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94화 (94/227)

< 이시현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1) >

[시현 수호천사들] 회원 수 : 18,820명

[시현 포에버] 회원 수 : 14,309명

현재 이시현의 대표적인 두 개의 팬클럽.

서로의 장단점을 꼽자면, 일단 시현 수호천사들은 개설일이 오래됐다. 정보의 업데이트도 빠르고, 흔한 말로 고급 정보가 많다.

반면 시현 포에버는 운영자가 성지훈 팬클럽 회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있지만, 카페 개설 두 달 만에 1만이 넘는 회원 수를 끌어모았다.

드르륵!

뒤로 밀린 의자 바퀴, 피시방을 가득 채웠던 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십 명이 동시에 빠져나가자 카운터에 있던 피시방 알바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우르르···

인근 카페며 책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현 수호천사들 나머지 회원들도 먼지를 흩날리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진풍경에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회원들은 하나같이 청색의 우비를 입고 있었다.

시현 수호천사들의 공식 색상 ‘코발트블루’

반면 그녀들 반대편에서도 한 무리의 여자들이 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시현 포에버의 운영진과 회원들로 짙은 다홍색 우비를 입고 있었다.

시현 포에버의 공식 색상 ‘심홍색’

추적추적 내리는 비.

드디어 한자리에 마주하게 된 두 팬클럽 회장 백유진과 조별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는데, 마침 그녀들이 서 있는 곳은 대형 스피커가 설치된 음반 매장 앞.

잔잔한 올드 팝송이 흐르는 가운데, 조별아가 하늘을 보며 속삭인다.

“날씨가 참 좋네?”

여유 있고 당당하며,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상대를 조롱하고 있는데.

“비 오는구만 무슨 날씨가 좋아? 너 안경 맞춰야겠다. 내가 하나 사줄까?”

백유진의 호쾌한 비아냥거림에 쿡쿡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러자 조별아는 한걸음 좁혀 눈을 부릅떴다.

“내 안경 사줄 생각하지 말고, 넌 오늘 병원비 좀 나올 것 같은데?”

“걱정 마, 보험 들었으니까. 실비라고 들어봤어? 실비보험. 훗.”

“흥!”

백유진의 피식 웃음에 조별아도 코웃음으로 맞받아쳤다. 그러자 백유진이 팔을 가린 청색 우비를 슥 올리고, 앞머리까지 덮인 우비 모자를 살짝 올렸다. 순간 번뜩이는 시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얘기할게.”

그리고 또 한걸음.

조별아의 바로 코앞까지 가서 다시 속삭인다.

“돌아가라··· 성지훈한테.”

“니가 가라. 성지훈한테.”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해 보이는 상황에, 백유진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갈게. 너 죽이고.”

“이년이 진짜!”

“쳐!”

**

지쳐서 다들 곯아떨어졌다.

한송이도, 서아린도 새근새근 콧바람만 내쉬는 시체들이다. 아, 땀 냄새···

그녀들도 나를 케어하느라 오늘 빗속을 뛰어다녔으니 많이 힘들었을 거다.

물론 스타일리스트야 자신의 배우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게 일이지만, 아무튼 나중에 선물이나 하나 해줘야겠다 생각하고 눈을 감으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뭔가 싶어 보니까 처음 보는 번호다.

요즘 들어 어떻게 알고 엉뚱한데서 전화를 해온다. 그래서 안 받을까 하다가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나 이수정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괜스레 얼굴이 찌푸려진다. 근데 이수정이 왜 전화를··· 아니,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무슨 일이세요?”

-내가 지금 좀 화가 나서요.

“예?”

흡사 너 오늘 제대로 걸렸어 같은 도전적인 말투에 나도 모르게 눈썹이 껑충 올라갈 만큼 놀랐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정의 찢어진 목소리는 계속됐다.

-같이 촬영을 하는데, 혼자만 그렇게 튀어도 돼요?

“그게 무슨 얘기세요?”

-나하고 걸치는 씬인데, 내가 못하겠다고 하면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먼저 상의를 한 다음에 결정해야죠! 뭔데 혼자 나서서 빗속에서 촬영을 하네! 마네! 하는 거예요?

“저, 나중에 얘기하시면 안 될까요? 지금 통화할 상황이······.”

-그렇게 감독님 눈에 들고 싶었어요?

눈에 들고 싶었냐고? 허··· 얘 완전 웃기네.

그래, 이수정 입장 이해는 간다. 아까는 내가 조금 오버한 게 사실이다.

