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84화 (84/227)

< Mission in Tokyo (3) >

“특수 분장이라고요?”

식당으로 돌아와서도 얼빠진 내 모습에 조은설은 묘한 미소만 보였다.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많이 놀랐나요?”

캠코더로 이 상황을 찍고 있는 남자가 껄껄 웃으며 묻는다.

기분이 어떠냐고? 놀랐냐고?

한송이는 8대 불가사의니, 도플갱어니, 외계인이니 어쩌고 하고 있고, 강 실장은 착잡한 얼굴로 숨만 쉬고 있다. 그런데 우리 기분이 어떻냐니.

아니면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 같은 거 아니야?

일요일 저녁 TV앞에서 깔깔 웃을 최재환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갑자기 한송이가 강 실장 팔을 덥석 잡고 물었다.

“실장님! 이거 몰래카메라죠? 카메라 어디 숨어서 찍고 있는 거죠? 경규 아저씨 근처에서 막 웃고 있는 거 아녜요?”

“임마, 이게 몰래카메라면 내가 최 팀장 동생이다.”

강 실장이 단칼에 의심을 잘라내고 맥주를 마신다. 눈을 부릅뜨는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던 조은설이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짝!

“잘 보세요.”

시선이 다시 집중되고··· 그녀의 눈에서 렌즈가 빠졌다. 고동색의 눈동자가 옅은 갈색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손가방에서 화장솜을 꺼내 눈두덩을 슥 닦았더니 쌍꺼풀도 사라졌다. 그녀가 짠! 하고 미소를 보인 순간,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가 맥주잔을 들고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시나리오 반추에는 주인공 김은재가 사랑하는 여자가 둘입니다. 유민서와 정하연이 그 둘이죠. 그리고 그 둘은 이란성 쌍둥이라는 설정이고.”

그래 맞는데.

“그거와 이 상황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한 사람으로 두 사람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굳이 두 사람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조은설이 오소리가 될 수 있고, 오소리가 조은설이 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럼, 그 말은 둘 중 한 사람을 캐스팅해서 1인 2역을 시키겠다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누가 캐스팅된 거죠?”

나는 질문을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내 모습을 캠코더가 줌을 당겨 잡는다.

**

“수고하셨습니다!”

분주히 철수하는 스태프들 사이를 오소리가 맑은 인사와 함께 지나왔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밤바람이 스쳐가는 그녀의 모습에 최재환은 안쓰러운 표정을 감추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저녁 10시.

오소리가 촬영 중인 곽인경 작가의 드라마도 이제 3분의 1이 진행된 상황이니까, 11월까지 사전제작으로 촬영을 마무리하고 심의를 거치면, 내년 1월에나 TV에서 오소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수고했어.”

차에 탄 그녀에게 얇은 점퍼를 건넸다.

그래도 낮에는 여름의 기운이 남아있더니만 해가 지니 날이 쌀쌀하다.

주말 촬영으로 다들 피곤한 밤.

촬영장을 벗어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최재환이 켜놓은 라디오에서 흐른 잔잔한 음악이 차 안을 두둥실 떠다녔다.

“저기 팀장님.”

조수석에 앉은 오명숙이 몸을 들썩이며 최재환을 바라본다. 안전띠가 터질 것 같은 그 모습에 최재환은 힐끗 쳐다보고 물었다.

“왜?”

“시현이 오빠 할리우드 진출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뭐가 어떻게 돼. 영화 찍고 드라마 찍고 지금이랑 별 차이 없지.”

최재환은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모과향 방향제 냄새에 콧잔등을 찌푸리며 졸음을 몰아내려 눈을 깜빡인다.

“에이, 그래도 지금이랑 다를 거 아니에요. 할리우드 스타들은 거의 다 1인 기업으로 움직인다면서요.”

자기 일처럼 들뜬 오명숙의 모습에 최재환은 말없이 미소를 보였다.

“그럼 시현 씨도 회사랑 계약 끝나면 1인 기업으로 갈 수도 있겠네요?”

어이구. 너무 앞서간다.

“이놈아, 영화가 잘 되고 그런 얘기를 해야지. 아직 된 것도 없는데 그런 얘길 뭐 하러 해? 너 대표님 앞에서 그러면 혼난다.”

“그냥 궁금해서요. 제가 설마하니 대표님 앞에서 그러겠어요? 팀장님도 참. 저도 눈치가 있는 여자라고요!”

오명숙이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최재환은 입에 걸린 웃음을 지우고 룸미러를 슥 보며 오소리를 살폈다. 잠이 든 건지 눈을 감고 있는데.

