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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벗을 시간 (1)
「일본 도쿄. 2000년 8월 22일 화요일」
“이게 뭐야?”
두 여성이 거리를 걷던 중에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 앞에 네모반듯한 설문판이 보이는데, 여섯 칸으로 나뉜 설문판은 위 세 칸에 3명의 남자 사진이, 아래 세 칸에는 색색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당신의 마음을 허락해주세요.]
설문판의 달콤한 문구에 여성들의 시선이 머문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설문판을 설치했는지 궁금했지만, 행사를 주최하는 인원은 보이지 않았다.
“아, 나 오전에 아키코한테 들었는데, 신주쿠에도 이런 설문을 하고 있대.”
“그래?”
일단 설문판을 자세히 보니, 가운데 칸의 남자에게 붙은 스티커가 압도적이다.
“이 사람이 제일 낫지 않아?”
“그렇긴 한데, 누구지?”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일본의 유명 남자 배우.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가운데 있는 남자가 압도적이다. 이름도 없이 그저 사진만 있을 뿐인데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는 외모.
“나는 여기에 붙일 거야.”
“그럼 나는······.”
고민하던 여성도 결국에는 가운데에 스티커를 붙였다. 그녀들이 설문판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씩을 찍는 사이에도 스티커를 붙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학생들에, 커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여성.
오전부터 있었던 설문판은 오후가 되기도 전에 시부야 거리에서 사라졌다. 물론, 가운데 칸이 스티커로 가득 찬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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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라 유이는 손에 든 시나리오에 집중했다. 지난달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를 통해 겨우 얻은 시나리오.
[반추(反芻)]
J라는 킬러 집단을 저지하기 위한 성심그룹 회장 김은재의 목숨 건 싸움, 그리고 사랑.
할리우드 자본.
한·중·일 3개국을 배경으로 제작되는 시리즈물.
작가는 영화 들새들의 가경(家慶).
이시하라 유이는 3년 전 극장에서 들새들을 봤을 때의 충격을 여전히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때의 흥분과 여운을 떠올리면 지금 당장 어떤 연기라도 쏟아낼 수 있을 만큼. 마치 가면을 쓰고 벗듯, 그런 원동력을 준 영화가 들새들이다.
그 결과 영화에 대한 생각이 작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고, 점차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드라마 우리 오빠에 출연 결심을 한 것도 그런 바탕이 깔려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손에 쥔 반추의 시나리오, 비공개 오디션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 그리고 마침내 얻은 오디션 기회.
‘우리 오빠’ 촬영을 끝내고 일본에 돌아온 이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여다본 탓에 그녀의 반추 시나리오는 너덜너덜해졌다. 자신의 인생작이 될 것을 확신하기에, 한시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여주인공 역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는데, 여주인공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이는 불가능. 그래서 이시하라 유이가 택한 인물은.
[권수경 75년생]
본명 다카다 미즈에. 정부 비밀요원.
일본 정부는 J를 탄생시킨 실험 결과를 회수하기 위해 그녀를 김은재가 있는 성심그룹에 투입한다. 김은재의 측근인 장지영의 신임을 받아 성심그룹 회장실 제 2비서가 된 권수경.
하지만 김은재가 J와 전면전을 선언하자 그녀는 국정원 요원 최성에게 접근하는데.
‘J··· 대체 그들은 어떤 존재일까.’
그 시초는 일제강점기 해방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 고아들이 넘쳐나는 세상.
일본은 패전의 색이 짙어지자 고아들을 전쟁 무기로 활용하기 위한 실험을 자행한다.
최면술로 기억을 조작하고, 아이들의 신체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실험. 그 실험이 모든 일의 시작··· J의 탄생이다.
“이시하라 상.”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가 오디션 시간이 됐음을 알린다.
이시하라 유이는 시나리오를 가방에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에 비치된 거울에 정장차림의 그녀 모습이 스친다.
또각또각···
복도의 적막을 깨는 구두 소리.
한여름의 햇살로 눈부신 건물 밖과 달리 이곳은 전기 소비를 줄이려는지 흔한 전등 빛도 없다. 그저 그림자와 대리석 바닥이 오디션 장소로 그녀를 안내할 뿐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러 명의 스태프와 카메라가 보인다.
대사를 맞춰줄 상대가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짧은 인사 뒤에 이시하라 유이가 한가운데 서자 스태프들이 시작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녀의 입이 열린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경시청 특수부 팀장 권수경입니다.”
선명하지만 거부감이 드는 낮은 목소리. 국정원 요원 최성은 권수경이 내민 손을 붙잡지 않았다. 방어하듯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신경질적으로 묻는다.
“그 이름 진짜 이름인가? 내가 아는 바로는 경시청 특수부에 재일교포는 없는데.”
최성이 못마땅해서 얼굴을 찌푸리자 그녀는 미소를 뿜듯 붉은 입매를 끌어 올렸다.
“후훗.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어디까지 알아냈나요?”
최성은 즉답을 피해 지하철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오고 있다.
