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in Tokyo (2) >
미쳤다고.
가경 작가는 내게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보였다. 무리에서 이탈한 늑대가 홀로 먼 길을 떠나듯, 화장도 지우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미쳤다는 말, 그가 보이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넋 놓고 있는 내게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가 미소와 함께 얘길 했다. 그러는 사이 낯선 남자가 다가와 캠코더를 보였다.
“잘 찍혔습니다.”
처음부터 동행한 사람은 아닌데, 광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캠코더로 공연을 촬영하고 있던 사람이다. 테스트 무비라는 것이 저걸 얘기한 건가 싶다.
“오늘 촬영한 영상은 홍보에 쓰일 겁니다. 작가와의 만남에서, 뭘 얻었습니까?”
관계자의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작가의 미쳤다는 말.
부인은 하지 않는다. 나는 미쳤으니까. 지금 촬영하고 싶어서 미치겠으니까. 잠깐 극에 몰입했을 뿐인데도 가슴이 들끓는다.
만약 오늘 작가를 만나지 못하고 확정 소식만 들었다면, 나는 들뜨기만 했을 거다. 하지만 작가의 한마디가 촬영 전까지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거짓을 사실처럼 꾸미는 게 아니라··· 거짓을 지우는 것, 그 자체를 없애고 나를 보여주는 것.’
이를 두고 오래 고민해야 할 듯했다.
“갑시다.”
“어디를 갑니까?”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의 제안에 또 이상한 걸 시킬까봐 미리 물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가게.
“유민서를 소개시켜줄게요.”
“유민서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반추의 여주인공 유민서.
“보고 싶지 않나요?”
보고 싶다. 미치게 보고 싶지.
나는 흥분을 겨우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
[경기도 양평 드라마 촬영장. 2000년 9월 3일 저녁]
“팀장님도 번개콘서트 보셨어요?”
-예, 방송 봤어요.
성 팀장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출렁거렸다. 그녀도 오늘 번개콘서트 방송을 모니터링 한다고 했는데, 재밌게 본 모양이다.
-혜선 씨가 휠체어타고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펑펑 나더라고요.
“애들이 마음고생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정말 잘 됐어요. 이쯤에서 접어야 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유종의 미는 거둔 거니까.
“3집에서 힘내야죠.”
3W의 2집 활동이 미처 두 달을 채우지 못했지만, 회사에서는 이쯤에서 공식 활동을 접기로 결정했다. 상황이 좋을 때 물러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근데 지금 어디세요? 여자 친구하고 데이트해요?
“데이트는 무슨. 소리 드라마 촬영장이에요.”
이 밤, 이 주말에 이러고 있다.
-아······.
“그럼, 월요일 날 봬요.”
전화를 끊은 최재환은 걸터앉은 쪽마루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처마 아래서 대본을 보고 있는 오소리에게 설렁설렁 다가간다.
이제는 조 부장이 그녀를 챙겨주고 있지만 오늘은 조 부장이 선본다고 밀렸다. 뭐, 오소리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소리야, 덥지?”
일부러 미소와 함께 휴대폰 크기의 미니 선풍기를 내밀었다. 그녀가 선풍기를 손에 쥐고, 딸칵 스위치를 켜자 긴 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그거 갖고 되겠어요?”
스타일리스트 오명숙이 느닷없이 부채질을 했다. 그 바람에 오소리 머리가 펄럭이는데, 무슨 백정도 아니고 부채에서 칼부림소리가 난다.
“임마, 머리 망가진다.”
“히히.”
오명숙은 바로 장난을 멈추고 흐트러진 오소리의 머리를 정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최재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친척이면 조금이라도 닮는 편인데, 어쩜 저렇게 다른지.
“촬영장 시선 신경 쓰지 마.”
최재환은 오소리의 곁에서 조용하게 얘기를 꺼냈다.
그녀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호기심의 시선도 많이 달라붙는다는 소리니까. 뒷말도 무수히 많을 테고.
아마 그녀는 촬영장에서 매일 가시에 찔리고 있을 거다. 시선이라는 가시에.
“괜찮아요. 별로 신경 안 써요.”
씩씩한 모습이 더 안쓰럽다.
“그래.”