“팀장님.”

자고 있는 게 아니었나.

“왜?”

“나, 권 선생님 스케줄 좀 봐줘요.”

“권 선생님?”

오소리의 연기 레슨을 봐주고 있는 권현옥 선생님.

“예. 당분간은 연습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반추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래, 권 선생님 연락해서 스케줄 조정 부탁드릴게.”

열의보다는 조급함이 보이는 오소리의 부탁에 최재환은 그녀가 원하는 답을 들려줬다. 그런데 눈을 감으려던 그녀가 다시금 얘기를 꺼냈다.

“아, 내일 보육원에 피자하고 햄버거 좀 보내주세요.”

“피자?”

“애들한테 오늘 일찍 끝나면 간다고 그랬는데, 약속 못 지켰네.”

오소리는 피곤에 잠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후원하는 보육원에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대중없이 들려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수년째 꾸준히 해올 정도로 그녀가 애착을 갖는 봉사 활동이라서 회사에서도 미리 스케줄을 잡아주는 편이고.

“알았어. 내일 내가 챙겨서 보낼게.”

최재환의 대답에 그제야 오소리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깊이 눈을 감는 모습을 보면서 최재환은 그녀가 눈치 채지 않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나저나 시현이 스케줄이 문젠데.’

9월 스케줄 표가 이미 꽉 찼다.

그래 누구 말대로 기적이다.

5년을 스케줄 표가 텅텅 비어있었는데, 이제는 꽉 찼으니까.

KIS에서 예능 출연도 한번 하자고 해서 그것도 고려해야 하고, 보컬 레슨도 신경 써야 하고··· 차라리 회사에서 트레이닝을 받으면 모르겠지만 외부에서 레슨을 받다 보니 신경 쓸게 한둘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매니저 문제도 정리해야 하는데.

권혜선의 교통사고부터 오소리의 스캔들까지, 연달아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매니저들이 여러 곳에 꼬였다. 이시현 한 사람을 박용현, 강 실장, 최재환이 번갈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딱 중간에서 자르기도 애매한 게, 어떤 클라이언트는 박용현을 마음에 들어 해서 지난번 함께 온 그 매니저 아니면 얘기를 안 하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클라이언트도 있다.

‘확실히 노선을 정리해야겠어.’

최재환이 머릿속에서 생각의 실타래를 푸는 사이 서울의 밤을 수놓은 네온사인이 쏟아졌다. 차는 오소리의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멈췄다.

“명숙이 너는 먼저 올라갈래?”

차에서 내린 오명숙을 향해 최재환이 넌지시 말했다.

“저 먼저요?”

“소리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짐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먼저가.”

오명숙이 고개를 갸웃하고 올라가자 오소리가 눈을 비비고 묻는다.

“무슨 얘기요?”

“잠깐이면 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오소리의 눈을 반쯤 가리고 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최재환은 잔잔한 미소를 끄덕였다.

이제 둘만이 남은 차 안.

차키에서 손을 떼고, 최재환은 반쯤 남은 캔커피로 목을 축였다. 하지만 그거로도 마른입이 해결되지 않는다.

“소리야.”

“얘기하세요.”

“반추 캐스팅··· 안됐어.”

일본에 있는 강 실장에게 전해 받은 얘기는 그 끝이 분명했다. 오소리는 이번에 안됐다.

“···그래요?”

오소리의 얼굴이 급격히 식어간다. 피곤에 지친 얼굴에 겨우 새겨 있던 미소가 파르르 떨리는 숨과 함께 어두운 차 안에 흩어졌다.

이번 오디션에 앞서 페이 프로덕션에서는 비디오 영상으로 오디션을 대체해도 좋다고 했지만, 오소리는 굳이 일본까지 건너가서 오디션을 봤다.

그녀에게 있어선 아역이라는 틀을 벗어날 기회이자 어둠 속 한 줄기 빛이었을 텐데··· 그리고 이제는 스캔들 이후 자신의 새로움을 보여야 했기에, 더 간절했을 텐데.

“아, 그렇구나. 뭐··· 어쩔 수 없죠.”

애써 담담한 얼굴의 그녀 모습을, 최재환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그녀의 속눈썹에 뭉치고 있으니까.

“팀장님.”

“말해.”

“저 좀··· 잠깐만 혼자 있을게요.”

최재환은 차에서 내렸다. 조금 떨어져서 주차장 기둥에 등을 기댔다. 검은 차창 너머에서 오소리의 흐느낌이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

페이 프로덕션의 최종 결정은 오소리가 아닌 조은설.

