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찬스를 얻는다는 뜻 (2) >
내가 연습실 한가운데 서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숨만 쉬어도 주목받는 대상이 됐다.
167센티미터의 키에 서구형 몸매를 가진 한승연을 마주했다.
긴장으로 굳은 그녀의 모습이 부러질 것처럼 보인다.
이마에 붙은 잔머리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게 보이는데, 얇은 입술을 빨아들이며 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다.
‘한승연.’
기억 속의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것은 여전히 이상한 느낌이다.
“저기······.”
한승연이 입술만 빨아들이며 내 눈치를 본다. 지금 상황에 그녀가 나를 리드하기에는 벅찰 것이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사실 즉흥 연기라는 게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다.
연습해온 걸 하면 되니까.
문제는 타인과 호흡을 맞추는 일인데,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돌이 괜히 수개월에 걸쳐 안무를 맞추고 파트를 나누는 게 아닌 것처럼, 연기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지금 한승연이 해야 하는 건 보여주는 연기다.
평가단의 체크포인트를 잡아야 한다는 말인데, 자연스러움도 좋지만 하고 싶은 얘기를 분명히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뭘 제일 잘해요?”
뭐라도 끄집어내 보려고 물었는데, 한승연이 눈만 깜빡거린다.
“최근에 뭐 연습했어요?”
“어··· 그게.”
생각 속에서 눈동자를 흔드는 한승연의 모습.
하긴, 아무 생각도 안 나겠지.
심장은 두근두근 터질 것 같을 테고, 입은 바싹바싹 마르겠지.
안 되겠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얼굴에 표정 하나 없는데 무슨 연기를 할까.
“잠깐 실례.”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양 볼에 구부린 검지와 중지를 댔다. 그런 뒤 그녀의 볼을 꾹꾹 눌러줬다.
“표정 풀어요.”
일일이 설명해줄 시간이 없다.
차 대표는 기다려주는 사람이 아니거든? 바로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승연 씨! 여기 우리 둘밖에 없는데, 왜 그렇게 긴장해요? 내가 괜히 눈치 보이잖아!”
그녀의 볼에서 손을 떼고 미소와 함께 주위를 둘러봤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삶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아픔에 비하면 타인의 시선이란 지극히 하찮은 거다. 물론 한승연에게는 벅찰지 모르지만, 지금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커버해줄 거니까.
“그, 글쎄요.”
한승연이 겨우 받아친다. 그럼 시작해볼까.
“승연 씨 그러지 말고, 우리 재계약해요.”
“뭘 계약을 해요?”
이제 정신이 좀 들었는지 한승연이 팔짱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일단 상황을 관망하는 자세. 내가 뭘 할지에 대한 정보부터 캐려는 거다.
“아휴 진짜,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섭섭하게 했나? 대표님도 승연 씨 잘되라고 한 거지.”
“차 대표님이요?”
“그럼 지에스에 차 대표님하고 누가 있어?”
이제 설정이 하나 나왔다.
지금 나는 지에스의 매니저, 그녀는 회사와 계약 만료 시점의 여배우 한승연.
진지한 연기나 인물 간의 갈등 상황을 꺼내볼까 했지만 이 아이가 받기는 힘들 것 같아서 택한 설정이다.
“그건 좀··· 생각해 볼게요.”
“뭐야? 딴 데 뭐 알아보는 데 있어? 어디야? SN?”
“우리나라에 지에스하고 SN만 있나? 하여간 지에스는 이래서 문제야. 여기 아니면 내가 어디 갈 데 없나?”
한승연의 얼굴에 슬슬 표정이 나온다.
“대표님 들으면 섭섭할 소리다.”
“섭섭이요? 섭섭한 것 따지면 내가 더 섭섭하지. 뭐만 했다 치면, 한승연이 그것밖에 못 해? 한승연이 열심히는 누구나 다 하는 거야. 여기 열심히 안 하는 놈 있어?”
턱을 내밀며 차 대표 흉내를 내는 한승연의 모습에 쿡쿡 소리가 연습실 구석에서 들린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천천히 생각해보고. 뭐, 이번에 들어간 거 촬영 잘하고 있던데.”