“아마도, 당신들이 아는 것까지는 알아낸 것 같은데?”
“글쎄요. 최성 씨가 알아낸 것은 아주 단편적이고, 기초적인 내용이죠. 책으로 따지면 서두 정도? 아니다, 프롤로그 정도는 되겠네.”
“말장난 그만하고. 당신들이 아는 게 뭔지, 이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서로 돕기로 했으면 오픈할 건 오픈하는 게 좋지 않나?”
협조적이지 않은 그의 말투에 권수경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 다리를 곱게 접어서 손가락 사이에 빙그르 걸고는 그를 똑바로 마주본다.
“저도 위험을 감수하고 최성 씨와 손을 잡는 겁니다. 이점은 처음부터 명시했던 거죠. 그러니까, 재촉하지 마세요. 모든 일에는 순서가 필요한 겁니다.”
“순서? 당신이 경시청 소속이고, 당신들이 성심그룹을 조사하고 있다고 나를 도와준다고 했잖아. 그리고······”
열연을 보이던 상대 배우가 대사를 멈췄다. 스태프가 손을 들었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이사하라 유이는 조금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스태프를 쳐다봤다.
준비한 게 산더미인데, 대사라고 뱉은 게 겨우.
다행히 스태프가 계속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이번에는 다른 씬으로.
준비한 씬을 연달아 마친 이시하라 유이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권수경이라는 인물에 몰입했고, 훌륭히 소화해냈다.
스태프들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문을 열고 오디션 장소를 벗어난 그녀는 목에 콱 막힌 것부터 토해야했다.
“후······.”
긴 한숨.
듣자 하니 남주인공은 이미 확정이 됐다는 얘기가 있다.
한국의 배우라던데.
‘이시현.’
문득 그 사람이 떠오른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라면 괜찮을지도.
주인공 김은재와 너무도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
1층에서 내린 이시하라 유이는 로비를 가로질렀다. 매니저가 입구의 소파에서 신문을 보며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다가가는데, 그녀의 곁으로 한 여성이 지나갔다.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 검은 머릿결, 장미향이 물씬 나는 여성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한편 오디션 장소의 스태프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비공개 오디션.
오디션 대상은 이시하라 유이, 그리고 한 명이 더 있다.
“늦네요.”
안경을 들썩이는 여자의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베레모를 고쳐 쓰고 대꾸한다.
“비행기가 연착돼 조금 늦는다고 했으니, 곧 올 겁니다.”
“이시하라 상의 연기는 어땠어요?”
“훌륭했죠. 드라마 ‘우리 오빠’ 보셨습니까?”
“반추의 주인공이 나오는데, 설마하니 안 봤을까요?”
여자는 비꼬는 투로 반문했다. 그러자 베레모의 남자가 입꼬리를 올린다.
“유이가 언어만 유창했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결정했을 겁니다.”
그 말에 여자가 한숨과 함께 시나리오를 손에 집었다. 새겨진 작가의 필명을 잠시 보다가 시나리오를 내려놓는데,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국에서 온 여배우.
카메라가 다시 스탠바이 되고, 대사를 맞춰줄 상대 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배우가 인사를 하는 것으로 오디션은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배우 오소리입니다.”
**
“오소리 선배 일본 갔다고?”
“어.”
우리는 지금 KIS로 향하고 있다. 박태 피디와 김은수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우리 오빠’ 정규 편성에 관한 얘기를 나눌 예정이다.
기억과는 다르게 우리 오빠가 인기리에 방영됐고, 또 연속극으로 정규 편성된다는 것이 나로서는 당황스러운데··· 실은 흥분된다. 과연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게 달라질까.
“일본에는 왜 간 거야?”
“페이 프로덕션 오디션 보러 갔어.”
그쪽이라면.
“그래, 반추 오디션 보러 간 거야. 사실 지난번에 보려고 했는데 오소리 스케줄이 안 돼서 이번에 2박 3일로 일정 뺀 거야. 간 김에 겸사겸사 좀 쉬고 오라고 했어.”
“이야, 팀장님 되시더니 배우 편애하네.”
“편애해야지. 소리 덕분에 너한테 기회가 온 건데.”
“기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요즘 나는 최재환이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다.
몇 가지 미심쩍은 게 있는데···
첫 번째는 오소리를 향한 최재환의 배려와 호감도가 높아졌다는 거다. 물론 내가 바이바이 건을 따낸 과정과 윤 부장 사건으로 그녀의 임시 매니저를 맡았던 일이 있으니 그럴 수는 있다고 본다.
두 번째는 VVW 건이다.
내가 성지훈 대신에 우리 오빠에 투입됐을 때, 가장 의아했던 건 성지훈의 소속사인 VVW가 순순히 드라마에서 빠졌다는 거다. 내가 아는 한, VVW는 절대 쉽게 포기할 놈들이 아니다.
‘쓰레기 노병기. 이간질 노병기.’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놈. 악연으로 엮인 놈. 그래서 내가 철저히 밟아줬던 놈. 그리고 현재는 VVW의 본부장으로 있는 놈.