최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에 억지로 미소를 붙이고 있는데, 오소리의 눈동자가 계속 그를 비친다.
“알았어. 진짜 이제 걱정 안 할게.”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자 그제야 오소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물렁한 살이 살짝 눌리고. 그녀가 속삭였다.
“보여줄 거예요··· 드라마로, 영화로, 오소리가 어떤 여자인지 사람들한테 보여줄 거예요.”
전에 없이 눈빛에 독기가 서려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최재환은 오소리가 확실히 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전에는 그녀를 보면 뭐랄까, 약간 어린 티가 있었다. 그동안은 아역시절의 느낌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거··· 이번에는 다르겠는데.’
어쩌면 스캔들이 오소리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 페이 프로덕션 오디션 잘 봤다며?”
스캔들이 터지던 날, 그녀는 일본에서 반추 오디션을 보는 중이었다. 배역은 유민서. 오디션 분위기에 대해선 강 실장에게 전해 들었는데, 직접 묻는 건 처음이다.
“그게······.”
“왜? 뭐 문제 있어?”
최재환이 걱정이 돼 다시 물었지만, 오소리는 미소만 띠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문제없는 거지?”
“예, 문제는 무슨.”
오소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어나는 최재환의 등을 바라보다가 대본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여전히 생각은 최재환을 뒤쫓고 있었다. 차마 그 얘기를 꺼낼 수 없었으니까. 페이 프로덕션이, 그녀의 캐스팅을 이번 이시현과의 만남에서 결정한다는 얘기를.
**
[일본 도쿄]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는 유민서를 보여준다더니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왔다. 그래서 맥주를 곁들여 마시고 있는데.
“오빠,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한송이가 나를 걱정한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말이다.
“우리 오빠가 힘이 없으면 안 되는데. 히히!”
맙소사가 절로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숨만 풀풀 내쉬고 있다.
근데 또 이 모습이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양이다. 특유의 친화력에 술기운까지 더해져서 오늘 처음 만난 관계자들과도 어느새 친근 모드다.
“시현아, 그냥 한송이 데리고 다녀라. 저것도 능력이야. 쟤가 니 스타일은 제대로 못 챙겨도 니 미소 하나는 챙기고 다니겠다.”
“후후. 그러게요.”
강 실장과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지만, 사실 많이 지친다. 그래서 취기도 좀 빨리 오는 것 같고. 연기를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우리 오빠는 단편이었으니까 버텼지, 연속극 촬영은 이렇게 씬 하나에 진 빼다가는 끝까지 완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빠, 한잔 더!”
“야, 좀 한 자리에 앉아 있어.”
“사토 상이 부르잖아요.”
“말은 통하니?”
고개를 덜렁덜렁 끄덕이는 한송이. 그래도 이 녀석이 무슨 몸짓을 하면 저들도 뭘 알아듣긴 하는지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송이야.”
“왜요?”
한송이가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을 들고 나를 본다.
“너 형이 준 유예기간 끝났는데, 걱정 안 돼?”
“걱정 말아요. 그래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있으니까.”
그녀가 축구선수처럼 어깨를 휙휙 피하는 흉내를 냈다. 그러더니 또 씨익 웃는다. 참 넉살도 좋지.
“너 그냥 형이 얘기하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그래. 두 손 딱 붙이고 싹싹 빌어. 한 달만 더 달라고. 그렇게 질질 끌어.”
내 말에 한송이가 입맛을 쩝 다시더니. 괜히 불쌍한 척 울상이다.
“저도 알아요. 저 실력 부족한 거. 오빠한테 피해주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래도··· 아린이 언니가 실력이 있으니까. 그래서 다행이고.”
“오··· 알긴 알아?”
“그래서, 놓아주려고요.”
“그래?”
한송이가 나를 게슴츠레 쳐다본다. 꿍꿍이가 있는 얼굴인데, 나도 약을 올릴 심산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그럼.”
“···치사하다. 이정도면 붙잡아야 되는 거 아녜요? 너 열심히 할 수 있다고! 너가 꼭 곁에 있어야 된다고! 그렇게 응원을 해야죠! 근데 가라고? 매정, 냉정, 각박!”
하여간 이 자식 잔머리 하나는.
