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86화 (86/227)

< 상큼하게, 신선하게 (1) >

“안녕.”

신재인이 눈물을 펑펑 쏟고 있다. 작은 주먹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훌쩍이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었구나. 이렇게 힘들었는데 아무도 몰랐구나.

아이를 보면서 가슴에서 오랜 감정이 들썩인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넘쳐나는 기억들.

[최재환의 과거. 도쿄. 2001년 3월]

“예?”

-들어오라고.

휴대폰에서 들리는 정 이사의 목소리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지금 한창 중요한 시기인데 한국을 들어오라니.

-몬스터 프로젝트··· 접는다.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조이치 사무실 직원들이 내 넋 나간 움직임에 흘깃 한번 쳐다본다.

-그쪽에는 얘기해둘 테니까, 정리하고 다음 주까지 들어와.

전화는 끊어졌다.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쳐다봤더니, 익숙한 우울함이 가슴에 밀려든다.

‘한국이라니······.’

이제와 일본 생활에 조금 적응하고 있었건만.

몬스터 프로젝트를 접는다는 소리보다 지금은 그게 더 충격이다.

사실 이곳에 와 오히려 새롭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으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제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니까. 아마 김포공항에서 내리면 다시금 묵직한 돌들이 내 어깨를 누를 게 분명했다.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걱 의자소리에 사무실 여직원이 고개를 들고 묻는다.

“최상, 어디가요?”

최상은 나를 부르는 이들만의 호칭이다. 내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코트를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아직은 추운 바람이 밀려오는 3월. 병원에 가기 위해 롯폰기역으로 향했다. 걸음을 재촉하면서 얼마 전 한국에서 들은 소식을 떠올렸다.

‘회사가 분열한다고?’

그런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물론 전부터 매니지먼트 사업부서 1팀과 2팀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알았으니 큰 충격은 없다. 단지, 그렇게 되면 내가 돌아갈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릴 뿐이다.

지하철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에 복잡함이 스며든다.

덜컹, 진동을 내며 지하철이 출발했다. 빈자리가 보였지만 앉는 대신 벽에 기댔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고 있고, 중년의 남성은 가지런한 자세로 가방을 끌어안고 있다. 그런 일상의 모습에서 나는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인지를 생각해봤다. 결론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이다.

목적지까지는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한다. 가는 길에 전화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차 대표의 딸이었다.

도쿄 외곽에 위치한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는 제법 시간이 흘러 있었다. 면회는 오후 5시까지.

‘흠.’

나는 병실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햇볕이 너무 잘 든다. 재인이도 이 햇살을 느끼고 있을까.

“또 오셨네요?”

요양사는 전보다는 유해진 미소로 나를 대했다. 오늘은 점심 반찬이 좋은 게 나왔나 싶다. 그녀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에는 30분을 기다렸는데, 오늘은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재인이 상태는 어떤가요?”

내 질문에, 요양사는 꾹 다문 입술에 보조개를 만들고 눈썹을 기울였다.

그녀를 따라 간 곳은 요양원 건물 중간층에 위치한 외곽 정원이었다. 제법 넓은 그곳에 재인이가 앉아 있다. 나무들 사이의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보는 아이의 모습.

나는 이렇게 멀리서 아이를 지켜만 본다. 가까이가면 절규에 찬 비명소리를 들어야 되니까. 그래서 항상 이렇게 멀리서만 보고 갈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습관적으로 그녀의 왼팔 손목을 바라봤다. 붕대가 감겨있다.

‘후······.’

감출 수밖에 없는 긴 한숨.

요양사가 자리를 비켜주고, 나는 이대로 시간을 보냈다. 멀리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한국에 있을 때 아이는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이는 급격히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말을 잃더니, 그 다음으로는 이상 행동을 보였다.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혹은 하루 종일 쭈그려 앉아 있다거나.