갑작스런 비에는 촬영을 미루는 게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전남 순천까지 내려갔는데 그 많은 스태프들 헛걸음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름 해결책을 내놨던 거다. 그리고 중간에 이수정이 나오면 적당히 분위기를 풀 생각이었고.

그런데 몇 시간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친 건 바로 너잖아?

“저기 수정 씨.”

-말해요.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했던 것 같네요.”

더 얘기하기 싫어서 적당히 넘어갈 생각으로 말했다. 어차피 얘는 내가 입만 뻥긋하면 배우 인생 종치지만, 오늘은 피곤하니까. 다른 사람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지친 밤이니까!

-실수했다고 하면 단가요?

아휴. 그럼 어떻게 해줘야 해?

얘가 멈출 생각을 안 한다. 나보고 석고대죄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그쪽 때문에 내가 입은 손해, 어떻게 감당할 건데요?

“어떤 손해를 입으셨는데요?”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요?

“죄송합니다. 잘 몰라서요.”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죠?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도 정도가 있지. 요즘 여기저기서 불러준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봐?

이건 뭐 가만히 있는데 옆에서 뺨 때리는 수준이네.

가만 보자.

이수정이 지금 신인이나 다름없는 경력인데, 자기보다 데뷔가 늦었다고 내 앞에서 선배 운운하는 건 도대체가··· 어이가 없네.

“아, 그건 아닌데. 그리고 제가 경력은 없지만 5년 전부터 오디션을 보고 다녔거든요.”

-자꾸 나랑 말장난할 거죠?

또다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내 목에서 뜨거운 게 울렁거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자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렸다.

-이시현 씨, 나 이수정 매니전데. 선배한테 말버릇이 그게 뭡니까?

허. 이제는 말문이 막힌다. 이 바닥이 아무리 겉과 속이 다른 놈들 천지라지만 이 정도로 막나가는 배우와 매니저는 또 오랜만에 본다.

-아무튼 수정이가 전화한 건······.

다시 이어진 이수정 매니저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내가 휴대폰을 귀에서 뗀 게 아니라, 등 뒤에서 불쑥 치고 들어온 손이 낚아채 간 거다.

아, 그러고 보니 이수정한테 말을 못했네.

최미숙 선생님하고 같이 있다는 말을.

**

-배우가 똥오줌 못 가리면 옆에서 휴지 들고 닦을 생각을 해야지, 같이 흘리고 있어?

이수정의 매니저는 최미숙의 목소리에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너희 사장 누구니? 아니다, 이수정 바꿔.

전화 너머 콧바람 내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최미숙이 지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하필 그녀가 이시현하고 같이 있었을 줄이야.

-안 바꾸고 뭐 해?

“죄송합니다. 지금 수정이가 아파서 링거를 맞고 있거든요.”

-뭐? 이수정이가 아파서 링거 맞고 있다고?

겨우 변명거리를 생각해서 뱉었더니 최미숙이 헛웃음을 뱉었다.

-니들,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가겠다.

그 말을 끝으로 최미숙은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선생님?”

망연자실한 매니저는 끊어진 휴대폰을 보다가 룸미러를 흘깃 쳐다봤다.

이수정이 살짝 열린 차창 너머로 담배 연기를 뱉고 있었다.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는 걸 보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뭘 어떻게 해? 어차피 그때 나가서 얼굴 비쳐도 미친년 되는 건 똑같았는데!”

이수정은 신경질적으로 얘기하고 다시 담배를 빨아들였다.

풍성한 머리카락에 담배 연기를 가득 배고 있으면서, 손에는 냄새 배는 게 싫다고 젓가락에 담배를 꽂아 피는 그녀 모습을 보며··· 매니저는 착찹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실장님한테 보고할까?”

그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이수정이 서슬 퍼런 시선을 흘긴다.

“그랬단 봐.”

“그럼 어떻게 할까?”

“그 여자는 뭔데 이시현 일에 자꾸 나서?”

중견배우 최미숙.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그다지 비중 있는 역은 없지만, 이 바닥에서만큼은 충분히 영향력이 있는 배우.

톡톡톡톡.

투명 매니큐어를 바른 이수정의 손톱이 유리창을 두드린다. 그래도 불안하긴 한 모양인데, 차창 틈에 젓가락을 문질러 담배꽁초를 내버리려다가 차 안에 떨어트리고는 짜증을 낸다.

“아 재수 없어. 오늘 왜 이래?”

오늘은 그녀에게 뭘 해도 안 되는 하루.