나처럼 그녀도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신인 배우였다. 그러니 누가 봐도 우리에 비해 오소리의 필모그래피가 월등한데, 반추팀은 왜 이렇게까지 신인을 고집하는 걸까.

그 정도로 연출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연출에 자신이 있는 감독은 어떻게든 배우를 굴려서 씬을 뽑아내니까.

하지만 감독이 확정됐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생각을 뒤로하고 외부 유출 금지 마크가 붙은 테이프를 비디오데스크에 밀어 넣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캔맥주를 입에 물고, 리모컨을 꾹.

-처음 뵙겠습니다, 조은설입니다.

카메라 앞에서 그녀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준비해온 연기를 펼친다. 가요도 부르고, 다양한 표정 연기도 보이고 있다. 그만큼 그녀도 간절하고, 그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후.”

캔맥주 두 캔을 비우고서야 조은설의 연기가 끝났다.

굳이 감상평을 하자면, 나쁘지 않다. 재일교포 3세라지만 한국어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고, 연기도 과하지 않고 차분했다. 충분히 장래가 기대되는 재목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오소리보다 딱히 나은 점을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조은설이 됐다는 것은 오소리의 오디션이 문제가 있었던 걸까? 강 실장 얘기로는 오소리는 무리 없이 오디션을 마쳤다고 했는데···

한국에서 백진철 스캔들이 터진 시점도 오디션을 마친 이후였기에, 영향을 받을 일이 없었을 테고.

아니면 나하고 같은 회사라서? 정말 그 스캔들 때문에?

띠리리······.

생각과 적막이 떠다니는 방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국제전화였다.

“여보세요?”

-뭐하냐?

최재환의 목소리에 캔맥주 하나를 들고 창가 소파에 앉았다. 호텔 밖 도쿄의 밤이 보이고, 유리에 내 모습이 비친다.

“그냥, 이것저것.”

나는 지금 상상을 하고 있다. 최재환과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가는 모습을. 뭐··· 상상은 자유니까. 더한 것도 하지 뭐.

생각해보니 참 빠르게 온 것 같다. 갑자기 너무 크게 뛴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들뜬 감정도 곧 사라질 거다. 한국에 돌아가면 드라마에만 집중할 테니까.

-소리한테 얘기했다.

“어때?”

-···안 좋지.

최재환의 늘어진 목소리에 착잡함이 느껴진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오소리가 캐스팅되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신인 배우인 내가 나설 일도 아니다.

-잠깐만, 다시 전화할게.

집 앞인지 철컥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최재환이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소파의 쿠션 틈에 휴대폰을 던져놓고 창가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바라봤다.

일단 일본에 온 목적은 달성했다.

가경 작가를 깊이 마주하진 못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경험했다. 반추의 캐스팅 건도 마무리가 됐고. 그러니 이제는··· 그 아이를 만나야 할 때.

사실 가경 작가를 만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일본에 한번은 올 생각이었다. 그 아이를 보기 위해서. 이번에는 아직 기회가 있으니까. 차 대표가 키우고 실패한, 천재를 살릴 기회가.

띠리리······.

생각에 잠긴 나를 휴대폰 벨소리가 다시 깨웠다.

-야, 너 세탁기 안 쓸 때는 물 잠그라니까. 물 넘쳤잖아.

“진짜? 아래층 물 샌 거 아니야?”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근데 형? 왜 우리 집이야?”

-니 집이 내 집이지 임마.

나는 실없이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오늘 하루가 내 몸 위에서 녹아드는 기분이다.

-시현아.

“왜.”

-자라 임마.

“그럴 겁니다.”

싱겁게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잠시 바라봤다.

아직은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이지만, 불편함을 모르겠다. 좀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좀 더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니까. 무엇보다 언제든 통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 비록 그게 나일지라도.

띠리리······.

또다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이번에는 눈을 감고 귓가에 휴대폰을 붙였다.

“또 왜?”

-······.

최재환인지 알았는데 대답이 없다. 그제야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뿌드드 소리가 울리고.

“여보세요?”

-저 오소리예요.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오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선배님.”

왜 전화했냐고 물을 수가 없어서, 그저 듣기만 했다.

그녀는 내게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밤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 때문에 생각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나는 지금 깊은숨만 내쉴 뿐이다.

다시 소파에 누웠는데··· 젠장.

결국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시계를 한번 보고 전화번호를 찾는다. 지금 시각이면 프랑스는 낮이겠지만.

-여보세요?

한참을 신호가 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이시현입니다.”

< Mission in Tokyo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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