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큼하게, 신선하게 (2) >
“어휴 재수 없어. 박태 미친 거 아니냐?”
좁은 화장실 안에 두 여자의 거침없는 수다가 맴돌았다.
어제 있었던 박태 감독의 발언. 미친 소리도 그런 미친 소리가 없지. 이시현에게 빠지지 말라니. 그게 여자들에게 할 소리인가. 누군가는 국장실을 찾아가자고 제안했지만, 그것도 미친 소리.
하지만 다들 인정하는 한 가지는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다는 거.
지난번 촬영에서 스태프들은 이시현이라는 배우를 똑똑히 봤다. 예의 바르지, 연기 대박이지, 그리고··· 잘생겼지. 벌써부터 밤잠 설치는 스태프가 어디 한둘인가.
“이시현은 이번 드라마로 방점 찍겠지?”
“그럴걸? 지금 예능국에서도 이시현 좀 써보려고 난리던데. 아, 곧 영화도 들어간다는데?”
“나도 신문 봤어. 어떤 역할일까. 드라마랑은 또 다를 거 아니야?”
“연기야 비슷하겠지. 그냥, 잘생기기만 하면 돼.”
“후후, 맞아. 그치 유선아?”
여자는 거울에 비친 화장실 칸막이를 향해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조연출 반유선이 그 안에서 온 힘을 쥐어짜 변비 탈출 시도 중이니까.
“전··· 얼굴 안 봐요.”
단전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대답에,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던 두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얼굴을 안 봐? 야, 잘생기고 예쁜 애는 세계 공통언어야. 일단 호감은 먹고 들어가니까.”
“저는, 저 좋아해 주고 성격만 좋으면 돼요. 끄응.”
“그래? 그럼 동태는 어때? 걔가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걔 성격 좋잖아?”
퍼스트 조연출 황동태.
“선배, 저랑 이제 얼굴 안 보실 거죠?”
탱탱볼처럼 튀어 오른 대답이 재밌는지 여자들이 깔깔 웃으며 밖으로 나가고, 잠시 뒤 물소리와 함께 열린 화장실 칸에서 반유선이 나왔다.
“후······.”
손을 닦으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본 그녀는 습관이 된 한숨을 내쉬었다.
칙칙한 피부톤, 축 늘어진 다크서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눈, 다 지워진 눈썹 화장, 얼굴에는 뾰루지까지.
전반적으로 예쁨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다. 차라리 옷이라도 괜찮으면 좋으련만, 후줄근한 검은색 티셔츠에 얇은 후드티는 패션 테러 수준.
“한동안 또 죽겠네.”
머리를 질끈 묶은 반유선은 물 묻힌 손으로 볼을 두드렸다.
9월이 어떻게 왔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이 바쁜 일상.
배우들 챙겨야 하지, 촬영 장소 섭외하러 뛰어다녀야 하지, 스케줄 짜야 하지··· 지방 촬영 들어가면 여자의 삶은 끝났구나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이제 스물일곱인데, 데이트도 못 하고 이렇게 궁상이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으며 자리로 돌아온 반유선은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컴퓨터에 옮긴 배우들 사진을 살폈다.
대본리딩을 마치고 찍은 사진들.
이시현이 최미숙을 끌어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넉살도 좋지. 분명 저거 다 쇼일걸. 이래저래 불만을 삼키는 이때, 그녀의 등 뒤에서 불쑥 황동태가 들어왔다. 그러더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린다.
“뭐하냐?”
“기자들 돌릴 사진 체크하고 있어요.”
반유선은 상체를 움직여 어깨에 올라온 황동태의 손을 밀어냈다. 요즘 부쩍 엉겨 붙어서 짜증나건만, 눈치 없는 황동태는 오히려 더 바싹 다가와 모니터를 보며 속삭였다.
“너도 결국 이시현이야? 그래, 지금 이시현이 탑이지. 키 크지, 얼굴 잘생겼지, 성격 좋지.”
