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큼하게, 신선하게 (3) >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연습실 문을 연 최재환은 가라앉은 공기부터 마주해야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넋이 나간 조연출 반유선을 이시현이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손에 든 시원한 블랙커피를 내세우고 안으로 들어가자 반유선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이시현에게서 떨어졌다.
‘진짜 뭐야?’
최재환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이시현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껑충 올렸더니 이시현이 알아서 대답한다.
“감독님이 의자에 부딪혀 넘어지셨거든.”
“뭐? 괜찮으세요?”
서둘러 이시현에게 커피를 넘긴 최재환은 반유선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디 다치셨냐, 아픈 곳은 없냐,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걱정을 하는데, 그녀가 손을 내젓는다.
“괜찮아요.”
“병원 안 가보셔도 돼요?”
“괜찮다니까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걱정돼서 물어봤거늘, 사람 무안하게.
괜찮다고 하니 최재환은 그녀에게 한 발짝 물러났다.
일단은 이시현이 들고 온 의자를 펴고 카메라 세팅을 도우며 그녀를 다시 힐끗 살폈다. 여자 조연출을 바라보는 순수한 호기심의 시선이었다.
방송국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PD가 되고 CP가 되고 국장이 되는 건 아니다. 바닥부터, 지긋지긋한 조연출 생활을 거쳐서 차츰 자기 밥그릇을 챙겨간다.
여자라고 예외는 아닌데, 24시간 돌아가는 방송국 환경에서 여자들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밤샘 촬영, 현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트러블, 불편한 촬영 환경 등이 그녀들의 발목을 잡는다.
“그럼 인터뷰해도 될까요?”
최재환이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에 반유선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 때문에 하나로 묶은 꽁지머리가 휙 돌아섰는데, 최재환은 인터뷰 시작에 앞서 그녀에게 커피부터 권했다.
“일단 한잔 드시고 하세요. 근데 회의실에서 할 걸 그랬나요?”
“아니에요.”
인터뷰 외에는 할 얘기가 없다는 듯이, 그녀가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누가 뭐 관심 있어서 말 거는지 아나. 최재환은 그냥 커피 빨대를 제 입에 물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터뷰는 시작됐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말씀하시면 돼요.”
반유선이 질문지를 꺼내 들고 이시현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꾹 다문 미소로 이시현을 잠시 보더니 미안한 듯 묻는다.
“제가 너무 재촉하죠?”
“아니에요. 제가 미안하죠, 이렇게 오시게 해서··· 방송국으로 제가 찾아갔어야 했는데. 감독님도 바쁘신데.”
“감독은 무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싫진 않은 눈치다. 반면 그 모습을 보는 최재환의 얼굴이 구겨진다.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걱정해주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손사래를 치더니만, 이시현이 말 한마디 해줬다고 미소는. 하여간.
“촬영 준비는 잘하고 있어요?”
그녀가 이시현에게 물었다.
“예. 지난번 백암산 첫 촬영 때 비하면 훨씬 많이 준비하고 있죠. 대본도 미리 받았고, 준비할 시간도 그때 비하면 넘쳐서 탈인걸요.”
“후후,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간단하게 인사말하고, 역할과 극에 대해 시현 씨의 생각 정도만 얘기하시면 될 것 같아요.”
“예.”
그녀가 다시 질문지를 보며 설명하는 사이, 삐딱해진 최재환의 시선에는 그녀의 후드티가 보였다.
‘쯧쯧, 한창 예쁘게 꾸밀 나이인데.’
남이 뭘 입든, 뭘 하든 상관없지만, 지금 최재환은 그녀에게 신경이 쓰였다.
방송국 사람들 얼굴 익혀두면 앞으로 두고두고 볼 사람이다. 아마 10년, 20년 뒤에는 저 모습도 추억으로 남겠지. 그때 가면 드라마국 CP 정도 돼 있으려나. 물론 중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는 보장 없다.
“시현 씨, 자기소개 멘트 다시 한 번만 딸게요.”
“안녕하세요. 드라마 우리 오빠의 박춘삼 역을 맡은 이시현입니다.”
이시현이 한 번 더 자기소개를 하고, 반유선은 그에게 어떤 각오로 극에 임할 건지, 다른 배우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같은 사소한 질문과 대답을 유도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인터뷰가 이어지고, 그녀가 질문지를 덮고 이시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질문할게요.”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연습실 입구의 최재환을 슥 한번 돌아보고 얘길 꺼냈다.