그 말에 그녀가 한발 다가온다. 눈썹 끝을 삐딱하게 올리고 나를 본다.
“최 팀장님.”
날 최재환으로 설정했나 보다.
“왜요?”
“듣자 하니 연애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쿨럭! 평가단들 속에서 들린 기침 소리.
“누가 그래?”
“아니 뭐.”
“그런 말은 어디 괜찮은 사람 소개나 해주고 해.”
“우리 언니 어때요?”
쿨럭! 평가단들 속에서 또 들린 기침 소리.
“에이, 거 말이 심하네.”
아무리 연기라지만 집중력이 확 깨지잖아.
또각또각.
한승연이 몇 걸음 걷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흘기고 얼굴을 구겼다.
“너 뭐야? 뭔데 자꾸 내 눈에 거슬리는데?”
어쭈. 자신감이 붙었다 이건가.
한승연이 새로운 상황을 그려낸다. 좀 전과 톤도 달라졌다. 이번에는 그녀가 주도적으로 바뀌었다.
“뭐가 거슬리는데?”
“다! 그냥 다! 니가 스타일리스트한테 잘해주는 것도 신경 쓰이고, 팬들한테 눈웃음 짓는 것도 짜증이 나. 그러면서 나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번 안 하고··· 나는 대체 뭐니? 니가 보고 싶다고 하면 한달음에 달려가고, 니가 귀찮다고 하면 꺼져주는 나는 뭐니? 그리고······.”
“더 해봐.”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너무 길어지면 호흡이 무너지니까.
“뭐?”
“보고 싶어서 왔는데, 너 화내는 모습 보니까··· 뭐, 이것도 나름 괜찮다.”
“뭐라고? 너 내가 우습니? 나도 여배우야. 너 아니어도 나 좋다는 사람 넘쳐나는 여배우라고!”
가슴을 두드리는 한승연의 모습이 정말 혼란스러워 보인다.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표정.
“그래?”
그녀에게 한발 성큼 다가갔다. 숨결이, 땀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바싹 붙는다. 흔들리는 그녀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알아. 너 만인의 여배우 한승연인거. 근데 어쩌라고? 지금은 내건데.”
순간 숨을 들이키는 한승연. 그래서 내가 입술을.
“아, 안 돼!”
한송이다. 쟤가 지금 미쳤나 싶지만.
아무튼 그래서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갔다가 시선을 뒤로 빼면서 한승연을 눈에 담고 말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랬어? 나한테 빠지지 말라고 그랬잖아.”
“너 참 재수 없다. 재수 없는데··· 너만 보면 지금도, 가슴이 떨려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더 화가나.”
그런데 나도 예상치 못한 일.
한승연이 그 말을 하고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만.”
차 대표의 목소리.
한승연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이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왔다. 연기 상대해주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내가 밀린 느낌이다.
“자식.”
최재환이 내 옆구리를 툭 찌르는데··· 송이야 나 좀 그만 노려보면 안 될까?
“한승연이.”
“예, 대표님.”
“너 지금 뭐 한 거야?”
차 대표가 이마를 찌푸리고 한승연에게 묻는다.
설마, 내가 오판한 걸까.
좀 더 진지한, 오디션에 맞는 정형화된 틀로 갔어야 했나.
“저··· 저를 보여주려고······.”
“정 이사는 어때?”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고 차 대표가 정 이사를 돌아봤다.
“자연스럽고 좋았습니다. 표정도 좋고, 가벼운 상황극이지만, 즉흥치곤 호흡도 잘 맞았고. 이 정도면 괜찮지 싶습니다.”
정 이사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끄덕였다. 그러자 차 대표가 잠시 한승연을 보더니, 손등에 턱을 괴고 그녀를 지그시 보며 입을 열었다.
“한승연이, 회사는 너 가수로 데뷔 못 시킨다.”
그나마 좀 전의 연기로 상기됐던 한승연의 얼굴이 빠르게 식는다. 그런데.
“그러니까, 연기자는 어때?”
“예? 그게 무슨······.”
