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딜 (1) >
KIS 부사장, 드라마국 황 국장, 윤찬 씨피, 그리고 중국에서 온 손님까지.
갑자기 찾아온 이들로 인해 촬영장에는 긴장이 맴돌았다.
더구나 KIS 수원 세트장은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는데, 촬영을 구경하는 이들도 점점 늘고 있었다.
일단은 오늘 남은 씬은 잠시 멈추고 박태 감독을 비롯한 연출진이 한자리에 모였다. 촬영감독도 턱 끝을 매만지며 합류했다.
“무슨 얘기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왔대?”
촬영감독이 까칠한 목소리로 말하자 박태 감독이 찌푸린 얼굴을 쓸어내리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
박태 감독은 조연출 두 놈을 돌아보고 물었다. 죄 많은 어린 양처럼 곁에서 숨죽이고 있는 녀석들의 입에서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는 없겠지만.
“물량 씬이야 당연히 안 되고, 오늘은 갈등 씬이 딱히 없고··· 엑스트라도 시장 아줌마 아저씨들밖에 없는데··· 소품실에서 폭죽이라도 하나 가져올까요?”
역시나 조연출 황동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속을 뒤집는 소리를 하고 있다. 너무 한심해서 욕할 타이밍도 놓친 박태 감독. 입맛을 쩝 다시고 손을 내밀었다.
“일단 대본 줘봐.”
황동태가 서둘러 손에 든 걸 건넸다. 오늘 촬영을 위해 미리 짜놓은 콘티였는데, 건네자마자 박태 감독이 돌돌 말아서 황동태의 머리를 두드린다.
“대본 달라고!”
지난 번 백암산 촬영이 너무 힘들었기에, 이번 촬영 첫날은 무난한 씬들만 구성했다. 그나마 갈등 구조라고 해봐야 이시현이 일본 순사한테 얻어맞는 게 전부였으니 오늘 콘티에서는 딱히 황 국장이 원하는 씬이 없다.
“여기 있습니다.”
이번에는 세컨드 조연출 반유선이 1회부터 4회까지의 대본을 한꺼번에 건넸다. 박태 감독은 겨드랑이에 대본을 꽂고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촬영감독이 찌푸린 얼굴로 다시 묻는다.
“뭘 보여주려고?”
“국장님이 좀 쎈 거 보여 달라잖아.”
“야, 그냥 예정된 것만 해. 갑자기 무슨 스케줄을 변경해?”
야외 촬영은 미리 동선과 카메라 구도를 구상하고, 그것에 맞춰 현장에서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촬영을 이어간다. 배우들도 스케줄을 미리 맞추기 때문에 오차가 발생하면 문제가 생긴다.
“중국 쪽 바이어가 뜬금없이 오고 싶어 했다잖아. 아휴, 국장님한테 제대로 물렸지 뭐.”
투덜투덜, 대본에 침을 튀기는 박태 감독의 모습에 촬영감독이 한숨과 함께 뒷머리를 북북 긁는다.
“진짜 하려고?”
“그냥 리허설만 보여주려고. 별거 아니잖아. 여기 세트장인데.”
“에효, 나는 모르겠다. 니가 연출이니까 알아서 해라. 근데 배우는 어떻게 해? 준비도 안 됐을 텐데··· 스케줄은 된대?”
그 말에 박태 감독도 구레나룻을 긁더니, 답답한지 아예 얼굴을 뭉개듯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는 황동태에게 대본을 던지고 물었다.
“이시현 어디 있냐?”
**
“첫날부터 마가 꼈나.”
최재환이 고개를 내젓는다. KIS 부사장부터 중국에서 왔다는 큰 손까지 나를 들들 볶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사진에, 칭찬에, 조언에, 앞으로 잘해보자는 얘기까지.
“괜찮냐?”
“하··· 조금 지치네.”
내가 지친 미소를 보이자 최재환이 내 어깨를 툭 한번 치고 시계를 살피며 말했다.
“이거 늦겠는데.”
오늘 나는 한 씬만 더 찍고 촬영 종료였다. 저녁에 회사에 가서 오랜만에 기콘부에 들릴 스케줄이었는데, 촬영이 딜레이 되면서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흐르고 있다.