최미숙이 왔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서 못 나갔고, 늦게 나가봤자 미친년 소리 들을 거 뻔해서 그냥 서울로 올라왔을 뿐이고, 괜히 열 받아서 이시현에게 전화를 했고··· 최미숙이 함께 있었을 뿐이고.

“안 되겠다. 실장님한테 보고해야 해.”

“하지 말라니까!”

이수정은 얼굴을 구겨가면서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매니저도 이번만큼은 참지 못했다.

“야! 내 말 좀 들어! 니 고집대로 하다가 계속 어그러지고 있잖아!”

“오빠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그래! 내가 아무리 이 나이 먹고 니 뒤치다꺼리하는 신입 매니저라지만 그래도 너보다는 오래 살았어. 내가 아까 말했지? 그냥 비 조금 맞고 촬영하자고! 나가서 인사드리자고! 이시현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매니저는 화를 쏟아냈고, 이수정은 그를 노려봤다.

“그렇게 잘났으면 오빠가 수습해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황당해서, 매니저는 이수정을 돌아봤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해 차창만 바라볼 뿐이었다.

**

김 작가에게 전화한 최미숙은 한참 동안을 이수정 얘기를 했다.

소위 말해 씹었다.

35년 배우 인생 그런 애는 처음 봤는데, 김 작가 이런 애를 키우는 거냐고, 황 국장에게 전화하려다가 김 작가 얼굴 봐서 참는다는 말까지.

모르긴 몰라도 김은수 작가, 전화 받는 내내 얼굴이 시뻘게졌을 거다.

“정말 병원 안 가 봐도 돼?”

“예.”

최미숙이 나를 오피스텔에 내려주고 여전히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내가 너무 주책없어 보였니?”

“아니에요.”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녀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이렇게 넘어갔지만, 다음에 또 이러면 바로 얘기해. 그때는 황 국장하고 담판 지을 테니까.”

“예.”

“웃기는. 넌 그런 소리 듣고도 웃음이 나와?”

“후후.”

“어이구. 넌 애가 그렇게 착해서 어떻게 하니?”

최미숙이 정말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그래서 왠지 든든하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생님.”

떠나는 그녀를 마중하고 엘리베이터에 기댔다.

발바닥이 땅에 녹아드는 기분인데, 오피스텔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마치 준비가 됐냐는 듯 휴대폰이 다시 울린다.

“여보세요.”

-시현 씨, 나 이수정 매니전데.

“그런데요?”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내가 시현 씨 쪽으로 바로 갈게요.

“저 오늘 빗속에서 4시간 촬영했습니다. 피곤합니다.”

-아, 그렇지··· 딴 게 아니고 오늘 일 말이야······.

“김은수 작가님 전화, 아직 못 받으셨나 봐요?”

김 작가가 니들 다 빼버린다고 했다. 박태 감독은 촬영분 들어낸다는 말까지 했는데, 내가 만류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결코 만류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찌 됐든 나는 착한 배우 이시현이니까.

“내일이든 언제든, 곧 작가님 전화 갈 겁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시현 씨, 시현 씨!

이렇게 다급하게 외칠 걸 아까는 왜 그런 거야.

그런데 또 이수정 목소리가 들린다. 전화를 내놓네 마네 휴대폰 너머에서 그녀 목소리가 들리더니.

-시현 씨 나 이수정이에요.

그래서 뭐?

나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아··· 피곤해.”

그래도 이 정도까지 무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하긴, 이런 애들 한두 번 보나. 계속 울리는 휴대폰은 끄고 리모컨을 꾹 눌렀다.

어두운 거실.

TV브라운관에서 퍼진 빛이 피곤에 젖은 내 눈동자에 스며들고··· 나는 채널을 돌린다.

동물 나오는 방송. 웃고 떠드는 예능. 그러다가 너무 볼 게 없어서 뉴스를 틀었는데, 눈이 슬금슬금 감긴다.

귓가에는 앵커의 목소리가 앵앵.

아··· TV 끄고 자야 하는데.

-여러분, 팬 문화를 아십니까? 좋아하는 가수나 혹은 배우를 응원하는 팬 문화. 일각에선 이 팬 문화가 도를 넘어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효주 기자?

-오늘 오후 8시, 명동에서 배우 이시현의 팬클럽이 충돌해 이 일대 통행이 마비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시현 수호천사들’과 ‘시현 포에버’ 두 팬클럽은 서로를 원조 팬클럽이라고 주장하며 명동 한복판에서······.

< 이시현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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