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찬스를 얻는다는 뜻 (5) >
공연장은 관객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들리는 소리에 차이가 있다. 무대 앞의 소리가 선명한 음향이라면, 무대 옆은 탁한 울림 같은, 뭐 그런 차이랄까.
하지만 그 어느 곳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소리가 있는데, 그게 바로 함성이다.
명심해라.
함성은 소리로 듣는 게 아니다. 눈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느끼는 거라고··· 나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이야, 우리 난리 났다.”
우리처럼 무대 옆에서 지켜보는 스태프들이 가슴을 들썩인다. 부정 탈까 대놓고 웃지는 못해도, 잠실종합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모습에 흥분한 얼굴들이다.
“굉장하네.”
“그러게요.”
김 팀장과 최재환이 혀를 내두르며 관객석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불과 반나절의 홍보로 저렇게 많이 모였냐면서, 남자 둘이서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둘이 멱살 잡고 싸울 때가 언제였더라.
“시현아 대단하지?”
최재환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그래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3W와 함께하면서 지난날 그녀들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서 지금 무대를 지켜보는 내 기분은, 최재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 그럼······.
둥둥둥.
긴장감을 높이려는 옅은 저음이 무대 바닥에 깔린다. 안대를 착용한 슬기와 레니, 그리고 성지훈이 MC의 좌우에서 초조하게 서 있고.
-자 그럼! 안대를··· 슬기 씨 안대 벗고 싶으세요?
-아이이!
MC의 짓궂은 장난에 슬기가 안달이 나서 발을 구른다.
저 정도면 웬만해선 웃음이 나올 상황인데도 관객들은 미리 전달받은 대로 입을 꽉 다물고 있다. 그래서 더 초조한 스타들.
근데 확실히 슬기가 애교가 있단 말이지. 뭇 남성들의 심장을 후벼 파고도 남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우리 옆의 스태프들 얼굴도 미소가 활짝 폈고.
-진짜 갑니다! 자 그럼! 안대를··· 벗어주세요!
번개콘서트 대망의 하이라이트.
레니와 슬기의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요동치고 있겠지. 숨이 막힐 것 같겠지. 가슴이 들썩이겠지. 안대를 벗는 손이 덜덜 떨리겠지.
무대를 스쳐간 바람이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흔들 때, 그녀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벌어진 입을 막고 눈물을 터트렸다.
바로 그 순간에 이어진 함성!
와아아!!
무대 옆에서도 선명히 들을 수 있는 그 소리!
MC는 멘트를 잇지 않았다. 그저 듣는다. 저 소리를. 잠실운동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환호성이 카메라에 넘치게 담길 때까지. 시청률 대박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세 분, 오늘 정말 열심히 하셨는데, 지금 기분이 어때요?
MC가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슬기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눈물범벅인 애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더니만, 역시 뭉개진 음성이 잠실운동장에 퍼진다.
-너무 감사··· 엉엉엉! 우리 응원해주신··· 흑흑! 팬분들··· 그리고 우리 혜선 언니··· 으어어!
-아이고, 슬기 씨가 오늘 진짜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럼, 지훈 씨!
-후··· 솔직히, 다 제 팬이셨으면 좋겠네요. 하하.
성지훈이 벅찬 가슴을 들썩인다. 물론 그는 개인 콘서트를 통해 많은 팬을 만난 경험이 있겠지만. 그래도 관객의 함성은 늘 새로울 거다.
-레니 씨! 3W는 아직까지 콘서트를 연 적이 없죠?
-···
레니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저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는 미소를 짓는데, 그래도 또 눈물이 흘러서 미소에 스며든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가겠습니다! 과연 오늘! 잠실운동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과연 누구를 보러 오셨을까요?
성지훈과 3W로 나뉜 두 대의 전광판.
-여러분 함께 외칠까요? 오늘 번개콘서트의 주인공을··· 보여주세요!