“저기에 계신 매니저님이 시현 씨를 직접 발굴하고 지금까지 함께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번 드라마 촬영은 시현 씨 보다 매니저님이 더 기대하실 것 같은데, 그런 얘기는 나눠보셨어요?”
“감회가 새로울 거예요.”
이시현이 입을 열자 최재환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그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그냥, 형한테는 고마울 뿐이죠.”
물론 지금 최재환도 이시현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잘해줘서. 하마터면 이시현을 캐스팅한 게 인생에서 가장 후회될 선택일 뻔했으니까. 녀석의 인생을 망칠 뻔했으니까.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최재환은 카메라를 챙기고 떠나는 그녀를 주차장까지 배웅했다. 건물 출입문이 열리고 닫히는 과정에서 1층 로비까지 따라온 이시현이 잠깐 비쳤는데, 녀석을 본 팬들이 아주 그냥.
“오빠아!”
“꺄아아!”
어이구 저것들 그냥. 최재환이 몸서리를 치며 로비에 들어갔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이시현이 로비 여직원에게 볼펜을 빌리더니 다시 나가려고 한다.
“뭐해?”
“애들 사인해주게.”
“야, 피곤할 텐데 그냥 올라가.”
“왜? 늘 하던 건데.”
이시현이 미소와 함께 웃으며 나간다. 늘 하던 거라는 녀석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리는데, 로비 여직원이 최재환을 바라보며 말한다.
“참, 좋은 배우예요.”
“그러게요.”
함박웃음을 짓고 팬들에게 달려가는 배우라니.
**
「우리 오빠 촬영 첫날, 2000년 9월 11일 월요일」
“야, 유선이 요즘 무슨 일 있냐?”
조연출 반유선이 고사장 주위를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전과 다르게 얼굴이 밝다. 미소도 이따금 보이고. 저런 애가 아닌데.
“너무 힘들어서 미쳤나보지.”
제작진과 출연진들이 한자리에 모인 고사 현장은 경건함 속에서도 웃음이 새 나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돼지머리에 꽂아 넣은 만 원짜리, 배우들이 준비해온 돈 봉투, 조연출 황동태가 재치 있게 쓴 축문을 시작으로 박태 감독이 고사상에 술 한 잔을 올렸다.
“사고 없이 무사히 촬영 마치게 해주십시오, 시청률 40프로! 우리 배우님들 부자 되게 해주십시오!”
박태 감독이 엉덩이를 빼들고 넙죽 절을 하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계속된 웃음소리에 이어 배우들도 인사와 소감 한마디씩을 덧붙였다.
“여기계신 모든 분들의 마음이 모여,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미숙이 연장자로서 모두를 어우르는 말을 하고, 이시현도 고사상에 돈 봉투를 내려놓고 절을 했다. 일어난 그도 조연출 황동태가 건넨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음, 선생님이 너무 좋은 말씀 해주셔서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웃으며 최미숙을 바라본 이시현은 자신을 향한 모두의 시선을 차례로 마주했다. 그 시선에는 스태프들, 배우들, 최재환이 있었다.
“좋은 분들, 좋은 팀워크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게 돼서 영광이고요,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입술에 살짝 술을 적시고, 이시현이 스태프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스타일리스트들은 구석에서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 그거 알아요?”
한송이가 팔짱을 켠 채로 여자 스태프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이시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서아린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동안 제가 지켜본 바, 사람들이 시현 오빠한테 빠지는 과정이 있더라고요.”
“그래?”
서아린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다. 그래도 한송이는 꿋꿋하게 계속 얘기했다.
“첫째, 시현 오빠에게 무조건 빠지는 거예요.”
이는 상당수 여성이 저지르는 우발적, 혹은 충동적 반응이다. 이시현의 압도적인 비주얼에 혹 가는 건데,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눈이 그냥 가는 걸 어떻게 해? 지금 저기 있는 여자 스태프들이 대표적이다. 뭐가 저리 좋은지 헤벌쭉 웃고 있으니까.
“둘째는, 그냥 멍 때리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른다. 그냥 멍하니 있는 거다. 보통은 이런 상태가, 첫 번째 상태로 이어진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한송이는 마치 굉장한 사실을 몰래 알려준다는 듯이 속삭여 말했다.
“각자의 방법으로 빠지는 거예요.”