한승연이 마저 입을 열기도 전에 차 대표가 최재환을 돌아본다.
“어디 단역 하나 없나? 아니다, 박태 피디한테 얘기해서 얘 좀 끼워 넣어봐.”
끼워 팔기를 하란 소리인데.
아니 그보다, 한승연이 연기자 데뷔라고?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리고, 오늘 3W 번개콘서트지?”
“예. 1팀장이 현장에 따라갔습니다.”
“성지훈이랑 붙는다며?”
번개콘서트.
일정 수 이상의 팬을 모으면 콘서트를 진행하고, 실패하면 콘서트가 무산되는 예능 프로그램인데, 오늘이 첫 회 촬영이고 성지훈과 3W가 서로 경쟁해서 팬을 많이 모은 팀이 콘서트를 여는 콘셉트라고··· 오면서 최재환에게 들었다.
“오늘 우리 쪽 게스트 누구야?”
“블랙보이 보낼까 했는데, 괜히 블랙보이 팬들 난리 칠 것 같아서 일단은······.”
“이시현이 보내.”
“예?”
“한번 보자고, 이시현이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그 농담 같지 않은 얘기 뒤에 차 대표가 다시 한승연을 본다.
“한승연이 열심히··· 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차 대표의 농담에 한승연이 서둘러 손사래를 친다. 아까는 연기였을 뿐이라며 우는 얼굴인데.
“잘했어.”
흔치 않은 차 대표의 웃음. 이제야 한승연의 하얀 얼굴이 밝게 피기 시작했다.
**
“형도 각오해.”
성지훈의 날 선 목소리에 매니저가 한숨을 내쉰다.
“지훈아, 회사에서 너 그냥 놔주겠냐?”
“소송이든 뭐든 다 할 거야. 나 더는 여기 못 있어.”
“1년 남았잖아. 그것만 참고.”
“형!”
성지훈이 화가 장난 아니게 났다. 특집드라마 하차에 이어 음악뱅크 MC까지 잘렸다.
그것도 미친 범죄자 놈들 때문에.
본부장이 뭐? 살인? 이런 개판이 다 있나.
“형은 나 따라 나오던지, 아니면 여기 계속 있을 건지 빨리 정하는 게 좋을 거야.”
성지훈의 최후통첩에 매니저뿐 아니라 스타일리스트도 심각한 얼굴이다.
“아우 젠장!”
우리 오빠 열풍이 불어 닥친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 억울해 하고 있는 게 성지훈이다.
틈만 나면 이시현이가 배역을 뺏어갔다고, 녀석만 아니었으면 지금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을 거라고, 지금 빵 떠서 주가 팍팍 올리고 있었을 건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인데, 이제는 KIS 출연금지라고?
“이딴 게 회사야? 돕기는커녕 팀킬이나 하고 있고. 내가 왜 KIS 출연금지야?”
“지훈아, 좋게 생각해. 너 일본 진출 하고 싶어 했잖아? 회사에서 이제 밀어줄 사람 너밖에 없다니까? 이번 기회에 회사하고 딜을 해. 열 내받자 너만 손해라니까?”
“시끄러워! 회사가 마비 상탠데 무슨 딜을 해!”
성지훈이 몸서리를 치며 소리를 치더니 입을 쓸어내린다. 그러더니 매니저를 흘겨보며 묻는다.
“조별아는? 연락해 봤어?”
성지훈 팬클럽 회장 조별아.
“걔는 이상하다··· 계속 잠적이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찾아가 보려고?”
“미쳤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팬들 신경 좀 써. 회사에서 팬클럽 애들 지원해줘도, 네가 가끔 팬클럽 임원진한테 문자도 좀 보내고.”
“내가 무슨 신인이야? 그런 건 형이 알아서 해야지! 일하기 싫어? 놀래?”
“아니 나야 물론 신경 쓰긴 하는데······.”
매니저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팬클럽 회원이 한 달 새 4분의 1이 떠난 걸 알면 성지훈의 지랄이 여기서 더 지랄 맞을 걸 알기에. 그래서 다른 말을 한다.