느릿느릿 올라가는 숫자들.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반전은 없었다.
성지훈을 보러온 팬 숫자는 6천에서 멈췄다. 하지만 3W의 팬 숫자는 계속 올라간다. 1만을 넘더니, 1만 5천, 2만, 그리고 2만 4천을 넘더니······.
-2만 8천 8백 2십 3명!
허공을 주먹으로 내려친 MC의 퍼포먼스. 그와 동시에 또다시 터진 함성! 그 순간 슬기와 레니가 껑충 뛰어 서로를 껴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최재환이 입술을 꾹 다문다.
물론 나 역시도.
얼마 전 나는 시립대 문화의 밤 행사에서 관객들의 함성을 경험했다. 그전에도 내가 키운 가수들의 무대에 올라가서 그들 팬의 함성을 경험했었다. 그래서 저 기분을 알 것 같은데··· 분명 또 다르겠지?
**
드르륵.
문을 열고 밴에 올라타니 SN 출신의 새로운 스타일리스트 서아린이 나를 반긴다. 층을 주지 않은 깔끔한 단발머리에 은테 안경을 쓴 무척 차분해 보이는 인상인데, 얘 눈빛도 보통이 아니란 말이지.
“수고하셨습니다.”
“너 왜 왔어? 오늘은 올 필요 없는데.”
“스타일리스트는요, 항상 어디든 따라가는 거예요.”
말 한번 똑 부러지게 한다. 물론 그만큼 실력도 있으니 인정.
그동안은 나 혼자 나름의 스타일 변화를 시도했었는데, SN의 세련된 감성이 더해지니까··· 뭐랄까, 확실히 정리되는 느낌이랄까.
“시현아, 결과 어떻게 됐냐?”
운전석의 강 실장이 룸미러를 만지며 묻는다. 이제는 나도 강 실장도 서로를 편하게 대한다.
“비밀입니다.”
“뭐가 또 비밀이야? 최 팀장 안 나온 거 보면 뻔하구만. 하여간 너 그런 유머코드 이상해. 완전 아저씨 같아. 가끔은 대표님 같다니까? 어휴··· 징그러!”
강 실장이 몸서리를 치며 차에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틀었다. 훗. 시원한 바람이 밀려오니 나른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최 팀장은 여기 계속 있겠대?”
출발에 앞서 강 실장이 다시 물었다.
“피디님하고 얘기할 게 있다고······.”
“어? 저기 오네?”
강 실장의 손짓에 고개를 들었더니, 최재환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인다. 번개콘서트 피디하고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퉁퉁퉁!
운전석 차창을 두드리는 최재환.
“벌써 얘기 끝났어?”
왜 왔냐고 물었더니, 최재환이 땀내가 섞인 한숨을 내쉰다.
“아니야, 그냥 나왔어. 너 남은 스케줄 나랑 같이 가자.”
그 말에 강 실장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한다.
“야, 시현이 나랑 갈 거야.”
“됐거든? 쟤 내거거든?”
최재환이 무작정 차 문을 연다.
“내려. 강 실장 넌 그냥 퇴근하던가, 아니면 들어가서 콘서트나 구경하던가.”
“장난하냐? 그럼 진작 퇴근하라고 하던가? 왜 오라고 했어어!”
두 사람, 요즘 부쩍 가까워진 것 같다.
아무튼 투정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최재환이 강 실장의 어깨를 툭툭 어루만진다.
“스케줄 끝나고 시현이하고 할 얘기 있어서 그래. 오랜만에 맥주나 한잔 하게 좀 양보해라. 강 실장님··· 나 팀장입니다?”
“으휴, 이 징그러운 놈들.”
강 실장이 차에서 내렸다. 둘이 잘 먹고 잘살라면서, 발을 구르며 잠실운동장으로 들어가는 그 뒷모습에 최재환이 피식 웃고 숨을 고르며 묻는다.
