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딜 (2) >
“아무리 중국에서 한류 어쩌고 한다고, 무슨 드라마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허!”
국장실에 돌아온 황 국장이 헛바람을 뱉으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뒤따라 들어온 윤찬 씨피도 마주 앉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뮤지컬도 아니고. 하하.”
윤찬 씨피는 실바람을 흘리며 황 국장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연다.
“근데 또 무시할 수 없는 게, 지금 정현이 곡이 중국에서 엄청 잘나간대요. 정작 가수는 한국에 있는데 표절 가수들이 부채 들고 활개 친다잖아요. 그러니까 쟤들이 저러는 거죠. 지금 열풍이 엄청나서 오죽하면 김치까지 잘 팔린다니까, 말 다했죠.”
어이없는 건 둘째 치고 냉정하게 상황을 보자 이거다.
“그리고 MNC는 재작년? 아니다 벌써 3년이나 지났네. 왜, 대발이 가족 중국에 수출해서 제대로 뽑아먹었잖아요. 회당 평균 1억 명이 봤다는데···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도 이제 공격적으로 나가야 된다 이거죠.”
“임마, 아까 부사장님 얼굴 못 봤냐? 뭐 이런 자식을 데려왔냐는 표정이었잖아. 박태 녀석 그렇게 쪼아서 촬영장 스톱하고 보여줬더니만··· 하여간 중국 놈들은.”
“왜 나쁘게만 보세요? 막말로 주제곡 정도는 부를 수 있는 건데. 중국놈 한국놈 차이가 어디 있어요? 중국 시장 무시하면 안 됩니다.”
계속된 윤찬 씨피의 설득에 황 국장은 더 얘기하기 싫어서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안 돼. 걔 음치래.”
“예?”
“차 대표가 전에 그러더라고. 5년 동안 가수 데뷔시키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안돼서 배우로 전향한 거래.”
“아니 어느 정도기에?”
얼추 음정 박자만 맞으면 배우가 부른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충분히 승산이 있건만.
윤찬 씨피의 이 같은 의문에 황 국장이 학을 뗀다.
“야 차 대표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노래는 무슨.”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윤찬 씨피가 입꼬리를 씨익 올린다.
“아이고 국장님, 중국 드라마 다 후시 녹음입니다. 어차피 더빙 붙이는데, 뭔 걱정이에요. 그냥 적당히 논두렁 걸으면서 그림만 넣으면 되지.”
“흠······. 그러네?”
황 국장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픽 웃었다.
그 모습에 윤찬 씨피도 피식 바람을 내쉬는데, 황 국장이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황 국장이라는 사람의 특징이 바로 저거다. 자기가 납득이 되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아도, 납득만 되면 바로 움직인다.
“어 차 대표, 바쁘지? 시간 되면 저녁에 밥 한 끼 하자.”
식사 일정을 잡은 황 국장이 바지춤을 챙기고 일어났다. 윤찬 씨피를 보는 그의 얼굴이 무척 해맑다.
“윤찬아, 오늘은 소고기 배 터지게 먹자!”
**
[MNC 예능국 국장실]
전화를 끊은 차 대표는 자신을 향한 시선에 사과부터 했다.
“미안합니다. 전화를 꺼놓는다는 게.”
“됐어, 됐어.”
민 국장이 손을 내젓고 다리를 꼰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KIS 황 국장?”
“예.”
웃으며 찻잔을 손에 든 차 대표의 모습에 민 국장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오늘이 첫 촬영인가?”
“예. 다음 주가 제작발표횝니다.”
“뭐야? 그럼 우리하고 제작발표회 겹치는 거 아니야?”
이번 MNC 수목극은 9월 중순부터 시작해서 11월에 끝난다. 촬영은 3회분까지 진행이 됐고, 제작발표회는 다음 주.
“글쎄요, 그것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네요.”
“이것 참. KIS 마음에 안 들어 죽겠네. 변 국장이 지금 얼마나 배 아파하는지 알아? KIS에서 지에스에 대체 뭘 해준거냐고 난리다 난리.”
“국장님, 저 이미 드라마국가서 한 소리 듣고 왔습니다.”
“그랬어?”
민 국장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든다.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내려놓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말이야. 이시현··· 이제 슬슬 준비시켜둬.”
“찾았어요?”
지난번 민 국장은 만남의 장이라는 기획안 하나를 내밀었는데, 우리 오빠의 실제 주인공인 박춘삼을 찾아서 남매를 만나게 하겠다는 기획이었다.
하지만 차 대표는 그때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정부에서도 하지 못한 것을 방송국 차원에서 하겠다는, 무모한 얘기였으니까.
“이거 밖에다 얘기하면 안 돼?”
민 국장은 신신당부를 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내부 회의에서 말이 많았어. 이거 해서는 안 되는 거다, 문제 생긴다, 별의별 얘기 다 나왔어.”
민 국장이 운을 떼고 찻잔을 손에 쥔다. 한 모금을 삼키고.