실은 드라마 촬영에 들어간 이후 VVW 놈들이 악의적 기사로 장난을 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그 정도?
내가 아는 노병기라면 온갖 더러운 짓을 마다치 않는 놈이니 말이다.
그럼 대체 차 대표는 누구의, 어떤 약점을 가지고 딜을 한 걸까. 그게 궁금해서 몇 번을 물어도 최재환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뭐··· 상관없으려나.
나는 이제 회사에 소속된 배우일 뿐이니까.
배우는, 방송국과의 이해관계나 광고주와의 갑을관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신이 맡은 바를 하면 된다.
연기하고, 성장하고, 대중에게 사랑받으면 된다.
하지만 매니저 출신에 연예기획사 대표, 그리고 현재는 배우라는··· 이런 특별한 과정을 거친 나로서는 그 경계가 애매해져 버렸다.
“근데, 어떻게 할 거야?”
나는 텅 빈 뒷자리를 가리키고 물었다. 평소 같으면 한송이가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졸고 있을 텐데, 오늘은 ATTM 내부 회의가 있어서 오후 스케줄에서 뺐다.
“넌 신경 쓰지 마.”
최재환이 또 선을 긋는다.
회사에서는 로드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를 추가로 붙여주기로 했는데, 문제는 최재환이 한송이에게 주었던 1개월의 유예기간이 끝났다는 거다.
1개월을 함께 해보고 계속 같이 일할지 결정한다고 했는데··· 그러니 이제 한송이를 뺄지, 아니면 그대로 둘지를 결정할 때다.
“새로운 스타일리스트는 언제 온대? SN 출신이라며?”
“내일부터. 실력은 확실하다더라.”
SN의 매니저들과 친분이 있는 최재환은 새로운 스타일리스트에 대해 알아본 건 다 알아본 듯했다. 한송이 때처럼 두고 보지만 않겠다는 건데, 실은 한송이를 뽑은 이는 나다.
그녀의 실력 때문에? 아니다.
그녀의 미래 때문에? 아니다.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인연 때문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시현아.”
“응?”
여의도에 가까워지자 최재환이 나를 부른다. 자못 심각한 얼굴인데.
“너 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었지?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응.”
“너 지금, 산 정상에 올라온 거 아니야. 이제 겨우 언덕 하나 올라왔어. 사람들 환호성에 잠깐만 취하라는 얘기야. 계속 취해있으면 음주 사고 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목청껏 대답하자, 최재환이 피식 웃더니 손을 뻗어 나를 때리는 시늉을 한다. 흔들림 없는 편안한 승차감의 밴이 잠시 흔들리는데.
“서 기자님.”
내 입에서 나직이 흐른 이름에 녀석의 관자놀이가 꿈틀 올라간다.
“서 기자는 왜?”
“예쁘더라.”
“······.”
최재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창을 열었다. 스스스··· 바람이 불어온다.
“많이 행복해 보이더라고.”
“그랬냐?”
“응.”
“다행이네.”
최재환이 핸들을 돌리며 왼팔을 차창에 기대고 입술을 매만지다. 미소인지 씁쓸함인지 모를 기울어짐이 녀석의 입가에 고이는데···
내 기억에 이시현은 내가 서 기자하고 사귀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에겐 숨겨도 3W와 이시현은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 한 내 말이 최재환에게는 위로의 말일 수도 있고, 일종의 상황보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녀석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하지 않을 거다.
어머니의 일로도 나는 최재환에게 주제넘은 짓을 했으니까. 그러니 이젠, 서른하나 최재환이 스스로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걸 지켜볼 뿐이다.
“시현아.”
“응.”
“날도 좋은데, 이따 맥주나 한잔할까?”
최재환이 불어온 바람에 이마를 긁으며 제안했다.
“날이 좋아?”
나는 대답에 앞서 차창 너머 하늘을 바라봤다. 좋기는.
“찜통인데.”
“내 눈에는 좋다. 길도 뻥 뚫려 있고. 우리 이 배우님 앞날도 화창해 보이고.”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오케이. 그럼 요즘 잘 버는 이시현 배우가 쏘겠습니다.”
“그러자, 한송이도 부르고.”
“송이도?”
나는 잠시 멍한 얼굴을 들고 입술을 스윽 핥았다. 어쩌면, 오늘 술자리가 한송이의 송별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띠리리··· 띠리리······.
“예, 최재환입니다.”
전화를 받는 최재환의 모습을 눈에 담고 차창에 기대는데, 끼익!! 갑자기 차가 멈췄다.
뭐야?
덜컹 흔들림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최재환의 굳은 얼굴이 보인다. 휴대폰을 귀에 바싹 붙인 채로 들썩이는 숨을 내쉬더니, 눈썹을 찌푸린다.
“성 팀장님, 제대로 못 들었어요. 뭐라고요?”
-오소리··· 기사 터졌다고요.