결국 일본에서의 학교생활은 석 달 만에 그만둬야 했고, 이후 아이는 자해를 시작했다.

그때, 한국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다.

차 대표의 미뤄진 결정, 재인이 부모님의 어긋난 기대, 내 방관··· 나는 매니저로서 실격이다. 회사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했으니까.

‘바로 한국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자해 이후에는 시간을 돌릴 수가 없었다. 차 대표는 두 번 정도 일본을 찾아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갔다. 아이를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날씨, 참 맑지?”

들릴 리 없는 질문을 해봤다.

지금 아이는 하늘을 보고 있다. 흐릿한 눈동자는 무엇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찌푸린 얼굴을 좀처럼 펴질 못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럼 시간이 지나면,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재인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그 둘을 속삭이며 나는 등을 돌렸다.

몬스터라 불리던 천재 소녀.

왜 저 아이는 스스로를 죽여야 했던 걸까. 나는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져두고 일본을 떠났다.

**

얼마나 좋은지 아이는 들뜬 얼굴로 두 팔을 휘저으며 나를 끌고 다녔다. 기숙사도 구경하고, 운동장도 구경하고, 그리고 교실에 골인.

나는 지금 교실 창가에서 탁 트인 하늘을 보고 있는데···

뒤통수가 따가워서 고개를 돌렸더니, 아이가 입에 바람을 가득 채우고 나를 보고 있다. 그래서 일단은 의자를 끌고 가 마주 앉았다.

“왜?”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이 신기한가. 아이가 큭큭 웃는다. 하얀 볼이 쏙 들어간 그 모습에 나도 피식 웃고 아이에게 물었다.

“한국 가고 싶니?”

“응.”

흠. 그럼 이제 남은 건 차 대표를 설득하는 일인데.

무턱대고 한국에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아이의 앞일도 고민해봐야 할 테고.

마음 같아서는 한국에 데려가서 그저 놀게 해주고 싶은데. 이 녀석이 스스로 원해서 다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까지는 내버려두고 싶은데··· 그게 어디 마음처럼 돼야 말이지.

“그럼, 여기 딱 한 달만 더 있다가 한국에 가는 거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겁을 덜컥 먹은 얼굴이다.

“진짜야.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고서야 아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내가 차 대표를 설득하는 데 필요한 시간.

정 안되면 그냥 때려치운다고 깽판이나 칠까.

안타깝지만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졌다.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왔더니, 창가에 빼곡히 붙어있던 여학생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나를 쫓는다.

“우와······.”

“와······.”

“호······.”

누가 음향 효과를 뿌려놓았나. 복도를 가득 메운 아이들이 나를 보며 입을 벙긋거린다. 먹이라도 던져줘야 되나, 심각하게 고민해보는데··· 마침 한송이가 복도 끝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빠, 비행기 시간 다 됐어요. 실장님이 내려오래요.”

나는 다시 아이를 눈에 담았다.

“그럼, 한 달 뒤에 보자.”

“응.”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안쓰럽지만, 아이를 두고 학교를 나왔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 실장의 차에 오르는데. 문득 뒤를 돌아봤더니 아이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앞에서 멈추고 함박웃음을 띤다.

“꼭··· 데리러 와야 해요.”

눈물 한 방울이 아이의 볼을 타고 흐른다.

왜. 지에스의 누구도 아이의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스쳐가는 짧은 생각들을 뒤로하고 아이의 작은 머리에 손을 올렸다.

“꼭 데리러 올게.”

더 있다가는 못 떠날 것 같아서 바로 차에 탔는데, 뒷좌석에서 한송이가 코를 훌쩍거리고 있다.

“너무 불쌍해요. 어린애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래요? 흑흑. 오빠 너무 불쌍해요.”

강 실장도 찌푸린 얼굴이다. 내가 이곳에 오자고 했을 때만 해도 거길 뭐하러 가냐고 그러더니, 아이의 모습을 보고는 나보다 더 착잡한 얼굴이다.