일단은 세트 건물로 장소를 옮겼다.
한송이가 의자에 철퍽 주저앉더니 몸빼바지 같은 치마를 펄럭인다.
“하. 더워.”
그녀가 코끝을 찌푸리고, 작은 손바닥이 만든 바람이 머리카락을 들썩인다. 하얀 볼의 솜털 사이로 땀방울이 스르르 흘러내리는데··· 확실히, 귀염상은 귀염상이다.
“송이 너는 남자 친구 없지?”
“없냐도 아니고, 없지는 뭐죠?”
한송이가 눈을 흘긴다. 찬바람이 쌩쌩 불겠네. 근데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나? 뭐 있으면 말고.
“아린아, 너는 남자 친구 있니?”
“지난달에 헤어졌어요.”
“어··· 그래?”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는데, 무겁게 돌아온다. 그런데 한송이가 고개를 빼 들고 다시 물었다.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SN에서 내가 맡았던 가수.”
“에에?”
한송이의 눈이 대뜸 커진다. 물론 나도 최재환도 그녀에게 시선을 쏟아부었다. 가만 보자, 서아린이 맡았던 SN 가수면, 5인조 보이그룹인데.
“그럼, 그 다섯 명 중에 누구예요?”
한송이가 제발 알려달라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다.
“글쎄.”
서아린이 안 알려줄 듯 시선을 돌리자.
“에이. 뻥이죠?”
“야, 쟤가 너냐?”
최재환이 핀잔한다. 그래서 한송이가 코평수를 들썩이는데, 서아린은 무슨 일이 지나갔냐는 듯 평온한 얼굴이다.
누구지? 궁금하다.
걔들이 누굴 만났는지는 얼추 알고 있었는데, 스타일리스트를 사귀었었다고? 금시초문인데.
최재환도 신기하다는 얼굴로 서아린을 쳐다본다. 그래서 언제 한번 다시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박태 감독이 들어왔다.
“감독님?”
“어, 앉아. 앉아요.”
박태 감독은 나와 최재환을 번갈아 보면서 마주 앉았다. 최재환이 묻는다.
“저희 어떻게 해요? 오늘 촬영 여기서 접나요?”
“접기는. 시현 씨 오늘 남은 씬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다른 씬 하나 리허설 갔으면 하는데.”
“다른 씬, 리허설이요?”
“응, 시현 씨 스케줄이 되나 모르겠네.”
그 말을 하고 박태 감독은 지금 상황을 설명하면서 한 번만 협조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 같은 신인 배우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만큼 박태 감독이 나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테스트 촬영한다고 생각하고 해보자고.”
“예.”
대답은 시원하게 했는데, 문제는 배우가 연기 기계도 아니고 갑자기 이거저거 하자고 하면 곤란한데.
“그래서 어떤 씬으로 가실 건데요?”
최재환이 묻자 박태 감독이 대본을 펼쳤다.
**
“4회 대본? 미친 거 아니야?
고우희는 의상실에 들어오자마자 고무신부터 훌렁 벗어 던졌다. 그러자 매니저가 찌푸린 얼굴로 이마를 긁적이며 대본을 건넸다.
“여기.”
“우리가 무슨 원숭이야? 아저씨들 불러 모아서 쇼를 하게.”
“원숭이가 뭐냐. 그냥 리허설이라잖아.”
그 말에 고우희가 휙 돌아봐 눈을 흘긴다.
“내가 리허설 배우야?”
리허설만 전문적으로 해주는 배우가 있다. 고우희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리허설 배우를 세우는 게 낫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리허설 배우 어쩌고 하는 소리만 들으면 과민반응이다.
“누가 리허설 배우래? 왜 이렇게 오늘 까칠하실까.”
“칫.”
고우희가 토라진 얼굴로 대본을 펼친다. 아까 박태 감독이 동그라미 쳐준 씬을 유심히 보더니.
“나 이것까지는 연습 못 했는데.”