“찾으면 또 어떻게 데려올 거냐, 두만강 어떻게 넘어올 거냐? 대사관 주변은 공안들이 감시한다. 설사 대사관에 들어가도 중국이 방해하면 1년은 한국에 못 올 거다. 정부에서는 좋아하겠냐? 괜스레 북한을 자극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등등.”
“그래서, 물 건너간 겁니까?”
서론이 길어지자 차 대표가 본론을 물었다.
MNC 내부에서 말이 나오는 거야 당연한 일.
분명 좋은 기획임은 틀림없지만 여러모로 무리일 수밖에 없으니까. 공영방송에서 브로커를 통해 북측에 있는 사람의 소재를 확인하겠다는 발상부터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무겁게 얘길 꺼내는 민 국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근데 말이야. 생각보다 일이 쉬워졌어.”
“일이 쉬워졌다고요?”
“소재 파악했어. 살아 있더라고.”
차 대표가 눈썹을 들썩거린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민 국장이 웃으며 계속 얘기했다.
“한양에서 김서방 찾기라고 생각했는데··· 허.”
헛바람을 뱉고 웃음이 사라진다.
“한국에 있더라고.”
머리가 쭈뼛 서는 얘기였다. 이어진 말은 더 놀라웠다.
“그것도 서울에 있어.”
민 국장의 눈동자에 비친 차 대표의 놀란 얼굴.
보기 드문 그 모습에 민 국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하게 피었다.
**
[일주일 후, KIS 수목드라마 ‘우리 오빠’ 제작발표회]
“와우.”
제작발표회에 기자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타 방송국 드라마 제작발표회보다 기자들이 배는 온 듯했다. KIS도 작정했는지 오늘 사회를 KIS 아나운서가 맡았다.
“이우정 기자님!”
지정석에서 벌떡 일어난 이우정 기자는 무대 옆에서 손을 흔드는 최재환을 발견하곤 얼굴이 활짝 폈다.
‘아싸!’
친분이 있다는 건 너무나 좋은 것이여를 속삭이며 카메라맨과 함께 재빨리 달려갔다. 최재환이 그녀를 무대 뒤의 복도로 끌고 나오면서 빠르게 얘기한다.
“5분이에요. 바로 무대 올라가야 해서 5분 안에 끝내셔야 해요.”
“아······.”
“그러게 좀 빨리 오시지.”
“차가 막혀서······.”
금세 우울해진 그녀가 우물우물 대답해자 최재환이 해답을 건넨다.
“사진만 찍으시고, 인터뷰는 전화로 해요. 나중에 시간 빼줄게.”
“역시 우리 최 팀장님!”
환히 웃으며 대기실로 들어갔더니 이시현이 메이크업을 끝내고 거울을 보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다리가··· 길다.
“시현 씨 사진 먼저 찍을게요.”
찰칵찰칵.
대충 찍어도 화보가 따로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번 드라마 시청률 얼마나 나올 것 같아요?”
“글쎄요. 기자님이 보시기엔 얼마나 나올 것 같아요?”
그녀의 질문에 이시현이 웃으면서 되묻는다.
“아이 뭐야. 기자는 저예요.”
“하하.”
넉살 좋게 웃는 이시현을 향해 카메라맨이 분주히 셔터를 누르고.
“지금 인터넷에서 촬영장 영상이 화제인 거 아세요?”
이시현과 고우희의 연기 장면을 누군가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서 난리가 났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연기 대박, 고우희 예뻐요, 고우희 진짜 귀여워, 고우희 사랑스러워, 이시현 짱, 이시현 너무 잘생겼어. 시청률 40프로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말들이 아주 그냥.
근데 이상하게 고우희 칭찬이 많단 말이지. 아무튼.
“우희 씨하고는 호흡 어때요?”
이우정 기자의 질문에 이시현이 눈을 지그시 뜨고 그녀를 내려봤다. 그 때문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목울대를 끌어올려야 했다.
“좋죠. 여동생인데.”
“아 그래요?”
하지만 기자들 사이에는 고우희 성격이 기분 따라 들쑥날숙한다고 전부터 말들이 많았다. 그런 천방지축도 이시현 앞에서는 얌전해진다는 건가? 결론을 빠르게 내고, 이우정 기자는 최재환의 눈치를 살폈다.
‘질문 몇 개 더 하고 싶은데······.’
고민이 무색하게도 마침 노크 소리에 이어 여자 스태프가 들어왔다.
“시현 씨, 이제 나오셔야 해요.”
그 말을 하고 나가는 스태프. 그런데 갑자기 이시현이 스태프를 불러 세운다.
“감독님.”
“예?”
꽁지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돌린 스태프에게 다가가더니, 이시현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다들 시선이 쏠렸는데.
“운동화 끈이 풀어졌네요. 잘못하면 다쳐요.”
그 자상한 행동에 조연출로 보이는 여자는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하긴, 누구라도 저 미소 앞에서는 숨이 멎지.
이우정 기자가 이 장면을 어떻게 글로 풀어쓸까를 고민하는 동안 이시현이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기실 스태프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이시현이 복도로 나간다. 최재환이 곁에 붙어 함께 가는데.
