 떠는 얼굴 가죽 벗겨버릴 거야!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쾅쾅 문 두드리는 건 서비스.
아, 옆집 사람 깨겠는데.
그러고 보니 옆집 사람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는데··· 아침부터 이웃 걱정하게 만들어줘서 이수정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수정 씨, 문 열게.”
잠시 잠잠해진다.
“장난인데.”
“야아!”
어이구. 저 실체를 모르는 이수정 팬들은 그녀를 여신이니, 천사니 어쩌고 하겠지만, 내 기준에서 이제 이수정이라는 배우는 잡상인보다 못한 인간이다.
“야!”
“왜에?”
“이게 정말!”
**
오전에 있는 미팅은 주류 광고 건이다. 원래 박한영이 하던 건데, 이번에 내가 인계한다. 물론 나야 술 좋아하니까. 간 김에 그냥 낮술이나 하자고 할까.
“시현이 너 뉴스 봤어?”
솜솜의 직원들과는 이제 다들 친해져서 스스럼이 없다.
“뉴스?”
설마 어제 이수정과 한판 뜬 일이 뉴스에··· 오를 일이 없지.
“어제 시현 수호천사들하고, 시현 포에버하고 명동에서 붙었대.”
“뭐?”
놀라서 눈을 끔뻑이니까, 디자이너가 메이크업 브러쉬를 손에 쥐고 나를 뚫어지게 보며 속삭인다.
“눈 깜빡이면 안 돼.”
그리고는.
“명동 한복판에서 수천 명이 서로 머리끄덩이 잡고 장난 아니었대. 아, 눈 깜빡이지 말라······.”
디자이너가 얘기를 멈췄다. 나 때문에 당황한 눈치다. 왜냐하면, 지금 거울에 비친 여자 때문에 내 얼굴이 찌푸려졌으니까.
“놀랄 것 없어요. 아쉬운 사람이 찾아오는 거잖아요?”
우리 뒤에서 이수정이 미소를 띠고 서 있다. 그 옆에는 박용현이 짜증 섞인 얼굴로 서 있고.
“이수정 씨, 뭐하는 거예요 지금?”
“형. 여기 사람 많아.”
나는 다시 이수정을 바라봤다. 붉은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는데, 짙은 갈색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 보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향해 친구에게 말을 걸듯 얘기를 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요. 나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수정은 그 말을 하고 뒤돌았다. 또각또각 소리에 이어 소파에 풀썩 앉는 소리가 들리자, 디자이너가 거울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중계했다.
“지금 잡지책 펼쳤어. 다리 꼬고,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어. 어머머 쟤 진짜 뻔뻔하다. 지금 애들한테 커피 달라고······.”
“누나, 그건 나도 들었어.”
“아, 그렇지··· 근데, 존재감은 짱이다.”
아무리 싹수없어도 여배우는 여배우니까.
아침의 상쾌한 기분이었다면 헤어팩에, 두피 마사지까지 받아서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리게 만들겠지만··· 지금은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한 디자이너와 곁에서 도운 견습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수정은 여전히 잡지를 보고 있었는데, 내가 앞에 서자 자연스레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어디 조용한 데 갈까요?”
그녀가 붉은 미소를 띠고 내게 제안했다.
“위에 직원휴게실 있어요. 거기서 얘기해요.”
“휴게실이요?”
“예. 간이식당도 있으니까, 거기서 얘기하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박용현이 말리는데, 이제는 나도 귀찮아져서 이쯤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형은, 여기 계세요.”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질러.”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데요?”
이수정이 태연하게 미소를 띠고 박용현을 쳐다봤다.
“그건 모르겠는데, 신인 배우 잡아먹으려는 신인 배우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서요.”
“아, 그래요? 난 또 처음 듣네.”
이수정은 아주 여유롭게 나선형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래서 적당히 간격을 두고 뒤따라 올라갔더니 그녀가 식당과 휴게실을 살피고 있었다.
“할 얘기가 뭐예요? 빨리해요. 가봐야 하니까.”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당황해서 이수정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지금 내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까.
“뭐하는 거예요?”
“내가 실수했어요.”
“일어나요. 이런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해결해줄 생각 없다. 관심도 가지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그저 빤히 내려 보고만 있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끝을 찌푸리더니 휴대폰을 내민다.
“그럼 김 작가님한테 전화해줘요. 우리 화해했다고.”
“화해라는 게 이수정 씨가 일방적으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제스처를 취한다고 화해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 무릎까지 꿇었는데 부족하면, 같이 호텔이라도 갈까?”
이거 아주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네.
“그냥 돌아가세요. 이런다고 해결되지 않으니까. 가서 진심으로 최미숙 선배님 찾아뵙고 사과드리고, 김 작가님 찾아가서 사과드리고, KIS 드라마국 찾아가서 감독님한테 사과드리세요. 아니, 혼나고 오세요. 그래야 이거 정리됩니다.”
내가 왜 얘를 데리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나 싶지만, 그래도 내 딴에는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얘는··· 역시나 멈추지 않는다.
“시현 씨 착하잖아. 최미숙 선생님이 그랬다며? 우리 착한 이시현을 이수정이라는 싸가지가 훈계를 하더라고. 촬영장 분위기도 엉망으로 만들더라고.”
말투에 가시가 단단히 꽂혀있는데, 어쭙잖게 나를 자극하고 있으니 웃음만 나온다.
“근데 딱히 착하지도 않나 보네?”
“어.”
“어?”
순간 이수정의 짙은 눈썹이 삐뚤어졌다.
“그래 어. 나 착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 앞에서 꺼져.”
아주 똥을 제대로 밟은 기분이니까. 드라마는 시작도 안했는데 별게 다 일을 만든다.
나는 이수정에게서 등을 돌렸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진짜 화가 날 것 같아서 내려가려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퍽!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까··· 이수정이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있다. 셔츠도 쫙 벌린다. 투둑, 심플하게 셔츠 단추 몇 개가 바닥에 구르는데.
“그쪽, 지금 나를 폭행했어요.”
마치 연기를 하듯,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는 이수정.
나는 일단 벽에 어깨를 기대고 그녀를 바라봤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정말 바닥을 보이는구나 싶다.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옷 찢고 지랄 발광을 해서 강간 어쩌고 하는 것보다는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하면 넘어가 줄게요.”
진심으로 한 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증명할 수 있겠어요? 지금 이 상황? 아니다. 이미지가 있잖아. 착한 이시현인데, 요즘 잘나가는 이시현인데, 여자를, 그것도 여배우를 때렸다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 해?”
후.
생각해보니 사람을 싸늘하게 노려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지난번 노병기 때는 그래도 이 정도로 짜증나지는 않았는데.
“그래서요?”
내가 묻자 그녀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말한다.
“넌 이제 끝났어.”
그래서 나도 피식 웃고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선반 옆의 틈새에 있는 공간.
“들어올 때 저거 못 봤어요?”
이수정이 휙 뒤돌아 내 손길이 닿는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는데··· 하, 아쉽다. 최재환이도 봤어야 했는데. 저 얼굴.
< 이시현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