입이 댓바람 나온 그 모습을 보던 매니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근데 말이야, 이시현은 대본 다 외웠대.”
“뭐?
고우희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래서 눈썹과 눈썹이 마치 이어질 듯 보이는데. 이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말도 안 돼.”
지금 찍겠다는 씬이 4회 대본 하이라이트다. 촬영이라는 게 순서대로 찍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촬영스케줄에 배우도 그것에 맞춰서 준비한다.
그런데 4회 하이라이트는 아직 촬영스케줄도 나오지 않았건만, 무슨 대본을 외웠다고.
“이시현은 대본 나왔을 때 바로 다 외웠다더라.”
“무슨 소리, 아까도 대본 보던데.”
“그거야 체크하려고 다시 한 번 보는 거지. 내 말은,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연기 준비가 됐다는 거지.”
“에이,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서.”
하지만 애써 부정하던 그녀도 고개를 갸웃한다. 하긴, 아까 보니까 리허설도 한방에 탁탁 끝내던데.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부정 그리고 또 부정.
그러다가 대본을 다시 손에 쥐었다. 물론 4회 대본은 전체적으로 한번 읽어 봤었다. 그리고 감정을 끌어오는 거야, 엉엉 울기만 하는 거니 어렵지 않다.
문제는, 자존심.
연습도 제대로 못했는데, 자칫 실수를 해서 배우 이시현이 돋보이는 건 싫다. 엄밀히 따지면 그녀가 이번 드라마의 주연이니까. 그래, 저 아저씨들 높은 사람들이니까 이참에 한번 제대로 보여줘서.
“오빠.”
고우희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지자 매니저는 께름칙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왜?”
“이수정 있잖아.”
이번에 일본인 선생님 역을 맡게 된 배우 이수정.
“걔가 왜?”
“좋은 생각이 났어.”
“어?”
매니저는 순간 또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녀석 눈이, 꼭 뭔가 저지를 눈이다. 괜히 매니저들 사이에서 소악마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솔직히 스태프들이 귀엽다고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우엑 하고 싶을 정도니까.
“오늘 이거, 인터넷에 올리게 캠코더로 찍어.”
“인터넷에?”
“그래야 이시현하고 나하고 둘이 확실히 투톱으로 가지. 이수정 걔는 작가님이 데려왔다며.”
“어. 그럴게”
귀찮지만 안 하면 또 안 한다고 난리를 칠 게 뻔하니까.
“그리고, 나 보컬 트레이닝 얘기는 어떻게 됐어?”
“그건 사장님이 안 된다고”
“왜에?”
“아 그게.”
차마, 너 음치야 라고 할 수는 없어서 대답을 망설이는데··· 고우희가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휴대폰 줘.”
“왜?”
“휴대폰 줘! 삼촌한테 전화하게! 나 이시현하고 OST 내야 한다고.”
“너 전부터 이시현이 노래 어쩌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는 몰라. 이시현의 노래를······.”
지난번에는 창피하게 그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던 그녀다.
“아무튼 나 무조건 OST 할 거니까, 지에스하고 조율해. 어?”
“아, 그래, 얘기해볼게.”
겨우 달래고서야 고우희가 다시 대본에 집중했다. 그나마 제일 조용할 때가 그녀가 대본 보는 거라서 매니저도 스타일리스트도 구석 자리에 숨죽이고 앉았다.
**
미술팀이 초가집 세트 하나를 붙잡고 정신없이 세팅했다. 보여주기용 리허설이지만 섣불리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촬영팀은 카메라를 돌리지 않기로 했다. 리허설이니까.
“이게 뭔일이다냐.”
촬영감독이 파라솔 의자에 앉아 있는 부사장 일행을 보면서 속삭이는데, 박태 감독은 그래도 애써 표정을 풀고 있었다.
“좋게 생각하자고. 그러잖아도 이시현이 한번 뭔가 보여줘야 스태프들 사기진작도 되지.”
“너 이시현이 너무 높게 평가한다.”
“백암산에서 못 봤어? 아니, 촬영 때는 안 봤어?”
“그거야 뭐.”
촬영감독이 입맛을 쩝.