“전 얼굴 안 봅니다.”
“그럼 너랑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어떻게 해줘야 해?”
황동태의 돌직구에 반유선은 팔뚝에 돋는 소름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제 연애사는 알아서 할게요.”
“그래··· 알아서 하고, 이거.”
빈정이 상했는지 황동태가 투박한 손길로 그녀의 책상에 카메라 한 대를 올려놓았다.
“뭐예요?”
“감독님이 주연 배우들 인터뷰 따오래. 아, 최미숙 선생님도 따와야 한다. 그리고 내일까지 필요하다는 사실.”
“선배, 저 죽겠거든요. 어제 하지 그랬어요?”
“6시간을 붙잡아놨는데, 거기서 또 인터뷰를 따? 야, 나도 힘들어. 그러니까 같이 좀 힘들자.”
물러나는 황동태에게 온갖 저주를 쏟아붓고, 반유선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
모니터 속 최미숙 배우는 이시현과 함께 웃고 있는데, 누구는 노총각내 풀풀 나는 황동태와 이런 대화라니.
‘나랑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좀 전 황동태가 했던 질문을 떠올린 반유선은 몸서리를 치고 카메라를 치웠다.
**
촤르르···
대본을 넘기는 손은 가벼운데 이것저것 많아지는 생각.
다음 주 월요일 ‘우리 오빠’ 첫 촬영이 들어간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스케줄까지 소화해야 해서 정신없을 건 백프로고, 그나마 다행인 건 김은수 작가가 대본을 4회까지 마쳐서 쪽대본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건데··· 문제는 연기에 집중할 시간이다.
“저, 선배님.”
연습실 한가운데서 한승연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다. 천장에서 흘러내린 에어컨 바람이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흔드는데.
이제 한승연도 매니지먼트 사업부 2팀의 관리 대상이 됐다.
지난 월말평가 결과 이제 그녀는 가수의 꿈을 접고 배우 라인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이번에 박태 감독에게 부탁해서 단역 한자리 얻었고.
“왜?”
다가갔더니, 한승연이 주름 하나 없는 이마를 찌푸리고 나를 본다.
“이 씬, 조금 이해가 안 가서요.”
그녀가 손에 든 대본을 내밀었다. 우리 오빠 1화 대본.
17# 약방 / 낮
박춘삼은 한약방 딸을 수줍은 얼굴로 본다(짝사랑하는 시선으로) 그런 그를 한약방 딸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대하는데.
박춘삼 : (괜스레 천장에 매달린 한약 다발을 보면서) 저 약은 어디에 좋아요?
한약방 딸 : 관절에도 좋고 (수줍은 얼굴로) 남자들 힘쓰는 데도 좋고.
박춘삼 : 그럼 이 약은······.
한약방 주인 : 춘삼아, 그거 애 못 낳는 사람 먹는 거다. 니 먹을 거 아니다.
박춘삼 : 아, 예. (뒷머리를 긁적이고, 한약방 딸을 다시 수줍게 쳐다본다)
딱 한 씬.
우리 오빠에서 한승연의 첫 씬이자 마지막 씬.
“수줍어하는 게 억지 같아서요. 남자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드라마는 꼭 이러더라고요. 괜히 빙글빙글 돌아가고.”
한승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을 꺼냈다. 촬영장이었으면 바로 찍힐 소리다.
“임마, 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 앞이면 무조건 넘어가? 남녀가 사귀는 게 그렇게 쉽니?”
핀잔을 주고 한승연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카락을 긁적여서 까치머리가 된 녀석의 머리를 털어주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이거 중요한 씬이야. 박춘삼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란 말이야. 너 한 씬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안 돼. 이 기회도 없어서 못 잡는 사람들 많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난 5년 동안 한 씬도 찍지 못한 배우가 여기 지에스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니?
“저 열심히 할 거예요! 그냥··· 조금 낯설어서.”