다시금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에게 쪼르르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딱 말 안 듣는 강아지다. 그래, 강 실장 말대로 저것도 능력이지. 저 깐깐한 관계자들을 사로잡고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문제는.
‘후······.’
미치겠네. 가슴이 두근거린다. 반추의 김은재가 여전히 내 몸 안에서 꿈틀대고 있다.
“왜?”
내가 일어나자 강 실장이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바람 좀 쐬게요.”
“같이 나갈까?”
“좀 전에 담배 태우고 오셨잖아요. 그냥 계세요.”
나 홀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유민서 역의 배우를 보러왔는데, 술 배만 채웠더니 등이 뻐근하다.
뭐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이런 여유도 있어야지.
생각해보니 이런 삶이 되고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다. 최재환이랑 깔짝깔짝 맥주나 마셨을 뿐인데··· 에이, 왜 현승아가 떠오르는 거야.
“후······.”
몇 잔이나 마셨다고 술기운이 이마에서 아른 거린다. 기분 좋은 취기에 절로 나온 콧노래는 불어온 밤공기를 타고 멀리 흘러갔다.
몬스터팀의 장연화 교수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시현이 네 노래는 시간이 완성해줄 거다.
지금의 목소리는 타고났지만, 아직은 길이 제대로 뚫리지 않았다.
그러니 계속 찾고, 계속 걸어야 부드러운 길이 된다.
의외인건, 그녀는 내 노래에 놀라지 않았다는 거다. 보컬 레슨에서도 쉽게 미소한번 주지 않았고. 실은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몬스터.’
듣기로는 장연화 교수가 몬스터의 재능에 놀라서 현기증을 일으켰다고 한다. 지금 이시현의 재능에 나뿐 아니라 차 대표까지 놀랐는데, 이런 나한테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그녀가 말이다.
그럼 몬스터는 대체 어느 정도란 얘기일까.
잠시 스친 생각을 뒤로하고 식당 옆 계단에 엉덩이를 걸쳤다.
“시현아!”
식당에서 나온 강 실장이 눈썹을 휘날리며 나를 찾는다. 그냥 안에 있으라니까 뭐 하러 나왔대?
“여기요.”
손을 흔들었더니 그가 다가와 전화를 건넸다.
“최 팀장이 너 바꾸래.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더니, 자기는 실이니까 바늘이랑 통화해야겠대.”
그러더니 전화기에 대고 꽥 외친다.
“야! 나는 가위거든?”
전화를 건네고 웃으며 들어가는 강 실장을 보며,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잘했다며?
최재환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온다.
“응, 잘했어.”
-수고했다.
“형.”
-왜?
“나··· 잘하고 있는 걸까?”
-한잔 했냐?
“조금?”
그래 아주 조금. 오늘은 조금 더 취해도 될 것 같다. 이 밤은 기니까.
-지금처럼만 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하하.”
재미없는 농담과 웃음 뒤에 어디냐고 물었다.
-오소리 촬영장. 이제 거의 끝난 분위기야.
“오소리 선배는··· 괜찮아?”
-문제없어. 얼굴도 밝고.
그 말에 안심하고 고개를 드는데. 어?
“형.”
-왜?
“오소리 선배랑 같이 있다고?”
지금 나는 식당 반대편 도로를 보고 있는데. 신호등에 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데. 저 여자가 예뻐서가 아니다.
-그렇다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호등에 서 있는 여자, 아니 지금 건너오는 여자. 하얀 원피스의 여자. 오소리인데?
“형, 여기 오소리 선배 있는데?”
-무슨 소리야. 너 많이 마셨냐?
“진짜 형이랑 있다고? 형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임마, 적당히 좀 마셔!
최재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거린다. 그런데 여자가 식당 쪽으로 오더니 문득 나를 돌아봤다. 눈썹을 크게 올리는 모습이 오소리랑 똑같다.
-시현아?
휴대폰을 귀에서 천천히 떼는데··· 그녀가 다가온다. 눈, 코, 입. 오소리 맞네. 자식들이 나 가지고 장난을···
“이시현 씨?”
불쑥 다가온 그녀가.
나를 뚫어지게 올려보더니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민서 역을 맡은 조은설입니다.”
< Mission in Tokyo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