“시현아, 김 작가님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널 보자는 거야?”
“글쎄.”
나도 자세한 건 듣지 못했다. 김은수 작가가 한번 보자고 해서 단둘이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러잖아도 한승연을 단역에 꽂아 넣으라는 차 대표의 언급도 있었으니까, 가서 비위 좀 맞춰줄 생각이고.
그나저나 좀 지쳤는데··· 최재환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까 왠지 힘이 나는 것 같다.
“오빠, 저 전화 한 통만 하고 오면 안 돼요?”
서아린이 휴대폰을 보여주며 묻는다. 한송이였으면, 오빠 잠깐만요!! 하고 무작정 날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을 텐데.
“그래. 아직 시간 여유 있어.”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최재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심각한 눈으로.
“야, 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정리하고 가야겠다.”
“뭘?”
“너, 노병기 찾아갔었다며? 그리고 백진철 설득한 것도 너라며?”
최재환이 의심이 가득 찬 시선으로 나를 본다. 아마 차 대표에게 들은 모양인데.
그날 나는 VVW에 다녀오고서 차 대표를 찾아갔다. 백진철한테 확실한 먹이를 줘야 했으니까. 그 먹이란, 백진철을 고소하지 않겠다는 오소리의 확답이었다.
지금 시대는 성범죄가 친고죄라서 오소리만 잠잠히 있으면 백진철로서는 대중의 시선을 어쩔 순 없다 쳐도, 죄는 피할 수가 있었다.
물론 그 대중의 시선마저도 노병기가 반 이상 덜어갔고.
오소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런 더러운 거래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설사 그것이 그녀가 원한 게 아닐지라도.
“대체 니가 노병기 뺑소니를 어떻게 안 거야?”
최재환이 다시 묻는다. 차 대표가 그날 했던 질문하고 똑같다. 그래서 그때도 이렇게 말했지.
“나 술집에서 일한 거 잊었어? 그때 들었어. 룸에서 과일안주가 상했다고 클레임이 들어와서 내가 갔는데, 어떤 남자가 술에 취해서 그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 노병기 어쩌고 하면서 사고 난 차를 가져왔는데 이상하다나 뭐라나. 그때 노병기라는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거든.”
“아······.”
그제야 최재환이 이마를 찌푸리고 탄성을 비춘다. 그러더니 실실 헛웃음을 뱉고, 마치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 먹구름이 걷힌 얼굴로 나를 본다. 물론 나로서는 아무렇게나 둘러댄 얘기가 먹히니 당황스럽지만.
아니면, 최재환은 그저 나를 믿고 싶은 이유가 필요했던 걸지도.
“그랬단 말이지? 자식아! 그럼 나한테 얘기를 하고 가야지.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가? 그리고 갔다 왔으면 보고를 해야지!”
“형이 갔으면 문제가 더 커졌을 거야. 내가 그냥 혼자 간 게 깔끔했어. 그리고 문제 생겼으면··· 형이 달려와서 구해줬겠지. 그거 믿고 간 거야. 걱정할 것 같아 얘기 안 했고.”
“으이구!”
최재환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어 댄다.
“그만해. 힘들어. 땀 냄새난다!”
밀어내도 계속 달라붙는 곰.
“좋아서 그래 임마! 하하.”
한창 난리를 치더니, 최재환이 갑자기 행동을 뚝 멈췄다.
“현승안데?”
최재환의 말대로 곧이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 일단 차에서 내렸는데, 현승아가 내 얼굴을 보고 묵직한 미소를 보인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인사를 나눴다. 촬영 중 짧은 대화는 나눴지만 제대로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이번이 처음.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녀와 함께 차에서 조금 떨어지는데, 차창 너머로 보이는 최재환이 이상한 웃음을 히죽거리고 있다. 저 곰탱이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무튼 주변에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바람만 있는데···
그녀가 입술을 빨아들이며 얘기를 망설인다. 라디오에서는 말도 잘하더니만. 아니면 막 쏟아내려고 준비 중인가? 설마, 나 갈구려는 거야?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 싶을 때,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얘길 꺼냈다.