한승연은 불에 덴 마냥 손사래를 치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래도 첫 촬영을 앞두고 긴장이 되는 것 같은데.
“봐. 니 기준에서 낯선 거지, 한약방 딸의 시선으로 보면 달라. 배경이 해방되기 전이잖아? 이때는 남녀가 서로 눈도 제대로 못 맞췄어. 상대 얼굴 한번 못 봐도 집안끼리 결혼을 약속하던 시기고.”
내 말에 한승연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씬 하나의 대사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전체를 보고 그 안에 들어가야지. 너 연기 선생님한테 안 배웠어?”
“그게··· 연습생들은 제대로 안 가르쳐주세요. 애들도 가서 시간 때우고 오거든요.”
한승연이 웅얼웅얼 말했다. 그래서 애들 연기 선생님이 누구인지 잠깐 궁금한데, 일단 그보다는.
“너 저번에 좀 하던데?”
“그거야 제가 드라마 광이니까.”
그럼 월말평가에서는 감으로 했다는 소리인데. 아무튼.
“한번 맞춰보자.”
제대로 내 앞에 선 한승연이 숨을 크게 몰아쉰다. 만약 이곳이 현장이라면, 감독의 시선, 스태프들의 눈, 카메라가 그녀를 담고 있을 거다.
그래, 비록 한 씬이지만 이 아이에게는 소중한 기회이자 첫 경험이다. 그걸 알기에 최재환도 한번 맞춰주라고 내게 부탁한 걸 테고.
그럼··· 슛 들어가 볼까?
“저 약은, 어디에 좋아요?”
박춘삼이 눈치를 보며 묻는다. 그러자 한약방 딸이 입을 여는데.
“관절에도 좋고, 남자들 힘쓰는데도······.”
“아니, 아니.”
컷컷! 야 잘라! 디렉션 이해 못 해? 나한테 불만 있냐고!
귓가에서 박태 감독의 고함 소리가 아른거리는 기분인데.
“왜요?”
한승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인데, 현장에서 컷 소리에 간이 콩알만해져봐야 감이 오려나.
“뭐가 문제인지 생각해 봐.”
대본을 다시 펴고, 한승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대사와 지문을 읽는다. 그렇게 들여다본다고 답이 나올까 싶지만, 잠시 내버려뒀다가 다시 끼어들었다.
“수줍은 얼굴이 그냥 수줍은 얼굴로 끝이 아니야. 그리고 대사 치기 전에 앞뒤 호흡도 봐가면서 해야지 바로 꼬리 물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 지난번에는 잘하더니.”
“죄송합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한 열 번쯤 했을까. 한승연이 지친 얼굴로 대본을 내려놓는다. 그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니 왜 이걸 못하지?’
이해가 안 간다.
월말평가에서는 사랑싸움하는 톱스타 커플 연기도 잘하더니만.
“죄송합니다. 수줍은 표정이 뭔지 잘······.”
간혹 큰 감정 연기는 잘하는 반면 간단한 표정 연기는 못하는 친구들이 있다. 보통은 어린 친구들이 디테일에서 한계를 보이는 건데, 지금 한승연도 그쪽인 것 같다. 물론 이 아이가 진짜 수줍은 표정을 모를 수도 있고.
하지만 촬영장에서 이런 핑계가 통할 리가 없잖아.
“너 누구 좋아해 본 적 없어? 짝사랑 같은 거.”
“없는데요? 먼저 대시 받는 편이라서.”
한승연이 큰 눈을 깜빡이면서 얘기한다. 그걸 왜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비주얼은 여배우로서 나쁘지 않다.
“짝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수줍은 걸 잘 모른다?”
“예. 저는 남자 얼굴 가까이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잘생겼구나 정도?”
확신에 찬 한승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살면서 누구나 수많은 감정을 겪는다. 단지 그걸 무의식에 지나칠 뿐이고, 적재적소에서 끌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아이에게는 그걸 깨달을 계기가 필요한 것 같다.