“이거 못할 짓이다. 회사가 애를 감금한 거나 다름없어. 애가 오죽하면 말을 잃어버렸겠어?”

“예, 맞아요. 못할 짓이었죠.”

그걸, 나도 차 대표도 너무 늦게 알았을 뿐이다.

천천히 차가 움직이는데, 백미러에 비친 아이는 우리를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등이 너무 신경 쓰여서··· 에이 모르겠다.

“실장님.”

“왜?”

“차 세워요.”

“어?”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추고, 나는 차 문을 열고 강 실장을 돌아봤다. 그도 내가 뭘 할지 짐작했는지 당황한 얼굴이다.

“너 어쩌려고 그래?”

“형한테 전화해요.”

“전화해서 뭐?”

“준비하라고요. 뒷감당할 준비.”

그대로 차에서 내려 다시 돌아갔다.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아이. 눈물과 콧물 범벅인 아이의 얼굴. 어쩔 수 없다. 그냥 확 부딪쳐야겠다. 차 대표가 날 죽이든 말든, 귀국 안 한다고 협박이라도 하지 뭐.

“한 달은 무슨··· 그냥 가자.”

이런.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다.

콧물이 잔뜩 묻었으니까.

**

“이시현이가 거길 왜 간 거야?”

날이 선 차 대표의 모습에 정 이사는 얼마 전 최재환이 몬스터 프로젝트에 대해서 물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 일과 관련이 있는 모양인데. 지금 그 얘길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문제는 앞으로인데, 오랜 세월 차 대표를 지켜본 정 이사는 어느 정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차 대표는 이시현의 행동을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일차적으로는 경고를, 이차적으로는 회사에 손실을 끼치지 않고 이시현을 벌 줄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거다. 어쩌면 극단적인 상황까지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무래도 재인이도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잠깐 들어오게 했다가 마음 추스르면 그때 가서······.”

“정 이사.”

차 대표가 턱에서 손을 떼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본다. 십수 년을 본 시선임에도 여전히 간담이 서늘해지는 시선이다.

“최재환이 들어오라고 해.”

“예.”

자리에서 일어난 정 이사는 나직이 숨을 뱉었다. 그나마 상황을 유연하게 풀어보려 시도했는데, 차 대표의 눈은 타협 따위는 없다는 얼굴이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사람이니까.

‘이거··· 생각보다 여파가 크겠는데.’

머릿속 생각을 접고 대표실 문을 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최재환이 바로 일어났다. 그러더니 결심이 선 얼굴을 들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침묵과 불편함.

그 속에서 최재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

“말해.”

최재환은 얘기를 꺼내는 듯하더니, 이내 허리를 틀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차 대표가 이마를 찌푸리는 사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잠깐만.”

그러더니 상대방을 기다리게 해놓고는 차 대표를 향해 휴대폰을 공손히 내밀었다.

“뭐하는 거야?”

“대표님이 받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차 대표의 시선이 매섭다. 뿌드득.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휴대폰을 가져가 귀에 붙였다.

“누구야?”

이마를 구기고 받더니, 차 대표는 입술을 열지 않고 상대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잠시 뒤 전화를 끊은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가에 섰다.

정 이사는 영문 모를 상황에 두 사람을 지켜만 봤다. 소파에 앉은 최재환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 같고, 차 대표는 그 판결에 앞서 고민에 또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뒤돌아선 차 대표가 최재환을 부른다.

“최재환이.”

“예.”

일어난 최재환에게 휴대폰을 툭 던진 차 대표는 다시 등을 돌리고 말했다.

“나가 봐.”

대표실 문이 닫히자, 차 대표가 입을 열었다.

“이시현에게 들어오라고 하고, 정 이사는 일본 가서 재인이 일 마무리 해. 학교 정리하고, 애 데리고 와.”