“신경 쓰지 말고, 오늘 잘해야지. 야 오늘 지에스하고 붙는 건데, 너 여기서 건재하단 거 보여줘야지.”
“그거야 당연한 소리를 왜 해?”
성지훈이 눈을 부릅뜬다.
회사가 엉망인 상황에서 겨우 잡힌 스케줄이다. 작년에 MNC 예능국 국장 손자 돌잔치에서 축가 부른 인연으로 얻은 기회다. 그때는 개쪽팔렸는데 그걸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어차피 권혜선 없으면 3W는 반쪽이야.”
매니저가 위로 섞인 말을 억지로 짜내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눈치 없이 끼어든다.
“왜요? 요즘 3W 응원 열풍 장난 아니에요.”
“야, 그것도 한때야. 팬들 몰라? 잠깐 들썩이는 거? 그러니까, 오늘 지훈이는 그거만 잘하면 돼.”
“뭘?”
성지훈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묻는다.
“작가가 그러는데, MC가 안대를 벗습니다! 라고 외친대. 그러면 그때 긴장하는 얼굴로 딱!”
“훗.”
피식 웃는 성지훈.
그때 차창을 누가 똑똑 두드렸다. 촬영 스태프다.
“성지훈 씨, 이제 이동하셔야 됩니다.”
“예!”
한낮의 도심 촬영.
차에서 내린 성지훈이 통제된 촬영 현장에 얼굴을 비치자 팬들이 웅성거리며 환호한다. 오전에 잠깐 비가 와서 날씨도 좋은데, MC 김진석은 큐카드를 만지작거리며 3W 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훗, 니들 어쩌냐? 그냥 집에 가게 생겼네.’
성지훈은 새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MC 옆에 섰다. 스태프가 박수를 짝! 치는 것으로 촬영이 시작된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번개콘서트의 김진석입니다!”
오프닝 인사와 요란한 박수 소리.
“먼저 3W 권혜선 양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잠깐 엄숙한 분위기 뒤에 MC의 진행이 계속됐다.
“자 그럼, 규칙을 설명해드릴게요. 오늘 이 두 팀 중에 정해진 시간 동안 가장 많은 팬을 모은 팀이 잠실운동장에서 콘서트를 열게 됩니다. 홍보 방식은 제약이 없습니다. 돈 많으시면 TV 광고 내셔도 됩니다, 하하하! 그럼, 양 팀 각오 한번 들어 볼까요? 슬기 씨 어때요? 잘할 수 있겠어요?”
“옙! 물론이죠!”
슬기가 주먹을 불끈 쥐고 껑충 뛰었다가 내려온다. 덕분에 양 갈래로 묶은 노란 머리가 들썩이고.
“레니 씨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숏컷트 머리를 흔들며 의욕에 넘친 모습을 보이는 레니.
“그럼, 우리 성지훈 씨 소감!”
“하··· 많이 떨리는데요.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극히 준비된 멘트를 하며 엄살을 피는 성지훈.
“지훈 씨, 오늘 응원의 게스트는 누가 오나요?”
“아, 현승아 씨가 옵니다. 지금 차가 막혀서 조금 늦는데, 아마 거의 도착했을 겁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과 라디오 디제이를 맡으면서 인기 순항 중인 그녀다. 스케줄 맞추기 힘들다고 안 온다는 걸 사정사정해서 불렀다.
“그럼 3W는요?”
“글쎄요. 블랙보이?”
슬기가 말꼬리를 올리자 촬영팀이 쳐놓은 가이드라인 너머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리는데.
“블랙보이··· 는 아니고.”
“에이.”
환호성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하는 사이, 가슴이 덜컥했던 성지훈도 이내 미소를 보인다.
지에스에서 블랙보이 아니면 뭐 특별한 애들이 있겠는가.
그랬는데··· 저 멀리서 오는 남자.
하늘에서 쏟아진 빛을 후광으로 달고 오는 남자.
그 모습을 향해 빗발치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귀가 먹먹한데. 얼빠진 얼굴의 성지훈이 혼잣말을 속삭인다.
“또··· 쟤야?”
<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찬스를 얻는다는 뜻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