“잠깐만.”
나는 다시 한승연을 마주 봤다. 머뭇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서 연습실 벽에 딱 붙이고.
“그대로 있어.”
반듯한 자세로 선 한승연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투명한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고, 코끝의 솜털이 바싹 서는 게 보이고, 가는 숨결이 볼에 닿는 거리에서, 잠시 동안 들여다봤더니 그녀가 휙 고개를 돌린다.
나는 다시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그런 뒤 대본을 주워 건넸다.
“자.”
한승연이 대본을 받아든다. 여태는 잘만 쳐다보더니 지금은 연습실 바닥만 보고 있어서, 그래서 다시 물었다.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아?”
**
연습실에 들어갔더니, 한승연인가 하는 애가 얼굴이 홍당무가 돼 있고, 이시현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그 모습이 보기가 좋으면서도 뭔가 부끄러운데.
“들어가세요.”
이시현의 매니저가 등 뒤에서 재촉해서, 반유선은 어깨에 멘 가방을 흔들며 연습실로 들어갔다. 그러는 중에도 이시현은 한승연에게 뭔가를 계속 얘기하고 있었다.
“오늘 한 거 잊지 말고. 알았지?”
“예.”
대답을 하더니, 한승연은 고개를 숙인 채로 반유선과 최재환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빠져나갔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반유선은 카메라를 의자에 올려놓고 최재환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저는 잠깐 위에 올라갔다 올 테니까, 얘기 나누고 계세요.”
대답할 틈도 없이 최재환이 연습실을 나갔다. 졸지에 이시현과 둘이 남은 반유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깨에 멘 가방부터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리 준비해둔 질문지를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이시현이 불쑥 다가왔다.
“반유선 감독님이시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거절했는데도 이시현은 곁에 바싹 붙었다. 황동태가 고개를 내밀었을 때하고 전혀 다른 느낌. 반유선은 서둘러 가방에서 질문지를 꺼냈다. 애써 태연한 얼굴로 연습실을 눈에 담고 물었다.
“인터뷰 바로 해도 되죠?”
“의자 가져올게요.”
이시현이 구석에서 의자 두 개를 챙긴다. 참 친절하구나, 설마 저것도 쇼일까, 이런저런 생각 속에 반유선은 카메라를 살피며 그에게 물었다.
“좀 전에 두 분, 연기 연습하셨던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대본 한번 맞췄어요.”
“보기 좋네. 선배가 후배 챙기고. 한승연 씨는 좋겠어요.”
“좋기는요. 제가 뭐라고.”
의자를 들고 오면서 이시현이 환히 미소를 띤다. 무심결에 고개를 든 반유선은 그 모습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얼굴 잘생긴 건 상관없는데, 미소는 안 된다. 남자 미소에 유독 약하니까.
“감독님?”
“아, 아녜요. 모기가 지나간 것 같아서.”
의자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대충 얼버무리던 반유선은 순간 놀라서 손을 뻗었다. 의자에 올려둔 카메라가 떨어질 듯하더니.
와당탕.
간신히 카메라는 세이프 했는데 덕분에 추한 모습으로 넘어져서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쪽팔려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데.
“괜찮아요?”
이시현이 놀란 얼굴로 반유선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양팔을 잡더니, 목을 살피고, 얼굴은 다친 데가 없는지 유심히 보는데, 엄청 걱정하는 얼굴인데··· 그녀는 지금 속으로 간절히 외치고 있다.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제발··· 미소만은 보이지 마.
“괜찮은 거예요?”
제발··· 내 앞에서 미소만은.
“다행이다. 다치지 않아서.”
간절한 바람이 연기가 돼 사라지고, 이시현의 미소가 그 연기를 헤치고 눈앞에 드러난 순간···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박태 감독이 여자 스태프들에게 했던 얘기.
이시현에게 빠지지 말라는······.
그 얘기, 세컨드 조연출 반유선에게는 더는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 상큼하게, 신선하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