“걔, 물건이야. 이번에 김 작가 대본이 평균만 가도, 이거 무조건 시청률 40프로 넘는다.”
“야야, 너 설레발치다가······.”
“두고 봐. 이번 리허설로 저 중국 부자 놈 대번에 넘어갈 테니까.”
지난 백암산 촬영이 그랬다. 첫날의 촬영장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으니까. 당시 비에 벼락까지 쳐서 감정과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그럼 오늘은 어떨까. 오늘은 이시현이 뭘 보여줄까.
‘하··· 비가 왔으면 좋으련만.’
그날 백암산처럼.
“감독님, 준비 끝났습니다.”
“어, 배우들 불러와.”
이제 현장은 준비가 끝났다. 정해지지 않은 스케줄이지만, 프로에게 불가능은 없다. 배우도, 연출도.
#58 박춘삼의 집 (방 안) / 밤
부모님을 여윈 남매는 텅 빈 집에서 외로이 밤을 맞는다. 풀벌레 울리는 한밤중. 흐느끼는 박희재를 본 박춘삼은 말없이 그녀를 위로하는데.
씬 자체는 짧은 지문과 대사지만 남매의 우애가 견고해지는 씬이기에 김은수 작가가 중요한 씬이라고 강조를 한 씬이다.
예정대로라면 밤 씬 촬영이지만, 지금은 리허설이니까.
촬영도 방안이 아닌 툇마루에서 하기로 했다.
고우희가 툇마루에 앉아 울고 있고, 박춘삼이 곁에 와서 꼭 끌어안는 연출이다.
박태 감독은 두 배우에게 디렉션을 충분히 주면서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감정을 요구했다.
이제 부사장을 비롯한 이들도 초가집 주변에 모였다. 시민들 중에는 멀리서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늘은 노을이 깔리고 있고, 코끝에 닿는 바람은 선선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레디, 액션!”
박희재의 텅 빈 눈에는 어느샌가 눈물이 가득 고였다. 흐느낌 속에 두 볼 가득 눈물이 흘러내린다.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슬픔과 세상에 덩그러니 버려졌다는 현실에 박희재는 두려워하고 있다.
저벅저벅.
인기척을 내며 다가온 박춘삼이 여동생의 곁에 앉는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아픔을 감추고, 여동생에 대한 안쓰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울지 마라.”
그가 손을 들어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오빠의 위로에 입술을 파르르 떠는 박희재.
“니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너 지킬 거다. 우리가 어디 있든 내가 항상 너 옆에 있을 거고. 어디를 가든··· 나는 항상 니 곁으로 돌아갈 거다.”
박태 감독은 둘의 연기를 보면서 아차 싶었다.
카메라를 돌렸어야 했는데··· 그런데 무엇보다, 이시현의 연기가 지난번과 달라졌다. 한층 선명하게 극에 빠져든 느낌이랄까.
얼굴에도 감정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었다. 여동생과 다투던 박춘삼도, 여동생을 위로하는 박춘삼도, 부모님을 잃은 박춘삼도, 앞날을 고민하는 박춘삼도··· 지금 저 얼굴에 담겨 있었다.
“희재야.”
박춘삼의 속삭임에 박희재가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운다. 여동생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박춘삼. 지금 순간 그의 볼에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려 턱에 고인다.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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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장을 나온 이들의 걸음이 가볍다. 오늘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으니까.
“어떻습니까?”
부사장의 질문을 통역이 중국 바이어에게 전달하고 답을 돌려줬다.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이시현이라는 배우의 감정이 생생히 느껴져서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씬이었는데, 컷이 떨어지자 구경하던 시민들이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심지어 중국 바이어는 대사도 못 알아들으면서 눈물까지 글썽였고.
“하하, 그럼 우리 오빠는······.”
“당연히 중국에서도 방영하고 싶습니다.”
“잘됐군요.”
“그래서 말인데, 이시현이라는 배우가 극 중에서 노래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
뜬금없는 말에 부사장도, 황 국장도 당황했다. 그러자 통역이 다시 말했다.
“그렇게 하면, 계약하겠습니다.”
< 빅딜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