“나, 지에스로 좀 데려가 줘요.”
“차 안 가져오셨어요?”
“나 지금, 지에스와 계약하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뭐?
“나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요. 나, 지에스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 현승아가, 지에스에 오고 싶다고 얘기하는 거야? 그럴 리가. 이 여자 VVW하고 많이 남았을 텐데.
“계약 만료되셨어요?”
“예. 어제부로 계약서 찢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회사와 합의했다고요. 계약 파기하기로. 이달 말까지만 같이 할 거예요.”
현승아가 VVW와 계약을 끝냈다고? 그쪽에서 계약서를 찢게 해줬다고? 그놈들이?
“승아 씨, 확실하게 얘기해줘야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내가 다시 묻자 그녀가 씁쓸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렌즈를 꼈는지 눈이 유난히 짙다.
“알잖아요 우리 회사. 탈세에 마약에 뺑소니에··· 근데 그것만 있겠어요?”
현승아가 피식 웃으며 내게 되물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회사와 거래를 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납득은 된다.
“지에스가 손해는 안 볼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 데려갈 데 많거든요?”
“그건 알죠. 근데 이런 얘기는 형하고······.”
내가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밴을 가리키자, 현승아가 미간을 찌푸린다. 꼭 나하고만 얘기하겠다는 듯이 뚫어지게 나를 보면서. 알았어, 알았어.
“근데 왜 지에스예요?”
내가 다시 묻자, 그녀가 후 하고 입을 연다.
“나도 최 팀장님 같은 매니저 갖고 싶어서요. 살갑고, 듬직하고.”
그러니까 최재환한테 가서 얘기하라고!
“그건 형이 유별난 거예요.”
“훗. 유별난 사람이 팀장이니까. 믿음은 가잖아요.”
하··· 뭐, 현승아로서는 VVW만 벗어나면 그 어디를 가도 좋은 대우를 받을 거다. 일하기도 훨씬 좋아질 테고. 오늘도 현승아 팬들이 많이 보였었다.
물론 내 기억에는 그녀가 일반인과의 스캔들로 나중에 주춤하지만, 그거야 내가 컨트롤 하면 되는 거긴 한데.
“아무래도 형한테 직접 얘기하시는 게.”
“잠깐만요.”
현승아가 갑자기 바람을 등지고 뒤돌아섰다. 졸지에 그녀의 등을 보고 있으니 조금 낯설다.
지난번 라디오에서 그녀는 프로의 모습을 보였다. 멘트도 똑 부러졌고, 순간의 재치도 좋았다. 라디오 디제이를 장기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고.
그런데 뭐야 이 여자.
지금은 등만 보이고 숨을 들썩이고 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녀의 뒤태를 눈에 담는데··· 물론, 정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시선으로.
흠, 블루 원피스라.
그녀도 다른 스케줄이 있는지 오늘 뛰어다닐 때와는 달리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이다. 근데 상체가 조금 비쳐서, 어깨가 조금···
“흠! 하실 얘기가 뭐예요?”
이제 가야 한다.
진이 빠져서 그런가.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네.
“승아 씨.”
그녀를 다시 불렀더니,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숨을 마저 들이마시고 휙 뒤돌아 나를 본다.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잡티 하나 없는 고운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 검은 눈썹 사이의 진한 눈동자에 내가 비치고 있는데, 저 붉은 입술 주름이···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한 번 더 확실히 말하고, 그녀는 운동화 코로 바닥을 톡톡 치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 여자··· 지금, 나한테 대쉬하는 건가?
당황하는 나를 스치고 간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좀···
‘예뻐··· 보이네.’
<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찬스를 얻는다는 뜻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