뭘까. 갑자기 차 대표의 마음이 180도 바뀌었다. 평소라면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을 정 이사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이시현이는 어떻게 할까요?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

정 이사가 대표실을 나가고 차 대표는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아까의 전화통화를 떠올린다. 집으로 가고 싶다고 흐느껴 우는 아이의 목소리를.

**

[여의도 KIS 별관. 2000년 9월 7일 목요일]

“시현아, 가자.”

갑자기 눈을 떠서 그런가. 아니면 오늘 해가 짱짱해서일까. 나를 깨운 최재환의 얼굴이 샤방샤방해 보인다.

“뭐해? 왜 쳐다보고 난리야.”

“이상하네. 형이 좀 잘 생겨 보이는데?”

“오랜만에 때 좀 밀었다.”

아하.

허구한 날 회사에만 틀어박혀 있더라니.

“잠꼬대 그만하고 빨리 나와.”

최재환의 재촉에 끌려 내리다시피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스타일리스트 두 놈··· 한 녀석은 기합이 팍팍 새겨진 얼굴로 서 있고, 한 녀석은 멀리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빨리 와!”

앞서가는 최재환을 따라 대본리딩이 있는 회의실로 향한다. 가는 길에 방송국에 운집해 있던 소녀들이 우리를 향해 펄펄 뛰며 손을 흔들었다. 귀 따가운 비명이야 이제 자주 들어서 적응이 됐는데도, 새삼 기분은 나쁘지 않다. 여기가 한국이란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최재환이 크게 인사 한 번 하고 복도에 들어서고, 그 뒤를 따르는 나 역시도 배꼽 인사를 빠트리지 않았다. ‘전체대본리딩’이라고 붙은 회의실에는 살갑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박태 감독과 김은수 작가가 먼저 와 있었다.

“왔어?”

박태 감독이 손을 흔든다. 김은수 작가는 미소만 보이고. 그밖에 다른 배우들은··· 아 중견배우 최미숙.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어.”

최미숙이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나를 본다. 지난번 백암산 촬영에서 그녀가 이것저것 조언을 많이 해줬는데, 이번에도 함께해서 다행이다.

“그래, 요즘에 많이 바쁘지? 예능에도 나오더라?”

“잠깐 도와주러 나갔던 거예요.”

“3W 애들이랑 친해?”

“같은 회사니까요. 그래도 선생님보다는 덜 친합니다. 하하.”

그녀에게 넉살 좋게 달라붙어 이런저런 소소한 얘기를 나누는 사이, 배우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출연진이 바뀐 탓에 낯선 배우도 있고, 눈에 익은 배우들도 있는데, 다들 첫 대본리딩에 대한 긴장감보다는 입가에 미소들이 걸려 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특집드라마가 빵 터져버렸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거다.

이참에 발 빠르게 예능프로에 얼굴을 비치는 이들도 있는 것 같고. 늘 그렇듯 드라마가 잘되면 관련된 모두가 웃는 법이다. 돈 문제만 빼고.

[배우 이시현]

길게 이어붙인 테이블 앞줄에 내 이름이 새겨진 종이가 놓여 있다. 지난번 바닷사람들 이야기의 대본리딩에서는 투박한 글씨체에 폰트 20짜리 모기 눈알만 한 글자가 박혀 있었는데, 지금은 궁서체에 눈에도 확 띈다. 자리 역시도 구석에서 감독의 바로 앞 우측 자리로 바뀌었고.

대우가 달라졌다는 건, 그만큼 책임이 달라졌다는 얘기.

물론 김은수 작가 말대로 이번에는 내 분량이 상당 부분 축소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주인공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괄량이 삐삐처럼 양 갈래 머리를 정신없이 흔들며 고우희가 들어왔다.

안 한다더니만 하기로 했나 보지?

어수선함 속에서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지만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고 숨을 크게 몰아쉰다. 앞에 놓인 대본이 펄럭일 정도이니, 그녀가 정신없이 뛰어왔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이시하라 유이의 역할을 맡은 배우.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자리에서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 여자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코끝에 좋은 향이 흘러오는 배우 이수정.