서아린이 이제야 고개를 돌려서 한송이를 본다. 조금 궁금한 모양인데.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은 다 약점이 있거든요. 뭐랄까, 성적 판타지 같은 거? 갑자기 뒤돌아보고 나를 향해 미소 짓는 모습에 빠지는 여자도 있고, 셔츠 올렸을 때 드러난 팔뚝 잔근육에 빠지는 여자도 있잖아요? 그렇게 이시현이란 남자에게 각자의 판타지를 찾아서 빠져드는 거죠.”
“너도 그랬어?”
“저야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다 거쳤죠. 그래서 결론은 포기. 가질 수 없으니까, 고로 제가 찼다고 봐야죠.”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의기양양해 하는 한송이를 잠시 보던 서아린.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해도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죠.”
한송이가 단호하게 말한다. 최소한 여태 본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다시금 고개를 가로젓더니 정정한다.
“딱 한사람 있어요.”
“누구?”
서아린이 묻자, 한송이가 손가락을 내밀어 바로 그녀를 가리켰다.
“언니요.”
이번에도 자신만만하게 미소 짓는 한송이. 그런데 서아린이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아닌데.”
“에?”
마침 이시현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여태와 표정이 달라졌다. 한송이는 저 모습을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저 남자는 이시현이 아닌 박춘삼이니까.
“30분 뒤에 슛 들어갑니다.”
조연출 황동태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외치고, 미술팀이 엑스트라들 의상을 챙기는 사이, 배우들은 곧바로 메이크업과 의상 세팅에 들어갔다.
이시현에게도 한송이와 서아린이 달라붙었다.
“왜 자꾸 저만 봐요?”
옆에서 매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최재환. 그 눈치에 한송이가 가자미눈을 하고 입술을 빼죽 내밀자, 가만히 있던 이시현이 그녀의 볼을 꽉 꼬집고 핀잔했다.
“네가 제일 못하니까.”
“경고했어요, 이러지 마시라고.”
“나도 경고했어. 까불지 말라고.”
“이씨!”
한송이가 팔을 뻗는다. 하지만 그 팔이 이시현의 얼굴에 닿기에는 너무 짧은데. 그러는 사이에도 서아린은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오늘 촬영은 KIS 수원 세트장에서 이뤄진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40년대 거리를 재현한 이곳에서 드라마 ‘우리 오빠’의 박춘삼과 박희재 남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준비 되셨어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온 이시현 일행에게 조연출 반유선이 다가가 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전과 다르게 밝아 보여서, 이시현의 대답도 한층 밝았다.
“예!”
먼저 나온 여동생 박희재 역의 고우희는 박태 감독에게 붙어서 디렉션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이시현을 슬쩍 눈에 담고, 다시금 감독에게 집중한다.
이시현도 박태 감독과 잠깐의 대화를 나눴지만 무난한 씬이었기에, 디렉션이 구체적이진 않았다.
마침내 두 사람이 촬영 동선에 섰다. 스태프들 준비 마치고, 박태 감독이 촬영 감독과 이것저것 얘기하고. 바로 리허설이 이어진다.
“배우들 준비됐습니까?”
준비가 끝난 이시현 그리고 고우희.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고우희에게 붙어있던 스타일리스트가 카메라 밖으로 빠진다.
“리허설 들어갑니다!”
드라마 우리 오빠의 서막을 알리는 분주한 그 모습들을 보면서 한송이는 아까의 얘기를 다시 물었다.
“언니는 그럼 뭐예요?”
“뭐가?”
“시현 오빠한테 빠지는 거! 언니는 몇 단계?”
“3단계.”
쿨한 대답, 쿨한 표정.
“뭘로요?”
이번에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보이는 서아린.
그사이 리허설도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촬영이 들어간다.
우리 오빠 첫 씬, 첫 컷, 첫 테이크.
배우들 준비 완료, 박태 감독의 눈이 빛나고, 반사판을 든 스태프가 붙고, 붐 마이크, 조연출 황동태가 배우들과 카메라 사이에서 시작을 알리려 심호흡 크게 하고··· 이제 정말 촬영이 시작되는 긴장된 분위기에 한송이는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뭔데요?”
그제야 서아린이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오빠한테, 좋은 냄새가 나.”
“에에?”
“상큼한 냄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서아린의 말에 놀라서 멍하니 있는 한송이의 귀에 박태 감독의 외침이 들려온다.
“액션!”
< 상큼하게, 신선하게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