“저거 찍어요.”
이우정 기자는 재빨리 카메라맨에게 그들의 뒷모습을 찍으라고 주문했다.
이시현과 최재환이 복도를 걷는 뒷모습이, 마치 세계적인 스타와 그 매니저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칠 정도로 분위기가 있었다.
잠시 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배우분들을 모시겠습니다. 우리 오빠에서 박춘삼 역을 맡은 배우 이시현입니다!”
무대에 오른 배우에게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무대 중앙에 설치된 포토월 앞에 당당하게 선 이시현.
단정한 수트 차림의 이시현은 하얀 미소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넘기는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으며, 눈동자는 맑은 호수 같았다···
이우정 기자가 기사에 쓸 것들, 아니 일기장에 쓸 것들을 떠올리는 사이 나머지 배우들도 차례로 올라왔다.
고우희는 노랑 원피스 차림인데 특유의 발랄함이 있고.
배우 이수정은 핑크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뾰족한 힐이 무대에 구멍을 낼 기세다.
그런데 최미숙이 올라올 때는 갑자기 이시현이 무대 계단으로 내려가 그녀를 부축하는 진풍경을 보였다.
“최미숙 씨는 촬영 중에 다리를 접질렸습니다. 그래서 이시현 씨가 부축을 해주고 있네요. 참 보기 좋은 선후배 사이입니다.”
사회자의 진지한 설명이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좋은 그림은 설명 없어도 무조건 찍고 있는 기자들.
잠시 포토월을 치우고 배우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는 사이 작가와 이시현은 무슨 재밌는 얘기를 나누는지 환히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우정 기자는 같이 온 카메라맨에게 양해를 구하고 최재환의 곁으로 이동했다. 아까 함께 가는 모습을 봐서인지 경호원도 그녀를 힐끗 쳐다만 봤다. 이래서 사람은 인맥이 중요한 거다.
“팀장님, 기분이 어떠세요?”
“좋죠.”
최재환이 푸근한 미소를 보인다.
“5년 동안 시현 씨 뒷바라지하셨다면서요? 라면도 사다 주고, 생활비도 챙겨주고.”
“뒷바라지는 무슨. 근데 그런 소리를 어디서 들었어요?”
최재환이 별다른 내색 않고 눈썹을 들면서 물었다.
“지난번에 백암산에 갔을 때 들었어요. 기사 내지 않는 조건으로 얘기해주더라고요. 그때 시현 씨가 얼마나 팀장님 얘기를 하던지, 옆에서 듣고 있던 강 실장님이 에잇! 그러면서 나갔다니까요. 호호.”
“하하. 뭐 그러네요. 벅차기도 하고··· 잘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잠시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는 듯, 최재환이 담담한 미소를 보이는데.
“근데 팀장님.”
“예.”
“3W 권혜선 씨.”
갑자기 화제가 바뀌자 최재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야, 화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우정 기자는 계속해 웃는 낯으로 얘기했다.
“그냥, 팀장님한테 묻는 게 날 것 같아서.”
“뭔데요?”
“은퇴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예?”
최재환이 엄청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본다. 전혀 뜬금없다는 얼굴이다.
“누가 그래?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누구라고 얘기는 못 드리는데, 저도 지에스 1팀에서 들은 얘기에요.”
그녀의 말에 최재환이 귀를 긁으며 생각에 잠긴다. 아무리 팀장급 위치에 있어도 파트가 다르면 모를 수도 있는 법. 하지만 귀에서 손을 뗀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아, 그래요?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 그럼 이따 봐요.”
이우정 기자는 재빨리 태세전환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제작발표회는 사회자의 차분한 진행 속에 기자들에게 질문 권한이 주어졌다.
“스카이데일리 기자 분 질문해주세요.”
그때마다 배우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고, 곤란한 질문은 박태 감독과 김은수 작가가 끼어들어 적당히 대답했다.
기대와 흥분 속에서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 우리 오빠 제작발표회는 제작진과 출연진이 한데 모여서 주먹을 불끈 쥐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우리 오빠 파이팅!”
이우정 기자는 녹음기를 챙기며 멀어지는 배우 이시현을 눈에 담았다.
뜨거운 플래시 세례 속에서 무대를 내려온 이시현은 한순간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대기실로 향하지 않고 갑자기 뒤돌아 이우정 기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기자님!”
이우정 기자는 마치 주인을 찾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갔다. 기자들이 쟤 뭐냐고, 대체 무슨 사이냐고 구시렁대던 말든 개의치 않고 이시현 앞에 섰다.
“왜요?”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이시현의 미소가 바라본다.
“개인적인 부탁 하나 드리려고요.”
“뭔데요?”
“우리 사진 한 방 찍어주세요.”
이시현이 최재환의 어깨를 붙잡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거야 뭐 거절할 이유가 있나.
“자, 찍습니다. 아이, 팀장님 좀 웃어요. 하나둘 셋 김치!”
찰칵.
< 빅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