좀 더 시간이 흘러 김은수 사단으로 불리는 배우인데, 사석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분량 욕심이 많은 배우였었지 아마. 그래서 작가한테 살살거리는 게 버릇이라면 또 버릇이고.

아무튼, 이제 시작이다.

“자, 우리 오빠를 연출하게 된 박탭니다. 또 봐서 반갑습니다.”

“우리 오빠의 작가 김은수입니다.”

박수들이 울려 퍼지고, 마침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박춘삼 역의 이시현입니다!”

**

대본리딩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첫 회부터 김은수 작가가 작정하고 웃음코드를 넣었다. 하긴, 뒷부분이 우울할 수밖에 없으니 앞에서 분위기를 띄워줘야 흐름을 탄다. 안 그러면 시종일관 우울할 테고.

“시비가 붙은 남매가 서로를 노려본다.”

스태프가 행동 지문을 읽자 이시현이 고우희를 향해 눈을 흘기고 짙은 목소리로 경고한다.

“그거 하지 마라.”

“싫은데?”

“경고했어.”

“싫은데?”

“이게!”

둘이 머리끄덩이를 잡는 시늉을 하고 마구 흔드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배우들의 웃음이 새 나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최재환은 문득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빠져나오는데.

“야 어디가!”

굉장한 목소리에 놀라서 휙 고개를 돌렸는데. 다들 최재환을 보고 깔깔 웃는다. 그리고 이시현이 입 모양으로.

‘대사’

저놈을 그냥.

최재환은 홍당무가 된 얼굴을 숙이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회사에서 온 전화인데, 이시현 스케줄에 변동이 생겼다는 전화다.

“잠깐만요.”

볼펜 뚜껑을 입에 물고, 수첩을 펴서 휘갈겨 쓴다.

“어,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서야 최재환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이제야 조금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끼며 벽에 기대는데.

끼익.

문을 열고 나온 조연출이 최재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세컨드 조연출인데, 드물게도 여성이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던 최재환은 문득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멈칫했다. 지난 5월에 있었던 드림콘서트 포스터에 3W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게 언젠데 아직도 붙여놨어.”

괜스레 입술을 괴롭히며 포스터를 바라보는 사이, 회의실 안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대본리딩이 끝난 모양이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해 오후 7시까지.

6시간에 걸친 대본리딩이 끝나서인지 이시현의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형, 배고프다.”

“그래, 가자.”

감독과 작가에게 인사를 하고, 최재환은 서둘러 이시현을 데리고 대본리딩 현장을 빠져나왔다.

**

모두가 빠져나간 대본리딩 현장.

박태 감독은 스태프들, 그중 여자들을 한자리에 불렀다.

이제 방송국에도 여성 인력들이 많이 늘고 있는 편이어서 이번에도 팀을 꾸리면서 제법 많이 포함됐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번 백암산 현장에서 여성을 배려 안 해줬다고 불만들이 나왔다는 점이다.

“다들 분위기 좋다고 얼빠져 있지 말고, 일정 차질 없도록 신경들 쓰고.”

“예!”

대답하는 스태프들.

“니들 지난번 현장에서 불편한 거 많았다고 그랬잖아. 지금 다 얘기해봐.”

화장실 문제에서부터 씻는 문제까지. 딱히 특별한 건 없었지만 그녀들이 현장에서 바라는 점들을 노트에 적은 박태 감독은 노트를 덮으며 소리 없이 한숨을 뱉었다.

“그래, 오늘은 이쯤하고. 마지막으로 니들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니까, 기분 나빠 하지 말고 들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질질 끄나 싶어서 쳐다보는 여자들에게, 박태 감독은 차분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니들, 이시현한테 빠지지 마라.”

< 상큼하게, 신선하게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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